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진짜 서아가 맞는지."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 말에 답할 때가 아니었다.재경도 더 캐묻지 않았다. 시선은 이미 조용한 집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세 사람은 몸을 낮춘 채 담장을 따라 움직였다.대문 안쪽, 흙바닥에 검붉은 자국이 보였다. 흙에 반쯤 덮여 있었지만 한두 방울이 아니었다."핏자국이에요."채원이 낮게 말했다.자국은 대문 안쪽에서 시작해 담장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세 사람은 소리를 죽인 채 흔적을 따라갔다.담장 끝을 돌아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 순간 재경이 걸음을 멈췄다.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재경이 곧장 달려가 몸을 뒤집었다."정우야."도사의 집을 지켜보던 사람이었다.가슴과 옆구리에 피가 흥건했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재경이 그의 목을 받쳐 들자 사내의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갔다."누가 이랬어."남자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처음에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이운이 몸을 낮췄다."도사는 어디 있느냐."그 말에 남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데려…… 갔습니다.""누가."남자는 피가 섞인 숨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도사뿐만…… 아닙니다."재경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말이야.""처와…… 아이들까지…… 전부……."채원이 도사의 집을 돌아봤다.사람이 없는 이유가 그제야 분명해졌다.도망친 게 아니었다.누군가 가족까지 통째로 데려간 것이다.재경이 다시 물었다."어디로 갔어. 봤을 거 아니야."남자는 대답하려 했지만 숨이 먼저 막혔다. 재경이 다급히 그의 어깨를 붙잡는 순간, 남자의 손이 힘겹게 움직여 이운의 소매를 움켜쥐었다."저하……."이운의 눈빛이 굳었다."말해라.""그자들이……."남자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저하의 이름을…… 말했습니다."정우의 눈이 다시 스르르 감겼다.그 한마디가 골목 안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정우야."재경이 그를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정우는 재경이 몸을 숨긴 뒤 처음으로 곁에 둔 사람이었다."숨은 붙어 있다."재경이 맥을 짚으며 말했다.
"넌 누구냐."두건은 이미 벗겨진 채였다. 낯익은 얼굴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 눈빛만은 낯설었다.재경의 시선이 채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무슨 말을 해도 증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눈물을 보여도, 옛일을 꺼내도, 재경은 믿지 않을 얼굴이었다."오라버니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 모르겠어요."재경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뭘 말해도 안 믿을 거잖아요.""……"재경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그럼 안 궁금한 척이라도 해보시지.""안 궁금한 게 아니라,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아니까 그래요.""그럼 저도 애써 증명하지 않을게요."재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의자 끄는 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렸다.채원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저하는 빠지십시오."이운이 채원 앞을 반쯤 막아섰다."재경아."재경은 대답 대신 창가 쪽으로 몇 걸음 걸었다. 등을 돌린 채였다."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이운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 말이 오히려 낯선 듯한 얼굴이었다.재경이 창턱에 손을 짚고 밖을 내다봤다."어떻게, 왜 저였는지는 지금 물을 만큼 급한 건 아닙니다. 그건 나중에 직접 말씀하신다고 했으니까요.""...때가 되면 말하마."재경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대신 도사 쪽은 제가 계속 쫓겠습니다. 저하와 부딪히지는 않게 하죠.""연락은."이운이 물었다."오늘처럼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을 겁니다.""그거면 됐다."재경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이운의 손에 쥐여줬다. 걸으며 건넨 것이라 종이 끝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도사가 최근 만난 자들 인상착의입니다."이운이 그것을 펼쳐보지도 않고 소매 안에 챙겼다."이걸로 도사 뒤에 누가 있는지 나오면 좋겠군."이운이 나직이 말했다."거기까지 나오면, 귀비 위에 있던 자와 같은 인물인지도 알겠지."재경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그자가 누구든, 이번엔 놓치지 않을 겁니다."채원이 끼어들었다."놓치지 않으려면, 이번엔 서두
