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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or: 코코넛 서고
단은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자고로 상인은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했다.

그녀가 가장 싫은 것이 상인의 딸이라는 신분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의 외모와 학식으로 진작에 상왕부의 안주인이 되었고 멍청한 서인경에게 왕비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속내가 들킬 위기에 처하자 단은설은 곧바로 태세를 바꿔 눈물을 쏟았다.

“왕비께서도 세간의 사람들처럼 상인 가문을 천하다 생각하시는군요. 소녀가 괜히 오지랖을 부린 것 같습니다. 소녀는 단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상대도 소녀를 진심으로 대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다 소녀의 착각이었나 봅니다….”

‘쳇, 연기는 끝내주네. 하지만 이 몸에 빙의하기 전에 난 황제의 여인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왔다 이 말씀이야.’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당연히 상대도 진심으로 너를 대하겠지. 그러나 얄팍한 속임수를 진심으로 가장해서 상대에게 접근한다면 벼락 맞아 죽어도 싸지!”

“서인경!”

단은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내가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사람에게 그리 각박하게 대하는 버릇은 대체 어디서 배운 것이냐?”

단은설은 이때다 싶었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왕야, 인경이에게 너무 뭐라 하시지 마십시오.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인경이가 기분이 안 좋은 거겠죠. 다만… 저는 제가 뭘 잘못 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서인경은 황제의 여인 여주인공이 흑화할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허리를 곧게 폈다.

“어디 상왕비의 존함을 너 따위가 입에 담는 것이냐?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에 또 불경한 태도를 보이면 엄하게 처벌하겠다.”

단은설에게 경고를 날린 서인경은 고개를 돌려 연기준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저에게 교양이 없다고 하십시오. 각박하다는 표현은 상대를 보아가면서 하는 것이지요. 존중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에게는 기어오를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는 법입니다.”

소문 속 서인경처럼 각박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다만 쓰레기들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비웃듯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연기준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서인경, 내 평소 너에게 너무 관대했던 것 같구나.”

마치 아비가 철없는 자식을 꾸중하는 듯한 말투였다.

서인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더 관대해지셔도 좋습니다. 조금 전 했던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조금 전 부탁이면 이혼?’

한 번도 누구에게 이런 욕설을 들어본 적 없는 상왕이었다.

단은설도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눈물을 흘렸다.

“왕비께선 누군가의 이간질을 듣고 저를 오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 뵙고 해명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울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원주인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서인경은 단씨 가문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상왕비의 자리 정도로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단씨 가문은 더 큰 것을 바라고 있었다.

‘두고 보자.’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등 뒤에 있는 연기준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화리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기준은 미련없이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내 관심을 사려고 별 짓을 다하는구나. 가장 친하게 지내던 언니에게마저 등을 돌리다니!’

소문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상왕과 상왕비가 이혼 얘기까지 나왔다는 소문은 반나절도 안 되어 온 경성에 퍼지게 되었다.

누군가는 상왕과 맹가의 소저가 밀회를 하다가 왕비에게 들켰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상왕과 상왕비의 측근이 몰래 정을 나누었다고 말했다.

어느 쪽이든 늘 소란을 몰고 다니던 상왕비가 또 한 건 했다는 내용이었다.

상왕비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이혼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소동으로 인해 상왕부의 체면이 깎인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또 어떤 소란이 벌어질지 기대하고 있었다.

그 시각, 상왕부.

서인경은 바깥에 퍼진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잠시는 지켜볼 생각으로 연기준의 서재를 찾았다.

그녀가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반 시진 후,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시종이 안으로 들어오며 단은설이 왔다고 알렸다.

서인경은 귀찮은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냥 돌려보내거라. 문지기한테는 앞으로 단은설을 절대 상왕부에 들이지 말라고 전하고.”

잠시 후, 나갔던 시종이 다시 돌아왔다.

“왕비마마, 왕야께서 오셨습니다.”

서인경이 고개를 들자, 정원으로 들어오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오후에 황궁에 다녀오는 길인지, 자색 관복을 입고 있었다.

