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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엿기름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4 06:17:16

2월 15일, 두식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있었다. 멍석은 아직 반쯤 말려 있었고, 두식은 마른 쪽을 위로 돌려 놓으려다 발에 걸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부지, 뭐 하세요?”

새미가 광에서 빈 바가지를 들고 나오다 물었다.

“손님 맞을 준비를 허는 중이여.”

“누구요?”

“동네 사람들.”

“무슨 일로요?”

두식은 갓을 고쳐 썼다. 삐뚤어진 갓이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우리 딸이 세자빈 후보가 났다는디, 집안에서 가만있을 수야 있나.”

새미는 바가지를 내려다봤다. 광에서 꺼낸 건 물을 뜨려고 가져온 바가지였다. 손에 든 채로는 아버지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후보가 난 게 아니에요. 단자를 낸 거예요.”

“그게 그거지.”

“아니에요.”

“이름을 적어 냈으니 후보 아니냐?”

“그럼 이름 적힌 사람은 다 세자빈 후보예요?”

“다들 후보는 후보지.”

“그렇게 말하면 동네 사람들한테 오해를 줘요.”

두식은 멍석을 펴다 말고 새미를 보았다.

“오해라니.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여?”

새미는 대답을 고르느라 바가지 손잡이를 만졌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허풍을 부리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단자를 냈다는 사실만으로 친척들이나 이웃을 불러 잔치를 할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오면 축하를 건넬 테고, 새미는 웃으며 아니라고 해야 했다. 그러면 새미가 간택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집안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다.

“아직 뽑힌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해요.”

“그 말만 하면 잔치 못 허냐?”

“잔치할 일이 없어요.”

“우리 집에 사람이 모여 밥을 먹는디 무슨 큰일이 있어야 하냐?”

“아부지가 세자빈 후보가 났다고 부르셨잖아요.”

“그건 사람을 모으려고 한 말이여.”

“그게 오해라고요.”

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멍석 가장자리가 마당 흙에 닿아 있었다. 새미는 바가지를 놓고 멍석을 잡았다.

“아부지, 장독 87개 아직 다 살아 있어요. 빚도 40냥 남았고요. 잔치할 돈 있으면 장값부터 모아야 해요.”

“잔치라고 해 봤자 밥 한 솥이면 되지.”

“밥 한 솥도 쌀이 들어가요.”

“쌀은 내가 구해 오마.”

“어디서요?”

두식의 눈이 옆으로 갔다.

“그건 이제 구하면 되지.”

“또 금방 오께 하고 나가실 거예요?”

“내가 언제 그랬냐?”

새미는 바가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아버지 소매 끝이 손에 닿았다. 지난 생에는 이 무렵, 두식이 빚을 조금 미루는 대신 장독을 내놓겠다고 염대길에게 먼저 말했다. 독 열 개였다. 새미는 그 말을 막지 못했고, 염대길은 그 말을 문서에 올렸다. 그 뒤로 독을 되찾는 데 오래 걸렸다.

이번에는 미리 막아야 했다. 새미는 아버지 소매를 놓지 않았다.

“아부지, 빚 대신 독 열 개 내놓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두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졌다.

“내가 그 말을 할 일이 어딨냐.”

“혹시라도 하지 마세요.”

“누가 그걸 내놓으라고 했냐?”

“아직 아무도 안 했어요. 그래도 하지 마세요.”

두식은 멍석에서 손을 뗐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바로 말하지 않았다. 바람이 마당을 지나가며 멍석 끝을 조금 밀었다.

“그려. 안 한다.”

새미는 아버지 소매를 놓았다.

“그리고 잔치도 안 해요.”

“밥 한 끼 먹는 것도 안 되냐?”

“세자빈 후보 잔치는 안 돼요.”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냐?”

“그냥 집에서 밥 먹는 거요.”

“동네 사람들을 불러 놓고 그냥 밥 먹는다?”

“예.”

두식은 다시 멍석을 잡았다. 이번엔 흙에 닿은 끝을 털어 고르게 폈다.

“그럼 잔치 음식은 안 하고 밥만 먹는 걸로 하자.”

“사람도 부르지 마세요.”

“밥만 하고 사람을 안 부르면 누가 먹냐?”

“우리 가족이요.”

“그게 잔치냐?”

“아부지가 하려던 잔치보단 작죠.”

두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멍석을 접었다. 잔치를 접는 일은 멍석을 접는 것보다 어려웠지만, 새미는 아버지가 더 말을 보태지 않도록 빈 바가지를 다시 들었다.

