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강시아
단은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자고로 상인은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했다.

그녀가 가장 싫은 것이 상인의 딸이라는 신분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의 외모와 학식으로 진작에 상왕부의 안주인이 되었고 멍청한 서인경에게 왕비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속내가 들킬 위기에 처하자 단은설은 곧바로 태세를 바꿔 눈물을 쏟았다.

“왕비께서도 세간의 사람들처럼 상인 가문을 천하다 생각하시는군요. 소녀가 괜히 오지랖을 부린 것 같습니다. 소녀는 단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상대도 소녀를 진심으로 대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다 소녀의 착각이었나 봅니다….”

‘쳇, 연기는 끝내주네. 하지만 이 몸에 빙의하기 전에 난 황제의 여인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왔다 이 말씀이야.’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당연히 상대도 진심으로 너를 대하겠지. 그러나 얄팍한 속임수를 진심으로 가장해서 상대에게 접근한다면 벼락 맞아 죽어도 싸지!”

“서인경!”

단은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내가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사람에게 그리 각박하게 대하는 버릇은 대체 어디서 배운 것이냐?”

단은설은 이때다 싶었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왕야, 인경이에게 너무 뭐라 하시지 마십시오.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인경이가 기분이 안 좋은 거겠죠. 다만… 저는 제가 뭘 잘못 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서인경은 황제의 여인 여주인공이 흑화할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허리를 곧게 폈다.

“어디 상왕비의 존함을 너 따위가 입에 담는 것이냐?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에 또 불경한 태도를 보이면 엄하게 처벌하겠다.”

단은설에게 경고를 날린 서인경은 고개를 돌려 연기준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저에게 교양이 없다고 하십시오. 각박하다는 표현은 상대를 보아가면서 하는 것이지요. 존중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에게는 기어오를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는 법입니다.”

소문 속 서인경처럼 각박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다만 쓰레기들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비웃듯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연기준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서인경, 내 평소 너에게 너무 관대했던 것 같구나.”

마치 아비가 철없는 자식을 꾸중하는 듯한 말투였다.

서인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더 관대해지셔도 좋습니다. 조금 전 했던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조금 전 부탁이면 이혼?’

한 번도 누구에게 이런 욕설을 들어본 적 없는 상왕이었다.

단은설도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눈물을 흘렸다.

“왕비께선 누군가의 이간질을 듣고 저를 오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 뵙고 해명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울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원주인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서인경은 단씨 가문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상왕비의 자리 정도로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단씨 가문은 더 큰 것을 바라고 있었다.

‘두고 보자.’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등 뒤에 있는 연기준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이혼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기준은 미련없이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내 관심을 사려고 별 짓을 다하는구나. 가장 친하게 지내던 언니에게마저 등을 돌리다니!’

소문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상왕과 상왕비가 이혼 얘기까지 나왔다는 소문은 반나절도 안 되어 온 경성에 퍼지게 되었다.

누군가는 상왕과 맹가의 소저가 밀회를 하다가 왕비에게 들켰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상왕과 상왕비의 측근이 몰래 정을 나누었다고 말했다.

어느 쪽이든 늘 소란을 몰고 다니던 상왕비가 또 한 건 했다는 내용이었다.

상왕비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이혼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소동으로 인해 상왕부의 체면이 깎인 것은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또 어떤 소란이 벌어질지 기대하고 있었다.

그 시각, 상왕부.

서인경은 바깥에 퍼진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잠시는 지켜볼 생각으로 연기준의 서재를 찾았다.

그녀가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반 시진 후,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시종이 안으로 들어오며 단은설이 왔다고 알렸다.

서인경은 귀찮은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냥 돌려보내거라. 문지기한테는 앞으로 단은설을 절대 상왕부에 들이지 말라고 전하고.”

잠시 후, 나갔던 시종이 다시 돌아왔다.

“왕비마마, 왕야께서 오셨습니다.”

서인경이 고개를 들자, 정원으로 들어오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오후에 황궁에 다녀오는 길인지, 자색 관복을 입고 있었다.

늠름한 그의 뒤로 후광이 비추듯, 석양이 그를 비춰주고 있었다.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얼굴만 아니었다면 참으로 희대의 미남자라 칭할 수 있었다.

그는 서인경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내 서재로 가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서인경은 그네에 탄 채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최대한 번체로 열심히 썼고 왕야처럼 똑똑하신 분이라면 알아보지 못했을 리는 없는데 왜 굳이 저에게 물으시는 겁니까?”