밤이 깊어지자 이운은 처소의 나인들을 일찍 물리고, 백건에게도 자신이 부르기 전까지는 누구도 가까이 들이지 말라고 명했다.채원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눈치채고 몇 번이나 이유를 물었지만, 이운은 오늘 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만 남긴 채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누군데 이렇게까지 숨겨요?""살아 있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채원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창밖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고,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채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이운이 전혀 놀라지 않는 것을 본 채원은 두 사람이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사내를 천천히 살폈다."도사는?""아직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최근 열흘 사이 같은 자를 두 번 만났고, 그때마다 돈을 받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사내는 의금부 도사가 돈을 받으면서도 계속 주변을 살폈고 손까지 떨고 있었다며, 스스로 가담한 것인지 협박을 받는 것인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가족은?""처와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집 근처를 맴도는 낯선 자들도 있어 지켜보는 중입니다."이운은 도사를 섣불리 잡으면 그 위에 있는 자가 숨어버릴 수 있다며 감시를 계속하라고 했고, 채원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그런데 그 사람을 언제부터 쫓고 있었어요?"사내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윤정명 대감께 역모의 죄가 씌워졌을 때부터 의금부를 살폈습니다."채원의 표정이 굳자 사내는 당시 증거가 오간 경로와 이번 김태겸의 직인이 움직인 경로를 비교했고, 서로 다른 일인데도 기록이 어긋나는 방식이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고 설명했다."그럼 도사가 그때도 관련돼 있었다는 겁니까?""아직 모릅니다. 같은 자에게 이용당했는지, 처음부터 한패였는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이운은 그 대답에 더 묻지 않고 다음 접촉을 확인하면 즉시 알리라고 했고, 사내는 짧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소매가 조
백건이 물러난 뒤, 침전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채원은 방금 본 문서를 떠올렸다.사흘 전 날짜.김태겸의 이름.그리고 병조판서의 직인.정작 김태겸은 그때 이미 옥에 갇혀 있었다."저하.""왜 그러느냐.""이거, 좀 닮았어요."이운이 채원을 돌아봤다."뭐가.""우리 아버지 때랑요."채원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창고에서 무기가 나오고, 병사 명단까지 나왔잖아요. 누가 봐도 아버지가 역모를 준비한 것처럼."이운의 얼굴이 굳었다."그 병사들 사이에 조필규의 부하들이 섞여 있었지.""네."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때도 진짜처럼 보이는 증거를 만들어서 아버지 이름을 씌웠어요."채원의 시선이 탁자 위 문서로 향했다."이번엔 김태겸이고요."잠시 침묵이 흘렀다.이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닮았다는 것만으로 같은 자의 짓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알아요.""확인해야 한다."이운이 문서를 집어 들었다."이 글씨부터."잠시 후 백건이 다시 들어왔다.손에는 김태겸이 직접 작성했던 문서 몇 장이 들려 있었다."확인했습니다.""말해라.""소집령에 적힌 필체는 김태겸의 것이 아닙니다."채원의 눈빛이 달라졌다."역시.""하지만……."백건이 잠시 말을 멈췄다.이운이 그를 바라봤다."뭐냐.""직인은 진품입니다."이운의 표정이 굳었다."확실한가.""예. 김태겸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사용하던 직인과 대조했습니다. 찍힌 자국이 일치합니다."채원이 탁자 위 문서를 바라봤다.글씨는 가짜.그런데 도장은 진짜였다."그 직인은 지금 어디 있어요?""김태겸이 투옥된 뒤 의금부 봉인고에 보관됐습니다."채원이 곧바로 이운을 바라봤다."그럼 누군가 거기서 꺼내 썼다는 거잖아요."이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봉인고 기록을 가져와라.""예.""직인이 들어간 날부터 지금까지 전부."백건이 다시 물러났다.한 시진쯤 지났을 무렵.백건이 돌아왔다.이번에는 얼굴이 더 굳어 있었다."저하.""찾았느냐.""예.