그때 안채에서 끝분의 목소리가 났다.

“두식아, 멍석 접을 거믄 거기 눕혀 둬라. 마당을 다 덮을 셈이냐?”

“밥상을 놓으려고 펴는 중이었슈.”

“밥상은 안채에 있당께.”

“사람이 많을 수도 있잖유.”

“누가 온다고 그라냐?”

두식은 새미를 보았다. 새미는 바가지 안을 들여다봤다.

“아무도 안 와요, 할매.”

“그럼 됐네.”

끝분은 더 묻지 않았다. 멍석을 든 두식이 마루 앞에 섰다.

“그럼 이건 어디다 둬유?”

“아까 있던 데.”

두식은 멍석을 들고 광 옆에 세워 두었다. 잔치 음식은 한 솥도 끓이지 않게 됐다. 새미는 바가지에 물을 길어 부엌으로 가져갔다.

두식이 벌이려던 잔치는 무산됐다. 대신 밥 한 끼만 먹자는 제안은 아직 버리지 않았다. 새미는 아버지가 그 제안을 다시 꺼내기 전에 부엌일을 시작했다.

―

엿기름은 대야에 담겨 있었다. 끝분은 손을 씻고 물을 부었다. 엿기름이 물속에서 풀리자 고소한 냄새가 부엌에 퍼졌다. 새미가 큰 천을 펼쳐 받치자 끝분은 대야를 기울여 엿기름물을 천에 부었다.

“천이 한쪽으로 쏠렸당께. 그짝 잡아라.”

“잡았어요.”

“거긴 네 손이 아니라 천 끝이여.”

새미는 손을 옮겼다. 천 양쪽을 잡고 물을 짜자 가라앉은 가루가 천에 남았다. 끝분은 맑은 물을 다른 그릇에 받았다.

“이 물은 얼마나 두면 돼요?”

“가루 가라앉을 때까지.”

“그건 얼마나 걸리는데요?”

“니 혀로 맞혀 봐라.”

“아직 가라앉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럼 기다려야제.”

새미는 그릇을 부엌 한쪽에 두었다. 엿기름물은 가만히 있어야 했다. 새미도 잠깐 손을 씻었다. 물이 손등의 얕은 흉터를 적셨다. 흉터 사이에 밀가루 같은 가루가 끼어 있었다.

끝분은 새미가 무명 끈으로 머리를 다시 묶는 동안 장작을 살폈다.

“단자 낸 뒤로 네가 자꾸 입을 연습하더라.”

새미는 손에 묻은 물을 앞치마에 닦았다.

“초간택에서 물을 게 세 가지라고 들었어요.”

“누가 그러드냐?”

“제가 꾼 꿈에서요.”

끝분은 새미를 보았지만, 꿈을 더 캐묻지 않았다. 엿기름을 거르는 천을 접어 대야 위에 얹었다.

“그럼 꿈에서 뭐라 묻디?”

“집안 어른을 어떻게 모시는지, 궁에서 지켜야 할 예가 뭔지, 귀한 게 뭔지요.”

“그걸 다 물었다고?”

“세 가지였어요.”

“귀한 게 뭔지는 나도 궁금허네.”

새미는 입술을 다물었다. 지난 생 초간택에서 중전이 같은 걸 물었다. 새미는 장맛도 집안일도 말하지 못하고 외운 문장만 답했다. 대답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말이 새미를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지금도 잘 알았다.

이번엔 다른 답을 해야 했다.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고르는 답이 아니라, 떨어질 만한 답을 찾아야 했다. 다만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끝분이 가마솥을 내오며 물었다.

“첫째 물음에는 뭐라 할 거냐?”

“어른 뜻을 따르겠다고요.”

“그럼 궁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한다는 말이냐?”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싫은 일도 한다는 말이여?”

“싫다고 말하면 떨어질 것 같아서요.”

“떨어지려고 나가는디, 싫은 걸 참을 필요가 있냐?”

새미는 가마솥 가장자리를 닦았다. 손가락으로 그을음을 문질렀다.

“너무 싫다고 하면 버릇없다고 할 수 있어요.”

“버릇없다고 하면 떨어지겄네.”

“그건 맞아요.”

“그럼 버릇없는 말을 해라.”

“할매는 참 쉽네요.”

“쉬운 걸 어렵게 허는 건 니 재주고.”

끝분은 작은 웃음을 삼켰다. 새미도 입가를 움직였다가 다시 다물었다.

“2번째는요?”

“궁에서 지켜야 할 예라며.”

“예를 지키겠다고 하면 뽑힐 것 같아요.”

