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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빌린 이름

Autor: 지호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0-21 13:48:27

서령은 밤새 그 종잇조각을 들여다봤다. 숫자 몇 개와 도장 자국 반쪽. 그것만으로는 누구도 추궁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단서는 단서였다. 문서철 하나를 통째로 치울 만큼 다급했던 손이 있었다. 그 자체가 이미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어젯밤 담장 모퉁이에서 움직이던 그림자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모르는 척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누가, 왜. 그것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종잇조각만으로는 이름도, 행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물건은 사람의 손을 거친다. 밤마다 드나들었다는 그 발길을 쫓으면, 적어도 얼굴 하나는 건질 수 있을 터였다.

다만 드러내 놓고 캐물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평소와 다르게 구는 것 자체가 의심을 사는 길이었다.

날이 밝자 서령은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명목은 간단했다. 혼례 물품의 운반 경로를 점검한다는 것. 의심 살 것 없는 핑계였고, 명단을 맡은 사람이 직접 확인하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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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24화. 빌린 이름

    서령은 밤새 그 종잇조각을 들여다봤다. 숫자 몇 개와 도장 자국 반쪽. 그것만으로는 누구도 추궁할 수 없었다.그래도 단서는 단서였다. 문서철 하나를 통째로 치울 만큼 다급했던 손이 있었다. 그 자체가 이미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어젯밤 담장 모퉁이에서 움직이던 그림자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모르는 척 걸음을 옮기긴 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누가, 왜. 그것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종잇조각만으로는 이름도, 행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물건은 사람의 손을 거친다. 밤마다 드나들었다는 그 발길을 쫓으면, 적어도 얼굴 하나는 건질 수 있을 터였다.다만 드러내 놓고 캐물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평소와 다르게 구는 것 자체가 의심을 사는 길이었다.날이 밝자 서령은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명목은 간단했다. 혼례 물품의 운반 경로를 점검한다는 것. 의심 살 것 없는 핑계였고, 명단을 맡은 사람이 직접 확인하겠다는데 막을 자도 없었다.물품을 나르는 짐꾼들이 모이는 뒷마당으로 가자, 낯익은 얼굴들이 허리를 숙였다. 새벽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 마당에는 횃불 몇 개가 타고 있었고, 수레바퀴 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짐 싣는 사내들 틈에, 유독 손에 흙 한 번 묻지 않은 자가 섞여 있었다. 서령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수레 뒤로 몸을 돌렸다.어젯밤 그림자와 같은 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을 나르는 사람치고는 손이 지나치게 깨끗했다.서령은 그중 가장 오래 일했다는 짐꾼을 눈으로 짚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수량 확인을 핑계 삼아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불러냈다. 손에는 조달 장부를 펼쳐 든 채였다. 누가 봐도 그저 혼수를 점검하는 신부로 보일 터였다."지난 두어 달 동안 물건을 받아 간 자들을 확인하려 한다. 평소와 다른 일은 없었느냐?"짐꾼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밤마다 물건을 받으러 오는 어른이 계셨습니다.""몇 명이서 왔는지, 수레는 몇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23. 죽은 자의 명의

    서령은 더 묻지 않았다.증명해 달라 조르는 건 이미 끝났다. 아버지의 낯빛이 모든 걸 말해준 이상, 이제는 직접 캐낼 차례였다.밤새 한숨도 못 잤다.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그 사람은 혼례에 올 사람이 아니다.날이 밝자마자 서령은 혼례 물품 조달 명단을 다시 펼쳤다. "비용은 진원군 대감께 직접 보고"라 적힌 줄 옆, 이름 하나를 손끝으로 짚었다."이 사람. 어느 군영 소속인지, 관직이 무엇인지 알아 와."시녀가 고개를 숙이려는데 서령이 덧붙였다."관아에는 묻지 마라. 저번에 물품값 흥정하던 포목전 쪽을 통해. 거기 주인은 입이 무겁고, 발도 넓다. 혼례 준비를 핑계 삼으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거다."시녀가 물러간 뒤, 서령은 평소대로 하루를 보냈다. 폐백 음식 목록을 점검하고, 혼수함 자수 색을 고르고, 하객 접대용 다과까지 일일이 확인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신부였다.점검 중에 이휘가 잠깐 들렀다."요즘 자주 안색이 어둡던데, 혼례 준비가 힘에 부치시오?""아닙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이휘는 그녀가 내민 자수 천을 보지 않았다."내게 말하지 못할 일이 있는 것이오?"서령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아직은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이휘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돌아서는 얼굴에서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서령은 생각했다. 이 사람에게도 아직은 말할 수 없다고.속은 달랐다. 머릿속은 온통 그 이름 하나뿐이었다.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돌아온 시녀의 낯빛이 평소와 달랐다."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말해 봐.""오 년 전, 변방에서 싸우다 죽었다는 사람이옵니다."서령의 손이 멈췄다."확실한 것이냐?""포목전 주인이 그때 장례 소문을 직접 들었다 했습니다. 틀림없다고요.""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하오나 그 이름이 지금 이 명단에, 그것도 진원군 대감 댁 소관으로 올라 있지 않사옵니까.""그러니 더 알아내야지. 병조 명부에 아직 그 이름이 올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22. 아버지의 경고

