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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감히

Auteur: 이스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7-26 09:00:26

"대답이 없구나."

중전의 목소리가 조용히 방 안을 울렸다.

연화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어려우면 어렵다고 하면 된다."

다그치는 기색도 없었고, 대답을 재촉하는 기색도 없었다.

연화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소인에게 전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하늘 같은 군주이시옵니다."

"소인이 평생 우러러 모셔야 할 분을, 감히 사내로 생각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옵니다."

중전은 연화를 한동안 바라봤다.

"참 바른 아이구나."

연화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칭찬인지, 시험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중전은 찻잔을 손에 들었다.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묻겠다."

"전하께서 너를 여인으로 보신다면."

"그때도 같은 대답을 할 것이냐."

연화는 놀란 얼굴로 중전을 바라봤다.

"마마,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왜 없다고 생각하느냐."

"소인은 그저 궁녀일 뿐이옵니다. 감히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없사옵니다."

중전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신분 때문에?"

"예."

"사람의 마음은 신분을 가리지 않는다."

연화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중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궁은 늘 그렇게 흘러왔다."

"귀한 집 규수와 혼인한 임금도 있었고."

"궁녀를 마음에 품은 임금도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예상 밖에서 시작된다."

연화는 손 끝만 부딪힐 뿐이었다.

진짜 마음이 있다 해도, 솔직할 순 없으니까.

중전은 연화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전하는 너를 보면 자주 웃는다지."

연화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소인도 연유는 모르겠나이다."

"모르는 것이냐."

"예."

"정말?"

연화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은 피식 웃었다.

"그래, 모르는 것이 맞겠구나."

연화는 여전히 대화의 영문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오늘 중전은 꾸짖지도 않았고 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질문만 계속했다.

중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거라."

연화는 깊이 절을 올렸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중전전을 나온 연화는 한동안 복도를 걷기만 했다.

"전하께서 너를 여인으로 보신다면."

중전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연화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승은? 귀찮아."

옛날에 떡을 먹으며 수라간 궁녀들과 했던 대화들이 생각났다.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괜히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손을 잡던 전하.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

연화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미쳤네 내가. 전하는 술기운 때문이셨다."

"분명 그랬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화."

연화가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강녕전 앞이었다.

헌이 마루 끝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연화는 괜히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중전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전하께서 너를 여인으로 보신다면.'

연화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하를 뵙사옵니다."

헌은 그런 연화를 가만히 바라봤다.

"중전전에서 오는 길이냐."

"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

연화는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중전의 말씀을 그대로 전할 수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연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를 함께 마셨사옵니다."

헌은 연화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그것뿐이냐."

"예."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전부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헌은 캐묻는 대신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오너라."

"예?"

"밤차를 마실 시간이다."

연화는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가 마음을 간질였다.

연화는 자신의 뺨을 손등으로 툭 쳤다.

'정신 차리고 차나 얼른 올리자.'

그렇게 다짐하며 강녕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느새 문이 닫히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중전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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