“그럼 안 지키겠다고 해라.”

“그것도 거짓말이에요.”

“예를 다 지킬 거라고 하는 것도 거짓말일 수 있제.”

새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궁에서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붙잡기도 했다. 지난 생의 새미는 무례하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혼자였다. 세자와 한 상에 앉아도 나눈 말은 적었다. 한 번은 세자가 말을 꺼내려다 그만둔 저녁이 있었다. 새미는 그때 묻지 않았다.

그 뒤로도 물어볼 수 있는 때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끝분이 솥을 아궁이 위에 걸었다.

“니가 정해라. 내가 대신 대답해 줄 수는 없응께.”

새미는 뚜껑을 옆에 내려놓았다.

“3번째는 귀한 게 뭐냐는 거예요.”

“그건 대답할 만허네.”

“뭐라고요?”

“우리 집에서 귀한 건 장이지.”

“그렇게 말하면 장집 딸이라서 장만 안다고 할 거예요.”

“장집 딸이 장 말고 뭐를 아냐?”

“사람도 알아요.”

끝분은 엿기름물이 담긴 그릇을 확인했다. 가루가 바닥에 가라앉고 있었다.

“그럼 사람이라고 해라.”

“간택을 보러 가서 사람이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을까요?”

“왜 이상혀? 사람 귀한 게 맞는디.”

“그 말은 좋아요.”

“좋은 말이면 왜 떨어지냐?”

새미는 가마솥에 쌀밥을 담았다. 조청을 만들려면 엿기름물을 밥에 섞고 한동안 따뜻하게 둬야 했다. 궁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지 새미는 기억하고 있었다. 대답은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생에는 그 질문을 들었을 때, 중전의 눈앞에서 오래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대답을 바꾸면 됐다. 하지만 대답을 바꾸는 것만으로 마음까지 바뀌지는 않았다.

“저는 떨어져야 해요.”

끝분은 엿기름물을 밥 위에 부었다.

“그라냐.”

“궁에 가고 싶지 않아요.”

“그라냐.”

“할매랑 장독대를 두고 갈 수도 없고요.”

“그라냐.”

끝분은 같은 대답을 했다. 새미가 말을 더 보태도 묻지 않았다. 왜 그렇게 싫은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지 않았다. 솥 안의 밥과 엿기름물을 골고루 섞고 뚜껑을 덮었다.

“이제 따뜻하게 둬야 해.”

“제가 불 볼게요.”

“불은 내가 본다. 니는 대답을 골라.”

“떨어질 대답을요?”

“거짓말 안 하는 대답.”

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분은 아궁이에 장작을 한 토막 넣었다. 불꽃이 잠깐 올라왔다가 잦아들었다.

“첫째 물음에는 싫은 건 싫다고 할게요.”

“그려.”

“둘째는 예를 지키되, 모르는 건 물어보겠다고 하고요.”

“그것도 거짓말은 아니네.”

“셋째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럼 아직 모른다고 해.”

“그렇게 말하면 간택에서 떨어질까요?”

“떨어질 수도 있고, 안 떨어질 수도 있겄지.”

“확실한 방법이 없네요.”

“세상에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냐.”

새미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한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면 끝분이 싫어할 것이다. 새미 자신도 싫었다.

가마솥 안에서 밥이 삭는 동안, 새미는 대답을 소리 내어 연습했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바꾸었다. 끝분은 불을 조금씩 조절했고, 새미는 질문을 듣는 사람처럼 자리를 고쳐 앉았다.

“어른 뜻을 따르겠느냐고 물으면?”

“제 생각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따르는 거냐, 안 따르는 거냐?”

“둘 다 아니에요.”

“그럼 질문한 사람이 다시 묻겄네.”

“그럴 것 같아요.”

“다시 물으면?”

“제 생각을 듣고 결정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건 대답이 길다.”

새미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긴장하면 숫자를 세는 버릇이 나왔다. 하나, 둘. 손가락 두 개가 접혔다.

“궁의 예를 아느냐고 물으면?”

“배우겠습니다.”

“그럼 뽑히겄네.”

“예를 다 지킨다고 말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모른다고 하면 떨어지겄네.”

“아는 걸 모른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것도 맞다.”

끝분은 솥뚜껑을 조금 열어 김을 뺐다. 밥과 엿기름물이 섞인 냄새가 부엌에 찼다. 새미가 뚜껑 쪽으로 손을 뻗자 끝분이 손등을 가볍게 쳤다.

“뜨겁다.”

“손을 대려던 건 아니에요.”

“손이 먼저 가더라.”

