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대표님께서 지원 씨 목이 잠겼다고 하시면서 특별히 부탁해서 구운 배에 도라지를 넣어달라고 하셨어요. 한밤중에 주문한 건데도 지금도 따뜻하네요.”고준석은 말을 마치며 따뜻한 구운 배가 담긴 봉투를 내 손에 건넸다.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나는 봉투를 들고 고개를 숙였다.고준석이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윤 팀장님, 지금 사시는 아파트로 모실까요?”그 아파트는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이었다.그가 이렇게 쉽게 물어본 걸 보니 지난번 한밤중에 강유형이 우리 집 아래에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아마 고준석이 미리 알아보고 강유형에게 정보를 준 게 분명했다.“아니요. 괜찮아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고준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룸미러로 나를 쳐다봤다.“그럼 어디로...”“고 비서님, 차를 세워주세요.”내 말에 고준석은 움찔하며 차를 한쪽에 세웠다.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윤지원 씨, 무슨 일이세요?"나는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집에 가지 않을 거예요. 병원 외과 병동으로 가주세요.”잠시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아직 병원에서 회복 중인 진소영을 찾아가야 한다는 걸 말이다.고준석은 금세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소영의 수술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걸 보니 강유형도 아마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밤새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그가 나를 걱정해서 그런지 아니면 강유형의 요구대로 일을 처리 못 하면 돌아가서 욕을 먹을까 봐 두려워서 그런지 몰랐다.“괜찮아요.”나는 말하며 차에서 내리려 했다.“윤 팀장님.”그가 나를 다시 불렀다.그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따뜻한 구운 배로 향해 있었다.“강 대표님은 여전히 윤 팀장님을 위해 정말 많이 신경 쓰십니다. 만약 제 실수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두 분은 결혼하셨을지도 모릅니다.”그 일이 아직도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아
그러자 진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이제 건강해졌으니까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어요. 제가 놓쳤던 것들을 다시 찾아야죠.”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다.“좋아. 언니가 응원할게.”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격려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근데 이 책들 혼자 이해할 수 있겠어? 혹시 어려우면 원포인트로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아볼까?”진소영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언니. 심장 이식받고 나서 그런지 전보다 머리가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이 책도 금방 이해되더라고요.”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자 진소영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장난스럽게 말했다.“언니, 혹시 이 심장의 주인이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던 걸까요?”“무슨 소리야. 공부 잘하는 건 머리로 하는 거지 심장이랑은 상관없어.”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생각을 부정했다.사실 아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괜히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그녀가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넌 원래 똑똑해. 네 오빠도 그렇게 말했잖아.”나는 진소영을 다독이며 말했다.진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언니, 저 정말 대학 가고 싶어요. 캠퍼스 생활도 해보고 싶고요.”“좋아!”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격려하며 책을 몇 장 넘겨보았다. 책에는 필기 흔적이 군데군데 있었고 누군가 사용했던 헌책인 것 같았다.“이 책들은 누가 구해줬어? 네 오빠가 준 거야?”“아니에요. 어떤 친구가 줬어요.”진소영은 말하면서 시선을 약간 피했다.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나는 살짝 장난스럽게 물었다.“어머. 병원에서도 친구를 사귀었어? 그것도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니... 대단한데?”진소영은 약간 쑥스러운 듯 말했다.“친구라고 하기엔 좀 그래요...”“그럼 어떤 사람이야?”나는 모르는 척 더 물어봤다.“다른 병실 환자 가족이에요. 그분이 책 보다가 병실을 착각해서 우리 방에 들어왔어요. 처음엔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까 박사 준비 중이래요...”진소영의 말을 들으니 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강유형이었다.그가 병실에 갑자기 나타나자 내 첫 반응은 삼촌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물었다.“삼촌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강유형은 병실 안을 둘러보지 않고 나만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으셔.”그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엄마가 널 찾으셔.”안도의 한숨이 나왔다.“무슨 일인데?”“글쎄... 나도 모르겠어. 급한 것 같아. 어서 너 보고 전화하라고 하셨어.”그는 다시 핸드폰을 내 앞에 내밀었다.내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받으려는 순간 뒤에서 진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이분은 누구세요?”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진소영은 이미 내가 진정우랑 왜 싸웠을까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강유형이 내 전 남자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게다가 그녀는 로맨스 소설로 가득 찬 머릿속을 가지고 있으니 온갖 상상을 할 게 분명했다.