번체가 뭔지도 모르는 연기준이지만 비웃음이 가득 담긴 그 말을 알아듣는데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번쩍 치켜들고 이혼서를 서인경의 얼굴에 던졌다.

“수작 좀 작작 부리거라.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으니.”

이혼서를 집어든 서인경은 그의 서명이 없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

“어차피 저를 마음에 두지도 않으실 거면서 좋게 갈라서면 안 되는 것입니까?”

‘난 그쪽이랑 살기 싫단 말이야!’

연기준의 눈빛이 음침하게 변했다.

“좋게 갈라선다라! 네가 원하면 폐하께 찾아가서 혼인을 시켜달라 조르고 네가 싫증이 났다고 하면 내가 순순히 이혼서에 서명을 해야 하는 것이냐? 날 대체 뭐로 보고!”

원주인이 한 행동이 있었기에 서인경도 그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합의된 이혼이 싫으시다면 휴서(休書: 고대에 혼인한 사내가 처를 집안에서 내쫓을 시 쓰는 문서)를 써서 저를 내쫓으셔도 됩니다. 그러면 왕야의 마음도 조금 편해지겠습니까?”

연기준은 싸늘한 얼굴로 대꾸했다.

“꿈도 꾸지 말거라.”

떠나기 전, 연기준은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앞으로 왕비가 내 서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거라.”

이혼 계획이 실패하자 서인경은 그네에 앉아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이혼도 이혼이지만 갑자기 고대로 타임슬립해서 고대 여인에게 빙의된 이 상황이 더 막막했다.

‘남들은 타임슬립하면 치트키 하나쯤은 가지고 온다던데….’

그녀는 조용히 품에서 자색 병 하나를 꺼냈다.

이는 그녀가 타임슬립하기 전에 몸에 지니고 있던 거였다.

안에 든 것은 21세기의 서인경이 교수님과 함께 제조한 해독제였다.

‘열 알밖에 없으니… 아껴 써야겠지? 그런데 이걸 어디에 쓰지?’

그녀는 언젠가는 쓰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약병을 도로 품에 넣었다.

서인경은 문전박대를 당하면 단은설도 좀 조용히 지낼 줄 알았는데 그런 기대는 바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날 저녁 식사 후, 시종이 급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왕비마마, 단 소저와 단 부인께서 찾아오셨으니 속히 오시라는 왕야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단은설이 또?’

서인경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데 나는 왜 부르지? 만나고 싶으면 왕야 혼자 만나면 되는데.”

어린 시종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간청하듯 말했다.

“어서 가보셔요, 마마. 굳이 이상한 사람들이 머리위로 기어오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서인경은 고개를 들고 흥미롭다는 듯이 시종을 바라보았다.

평이라고 하는 이 시종은 어제 새로 그녀의 처소로 오게 된 사람이었는데 일만 열심히 하고 겁은 많은 아이라 생각했는데 겉모습은 그래도 뚝심은 있는 아이로 보였다.

서인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상왕비로 있는 한, 누가 내 머리 위로 기어오르는 것은 못 참지.”

그렇게 그녀가 왕부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뻔뻔한 소리가 들려왔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시간을 거슬러   제100화

    연기준은 가녀린 그녀의 체구를 훑어보며 물었다.“그걸 다 먹는다고?”서인경은 빈 식탁을 찾아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왕야도 드셔야지 않습니까. 어제 그렇게 수고하신 걸 봐서 제가 사겠습니다.”그녀의 답에 연기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혼인하고 지금까지 두 사람이 같이 외출한 것도, 이렇게 소박한 노점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연기준은 조용히 자리를 찾아 앉았다.서인경은 점주에게 만두국에 국물은 적게, 대파는 넣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대파를 먹지 않는 연기준은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자리에 돌아온 서인경이 그에게 말했다.“저기 길목 입구에서 고기 만두를 파는 곳이 있던데 그거 좀 사다주십시오.”연기준은 미동도 하지 않고 답했다.“두 그릇은 네가 먹거라. 난 한 그릇으로 충분하니.”서인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안 그래도 두 그릇이나 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가 지금 너무 배가 고픈 상태거든요.”연기준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고작 그 정도로 지쳤느냐? 많이 먹긴 먹어야겠어. 그래야 체력이 오르지.”서인경이 버럭 화를 내려던 순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동전이 없어.”아주 당당한 말투였다.서인경은 못 믿겠다는 듯이 대꾸했다.“고기만두 하나에 동전 한 잎인데 그것도 없어요?”연기준이 답했다.“난 외출할 때 동전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그 옆엔 늘 연풍이 따라다녔으니 굳이 은화나 동전을 챙길 이유가 없었다.서인경은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연기준은 잽싸게 그것을 잡고는 어이없어 웃음을 터뜨렸다.어쩐지 서인경이 왜 돈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게다가 만두 하나에 동전 한 잎인데 심부름 값도 보태주지 않은 것이 괘씸하기도 했다.만두 점포의 주인장은 젊은 부부였는데, 마감 준비를 하고 있다가, 연기준을 본 남자 주인장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공자, 만두를 사러 오셨습니까? 죄송하지만 오늘 가지고 나온 건 다 팔렸거든요.