늠름한 그의 뒤로 후광이 비추듯, 석양이 그를 비춰주고 있었다.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얼굴만 아니었다면 참으로 희대의 미남자라 칭할 수 있었다.

그는 서인경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내 서재로 가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서인경은 그네에 탄 채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최대한 번체로 열심히 썼고 왕야처럼 똑똑하신 분이라면 알아보지 못했을 리는 없는데 왜 굳이 저에게 물으시는 겁니까?”

번체가 뭔지도 모르는 연기준이지만 비웃음이 가득 담긴 그 말을 알아듣는데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번쩍 치켜들고 화리서를 서인경의 얼굴에 던졌다.

“수작 좀 작작 부리거라.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으니.”

화리서를 집어든 서인경은 그의 서명이 없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

“어차피 저를 마음에 두지도 않으실 거면서 좋게 갈라서면 안 되는 것입니까?”

‘난 그쪽이랑 살기 싫단 말이야!’

연기준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

“좋게 갈라선다라! 네가 원하면 폐하께 찾아가서 혼인을 시켜달라 조르고 네가 싫증이 났다고 하면 내가 순순히 화리서에 서명을 해야 하는 것이냐? 날 대체 뭐로 보고!”

원주인이 한 행동이 있었기에 서인경도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합의된 이혼이 싫으시다면 휴서(休書: 고대에 혼인한 사내가 처를 집안에서 내쫓을 시 쓰는 문서)를 써서 저를 내쫓으셔도 됩니다. 그러면 왕야의 마음도 조금 편해지겠습니까?”

연기준은 싸늘한 얼굴로 대꾸했다.

“꿈도 꾸지 말거라.”

떠나기 전, 연기준은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앞으로 왕비가 내 서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거라.”

이혼 계획이 실패하자 서인경은 그네에 앉아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이혼도 이혼이지만 갑자기 고대로 타임슬립해서 고대 여인에게 빙의된 이 상황이 더 막막했다.

‘남들은 타임슬립하면 치트키 하나쯤은 가지고 온다던데….’

그녀는 조용히 품에서 자색 병 하나를 꺼냈다.

이는 그녀가 타임슬립하기 전에 몸에 지니고 있던 거였다.

안에 든 것은 21세기의 서인경이 교수님과 함께 제조한 해독제였다.

‘열 알밖에 없으니… 아껴 써야겠지? 그런데 이걸 어디에 쓰지?’

그녀는 언젠가는 쓰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약병을 도로 품에 넣었다.

서인경은 문전박대를 당하면 단은설도 좀 조용히 지낼 줄 알았는데 그런 기대는 바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날 저녁 식사 후, 시종이 급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왕비마마, 단 소저와 단 부인께서 찾아오셨으니 속히 오시라는 왕야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단은설이 또?’

서인경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데 나는 왜 부르지? 만나고 싶으면 왕야 혼자 만나면 되는데.”

어린 시종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간청하듯 말했다.

“어서 가보셔요, 마마. 굳이 이상한 사람들이 머리위로 기어오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서인경은 고개를 들고 흥미롭다는 듯이 시종을 바라보았다.

평이라고 하는 이 시종은 어제 새로 그녀의 처소로 오게 된 사람이었는데 일만 열심히 하고 겁은 많은 아이라 생각했는데 겉모습은 그래도 뚝심은 있는 아이로 보였다.

서인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상왕비로 있는 한, 누가 내 머리 위로 기어오르는 것은 못 참지.”