“저기... 내 오빠야.”내가 그렇게 말하자 강한 냉기가 주위를 감싸는 걸 느꼈다.나는 강유형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반응이 예상되었다.나는 진소영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너는 구운 배를 마저 먹어.”진소영은 손에 작은 스푼을 든 채 강유형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경계와 방어의 기색이 가득했다.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나는 강유형에게 말했다.“가자.”그 순간 진소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저분이 둘째 오빠인 걸 저도 알아요.”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강유형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의 눈빛이 더 어두워졌다.그가 지금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불편한 걸까?하지만 우리가 이미 헤어진 사이고 그의 부모님은 나를 건너뛰어 의붓딸 삼겠다고 했으니 강유형은 엄연히 내 둘째 오빠가 맞다.“맞아. 둘째 오빠야.”나는 단호히 대답했고 핸드폰을 받아 들고 병실을 나섰다.병실 밖으로 나온 나는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아줌마의
“그 나쁜 계집애가 강유형을 믿고 이러는 거야.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아줌마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줌마, 우선 조나연이 삼촌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확실히 아는 게 중요해요.”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무슨 말을 했겠어? 당연히 우리 집에 들어오고 싶다는 얘기겠지. 대놓고 우리한테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말했을 거야.”아줌마의 말투에서 조나연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천만에. 세상에 여자가 다 없어져서 강유형이 평생 혼자 산다 해도 그런 년을 절대 우리 집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야!”그녀의 단호한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나는 그녀의 분노가 삼촌을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화를 풀게 두고 있었다.그리고 얼마 후 아줌마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지원아, 지켜봐. 내가 그년을 제대로 혼쭐낼 거야.”그 말을 듣자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강유형 집에 들어온 지 2년째인가 3년째 되는 해 아줌마와 삼촌은 이혼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그때 아줌마가 누군가를 혼쭐내겠다고 전화로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아줌마는 상대방에게 내 남편을 건드리지 말라며 경고했다.그 일 후, 삼촌과 아줌마는 크게 다퉜고 삼촌은 아줌마를 지독한 여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오늘의 아줌마도 그때와 비슷했다. 나는 이번에도 아줌마가 무언가 극단적인 행동을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만약 내가 그녀를 말리지 않고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삼촌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제가 조나연을 찾아가서 직접 물어볼게요. 어떤 속셈인지 확인한 후 그다음에 대책을 생각하셔도 늦지 않아요.”나는 차분히 설득했고 아줌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마침내 동의했다.“그래. 네가 가서 물어봐. 하지만 분명히 전해줘. 만약 너희 삼촌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년은 목숨으로 갚아야 할 거라고.”그 마지막 말은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진소영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진정우에게 전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핸드폰이 드디어 연결된 걸까?처음엔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묵묵히 서서 진소영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오빠, 지원 언니 전 남자 친구가 언니를 보는 눈빛이 이상해. 분명히 아직도 언니를 좋아하는 것 같아.”“오빠, 혹시 언니랑 싸운 거 아니야? 언니가 아까부터 계속 멍하니 있었어.”“왜 문자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지?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한 가지 확실히 말해둘게. 만약 언니랑 헤어지면 나도 오빠랑 안 볼 거야.”“빨리 답장해. 전화 받으라고!”마지막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통화 중이 아닌 음성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진정우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왜 연락이 안 되는지 궁금해졌다.나는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녀가 음성 메시지를 보내는 걸 엿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병실 문을 다시 열고 더 큰 소리로 문을 닫았다.“언니!”진소영이 문소리를 듣고 날 불렀다.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숨기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며 웃었다.“별생각 하지 마.”나는 그녀의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아까 병실에 왔던 사람이 내 전 남자 친구였어. 하지만 다 지난 일이야. 지금은 그냥 친구 아니면 형제 같은 관계야.”진소영은 빤히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언니, 그럼 그 사람이랑 어떻게 만나서 연애했는지 그리고 왜 헤어졌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그녀의 순수한 눈빛은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탐구하려는 것 같았다.아마 그녀는 로맨스 소설 속 사랑 이야기만 접해봤기에 현실에서의 사랑 이야기가 더 궁금했을 것이다. 모르는 이야기는 더 알고 싶기 마련이다.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그녀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게 뻔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알았어. 너의 궁금증을 풀어줄게.”나는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진소영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강유
