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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술상

Author: 이스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3 09:12:18

밤의 강녕전은 낮과 달랐다.

사람이 오가는 소리도, 마루를 닦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열린 창호 사이로 서늘한 바람만 스며들었다.

연화는 찻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차를 올리겠사옵니다.”

서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던 헌이 고개를 들었다.

낮과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연화는 괜히 손에 힘을 주었다.

밤은 왠지 어색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던 강녕전이 오늘따라 지나치게 조용했다.

연화가 찻상을 내려놓고 잔을 채우려 하자 헌이 서책을 덮었다.

“차도 좋지만 밤도 깊었고 하니.”

연화가 손을 멈췄다.

“술상은 어떻겠느냐?”

“술상이옵니까?”

“그래.”

“지금 말씀이십니까?”

헌이 눈썹을 살짝 들었다.

“밤에 술상을 받는 것이 이상하냐?”

“아니옵니다.”

연화는 곧장 허리를 숙였다.

“곧 준비해 오겠사옵니다.”

방을 나선 연화는 찻상을 든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어쩐지 시작부터 예상과 달랐다.

밤차를 맡으라고 하기에 그저 차를 올리고 물러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첫날부터 술상이라니.

‘전하께서 원래 밤마다 술을 드셨나?’

그렇다면 왜 굳이 자신을 불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연화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수라간으로 향했다.

술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맑은 술 한 병과 잔 두 개, 가볍게 곁들일 안주가 상 위에 놓였다.

연화가 다시 강녕전으로 돌아왔을 때 헌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서책을 펼쳐 놓았지만 읽고 있지는 않았다.

“술상을 들였사옵니다.”

“이리 놓아라.”

연화는 헌 앞에 상을 내려놓았다.

술병을 들어 잔을 채우자 맑은 술이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흘러들었다.

헌은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연화의 눈이 커졌다.

‘한 번에?’

잔이 내려놓이자 연화는 다시 술을 따랐다.

두 번째 잔도 빠르게 비워졌다.

세 번째 잔을 채우려던 연화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전하.”

“왜 그러느냐.”

“너무 빨리 드시는 것 아니옵니까?”

헌이 잔을 내려다봤다.

“빠르냐?”

“예.”

“평소에도 이 정도는 마신다.”

“그러시옵니까?”

연화는 못 미더운 얼굴로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안주를 먼저 드시는 편이 좋겠사옵니다.”

“내가 술 마시는 법까지 네게 배워야 하느냐?”

“배우시라는 뜻은 아니옵니다.”

“그럼?”

연화는 안주가 놓인 접시를 헌 쪽으로 밀었다.

“건강 챙기시라는 의미였사옵니다.”

헌의 손이 멈췄다.

연화는 제 말이 지나쳤나 싶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헌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잔을 내려놓고 안주 하나를 집었다.

“되었느냐?”

연화의 얼굴이 밝아졌다.

“예.”

“참 까다롭구나.”

“전하의 건강을 살피는 일이 어찌 까다로운 일이겠사옵니까.”

헌은 대꾸하지 않고 안주를 입에 넣었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연화는 그제야 안심하고 술병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잔을 절반만 채웠다.

헌이 잔을 바라봤다.

“왜 반만 따르느냐.”

“천천히 드시라고 그러하였사옵니다.”

“내 잔인데.”

“술은 제가 따르고 있지 않사옵니까.”

헌은 어이없다는 듯 연화를 바라봤다.

연화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헌이 먼저 잔을 들었다.

“고집도 세구나.”

“그리 말씀하시는 분을 한 분 더 알고 있사옵니다.”

“누구냐.”

연화는 잔을 든 헌을 바라봤다.

“전하이옵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연화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정말 지나친 것 같았다.

하지만 헌은 잔을 입가에 댄 채 웃음을 흘렸다.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너뿐일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송구하다는 얼굴은 아니구나.”

연화는 입가를 손으로 눌렀다.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헌은 남은 술을 마시고 빈 잔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너도 한 잔 받아라.”

연화는 너무 놀라 바로 대답해버렸다.

“소인이 말씀이옵니까?”

“이 방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느냐.”

“소인은 술을 잘하지 못하옵니다.”

“어느 정도로 못하느냐.”

“마시지 않는 편이 나을 정도로 못하옵니다.”

“한 잔도?”

“예.”

헌은 빈 잔 하나를 연화 앞으로 밀었다.

“확인해 봐야겠구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정말 한 잔도 못 마시는지.”

연화가 잔을 슬쩍 뒤로 밀었다.

