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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숭늉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4 06:17:09

“물안골 단가네 장입니다.”

새미는 숟가락을 그릇 옆에 내려놓았다. 선비가 물었다는 말에 국밥집 주인도 고개를 돌렸다. 구석자리의 선비는 국밥 앞에 앉아 있었다. 쪽빛 도포 소매가 상 위에 닿지 않도록 팔꿈치를 안쪽으로 당겼다.

“단가네라. 물안골은 도성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소?”

“10리쯤 됩니다.”

“걸어서 가면 오래 걸리겠구려.”

“장 지게를 메고 가면 더 걸립니다.”

“장독은 몇 개요?”

새미는 선비의 얼굴을 살폈다. 장을 사려는 사람치고는 물안골까지의 거리와 장독 수부터 물었다. 장독을 구경하러 온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 국밥집에서 처음 만난 선비가 물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87개입니다.”

“모두 장이 들었소?”

“장마다 익는 때가 달라서요. 비어 있는 독도 있습니다.”

“그 독에도 이름이 있소?”

새미는 눈썹을 조금 올렸다.

“독에 이름 붙이는 집은 드뭅니다.”

“그렇소?”

“저희 할매가 붙였습니다.”

“독마다 이름을 붙였겠구려.”

“예. 장부에도 적혀 있습니다.”

“장부까지 있소?”

“장 담근 날과 옮긴 날을 적습니다. 장이 어느 독에서 났는지도요.”

선비가 국밥을 내려다봤다. 김이 그릇 위에서 가늘게 올랐다. 숟가락을 들려던 손이 잠깐 멈췄다.

“그 장부를 보면, 이 장이 어느 독에서 난 것인지도 알 수 있소?”

“장부를 보고 맛도 보면요.”

“맛을 보면 알 수 있소?”

“몇 해 묵었는지, 소금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어느 독인지 압니다.”

“맛만 보고?”

“예.”

“늘 맞소?”

“틀릴 때도 있습니다.”

새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선비가 다시 새미를 보았다. 웃을 때 한쪽 눈썹이 먼저 올라가는 얼굴이었다. 지금은 웃지 않았다.

“틀릴 때는 어떻게 하오?”

“장부를 다시 봅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모른다고 합니다.”

주인은 그릇을 닦던 손을 멈췄다.

“새미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애야. 장사하는 사람한텐 별로 편한 성미가 아니지.”

“모른다고 하면 손님이 장을 못 믿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아는 척하면 장이 상하잖아요.”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비는 숟가락을 들고 국물 한 모금을 떴다. 맛을 살피듯 혀를 조금 굴렸다.

“이 장은 물안장 장이오?”

“물안골 단가네 장입니다.”

“아까 말했는데도 다시 묻는구려.”

“이름을 정확히 알고 싶으신 것 같아서요.”

주인은 헛기침을 했다. 손님이 장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래도 선비의 질문은 장을 살 때보다 장을 만든 사람을 찾는 쪽에 가까웠다.

“선비님도 장을 사러 오셨소?”

선비가 주인에게 물었다.

“나는 국밥을 팔지. 장은 새미한테 사.”

“국밥에는 이 장을 쓰시오?”

“그렇소. 간이 세지 않고, 끓여도 콩 맛이 남아. 손님들이 국물까지 비우지.”

주인은 빈 국밥 그릇 하나를 치우며 말했다. 숟가락이 사기그릇에 닿아 짧은 소리를 냈다.

“그럼 한 그릇 더 드시겠소?”

“아니오. 한 그릇이면 충분하오.”

“선비님은 국밥을 천천히 드시는구려.”

“급히 먹을 까닭이 없소.”

“국밥은 식기 전에 먹는 게 좋습니다.”

새미가 말했다. 선비는 그 말을 듣고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그렇다면 식기 전에 먹겠소.”

국밥집 주인은 새미의 그릇을 보았다. 국물은 아직 남아 있었고 밥은 반쯤 말려 있었다.

“새미도 먹어. 장터에서 종일 서 있었잖아.”

“아직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은 배부를 때나 하는 거야. 배고플 때 괜찮다고 하면 밥이 안 들어가냐?”

“국밥값은 낼게요.”

“그건 나중에 받고.”

“아까도 나중에 받으신다고 하셨어요.”

“그럼 오늘은 외상으로 두 번 먹는 거지.”