“맛을 보려고요.”

“아직 삭지도 않았는디 뭘 맛봐.”

새미는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한동안 솥을 지키는 일은 기다리는 일이었다. 부엌의 소리가 줄자 바깥 마당에서 나무가 밟히는 소리가 났다.

―

밤톨이는 마루 아래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앞니 하나가 빠진 자리로 바람이 들어오는지, 밤톨이는 입을 다문 채 소매를 걷었다. 손바닥에는 엽전이 조금씩 모여 있었다.

새미는 부엌문을 열고 나오다 동생의 등을 보았다.

“밤톨아, 거기서 뭐 하냐?”

밤톨이는 어깨를 움찔했다. 손에 든 엽전을 급히 쥐었다.

“아무것도 안 해.”

“아무것도 안 하는데 마루 밑을 파?”

“안 팠어.”

새미는 손에 들고 있던 바가지를 내려놓고 가까이 갔다. 마루 아래 흙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밤톨이는 몸으로 그 자리를 가렸다.

“손 펴 봐.”

“싫어.”

“손에 든 거 보여 줘.”

“싫다니까.”

“밤톨아.”

밤톨이는 한쪽 손을 뒤로 숨겼다. 다른 손으로는 마루 기둥을 붙들었다. 새미는 그 손목을 잡지 않았다. 대신 마루 아래 흐트러진 흙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거 네가 숨긴 거야?”

“아니야.”

“그럼 누가 했어?”

“바람.”

새미는 마당을 둘러봤다. 바람은 약했고, 마루 아래에는 엽전 하나가 드러나 있었다.

“바람이 엽전을 땅에 묻었어?”

밤톨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빠진 앞니 사이로 작은 숨이 샜다.

“누나한테 들키면 안 돼.”

“왜?”

“누나 시집갈 때 줄 거야.”

새미는 손가락을 펴서 엽전을 하나 집었다. 엽전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내가 시집을 왜 가?”

“세자빈 되면 가잖아.”

“난 안 될 거야.”

“아직 모르잖아.”

“난 떨어질 거야.”

밤톨이는 엽전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시집갈 때는 돈 필요하잖아.”

“그 돈은 네가 모은 거야?”

밤톨이는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

“내가 모았어.”

“어디서?”

“받은 거.”

“누구한테?”

“여기저기.”

“어디저기가 누구야?”

“누나가 다 아는 사람들.”

새미는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밤톨이는 시선을 피했다. 대답은 엉성했지만 손에 든 돈을 빼앗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밤톨이는 엽전을 자기 것으로 모아 두었고, 새미에게 주려고 했다. 새미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어깨가 무거웠다.

“다시 묻는다. 어디서 났어?”

“장터에서 심부름하고 받은 거야.”

“할매한테 말했어?”

“안 했어.”

“왜?”

“할매가 장에 쓰라고 할까 봐.”

“그럼 내가 받을게.”

밤톨이는 손을 더 꽉 쥐었다.

“누나가 시집갈 때 주려고 모은 건데.”

“내가 시집 안 가면?”

“그럼 나중에 줘.”

“뭘 나중에?”

“먹을 거.”

새미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엽전으로 먹을 거 사 주려고?”

“응.”

“그럼 네가 먹어도 되잖아.”

“누나가 먹어야지.”

밤톨이는 흙을 모아 엽전 꾸러미를 덮으려 했다. 새미는 손을 뻗어 흙을 막았다.

“그만해. 마루 밑에 묻어 두면 녹슬어.”

“엽전은 안 녹슬어.”

“흙 묻으면 닦아야 해.”

“누나가 닦아 줘.”

“네가 숨겼으니까 네가 닦아.”

밤톨이는 엽전 꾸러미를 쥔 채 몸을 돌렸다. 마루 끝을 돌아 달아나려 했다.

“밤톨아, 그 돈은 네 거야. 숨기지 말고 할매한테 맡겨.”

“싫어.”

“왜 싫어?”

“할매가 가져가면 장독 살 거야.”

“장독은 이미 87개 있어.”

“그럼 88개 사겠지.”

“장독을 더 살 필요 없어.”

“그럼 할매한테 말하지 마.”

밤톨이는 엽전 꾸러미를 품에 넣었다. 새미는 동생을 쫓아가지 않았다. 밤톨이는 몇 걸음 달아나다 뒤를 돌아봤다. 새미가 따라오지 않자 더 빠르게 마당을 가로질렀다.

“누나 시집갈 때 줄 거야!”

“나 안 간다니까!”

“그래도 줄 거야!”