  • 시간을 거슬러   제99화

    어젯밤 공개적으로 은 5백냥을 내고 기생을 산 상왕비와 사내 구실을 못한다는 상왕이 동시에 등장하니 수많은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게다가 둘이 같이 손을 잡고 배에서 내려오고 있었으니 말이다.상황을 보면 상왕은 바람난 왕비를 잡으러 온 게 아니었다. 가까이에 있던 사람은 그들의 목에 난 자국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상왕비가 돈을 주고 산 기생이 상왕이었단 말인가?한편, 맹은영은 유람선에서 같이 배를 내리는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셋째 오라버니, 상왕 전하께서 정말 사내 구실을 못하시나요?”맹경운은 고개를 숙이고 어젯밤 연기준이 보내온 선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현철로 주조된 단도였는데 진귀한 재질로 만들어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다.일전에 연기준에게 며칠 빌려달라고 했을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어제는 이리도 쉽게 내어줄 줄이야!여동생의 물음에 그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넌 상왕비와 절친이니 차라리 그분께 직접 물어보지 그러니?”맹은영이 답했다.“왕비께서는 너무 못하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요.”풉!맹경운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어제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었으나 워낙 이 배의 칸막이가 얇아서 그 격정적인 소리를 안 들을래도 안 들을 수 없었다.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를 무능하다고 하면 그건 아마 상왕비의 문제일 것이다.‘참으로 교활하네. 온 나라에 상왕이 무능하다는 소문을 내서 경쟁자들을 미리 차단해 버리다니.’물론 맹경운은 여동생에게 진실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처자가 형수들과 어울리더니 점점 이상한 것만 배우고 있었다.맹경운은 단도를 품에 넣고는 웃음을 거두었다.“돌아가자꾸나. 조금전에 아버지께서 소식을 보내오셨는데 폐하께서 너를 궁으로 부르셨다고 하더구나.”맹은영은 비록 이미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오라버니, 황후가 정말 저를 대황자비로 들이려는 생각을 포기할까요?”맹경운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황궁에 가

  • 시간을 거슬러   제98화

    서인경은 턱을 괴고 앉아 구석진 곳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그래도 누님은 네가 마음에 들어. 얼굴이 잘났으니까, 아름다운 사람은 뭘 해도 용서받을 수 있어. 긴 밤을 같이 보내야 하는데 누님 기분 좋게 장기자랑이라도 보여주려무나.”헛돈을 쓸 수는 없으니 장기자랑이라도 해보라는 의미였는데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주변 분위기가 더 싸늘해졌다.맞은편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그의 숨결을 통해 공기 중에 익숙한 용연향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순간 서인경은 가슴이 철렁거렸다.“너 누구냐!”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지며 불안감이 엄습했다.“내 왕비가 장기자랑을 보고 싶다고 하는데 소원을 들어줘야지 않겠느냐.”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서인경은 가슴이 쿵 하고 무너졌다.갑자기 방 안에 등불이 켜지더니 익숙한 얼굴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그 순간 그녀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그러나 문에 닿기도 전에 갑자기 앞에 나타난 사내에게 가로막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박아버렸다.그는 서인경의 두 손을 꽉 잡더니 그대로 침상에 던졌다.“오늘 밤에 내가 사내 구실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제대로 보여줘야겠구나!”“이게 무슨….”사내의 입술이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포개졌다.이날 밤, 서인경은 자신이 어떻게 잠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정신을 잃던 순간까지도 연기준은 그녀의 귀에 대고 같은 질문을 속삭였다.“말해 보거라! 내가 사내 구실을 못하더냐?”‘그래! 너 잘났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그녀는 목소리를 낼 힘도 없어서 그저 속으로 절규할 뿐이었다.서인경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점심 때가 되어가고 있었다.너무 지치고 삭신은 아프고 배도 고파서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방 안에는 그녀 혼자 있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어젯밤 유람선에 있었다.‘그 자식은 돌아갔나?’서인경은 천천히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그런데 채 입기도 전에 갑자기 문이 열렸다.여인의 하얗고 부드러운 나신에는 어젯밤에 남긴 광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