“그건 갚을 게 두 번이잖아요.”

주인이 국자를 들고 웃었다.

“갚을 때 한 번에 갚으면 되지.”

“장값은 장값이고 밥값은 밥값입니다.”

“새미는 장부에 적을 말이 참 많구나.”

“돈이 얽히면 적어야 해요.”

선비는 국밥을 먹으며 둘의 말을 들었다. 새미는 선비가 장에 관심이 있는지, 물안골에 관심이 있는지 가늠하려 했다. 국밥 한 그릇을 먹으러 들어온 선비가 단가네 장독 수까지 물었다. 아무 이유 없이 묻는 건 아닐 것이다.

“물안골까지 장을 가져오면 사겠소?”

“어떤 장을 원하십니까?”

“간장 한 종지면 충분하오.”

새미는 잠시 선비를 바라봤다. 간장 한 종지를 사려고 물안골을 묻고 장독 수까지 물었다면, 장을 많이 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간장만 필요하시면 여기서 사셔도 됩니다.”

“단가네 간장을 사고 싶소.”

“장터에서 파는 것과 집에서 먹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소?”

“장터에 내놓는 장은 맛을 보고 골라서 가져옵니다. 집에서 먹는 장은 아직 덜 익었을 수도 있고, 씨간장처럼 함부로 뜨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씨간장도 있소?”

“있습니다.”

새미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씨간장은 집안 장맛을 이어 가는 독이었다. 누구에게나 알려 주고, 누구에게나 맛보이는 장이 아니었다. 선비는 더 묻지 않았다.

국밥집 주인이 선비의 그릇을 슬쩍 살폈다.

“국물은 입에 맞으셨소?”

“잘 먹고 있소.”

“처음에 숟가락을 멈추기에 장이 셌나 했지.”

“국물 맛을 본 것이오.”

“장맛을 보는 줄 알았소.”

“국밥에 들어간 장맛도 장맛이오.”

“그야 그렇지. 국밥에 장을 넣었는데 국물 맛만 볼 수는 없겠구먼.”

주인은 옆 손님에게 물을 내주러 갔다. 선비는 국밥을 한 숟가락 더 떴다. 숟가락이 그릇에 닿지 않게 조심했다. 먹는 손이 서두르지 않았다.

새미는 그 모습을 보다가 제 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 생 궁에서는 국밥을 먹을 일이 드물었다. 수라상은 늘 정해진 때에 올라왔고, 식는 음식은 다시 데워졌다. 궁 안은 겨울마다 추웠다. 두꺼운 옷을 입어도 손끝이 차가웠다.

세자와 마주 앉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한 상에 국밥을 놓고 장맛을 두고 묻고 답한 적은 없었다. 그가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문 저녁도 있었다. 새미는 그때도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면 대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번 생에는 간택에서 떨어질 것이다. 궁은 춥고, 장독대는 비우면 안 된다. 할매도 두고 갈 수 없다. 마음을 줄 사람을 찾을 까닭도 없었다.

새미는 숟가락으로 밥을 눌렀다.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국물은 뜨거웠다.

―

선비는 국밥을 다 먹고 숭늉을 청했다. 주인은 솥에서 따뜻한 물을 떠 작은 사발에 부었다.

“국밥이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오.”

“잘 먹었소.”

“아까 그 장을 더 넣어도 좋았을 텐데.”

“지금도 좋소.”

“장사가 하는 말치고는 서운한 말이구려.”

“장사가 원하는 말과 손님이 할 말은 다르오.”

주인은 사발을 상에 놓았다.

“그 말은 맞네. 그래도 손님이 맛있다고 하면 장사하는 사람은 기분이 좋아.”

“맛있었소.”

“그럼 됐네.”

주인은 다른 그릇을 치우러 갔다. 선비는 숭늉을 한 모금 마셨다. 새미는 아직 그릇에 밥을 남겨 두고 있었다. 주인은 손님들 사이를 오가느라 바빴다. 새미가 숟가락을 들고 있어도 말을 보태지 않았다.

선비가 소매 안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이 잠시 안쪽에서 움직였다. 새미는 그때 주인이 떨어뜨린 물수건을 주워 주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요.”

“어이쿠, 내가 또 놓쳤네.”

“바닥이 젖었어요. 밟지 마세요.”

“고맙다. 무릎이 먼저 젖을 뻔했구나.”