밤톨이는 안채 쪽으로 도망쳤다. 새미는 흐트러진 흙을 손으로 눌러 평평하게 했다. 엽전 한 개가 마루 기둥 옆에 남아 있었다. 새미는 그것을 주워 손바닥에 올렸다. 앞면에 흙이 묻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부엌에서 끝분이 새미를 불렀다.

“새미야, 조청 다 됐다.”

새미는 엽전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바가지 옆에 놓았다. 밤톨이가 돌아오면 돌려줘야 했다. 부엌 안에서는 엿기름물 냄새가 진해졌다. 끝분은 솥을 열고 밥물을 걸러 내고 있었다.

새미는 저어 주는 주걱을 받아 들었다. 걸러진 물이 솥에 담겼고, 아궁이 불은 낮아져 있었다. 주걱이 바닥을 훑을 때마다 걸쭉한 소리가 났다.

“너무 빨리 젓지 마라.”

“이 정도요?”

“그래. 눌어붙지 않게만 해.”

“조청은 얼마나 졸여야 해요?”

“주걱 들었을 때 천천히 떨어질 때까지.”

새미는 주걱을 들어 올렸다. 엿기름물이 가느다랗게 떨어져 솥 안에 섞였다.

“아직 묽네요.”

“그렇제.”

“그럼 더 졸일게요.”

끝분은 솥 가장자리를 닦았다. 새미가 주걱을 젓는 동안, 끝분은 불을 살피고 장작을 안쪽으로 밀었다. 부엌 밖으로 밤톨이가 뛰어가는 발소리가 지나갔다. 이번에는 마루 아래로 들어가지 않았다.

대문 쪽에서 사람 그림자가 잠깐 비쳤다. 새미는 주걱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염대길의 머슴이었다. 문 앞을 지나가다 멈춰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새미가 눈을 맞추자 머슴은 손을 허리춤에 얹고는 다시 걸었다.

그믐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염대길은 40냥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미는 솥 안을 저었다. 조청이 주걱에 조금씩 달라붙기 시작했다.

“아까 그 사람이 염씨장전 머슴이지?”

끝분이 물었다.

“네.”

“문 앞에서 뭘 했냐?”

“안에 사람이 있는지 봤어요.”

“우리 집에 사람이 있나 보는디, 우리도 봐도 되제.”

새미는 주걱을 솥 바닥에 붙였다가 천천히 돌렸다.

“그믐이 다가오니까 왔나 봐요.”

“빚 받으러 오겠지.”

“아직 돈이 다 모이지 않았어요.”

“그려.”

끝분은 더 묻지 않았다. 새미는 조청이 바닥에 눌지 않게 계속 저었다. 쓴 냄새가 나지 않도록 불을 낮췄다. 부엌 바깥에서 두식이 멍석을 접어 광에 넣는 소리가 들렸다. 밤톨이는 마루 밑에 숨긴 엽전을 꺼내 다시 세고 있었지만, 새미는 보지 못한 척했다.

“할매.”

“왜 그러냐?”

“떨어지는 대답을 찾았어요.”

“뭐라 할 건디?”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싫은 건 싫다고 할 거예요.”

“그라믄 됐네.”

“그럼 떨어질까요?”

“그건 내가 모른다.”

새미의 손이 주걱 위에서 멈췄다. 솥 안의 조청이 주걱 끝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할매도 모른다고 하네요.”

“모르는 걸 안다고 허면 거짓말이제.”

끝분은 주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새미의 손을 잡았다.

“떨어지고 싶으믄 떨어져라. 근디 거짓말은 하지 마라.”