“확인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헌이 다시 앞으로 밀었다.

“받아라.”

“괜찮사옵니다.”

“명이다.”

연화의 손이 멈췄다.

명이라는 말까지 나오면 거절하기 어려웠다.

연화는 결국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맑은 술에서는 은은한 향이 올라왔다.

‘정말 마셔야 하나.’

잔을 바라보던 연화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에 가져갔다.

딱 한 모금이었다.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콜록!”

연화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기침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콜록, 콜록.”

“괜찮으냐?”

헌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연화는 손을 저었다.

“괜찮사옵니다. 송, 송구하옵니다.”

헌은 연화의 붉어진 얼굴을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정말 못 마시는구나.”

“그렇다고 말씀드렸지 않사옵니까.”

“너같이 힘 센 애가 술 한 모금에 이리될 줄은 몰랐다.”

연화는 손등으로 뺨을 눌렀다.

열이 오른 얼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방 안이 더운 것뿐이옵니다.”

“그래.”

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창 쪽을 돌아봤다.

“창을 더 열어 주랴?”

“그 정도는 아니옵니다.”

“덥다며.”

“이제 괜찮아졌사옵니다.”

“금세?”

“예.”

헌이 다시 웃었다.

연화는 괜히 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피했다.

“전하께서는 사람을 놀리는 것을 좋아하시옵니까?”

“아무나 놀리지는 않는다.”

“그럼 누구를 놀리시옵니까?”

헌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술잔을 들어 연화를 바라봤다.

“반응이 재미있는 사람.”

연화는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깨닫고 입술을 다물었다.

헌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웃음을 감췄다.

술상 위로 한동안 말이 오가지 않았다.

촛불이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연화는 빈 접시를 하나씩 정리했다.

헌의 술 마시는 속도는 처음보다 느려져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경이 쓰였다.

평소와 달리 그의 시선이 자주 자신에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연화가 술병에 손을 뻗자 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화.”

“예, 전하.”

“왜 밤차를 맡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연화의 손이 멈췄다.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아침에도 차를 올리고 있는데 굳이 밤까지 자신을 부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조금은 궁금하옵니다.”

“조금?”

“많이 궁금하옵니다.”

솔직한 대답에 헌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런데 왜 묻지 않았느냐.”

“명을 받은 사람이 이유까지 묻는 것은 도리가 아닌 듯하여 그랬사옵니다.”

“내가 말해 준다면?”

연화는 헌을 바라봤다.

“귀 기울이겠나이다.”

헌은 잔을 손끝으로 돌렸다.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눈빛이 느슨했다.

“낮에는 네가 너무 바쁘더구나.”

“소인이 말씀이옵니까?”

“누가 부르면 그곳으로 가고, 심부름이 생기면 또 사라지고.”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궁녀의 일이었다.

“밤에는 덜 바쁘지 않으냐.”

“그렇기는 하옵니다.”

헌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 밤에 부른 것이다.”

연화는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라면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되었다. 강녕전에는 차를 올릴 궁녀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도 헌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연화도 다시 묻지는 못했다.

괜히 얼굴의 열이 더 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 술상을 물리겠사옵니다.”

연화는 빈 접시를 모으며 일어섰다.

더 앉아 있다가는 술을 한 잔밖에 마시지 않고도 취해 버릴 것 같았다.

상 끝에 놓인 잔을 집으려 몸을 기울인 순간이었다.

“연화.”

“예?”

“가까이 오너라.”

연화는 멈칫했다.

이미 술상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소인은 이미 가까이 있사옵니다.”

“조금 더.”

헌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연화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다.

“이 정도면 되옵니까?”

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연화의 얼굴을 바라봤다.

연화는 괜히 눈을 피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었다.

“전하?”

헌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연화의 어깨가 굳었다.

그의 손끝이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왜 이리 가까이 오시지?’

헌의 손이 뺨 근처에서 멈췄다.

“머리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묻었다.”

연화는 제 머리 위를 올려다보려 했지만 보일 리 없었다.

“어디에 말씀이십니까?”

헌의 손끝이 다시 움직였다.

연화의 귓가를 스칠 듯 가까워졌다.

얼굴을 스치는 술 향기에 연화의 숨이 멎었다.

‘가깝다.’

너무 가까웠다.

헌의 손끝이 머리카락에 닿으려는 순간.

연화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손목을 낚아챘다.

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연화는 잡은 손목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반대편 발이 앞으로 나간 뒤였다.

허리가 돌아갔다.

헌의 몸이 연화의 어깨 위로 떠올랐다.

“……!”

그제야 연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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