주인은 물수건을 받아 바닥을 훔쳤다. 새미는 제자리로 돌아가 그릇을 들었다. 선비는 이미 숟가락을 손에 쥐고 있었다.

새미는 그 숟가락을 보지 못했다. 보았으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선비는 국밥을 남김없이 먹었다. 숭늉도 사발 바닥까지 비웠다. 주인이 사발을 받으러 오자 선비는 손을 들어 잠시 막았다.

“얼마요?”

“국밥값 말이오?”

“그렇소.”

주인은 값을 말했다. 선비는 품에서 엽전을 꺼냈다. 주인은 받은 엽전을 손바닥에 늘어놓고 셌다.

“이건 선비님 국밥값보다 많은데.”

“저 낭자의 밥값도 내겠소.”

새미가 고개를 들었다.

“제 밥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내가 내겠소.”

“선비님과 제가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그렇소.”

“그런데 왜 내십니까?”

“국밥을 같이 먹었으니 한 상의 값이라 생각했소.”

“같은 상에서 먹지 않았습니다.”

“그렇소. 그럼 내가 낭자의 국밥값을 내고 싶어서 내는 것이오.”

선비의 대답은 간단했다. 새미는 말을 고르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내게는 있소.”

“그 이유를 말해 주실 수 있습니까?”

선비는 새미를 보았다. 입을 열었다가, 곧 닫았다.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아직 말할 때가 아니오.”

새미는 선비의 손을 보았다. 엽전은 이미 주인의 손에 넘어갔다. 선비가 억지로 갚으라고 할 기색은 없었다. 새미는 밥값을 받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보다, 이유를 묻자 대답을 미룬 일이 마음에 걸렸다.

“모르는 사람에게 밥을 얻어먹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갚으시오.”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소.”

선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새미가 그걸 알 길은 없었다. 주인이 선비의 엽전을 세어 품에 넣었다.

“새미가 장터에 다시 올 테니, 선비님도 장터에 오면 되겠구먼.”

“그러겠소.”

“2사람이 다음에 만나면 밥값을 갚고, 장도 사면 되겠네.”

“아저씨는 사람을 마음대로 다음에 만나게 하시네요.”

“국밥집 주인은 손님이 다시 오길 바라야지.”

주인은 빈 그릇을 들고 부엌 쪽으로 갔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쪽빛 도포 자락이 상 모서리를 스쳤다. 선비는 손으로 옷자락을 정리하고 문 쪽으로 향했다.

새미는 그릇에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숟가락이 그릇 바닥에 닿았다. 주인이 선비가 앉았던 자리를 닦으러 왔다.

“저 선비, 단가네 장을 살 생각이 있는 것 같지?”

“잘 모르겠어요.”

“물안골까지 묻고 장독 수도 물었잖아.”

“그래서 수상해요.”

“장독 87개가 수상할 수도 있나?”

“그걸 세는 사람은 수상하죠.”

“독이 87개라고 네가 말했잖아.”

“제가 말한 건 맞아요. 그래도 물어본 까닭은 모르겠어요.”

주인은 상을 닦다가 손을 멈췄다.

“그럼 물어보면 되지.”

“물어봤는데 아직 말할 때가 아니래요.”

“선비가 그렇게 말했어?”

“예.”

“밥값을 내는 까닭도?”

“그것도 말하지 않았어요.”

“말을 아끼는 선비구나.”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밥값은 받았네.”

“제가 내려고 했어요.”

“다음에 갚으면 되지.”

“다음에 만날지 모르는데요.”

“아까 그 선비는 만날 거라고 했다며.”

“그 말만으로는 부족해요.”

“장부에 적어 둘까?”

“아니요.”

“밥값 외상으로 적어 놓으면 편하잖아.”

“제가 갚을지 안 갚을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적을 수는 없어요.”

주인은 새미가 밥을 다 먹었는지 그릇을 살폈다. 새미는 마지막 밥알을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다 먹었어요.”

“잘했네. 장터 다니는 애가 밥을 남기면 손해지.”

“배가 고파서 먹은 거예요.”

“그럼 더 잘했네.”