    오랜만에 마주한 부녀였지만 반가움을 나눌 여유는 없었다.“진원군 대감께서 날짜를 앞당기셨습니다.”“이휘는 뭐라 하더냐?”“도련님께서는 갑작스러운 결정에 의문을 품고 계십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뜻을 꺾지는 못하셨습니다.”김태겸은 씁쓸하게 웃었다.“그럴 테지. 진원군이 한번 마음먹은 일을 누가 말리겠느냐.”서령은 아버지의 안색을 살폈다. 예전보다 수척해졌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아버지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말해 보거라.”“진원군 대감께서는 어째서 혼례를 서두르시는 걸까요?”김태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왕실에 경사가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혼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만이 이유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어떤 사람들이더냐?”“대감과 가까운 관리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려움을 겪으실 때 등을 돌렸던 집안들도 있고요.”김태겸의 얼굴이 굳었다.“그자들까지 부른단 말이냐?”“제가 청했습니다.”“네가?”“예. 저희 집안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그들에게 직접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그자들 앞에서 웃으며 인사를 받겠다는 것이냐?”“웃는다고 지난 일을 잊는 것은 아닙니다.”김태겸은 딸을 한동안 바라봤다.“너를 너무 어리게만 보았구나.”서령은 고개를 저었다.“아버지께서 겪으신 일을 생각하면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내 일 때문에 네 혼례까지 복수의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복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를 외면했던 사람들 때문에 제가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습니다.”김태겸은 더는 말리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진원군은 네 청을 순순히 들어주더냐?”“예. 대신 혼례 준비 비용과 일부 물품을 제게 맡기셨습니다.”“그것이 대가였구나.”“저를 시험하시는 듯했습니다.”“그 사람은 쓸모를 확인하기 전에는 누구도 온전히 믿지 않는다. 며느리가 될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을 게다.”서령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아버지께서는 진원군 대감을 가까이에서 보셨지요. 그분이 무엇을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21. 신부가 고른 손님

    “이 사람들을 모두 부르겠다고?”진원군이 명단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위에는 김태겸이 몰락하자 앞다투어 등을 돌렸던 집안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예.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아 주십시오.”“네 아비가 어려울 때 문전박대하던 자들이다. 혼례까지 찾아와 네 얼굴을 보는 것이 즐겁겠느냐?”“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그들도.”서령의 대답에 진원군의 눈썹이 꿈틀했다.“그런데도 부르겠다는 것이냐?”“그들이 오지 않으면 사람들은 김씨 집안이 여전히 외면받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참석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서령은 명단의 한 이름을 짚었다.“이 사람은 아버지께서 곤경에 처하셨을 때 가장 먼저 왕래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혼례에 와서 축하를 올린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김씨 집안이 다시 일어섰다고 생각하겠지.”“그리고 그 집안을 다시 일으킨 분이 누구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진원군은 서령을 빤히 바라봤다.“나를 치켜세우려고 찾아온 것이냐?”“대감께서 바라시는 일이기도 하지 않습니까?”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진원군은 얼마 전 이휘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왕실의 혼인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고. 서령은 그 뜻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그렇다면 네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겠구나.”진원군은 명단에서 이름 하나를 짚었다.“이자는 네 아비와 등을 진 뒤 내게 찾아와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은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지. 그런데 네 혼례에 초대하면 그가 기꺼이 오겠느냐?”“오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김태겸의 딸 앞에서 지난 일을 떠올려야 할 텐데.”“그렇기에 와야 합니다.”서령은 물러서지 않았다.“그분이 참석하면 아버지를 버린 일을 모두가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석하지 않으면 대감의 초대까지 거절한 사람이 되겠지요.”진원군의 웃음이 사라졌다.서령은 덧붙였다.“그분께 선택을 맡기십시오. 어느 쪽이든 제게 손해는 아닙니다.”진원군은 잠시 침묵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사람을 제법 곤란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20화. 혼례를 서두르는 이유