“그럴 일은 없을 거야.”진소영은 내가 한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요! 오빠가 돌아오면 언니랑 빨리 결혼해야 해요. 그래야 아무도 언니를 노릴 수 없잖아요.”철없고 순진한 동생 같은 말에 웃음이 났다. 세상에는 '이혼'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를 것이다.하지만 나는 진소영이 괜한 걱정을 할까 봐 가볍게 대답했다.“그래, 나도 네 오빠가 빨리 나 데려가길 기다리고 있어.”진소영은 눈을 반짝이며 기뻐하더니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진정우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언니가 오빠가 데리러 오기만 기다리고 있대요. 얼른 와서 청혼해요!”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메시지를 보낸 뒤 진소영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근데 오빠 왜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안 봐요?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죠?”그 말에 나도 잠시 마음이 철렁했지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글쎄, 어쩌면 가는 길에 다른 예쁜 여자한테 홀렸을지도 몰라.”“그럴 리 없어요! 오빠는 예전부터 쫓아다니는 여자들한테도 관심 없었어요. 오직 언니만 좋아했거든요.”진소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우리는 웃으며 가벼운 대화를 이어갔다. 아침을 함께 먹고 나서 나는 간병인에게 진소영을 맡기고 병원에서 나왔다.안리영이 준비해 준 예비 핸드폰과 새 번호를 받아 들고 진정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불안감이 커졌지만 지금 당장 그를 찾으러 갈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나는 집에서 부모님 사고와 관련된 자료를 꺼내 다시 살펴봤다.보고서에는 사고 원인이 브레이크 고장으로 인해 차량이 통제력을 잃고 전복된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브레이크 고장이라니?이게 단순한 차량 문제였을까? 아니면 누군가 고의로 손을 댄 걸까?보고서는 이 의문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왜 당시에는 이런 부분을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이 모든 사고 처리를 삼촌이 맡았
나는 눈을 감았다. 연락이 닿지 않아 불안했던 마음이 그제야 가라앉았다.“정우 씨는 어딘데?”“집 앞이야.”그 말에 순간 머릿속에 그가 텅 빈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모습이 그려졌다.내가 이사를 했다는 걸 알 리 없는 그는 당연히 그곳으로 간 것이었다.“핸드폰이 없길래 소영이한테 물어봤더니 네가 집에 돌아갔다고 했어. 리영 씨도 수술 중이라 연락이 안 되고...”진정우가 이유를 설명했다.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새집을 둘러보며 대답했다.“나도 정우 씨가 연락이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알아.”그의 짧은 대답에 어쩐지 쓴웃음이 나왔다.그에게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만나서 이야기할게. 너 이사 간 거야?”지금 이 새로운 집은 진정우도 모르고 있었다.그전에 그는 셋집을 구했다고 나한테 말하면서 나보고 그곳으로 오라고 했고 나도 그 당시 동의했다.하지만 진정우가 연락이 되지 않자 갈 곳이 없던 나는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응. 네 짐도 다 가져왔어.”바닥에 놓인 그의 짐가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사실 그의 짐은 별로 없었다. 그가 살던 곳의 많은 것들은 원래 집주인의 것이었다.그는 잠시 말이 없었고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아서 나는 바로 말했다.“택시 타고 자호 가든으로 와. 내가 입구에서 기다릴게.”“알았어.”나는 전화를 끊고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인 뒤 컵 두 개에 식히고 신발을 갈아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 단지는 작년에 완공된 새 아파트였고 깔끔하고 환경도 좋았다.나는 단지를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보낸 뒤 약속한 입구로 갔다.마침 입구 근처의 과일가게가 새로 문을 열고 할인 행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게에 들어가 몇 가지 과일을 골랐다. 계산하려던 순간 진정우에게서 전화가 왔다.“과일가게 안에 있어. 들어와.”전화를 끊자마자 그가 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내가 손을 흔들자 그는 빠르게 걸어왔다. 그의 눈길이 내 얼굴에 고정된 것을 느끼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뭐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코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정말 너무해. 내 말도 안 들어보고 이렇게 구는 거야?”“내가 언제 안 들었어. 네 얘기를 들으려고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그의 말에 나는 머릿속으로 그가 얼마나 초조했을지 그려졌다.내가 없어진 걸 알고 CCTV까지 확인하며 나를 찾아다녔겠지. 그리고 결국 내가 강유형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것이다.강유형이 말한 대로 진정우는 나를 찾기 위해 애썼다.나는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전화 못 받은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땐 내가 중환자실에 있었거든.”“알아.”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래서 화내지 않았어. 그리고 전화가 안 됐던 이유는 집에 가면 얘기해줄게.”그는 멀리 보이는 아파트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네가 어젯밤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어. 물도 안 마셨고. 정말 피곤하고 목이 말라.”