(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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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미는 뚜껑에서 손을 뗐다. 끝분이 마른 천으로 손잡이를 한 번 더 닦았다.“이제 가야제. 궁에서 기다리겄다.”“할매가 먼저 가면 안 돼요. 오늘은 제가 가는 날이에요.”“독도 같이 가는디 내가 먼저 가면 어떻고 네가 먼저 가면 어떠냐.”끝분은 씨간장 독 앞에 섰다. 독의 입구를 둘러싼 흙은 단단했다. 독 옆면에는 오래된 손자국이 몇 겹으로 남아 있었다. 새미는 손바닥을 독에 댔다. 차가운 옹기가 손끝에 닿았다.새미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독은 물안골 장독대에 있었다. 끝분의 시어머니가 그 시어머니에게서 받아 지킨 씨간장이었다. 지난 생에는 궁 장고에서 이 맛을 다시 만났다. 그때 새미는 독 앞에서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그 독을 제 손으로 궁에 들여놓으려 했다.마당에 첫눈이 내렸다. 한 점씩 떨어진 눈이 독 뚜껑과 새미의 무명 끈 위에 붙었다.“눈 온다.”밤톨이가 문밖에서 소리쳤다.“누나, 눈이 독에 들어가면 안 되지?”“뚜껑 닫았으니까 괜찮아. 너는 옷부터 챙겨 입어.”밤톨이는 이미 겉옷을 입고 있었다. 앞니 빠진 입을 벌리고 웃으며 빈손을 내밀었다.“내 옷은 다 입었어. 독을 받치면 돼.”“손부터 씻어. 옹기 잡을 거잖아.”밤톨이는 손을 내렸다. 뒤뜰에서 두식이 지게 끈을 조였다. 갓은 평소보다 반듯하게 썼지만, 새미가 보기엔 여전히 한쪽이 기울어 있었다.“아부지, 갓이 또 삐뚤어졌어요.”“그려? 오늘은 마음이 바빠서 그런가 보네.”“갓은 마음으로 쓰는 게 아니에요.”“그럼 손으로 고치면 되지.”두식은 갓을 바로잡고 지게를 내려놓았다. 지게 위에는 씨간장 독을 받칠 짚과 두꺼운 천이 놓여 있었다. 끝분이 천을 만져 보고는 두식의 손등을 탁 쳤다.“이거 너무 얇다.”“어머니, 독이 그리 무겁진 않잖유.”“네가 들어 봤냐?”“아직은 안 들어 봤슈.”“안 들어 봤으면 입부터 다물어라.”“예.”두식은 대꾸를 삼켰다. 밤톨이는 손을 씻고 돌아와 지게 옆에 섰다. 새미는 독의 아래쪽을 살폈다. 금이 간 곳은 없었다. 지게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9화. 첫 장

    새미는 기다림이 독 앞에 쪽지를 내려놓았다. 종이 끝이 바람에 들리지 않도록 장부로 눌렀다.“오늘 여는 날이오.”세자가 독 앞에 섰다. 쪽빛 도포의 소매를 걷은 손에 흙이 조금 묻어 있었다. 새미는 독 뚜껑을 살폈다. 가장자리에 마른 흙이 끼어 있었고, 손잡이에는 지난번 닦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오늘 여는 날이라고 하셨으면서, 벌써 열어 보셨습니까?”“아직 열지 않았소.”“그럼 이 흙은요?”“독을 옮길 때 묻었소. 뚜껑은 건드리지 않았소.”새미는 세자의 손을 보았다. 손가락 끝에도 흙이 묻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독을 옮기고 나서 손을 씻지 않은 모양이었다.“장독대에 들어오시기 전에 손부터 씻으셨어야죠.”“맞는 말이오.”세자는 그 자리에서 손을 털지 않았다. 새미가 바가지와 물그릇을 가져오자 두 손을 내밀었다. 새미는 물을 부었다. 손끝에 묻은 흙이 물그릇 밑으로 가라앉았다.“이제 됐소?”“손톱 밑도요.”세자는 손을 돌려 손톱 밑을 보여 주었다. 새미는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장독대에는 찬 공기가 남아 있었다. 볕이 닿은 독의 어깨는 조금 따뜻했고, 그늘에 놓인 독은 차가웠다. 기다림이 독은 가운데 줄 맨 끝에 있었다. 8개월 동안 뚜껑을 열지 않았다. 새미는 담근 날부터 장부에 날짜와 재료를 적었다. 그 뒤로는 독을 지나칠 때마다 뚜껑을 두드리지 않고 옆면만 살폈다.“3년 뒤에 같이 열자고 하셨잖아요.”“그랬소.”“그런데 오늘은 8개월 된 장을 열어도 된다고 하시는군요.”“3년을 기다리기로 한 건 장이었소. 오늘 맛을 보는 것까지 금한 건 아니오.”“말은 맞는데, 듣고 있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네요.”“그럼 내가 먼저 맛보겠소.”“제가 장을 담갔으니 제가 먼저 봐야죠.”“그대가 먼저 봐도 좋소.”세자는 대꾸를 더 잇지 않았다. 새미는 그 침묵을 받아 독 앞에 쪼그려 앉았다. 독을 열기 전에 주변부터 살폈다. 뚜껑이 비뚤어지지 않았고, 독의 입구도 깨끗했다. 새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마른 천으로 뚜껑 가장자리를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8화. 강정