그렇게 그녀가 왕부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뻔뻔한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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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거슬러   제902화

    그 무렵,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온 후궁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황제는 벽돌 하나, 기와 한 장도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듯 후궁을 거의 뒤엎다시피 뒤지고 있었다.그 와중에 서인경은 연기준의 품에 안겨 오랜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잤다.하늘이 환해지고 밖에서 갑옷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들려오자 서인경은 화들짝 눈을 떴다.“들킨 겁니까?”연기준은 그녀를 다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못 들어온다.”후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곳은 금기된 땅이라는 것을.태황태후의 명이 없이 감히 발을 들인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과연 잠시 뒤,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공기는 다시 고요해졌다. 희끗해진 하늘빛을 보던 서인경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우리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합니까?”연기준은 그녀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감아 돌리며 나른하게 웃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둘만의 시간을 좀 더 즐기면 안 되는 것이냐?”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서인경은 지금 상황에서 그가 정말 그런 여유를 부릴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연기준이 낮게 웃었다.“오늘 밤에 움직일 것이다. 황제를 끌어내리고 열셋 째 황자를 올리려 하는 데 어떠느냐?”피로 얼룩질 수밖에 없는 왕위 쟁탈전을 그는 마치 산책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서인경은 잠시 생각했다.“대황자가 황제가 된다면 저희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연무성은 너무 어려 황제가 된다고 해도 버티기 힘들겠지요. 그렇다면 열셋 째 황자가 그나마 나은 선택이긴 하지만 그 아이의 성품이 어떤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연기준은 그녀의 머리끝을 손바닥에 굴리며 말했다.“성품이 어떻든 상관없다. 내가 올릴 수 있으면 다시 끌어내릴 수도 있거든.”그 말에 담긴 자신감은 허세가 아니었다. 서인경 역시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열셋 째 황자가 최선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다만 조정이 뒤집히는 순간마다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여왔다는 사실을

  • 시간을 거슬러   제901화

    하지만 상왕비를 굳이 가둔 것은 황후로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가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그녀조차 갈피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상왕은 야랑국에서 죽었고 야랑국의 적통인 팔황자는 진국에서 죽었다. 그런데 열셋 째 황자는 느닷없이 호국호민의 영웅이 되어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황후는 늘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예감. 이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일 리 없었고 마치 누군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짜 놓은 판처럼 보였다. 만약 정말 그 뒤에 조종자가 있다면 지금은 결코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황후는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자. 산 위에 앉아 호랑이들이 싸우는 것을 관망하는 수밖에.이미 황후는 궁 밖으로 사람을 보내 대황자와 하선준 가문에 전갈을 전해 두었다. 요즘은 괜히 나서지 말고 조용히 지내며 절대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말이다.그런데 뜻밖에도 황제의 한 장 조서가 다시 그녀를 무대 앞으로 끌어냈다.태감이 조서를 읽고 나서 공손히 황후 앞에 섰다.“황후 마마,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금수 대장공주께서 후궁 생활이 지루하시다 하여 황후 마마더러 직접 모시고 궁 밖으로 나가 바람도 쐬고 겸사겸사 변복하고 민정을 살펴보라 하셨습니다.”황후는 나라의 어머니답게 단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알겠다. 물러가거라.”“예.”태감이 물러난 뒤 황후는 고개를 돌려 궁녀에게 물었다.“어젯밤 냉궁에서 있었던 일, 특히 금수 대장공주와 관련된 부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보거라.”궁녀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침에 들은 소문을 신이 나서 풀어놓았다.“냉궁에서 다섯 구의 시신이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어른, 하나는 아이였는데 아이 쪽은 열다섯 째 황자로 확인되었습니다. 몸에서 떨어진 옥패가 증거였고 신비와 금수 대장공주도 직접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폐하께서 열다섯 째 황자를 말리려다