그의 말에 마음이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이끌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간 걸 알면서 왜 잠도 안 자고 물도 안 마신 거야? 대체 뭘 했길래 이래?”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나를 따라 걸었다. 그의 상태가 걱정돼 더 이상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데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짐을 내려놓고 과일을 정리하더니 나를 신발장 쪽으로 밀어붙였다.그의 강렬한 눈빛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멎을 듯해 나는 침을 삼켰다.“물 준비해 놨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질투 났어.”그의 말에 나는 놀라 멈췄다.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걸 이해한다는 말투였는데, 이제 와서 질투했다고?“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건...”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 말을 막았다.그의 품에 안겨 입맞춤을 나누며 그의 목마름이 얼마나 컸는지 느껴졌다. 거칠고 마른 입술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따뜻했다.“네가 한 일을 이해해. 그래도 질투는 멈출 수 없더라.”그가 입맞춤을 멈추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나는 오직 그녀만을 믿었다.“괜찮아. 초음파 사진 봤어. 아기는 아주 건강해.”안리영의 곱고 단정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저 그렇게 미묘하게 번진 웃음 하나가 내겐 믿음을 주는 보약처럼 느껴졌다.“리영아, 제발 이 아이만은 꼭 지킬 수 있게 도와줘.”나는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듯 말했다.“당연하지. 이건 너랑 정우 씨의 사랑의 결실이잖아.”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강유형은 고개를 돌렸다. 감춰지지 못한 외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이미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 역시 이별을 받아들였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했다.안리영 덕분에 나는 병실에, 그것도 VIP 병실에 입원할 수 있었다. 그녀의 당직실이 아니라 정식 병실이었다.아랫배의 통증도 가라앉았고 출혈도 점점 잦아들었다. 마음이 조금 놓이자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그 강 선생님이라는 사람, 갑자기 부임한 거라면서? 어떻게 된 일이야?”안리영은 반 박자쯤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소희연의 고모인가 이모인가 그래.”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눈치를 챘다. 슬쩍 그녀의 표정을 살폈지만 전과 다를 건 없었다. 다만 얼굴이 조금 더 야위어 보였다.그녀는 구안석과 헤어졌다. 게다가 먼저 끝내자고 한 것도 그녀였다. 실망이 극에 달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구안석은 그녀가 오랜 세월 마음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그 오랜 감정을 끊어낸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나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그런 감정은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저 무심히 말했다.“강유형이 병원장한테 얘기할 것 같아.”“고자질할 만하면 해야지.”안리영은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만히 당해줄 호구도 아니었다.나는 웃음이 터졌다.“의사 선생님답네. 칼 쥐고 돈 받는 직업이라 그런가 마음도 차갑기 그지없군.”“남한테 괜히 마음 써봤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셈이나
“유산 조짐이 있습니다.”그 말을 듣자 나는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 얼이 빠졌다.‘유산이라니?’“의사 선생님, 저 임신한 거예요?”놀라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는 의사의 가운을 붙잡았다.“몰랐어요?”의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는 곧 못마땅하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요즘 젊은이들은 쾌락만 즐기고 책임질 생각을 전혀 안 한다니까요.”의사는 나와 강유형을 연인으로 착각하고는 설교를 퍼부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해명할 정신도, 그의 핀잔에 대응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재차 물었다.“선생님, 저 정말 임신한 거 맞죠?”“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산 조짐이 보여요.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는 아직 몰라요.”의사의 말에 나는 그의 가운을 더 꽉 움켜쥐었다.“제발 부탁드릴게요. 아이를 지켜 주세요.”흥분에 겨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요즘 들어 이유 없이 아이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물처럼 안겨 오다니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몰랐었고 그로 인해 아이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아가야, 아무 일 없어야 해. 꼭...’“우선은 보태부터 시작할게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화장실을 가는 것과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조건 누워 있어야 해요. 일주일 정도 상태를 지켜본 후에 다시 판단할 겁니다. 계속 출혈이 있으면 아이는 지키기 힘들지도 몰라요.”의사는 이미 키보드를 두드리며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었다.“선생님, 여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나는 지금 몸을 함부로 움직이기 두려웠고 그저 병원 안에 머무르고 싶었다.이 병원엔 안리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산부인과 과장이기도 하다.지금은 또 수술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 분명했다.“지금은 남는 병상이 없어요. 일단 집에서 안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