    새미는 강정 접시를 마루 가운데로 옮겼다. 접시 밑에 깐 종이가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손끝으로 종이를 당기자 바삭한 부스러기가 손바닥에 묻었다.“이렇게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었는데.”“손님이 오신다면서요.”옆에서 찻물을 올리던 나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새미는 접시를 살폈다. 강정은 가지런히 놓였지만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쌀알이 큼직하게 붙은 것도 있고, 끝이 조금 부서진 것도 있었다.“모양이 달라도 맛은 같아요.”“그래도 마마께서 손수 놓으셨는데요.”“손님들이 모양을 세어 보러 오시는 건 아니잖아요.”나인은 웃음을 삼키며 주전자를 들었다. 뜨거운 물이 찻잔에 부어졌다. 새미는 찻잔을 받쳐 들고 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강정에 묻은 조청 냄새가 방 안에 퍼졌다.별궁 마당에서는 빗자루가 마른 잎을 쓸고 있었다. 매실나무 아래에는 잎 몇 장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떨어졌고, 나인은 쓸고 새미는 잠시 뒤 다시 밟았다. 오늘은 그 정도 실수쯤은 그냥 두기로 했다.“오시는 분들이 곧 도착하실 겁니다.”“가희가 먼저 오면 방으로 안내해 주세요. 도강도 같이 왔으면 둘 다요.”“예, 마마.”새미가 강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으려는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인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손님이 오셨습니다.”새미는 강정을 접시에 내려놓았다. 손끝을 옷에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희는 마루에 오르자마자 새미를 보고 두 손을 들었다.“새미야!”새미도 웃으며 앞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가희의 손에 보자기가 들려 있었고, 새미의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손부터 비워야겠네.”“그럼 이걸 받아.”가희가 보자기를 새미에게 건넸다. 새미는 찻잔을 나인에게 맡기고 보자기를 받았다. 도강이 뒤에서 가희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도강은 새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마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두 사람 다 편히 들어오세요. 여기서는 그렇게까지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그렇다고 마루에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7화. 대추차

    “할매, 씨간장 독은 지게로 못 져.”끝분의 손이 독 뚜껑에 놓인 채 멈췄다. 두식은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고 장독대 앞에 바짝 다가섰다. 새미는 아버지의 갓을 보았다. 갓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두식은 그걸 모르는 눈치였다.“못 지면 수레에 싣지.”“궁 문턱을 수레가 넘어가겄냐.”“그러면 내가 들면 되지.”“독을?”“씨간장 독은 안 되더라도, 작은 독은 들 수 있어유.”끝분은 두식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에 굳은살은 있었지만, 장독을 들어 본 손 같지는 않았다.“네가 장독을 들어 봤냐?”“장 지게를 졌잖유.”“그건 장 항아리 몇 개 실은 지게였고.”“그려도 등에 멨슈.”“항아리도 깨 먹었지.”두식은 입을 다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든 채 아버지를 살폈다. 지난번 같았으면 두식은 “금방 오께”라는 말만 남기고 마당을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오늘은 막걸리 사발도 내려놓았고 장독대에서 물러나지도 않았다.“그럼 내가 지게 대신 장독대를 지킬게유.”끝분이 고개를 돌렸다.“뭐라고?”“새미가 궁에 가면 물안장 독을 누가 살펴야 하잖유. 어머니 혼자 다 보기엔 힘에 부칠 테고. 내가 배우면 되지.”“장 담그는 것도 모르면서 뭘 지켜.”“그러니까 가르쳐 주시면 되잖유.”끝분은 한동안 두식을 바라봤다. 두식의 갓은 여전히 삐뚤어져 있었다. 새미는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다물었다.“내가 새미한테 장 담그는 법을 가르친 건 한두 마디가 아니여.”“나도 처음부터 배우면 되지.”“처음부터라면 메주부터다.”“그러면 메주부터 하겄슈.”“소금도 골라야 한다.”“고르면 되지.”“독도 씻고 말려야 혀.”“씻으면 되잖유.”“입은 잘 씻네.”“손도 씻을게유.”끝분이 독 뚜껑에서 손을 떼었다. 두식은 그 손짓을 허락으로 알아들었는지 소매를 걷었다.“지금부터 할까유?”“지금은 손님들 밥을 먹여야제.”“그럼 밥 먹이고 나서 배우면 되겠구먼.”“네가 밥을 먹이고?”“내가 상도 옮겼잖유.”“접시 하나 들고 전을 흘릴 뻔했지.”“안 흘렸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6화. 막걸리