  • 시간을 거슬러   제900화

    시신이 금수 대장공주 앞을 지나갈 때, 그녀는 뒤에 서 있던 시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시녀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한바탕 벌어진 대화재는 황제의 입에서 손쉽게 사고로 규정되었다.그날 새벽, 금위군은 후궁 전역을 샅샅이 수색했다.후궁에서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열다섯 째 황자가 냉궁에 잘못 들어갔다가 불운하게 불에 타 죽었다는 것. 그런데도 황제가 무엇을 찾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한순간에 궁 전체가 불안에 휩싸였다. 사람마다 얼굴이 굳었고 어디서든 긴장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열다섯 째 황자의 죽음을 두고 후궁에는 탄식이 가득했다.“후궁에서 어미 없는 아이는 오래 못 산다더니 과연 그렇구나.”“신 황귀비께서 아이에게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 애가 스스로 냉궁에 간 거 아니겠느냐?”이런 소문이 신 황귀비의 침전에까지 전해졌을 때, 마침 황제의 조서도 함께 도착했다. 황귀비 작호를 박탈하고 귀비로 강등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반성하며 석 달간 외출을 금하라는 명도 전해졌다.한때 가장 총애받던 궁전은 순식간에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겼다. 사람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궁녀는 분노에 차 컵을 집어 던질 뻔했다.“밖에서 떠드는 건 전부 개소리예요! 우리 마마가 열다섯 째 황자에게 쏟은 정성은 열일곱 째 황자와 열여덟 째 공주보다도 훨씬 컸는데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입만 살아서 떠들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들 입이 썩고 배가 터질 거예요!”신 황귀비는 웃으며 그녀를 내보냈다.“사람들 말이야 마음대로 하게 두거라. 우리만 떳떳하면 그만이지. 어서 가서 차 한 잔 다시 끓여 오너라. 이 잔이랑 주전자는 값비싼 거니까 조심하고.”궁녀는 입을 삐죽이며 주인이 너무 착하다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나갔다.그때 운 유모가 작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신 황귀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숙 언니만 세간의 헛소문을 믿지 않으시면 돼요.”운 유모는 그녀 옆에 앉았다.“저는 당연히 믿지 않습니다.

  • 시간을 거슬러   제899화

    신 황귀비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거의 후궁 전체가 다 들을 만큼 요란해졌다.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소란에 잠에서 깬 궁인들과 후궁들이 하나둘씩 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다.황제는 분노로 관자놀이의 핏줄이 불거졌다.“그만하거라!”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이게 무슨 소란이냐?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냐?”황제가 미처 막기도 전에 사람들 사이가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 금수 대장공주가 망토를 걸친 채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본궁이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쪽이 시끄러워서 깼다. 두 후궁이 밤중에 질투 싸움이라도 벌인 줄 알았더니 황제와 신 황귀비였느냐? 두 사람은 또 무슨 연극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냐?”말을 하며 금수 대장공주의 시선이 바닥에 놓인 다섯 구의 시신으로 옮겨갔다.그녀는 일부러 놀란 듯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입을 가렸다.“어머, 사람이 죽었구나?”목소리는 과장됐고 표정은 지나치게 연극적이었다. 전장을 누비며 수없이 사람을 죽여 본 인물치고는 반응이 너무 요란했다.황제는 알고 있었다. 이 황고모는 또 구경꾼처럼 끼어들어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이 일은 황제가 조금도 외국 세력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그는 급히 다가가 금수 대장공주의 팔을 붙잡았다.“황고모를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짐의 잘못입니다.””어서 황고모를 모셔 돌아가 쉬시게 하거라. 누구든 다시 황고모를 번거롭게 하면 곤장으로 다스린다!”내시가 막 다가가 부축하려는 순간, 금수 대장공주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방금 신 황귀비가 한 말을 들었다. 저 아이가 열다섯 째 황자라며? 저 옥패, 본궁도 며칠 전에 그 아이가 차고 있는 걸 봤거든. 그럼 옆에 있는 건 누구냐?”황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열다섯 째가 장난삼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우연히 화재를 만난 것입니다. 옆에 있는 건 아마 그를 말리려다 함께 불에 휩싸인 궁녀일 거예요. 사람을 보내 어느 궁에서 궁녀가 사라졌는지 조사하고