주인은 그릇을 들었다. 새미는 선비가 앉았던 자리를 한 번 더 보았다. 상 위에 남은 물기는 주인이 닦아 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새미는 품에 넣었던 장값을 꺼냈다. 엽전을 상 한쪽에 놓고 하나씩 세었다. 손바닥에 모인 돈은 오늘 장을 팔아 받은 돈이었다. 염대길의 빚은 그대로였다. 그믐까지 갚아야 할 돈도 줄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엽전이 상에 닿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새미는 돈을 세고, 다시 묶고, 매듭을 당겼다. 돈주머니가 손안에 들어왔다.

“그렇게 세면 돈이 늘어나냐?”

주인이 물었다.

“늘어나진 않아요.”

“그럼 왜 또 세?”

“빠진 게 없는지 봐야 하니까요.”

“빠진 돈은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있고?”

“찾을 수 있을 때도 있어요.”

“못 찾을 때는?”

“그때는 장부를 봐요.”

“장부에도 없으면?”

“제가 잘못 셌겠죠.”

주인은 젖은 행주를 짜서 걸었다.

“너는 장도 돈도 다 기억해야 해서 힘들겠다.”

“기억하면 편합니다.”

“밤에도?”

“밤에는 안 세요.”

“그럼 다행이네. 네 할매는 밤에도 독한테 이름을 부르더라.”

“독이 뭐라 대답하는 건 못 들으셨어요?”

“아직은 못 들었지.”

“할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할걸요.”

주인은 낮게 웃었다. 새미는 돈주머니를 다시 품에 넣었다. 선비가 대신 낸 밥값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를 냈는지 묻지 못했다. 아는 사이가 아니니 갚을 의무도 없다고 생각하려다가, 그런 식으로 남의 호의를 그냥 두는 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저씨.”

“왜?”

“선비님이 제 밥값을 얼마나 내셨어요?”

“네가 먹은 값만큼 냈지.”

“그럼 제가 다음에 장을 가져오면 장값에서 빼 주세요.”

“밥값을 장값에서 빼면 내가 손해인데.”

“제가 갚는다고 했잖아요.”

“네가 직접 갚겠다고 한 건 아니잖아.”

“제가 내겠다고 했어요.”

“그건 맞지.”

“그럼 다음에 오면 알려 주세요.”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잊지 않을게.”

“장부에 적으세요.”

“네가 직접 적으면 되지.”

“제가 모르는 선비한테 진 빚을 아저씨 장부에 적을 수는 없어요.”

“그 선비가 네 대신 낸 돈인데?”

“그래서 선비님이 다시 오면 물어볼 거예요.”

“또 만날 거라고 했으니 오겠지.”

주인은 빈 그릇을 쌓았다. 새미는 그릇을 한 개 받아 주인 손에서 옮겼다. 두 사람은 상 위에 남은 물자국을 함께 닦았다. 밖에서 장터 사람들의 발소리가 지나갔다. 문틈으로 장작 타는 냄새가 들어왔다.

“선비님은 국밥을 아주 깨끗하게 먹었네.”

“배가 고프셨나 봐요.”

“그럼 숭늉까지 마신 건 더 배고파서였겠구나.”

“숭늉은 맛있어서 마셨을 수도 있죠.”

“국밥집 주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해 주면 내가 기쁘지.”

“숭늉이 맛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럼 다음 손님한테 물어봐야겠네.”

주인은 사발을 닦으며 문밖을 내다봤다. 선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미는 돈주머니를 눌러 매듭을 확인했다. 그믐까지 아직 시간이 있었다. 빚을 갚고 장독을 지키려면 장을 더 팔아야 했다. 간택에서 떨어질 생각도 잊으면 안 됐다.

궁은 춥다.

그 기억은 국밥의 김이 가라앉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새미는 입술을 다물고 소매를 걷었다.

“아저씨, 그릇 더 있어요?”

“저기 쌓인 것 좀 옮겨 줘.”

새미는 그릇을 받아 부엌 쪽으로 옮겼다. 주인은 선비가 앉았던 자리에 새 손님이 앉도록 상을 닦았다.

국밥집 밖에서는 둥근 얼굴의 사내가 소매로 땀을 닦았다. 사내는 문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가, 안을 살피고 다시 물러섰다. 도포 자락이 골목 끝에 나타나자 사내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선비가 가까워지자 사내는 허리를 깊이 굽혔다. 선비는 걸음을 멈췄다.

“저하, 환궁하실 시각이옵니다.”