    마당에 들어선 단새미는 먼저 장독대를 바라봤다.장독 87개가 제자리에 있었다. 그 앞에는 멍석이 깔렸고, 마당 한쪽에는 잔치 음식이 놓인 상이 길게 이어졌다. 떡과 전, 삶은 고기가 접시마다 담겼다. 부엌에서는 국 끓는 소리가 났고, 막걸리 사발이 상 위에 하나씩 놓였다.“새미야,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봐라.”끝분이 부엌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새미는 치맛자락을 조금 걷어 잡고 다가갔다.“할매, 뭐 도와줄까?”“저짝 상에 전이 모자란다. 저것 좀 옮겨라.”“벌써 다 놨는데?”“다 놨다고 끝이냐. 먹는 사람 입이 한둘이 아닌디.”끝분은 새미 손에 접시를 얹어 주었다. 새미는 접시를 들고 상으로 갔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단두식이 그 앞을 막았다.“새미야, 오늘은 네가 손님이여. 일을 하면 쓰나.”“아부지가 방금 일하라고 하셨잖아.”“그려. 아까는 그랬슈. 지금은 내가 생각이 바뀌었어.”“전은 이미 들었는데.”“그러면 잘 들고 가면 되지.”두식은 딸 손에 든 접시를 받아 들었다. 접시를 너무 높이 들자 전 하나가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두식은 다른 손으로 얼른 받쳤다. 그 동작이 제법 능숙해 새미는 눈을 깜빡였다.“아부지, 전 옮기는 법도 배웠어?”“내가 젊어서 말이여, 장터에서 접시를 한 손으로 열두 개씩 옮겼어.”새미는 접시를 내려다봤다. 전은 몇 장 없었다.“열두 개가 어디 있어?”“그때는 있었지. 오늘은 접시가 작아서 이만큼만 든 거여.”끝분이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두식아, 허풍도 상에 올릴 거냐?”“어머니, 오늘은 새미 시집가는 잔칫날이잖유. 기운 좀 내야지.”“기운은 네가 내고 전은 내가 부칠란다. 그거 놓고 얼른 움직여.”두식은 접시를 상에 놓았다. 이번에는 전이 미끄러지지 않았다. 끝분은 그 모습을 보고도 칭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엌으로 돌아가며 새 접시를 한 장 더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새미는 그 접시를 받아 상 끝에 놓았다. 전 냄새와 막걸리 냄새가 마당에 퍼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

  • 세자빈 간택에서 떨어지려고 회귀했더니 세자가 장독대로 찾아왔다   75화. 떡국

    삼간택 처소의 문이 열렸다. 새미는 무릎 위에 모은 손을 내려다봤다. 나무 맛숟가락은 허리춤에 있었다. 오늘은 그걸 꺼내 쓸 자리가 아니었다.윤보옥이 먼저 일어섰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중전 앞에 섰다. 고개를 숙이는 각도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중전마마께 청이 있습니다.”“말하라.”“삼간택에서 물러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옹원 일을 배우고 싶습니다.”방 안이 잠잠해졌다. 보옥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자리가 싫어서 물러나는 것도, 세자를 원하지 않아서 물러나는 것도 아니라고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새미는 보옥이 제 선택을 고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보았다.중전은 보옥의 눈을 살폈다.“세자빈 자리를 마다하고 사옹원에 가겠다는 뜻이냐?”“그렇습니다.”“사옹원 일은 예법을 익히는 것과 다르다. 손에 물도 묻고, 장부도 살펴야 한다.”“알고 있습니다.”“그 일을 네가 원하느냐?”“제가 원합니다.”보옥의 대답은 망설이지 않았다. 손은 치맛자락을 잡지 않았다. 예법 시험에서 답을 읊을 때와 달리 고개를 뻣뻣이 세우지도 않았다.중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다. 네 뜻대로 하라. 오늘부터 사옹원에서 배우도록 하겠다.”보옥은 깊이 절했다. 다시 몸을 일으키자 새미와 눈이 마주쳤다.“새미.”보옥이 불렀다. 두 사람 사이에 호칭이 바뀐 뒤로도,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부른 적은 드물었다.“네가 고른 일이니까, 잘해.”“새미도 네가 고른 일을 하겠지.”“응.”“그럼 됐어.”보옥의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새미는 손가락을 세지 않았다. 대신 보옥이 절을 마치고 돌아서는 것까지 지켜봤다.보옥은 삼간택을 위한 자리에서 물러나 문 쪽으로 걸었다. 그 걸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보옥이 나간 뒤, 비어 버린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새미는 그 자리를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새미도 한때는 떨어지는 일만 바라봤다. 할머니와 장독을 두고 궁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빚을 갚고 집을 지키면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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