임금이 쓰러졌다는 소식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궁 밖 종친가에까지 퍼졌다.침전 앞마당에는 문안을 청하는 가마들이 하나둘 늘어서기 시작했다.백건이 그 행렬을 훑어보며 낮게 말했다."종친들이 벌써 몰려들고 있습니다. 다들 문안을 청한다지만…….""속내는 다르겠지."이운이 말을 끊었다.임금이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평소에는 얼굴조차 보기 힘들던 종친들까지 하나둘 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그때 상궁 하나가 다급히 다가왔다."저하, 진원대군 대감께서 오셨습니다."이운의 눈빛이 순간 가라앉았다.채원에게는 낯선 이름이었다.그녀가 백건을 바라보자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전하의 이복동생 되십니다. 종친들 가운데서도 위세가 큰 분이지요."곧 문이 열렸다.후덕한 인상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느긋한 걸음이었다.표정에도 특별한 긴장감은 없었다."저하."진원대군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전하께서 이리되셨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왔습니다. 얼마나 놀라셨습니까.""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부님."이운은 예를 갖췄지만 목소리는 담담했다.진원대군이 뒤를 돌아봤다."이휘야, 인사드려라."그제야 뒤에 서 있던 청년이 앞으로 나왔다.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세자 저하를 뵙습니다."말투도, 표정도 무심했다.이 자리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진원대군이 허허 웃었다."이 아이는 정치에는 통 관심이 없습니다. 활쏘기나 말 타는 것밖에는 모르지요."이휘가 못마땅한 듯 아버지를 힐끗 바라봤다."아버님.""왜. 틀린 말도 아니지 않느냐."진원대군이 웃으며 이운을 바라봤다."그러니 저 녀석이 궁에 들어오는 일도 드뭅니다.""그렇습니까."이운은 짧게 답했다.진원대군이 다시 이휘에게 말했다."인사드렸으면 밖에서 기다리거라.""예."이휘는 군말 없이 물러났다.채원의 시선이 잠시 그의 뒷모습을 따라갔다.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다만 이휘의 얼굴에서는 적어도 권력에
이운과 채원은 곧장 지하 옥사로 향했다.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횃불 몇 개만이 좁은 통로를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앞서 뛰어온 백건이 숨을 몰아쉬며 상황을 전했다."조금 전까지 숨이 끊어질 뻔했습니다. 지금은 의녀가 붙어 있습니다.""누가 발견했나.""당번 옥리입니다. 늦지 않게 끈을 잘랐다고 합니다."이운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임금이 쓰러진 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옥사 안, 귀비는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목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했고, 숨은 붙어 있었지만 의식은 없었다.의녀가 다급히 맥을 짚고 있었다."숨은 붙어 있습니다. 하나 언제 깨어날지는……."이운이 옥리를 향해 돌아섰다."어찌 된 일이냐.""소인이 순찰을 돌던 중 발견했습니다. 창살에 명주끈을 걸고…….""끈은 어디서 났느냐."옥리가 마른침을 삼켰다."저고리 고름을 뜯어 만든 것으로 보였습니다."그 말을 듣던 채원이 귀비 곁에 쪼그려 앉았다.목에 남은 흔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스턴트 현장에서 목을 매다는 장면을 숱하게 만들어봤다. 배우가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화면에서는 진짜처럼 보여야 했다.그러려면 끈이 어디에 걸리고, 몸의 무게가 어느 방향으로 실리는지까지 계산해야 했다.채원의 손이 귀비의 목 가까이에서 멈췄다."이거 이상해요."이운이 곁으로 다가왔다."뭐가.""흔적이 하나가 아니에요."채원이 목에 남은 자국을 가리켰다."이쪽은 끈이 위로 끌려 올라간 흔적이에요. 그런데 그 아래에 다른 자국이 있어요."목을 한 바퀴 두르듯 이어진 짙은 압박 흔적이었다."이건 매달려서 생긴 방향이 아니에요."이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그럼?""누군가 먼저 목을 졸랐을 가능성이 있어요."옥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채원은 곧장 창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끈이 걸려 있던 곳은 귀비의 머리보다 한참 위였다.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팔을 뻗어보았다.손끝이 닿지 않았다.채원이 주위를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