(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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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미는 강정 접시를 마루 가운데로 옮겼다. 접시 밑에 깐 종이가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당기자 바삭한 부스러기가 손바닥에 묻었다.“이렇게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었는데.”“손님이 오신다면서요.”옆에서 찻물을 올리던 나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새미는 접시를 살폈다. 강정은 가지런히 놓였지만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쌀알이 큼직하게 붙은 것도 있고, 끝이 조금 부서진 것도 있었다.“모양이 달라도 맛은 같아요.”“그래도 마마께서 손수 놓으셨는데요.”“손님들이 모양을 세어 보러 오시는 건 아니잖아요.”나인은 웃음을 삼키며 주전자를 들었다. 뜨거운 물이 찻잔에 부어졌다. 새미는 찻잔을 받쳐 들고 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강정에 묻은 조청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별궁 마당에서는 빗자루가 마른 잎을 쓸고 있었다. 매실나무 아래에는 잎 몇 장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떨어졌고, 나인은 쓸고 새미는 잠시 뒤 다시 밟았다. 오늘은 그 정도 실수쯤은 그냥 두기로 했다.“오시는 분들이 곧 도착하실 겁니다.”“가희가 먼저 오면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도강도 같이 왔으면 둘 다요.”“예, 마마.”새미가 강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으려는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인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손님이 오셨습니다.”새미는 강정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손끝을 옷에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희는 마루에 오르자마자 새미를 보고 두 손을 들었다.“새미야!”새미도 웃으며 앞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가희의 손에 보자기가 들려 있었고, 새미의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손부터 비워야겠네.”“그럼 이걸 받아.”가희가 보자기를 새미에게 건넸다. 새미는 찻잔을 나인에게 맡기고 보자기를 받았다. 도강이 뒤에서 가희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도강은 새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마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두 사람 다 편히 들어오세요.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그렇다고 마루에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7화. 대추차

    “할매, 씨간장 독은 지게로 못 져.”끝분의 손이 독 뚜껑에 놓인 채 멈췄다. 두식은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고 장독대 앞에 바짝 다가섰다. 새미는 아버지의 갓을 보았다. 갓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두식은 그걸 모르는 눈치였다.“못 지면 수레에 싣지.”“궁 문턱을 수레가 넘어가겄냐.”“그러면 내가 들면 되지.”“독을?”“씨간장 독은 안 되더라도, 작은 독은 들 수 있어유.”끝분은 두식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굳은살은 있었지만, 장독을 들어 본 손 같지는 않았다.“네가 장독을 들어 봤냐?”“장 지게를 졌잖유.”“그건 장 항아리 몇 개 실은 지게였고.”“그려도 등에 멨슈.”“항아리도 깨 먹었지.”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든 채 아버지를 살폈다. 지난번 같았으면 두식은 “금방 오께”라는 말만 남기고 마당을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오늘은 막걸리 사발도 내려놓았고 장독대에서 물러나지도 않았다.“그럼 내가 지게 대신 장독대를 지킬게유.”끝분이 고개를 돌렸다.“뭐라고?”“새미가 궁에 가면 물안장 독을 누가 살펴야 하잖유. 어머니 혼자 다 보기엔 힘에 부칠 테고. 내가 배우면 되지.”“장 담그는 것도 모르면서 뭘 지켜.”“그러니까 가르쳐 주시면 되잖유.”끝분은 한동안 두식을 바라봤다. 두식의 갓은 여전히 삐뚤어져 있었다. 새미는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다물었다.“내가 새미한테 장 담그는 법을 가르친 건 한두 마디가 아니여.”“나도 처음부터 배우면 되지.”“처음부터라면 메주부터다.”“그러면 메주부터 하겄슈.”“소금도 골라야 한다.”“고르면 되지.”“독도 씻고 말려야 혀.”“씻으면 되잖유.”“입은 잘 씻네.”“손도 씻을게유.”끝분이 독 뚜껑에서 손을 떼었다. 두식은 그 손짓을 허락으로 알아들었는지 소매를 걷었다.“지금부터 할까유?”“지금은 손님들 밥을 먹여야제.”“그럼 밥 먹이고 나서 배우면 되겠구먼.”“네가 밥을 먹이고?”“내가 상도 옮겼잖유.”“접시 하나 들고 전을 흘릴 뻔했지.”“안 흘렸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6화. 막걸리