  • 시간을 거슬러   제898화

    냉궁 밖.황제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서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얼음처럼 차갑고 섬뜩했다. 반경 십 미터 안에는 측근 내시들 외에는 누구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그는 눈앞에서 새까맣게 탄, 크고 작은 두 구의 시신이 잿더미 속에서 끌려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함께 타버린 네 마리 악어의 시체 조각까지 들려 나왔다.황제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말도 안 된다! 안에는 강물이 있지 않았느냐? 그렇게 물이 많았는데 어떻게 불이 날 수 있단 말이냐!”내시는 몸을 떨며 아뢰었다.“폐하, 신도 이유를 알지 못하옵니다. 불이 나기 직전, 안에 있던 물이 갑자기 전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악어 네 마리도 전부 타 죽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사라졌다?황제는 선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안의 물과 악어는 모두 연강호가 설산에서 함께 데려온 것이라고.겉보기엔 고인 죽은 물 같았지만 백 년이 지나도록 마르지도 않았고 썩지도 않았다. 보통 물이었다면 악어는 진작 죽었을 터였다.그렇다면 신비로운 설산의 물도 불에는 약한 것일까? 불을 만나면 그대로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황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물은 이미 서인경이 전부 약왕곡으로 옮겨 버렸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에도 네 마리 악어는 그 안에서 신나게 날뛰고 있었다.내시의 보고를 들을수록 황제의 분노는 더욱 치밀었다.“금위군은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 왜 첫 순간에 이곳을 봉쇄하지 않았느냐!”금위군 통솔자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냉궁은 본래 신의 관할 구역이 아니 옵니다. 폐하의 명이 없이는 감히 직무를 이탈할 수 없었사옵니다.”쿵!황제는 발길질로 그의 어깨를 세게 걷어찼다.“너희는 머리 달린 시체냐? 이 정도 융통성도 없어서야! 짐이 너희를 둔 게 무슨 소용이냐!”통솔자는 억울했지만 땅에 엎드린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때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열다섯 째 황자! 혹시 그 아이인 것이냐?”“신 황귀비 마마

  • 시간을 거슬러   제897화

    희태비는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서인경의 마음속에서 그녀에 대한 존경은 더욱 깊어졌다.“그럼 태황태후께서 계속 어머님을 견제한 것도 혹시 어머님과 그 시녀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 아닐까요?”연기준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닐 거야. 태황태후께서 알았다면 이곳을 이렇게 오랫동안 두려워하지도 않았겠지. 그녀가 모비를 싫어한 건 단순해. 그녀는 열셋 째 황숙에게 수많은 귀족 규수를 소개했지만 황숙 눈에는 늘 모비밖에 없었거든. 태황태후 눈에 모비는 나라를 망치는 요물 같은 존재였지. 열셋 째 황숙의 마음을 완전히 끊어내려고 한때는 그를 후궁 지하 밀실에 가둬 두고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모비를 잊게 만들려고 말이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황숙은 그 밀실에서 나온 뒤로 다시는 모비를 찾지 않았고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서인경은 조용히 듣다가 문득 자신이 단은설의 침전 밀실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급히 품속에서 반달 모양의 옥패를 꺼냈다. 옥패에는 포효하며 달려가는 호랑이가 새겨져 있었다.달빛이 비쳐 서인경의 손바닥을 환하게 밝혔다.연기준의 시선이 옥패에 멈췄고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서인경은 옥패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이거 압니까? 단은설 밀실에서 발견한 겁니다. 혹시 그 밀실이 예전에 열셋 째 황숙을 가둬 두었던 곳이 아니었을까요?”그 안에 있던 형구들을 떠올리자 서인경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태황태후가 아무리 미쳐 있었다 해도 설마 친아들에게까지 형벌을 가했을까?연기준은 옥패를 받아 달빛 아래서 한 번 더 살폈다. 확인한 뒤 그는 그것을 단단히 손에 쥐었다.서인경은 그의 반응이 이상해 보여 물었다.“이걸 압니까?”연기준의 검은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성조 선제 때, 흑갑군이라는 비밀 군대가 있었다. 오직 연 씨 황실에만 충성하는 군대지. 이건 그 흑갑군을 움직이는 호부다. 대대로 진국 황제에게만 전해졌고 오직 역대 황제만이 병권을 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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