    진원군이 이휘의 혼례를 앞당기겠다고 밝힌 것은 윤재경에 대한 조사가 조정의 입에 오르내리던 때였다. 세자의 측근을 둘러싼 의혹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진원군은 왕실에 경사가 필요한 시기라며 혼례 날짜를 다시 의논하자고 했다.이휘는 부친의 뜻을 전해 듣고 곧장 찾아갔다. 혼례를 치르는 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해진 일정을 굳이 바꿀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아버님, 서령과의 혼인을 서두르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조정이 어수선하니 그러는 것이다. 나라에 근심이 있다고 왕실의 경사까지 미룰 필요는 없지 않으냐.”“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조용히 치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진원군은 아들의 말을 듣고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너는 혼례를 그저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일로만 여기는구나. 왕실의 혼인은 그보다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이휘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 전까지 세자의 자리를 입에 올리던 사람이었다. 이 혼례에도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혼례를 빌미로 제게 다른 일을 바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진원군의 눈빛이 잠시 차가워졌다.“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안다. 하지만 혼례를 치르는 일까지 의심한다면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이휘는 더 묻지 못했다. 부친은 날짜를 앞당기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혼례 준비를 돕겠다며 사람까지 붙여 주었다.서령에게도 곧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는 혼례가 빨라졌다는 말보다 진원군이 준비에 직접 관여한다는 사실에 더 신경이 쓰였다. 몰락한 김씨 집안의 딸인 자신에게 왕실 혼례를 치를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진원군에게 맡길 생각도 없었다.“혼례에 필요한 물목과 일을 맡을 집안들을 적어 오너라. 빠짐없이 살펴야겠다.”시녀가 가져온 목록에는 예물과 비단을 마련하는 상인들뿐 아니라 혼례 준비를 거들겠다고 나선 관리들의 집안도 적혀 있었다. 서령은 처음에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읽었다. 왕실과 혼인하는 만큼 여러

  • 스턴트우먼 세자빈이 되다.   119화. 증인의 값

    “그날 밤, 자신을 살려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담당 관원이 쪽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자 윤재경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살아 돌아온 경위를 묻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누군가 그날 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윤재경,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재경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행방불명되었던 동안의 기억은 온전하지 않았다. 의식을 잃기 전후의 일도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쪽지를 보낸 자는 자신을 살려 준 사람이 있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소인도 그 뜻을 알지 못하옵니다.” “허면 어찌 그리 놀랐느냐?” “소인조차 알지 못하는 일을 누군가 알고 있는 듯하여 놀랐사옵니다.” 담당 관원은 쪽지를 다시 살폈다. 재경의 대답이 거짓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쪽지를 남긴 자가 실제로 그날의 일을 목격했다면 조사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었다. “증언을 거두겠다는 자를 다시 불러오라.” 잠시 뒤 사내가 끌려왔다. 이름은 박만수였다. 그는 처음 조사에 나섰을 때, 재경이 행방불명되었던 무렵 도성 밖에서 그에게 서찰 한 통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묻자 대답을 흐렸고, 끝내 증언을 거두겠다며 쪽지 한 장을 남겼다. 지금 담당 관원이 읽은 바로 그 쪽지였다. “네가 직접 쓴 것이냐?” “아니옵니다. 어떤 분이 전해 달라 하였사옵니다.” “그자가 누구냐?”“이름은 밝히지 않았사옵니다. 다만 윤재경 나리께 반드시 전하라 하였사옵니다.”담당 관원이 재경을 돌아봤다. 재경은 사내의 얼굴을 살폈지만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의식을 잃었던 시기가 있었으니 그를 만난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서찰을 전한 곳이 어디냐?”“도성 서쪽 산길이옵니다. 윤 나리께서 홀로 계셨사옵니다.”“그대가 나를 알아본 까닭은 무엇이오?”“서찰을 맡긴 분께서 용모와 차림새를 일러주셨사옵니다.”재경은 더 묻지 않았다. 사내가 자신을 알아본 것만으로는 거짓을 밝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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