    마당에 들어선 단새미는 먼저 장독대를 바라봤다.장독 87개가 제자리에 있었다. 그 앞에는 멍석이 깔렸고, 마당 한쪽에는 잔치 음식이 놓인 상이 길게 이어졌다. 떡과 전, 삶은 고기가 접시마다 담겼다. 부엌에서는 국 끓는 소리가 났고, 막걸리 사발이 상 위에 하나씩 놓였다.“새미야,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봐라.”끝분이 부엌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새미는 치맛자락을 조금 걷어 잡고 다가갔다.“할매, 뭐 도와줄까?”“저짝 상에 전이 모자란다. 저것 좀 옮겨라.”“벌써 다 놨는데?”“다 놨다고 끝이냐. 먹는 사람 입이 한둘이 아닌디.”끝분은 새미 손에 접시를 얹어 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들고 상으로 갔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단두식이 그 앞을 막았다.“새미야, 오늘은 네가 손님이여. 일을 하면 쓰나.”“아부지가 방금 일하라고 하셨잖아.”“그려. 아까는 그랬슈. 지금은 내가 생각이 바뀌었어.”“전은 이미 들었는데.”“그러면 잘 들고 가면 되지.”두식은 딸 손에 든 접시를 받아 들었다. 접시를 너무 높이 들자 전 하나가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두식은 다른 손으로 얼른 받쳤다. 그 동작이 제법 능숙해 새미는 눈을 깜빡였다.“아부지, 전 옮기는 법도 배웠어?”“내가 젊어서 말이여, 장터에서 접시를 한 손으로 열두 개씩 옮겼어.”새미는 접시를 내려다봤다. 전은 몇 장 없었다.“열두 개가 어디 있어?”“그때는 있었지. 오늘은 접시가 작아서 이만큼만 든 거여.”끝분이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두식아, 허풍도 상에 올릴 거냐?”“어머니, 오늘은 새미 시집가는 잔칫날이잖유. 기운 좀 내야지.”“기운은 네가 내고 전은 내가 부칠란다. 그거 놓고 얼른 움직여.”두식은 접시를 상에 놓았다. 이번에는 전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끝분은 그 모습을 보고도 칭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으로 돌아가며 새 접시를 한 장 더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새미는 그 접시를 받아 상 끝에 놓았다. 전 냄새와 막걸리 냄새가 마당에 퍼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5화. 떡국

    삼간택 처소의 문이 열렸다. 새미는 무릎 위에 모은 손을 내려다봤다. 나무 맛숟가락은 허리춤에 있었다. 오늘은 그걸 꺼내 쓸 자리가 아니었다.윤보옥이 먼저 일어섰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중전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중전마마께 청이 있습니다.”“말하라.”“삼간택에서 물러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옹원 일을 배우고 싶습니다.”방 안이 잠잠해졌다. 보옥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자리가 싫어서 물러나는 것도, 세자를 원하지 않아서 물러나는 것도 아니라고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새미는 보옥이 제 선택을 고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보았다.중전은 보옥의 눈을 살폈다.“세자빈 자리를 마다하고 사옹원에 가겠다는 뜻이냐?”“그렇습니다.”“사옹원 일은 예법을 익히는 것과 다르다. 손에 물도 묻고, 장부도 살펴야 한다.”“알고 있습니다.”“그 일을 네가 원하느냐?”“제가 원합니다.”보옥의 대답은 망설이지 않았다. 손은 치맛자락을 잡지 않았다. 예법 시험에서 답을 읊을 때와 달리 고개를 뻣뻣이 세우지도 않았다.중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네 뜻대로 하라. 오늘부터 사옹원에서 배우도록 하겠다.”보옥은 깊이 절했다. 다시 몸을 일으키자 새미와 눈이 마주쳤다.“새미.”보옥이 불렀다. 두 사람 사이에 호칭이 바뀐 뒤로도,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부른 적은 드물었다.“네가 고른 일이니까, 잘해.”“새미도 네가 고른 일을 하겠지.”“응.”“그럼 됐어.”보옥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새미는 손가락을 세지 않았다. 대신 보옥이 절을 마치고 돌아서는 것까지 지켜봤다.보옥은 삼간택을 위한 자리에서 물러나 문 쪽으로 걸었다. 그 걸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보옥이 나간 뒤, 비어 버린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새미는 그 자리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새미도 한때는 떨어지는 일만 바라봤다. 할머니와 장독을 두고 궁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빚을 갚고 집을 지키면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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