  • 시간을 거슬러   제97화

    서인경이 답을 얼버무리자 맹은영은 흥미롭다는 듯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그럼 마마께서 만족을 못하신다는 거군요.”맹은영은 조곤조곤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공격에 서인경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혼인도 안 한 처자가 어떻게 이렇게 직설적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말이 없자 맹은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기술을 가르쳐준다고 나섰다.“제 둘째 형수가 그러셨는데 여인이 너무 사내에게만 맞출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37번 녀석을 보니 체구도 작고 얼굴도 못났으니 차라리 38번을 데려가세요. 어쨌든 오늘 헛걸음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서인경은 순간적으로 맹국공 일가 역시 현대에서 건너온 사람이 아닌지 의심했다.그게 아니라면 사고가 이렇게 개방적일 수가 없었다.맹은영은 하는 김에 다 해주겠다며 호성강에서 호화 유람선 하나를 빌렸다.2층짜리 거대한 유람선 안에는 여행을 떠나도 될 정도로 없는 게 없었다.서인경은 배에 타자마자 누군가에게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갔다.맹은영은 아래층에서 잘 즐기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배웅했다.‘대체 누가 현대인이야?’하인은 그녀를 한 방문 앞에 데려가놓고는 조용히 물러갔다.37번이든 38번이든 그녀는 그런 거에 관심없었다.서인경은 연극을 할 거면 끝까지 마무리하자는 심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연기준이 나중에 알고 어떻게 나오든 그건 그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저 어쩌면 소문이 퍼져서 내일 당장 이혼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등불이 켜지지 않은 방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다.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미약한 달빛을 통해 구석진 곳에 누군가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다.그런데 윤곽을 보니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서인경은 한참이나 등불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혹시 분위기 잡으려고 이러나 싶어서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38번 미남은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인경은 그가 수줍음을 타서 그런다고 생각했다.‘듣기로 선발대회에 참가하러 온

  • 시간을 거슬러   제96화

    혹여 상왕의 남성성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서인경은 자신의 지혜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다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주루의 2층 객방에서 구경 온 사람들 의견은 모두 분분했다.“무공으로 치면 따라올 자가 없는 상왕이 설마 밤일을 못하겠어?”“그거야 모르지. 밤일은 생긴 거랑 아무 상관이 없어. 그건 말 못할 병이거든. 어쩌면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후유증일지도 모르지.”“그래서 상왕비가 늘 기분이 안 좋았던 거구나. 밤에 만족을 못하니 어찌 행복을 알겠어. 그건 상왕이 문제 있는 게 맞아.”“그러게. 밤에 사랑을 받은 여인은 물처럼 부드럽다는데 말일세.”“정말 전장에서 부상을 당해 후유증이 많은 거라면 뒤에서 흉을 보는 건 아니지. 상왕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희생하신 것 아닌가!”“그렇지! 상왕과 상왕비 모두 잘못이 없으니 이해하고 넘어갑시다!”한편, 맹은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연기준의 표정을 보면 오늘 누구 하나 죽일 기세였다.사실 그는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깐 격이었다.맹은영에게 이렇게 하라고 제안한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었다.미남대회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남기고 끝이 났다. 내일은 미녀대회가 있는 날이었다.사람들은 그렇게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흩어졌다.붐비는 사람들 틈에 남장을 한 소녀와 호청이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소녀는 서인경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호청에게 물었다.“호 영감, 저 사람 진짜 상왕비 맞아? 어서 나를 저쪽으로 데려가 줘!”나이도 많은 호청은 한창 뛰놀 시기인 어린애와 함께 놀아주려니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그는 다급히 소녀를 반대방향으로 이끌었다.“가면 안 되지! 왕야께서 아시면 큰일나!”한설은 목을 빼들고 그쪽을 바라보며 계속 종알거렸다.“지난번에 왕야께서 왕부에서 쫓겨난 이유가 혹시 그거일까? 사실은 집에서 쫓겨난 게 아니라 안방에서….”호청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히 소녀의 입을 틀어

  • 시간을 거슬러   제95화

    ‘이래서 현대에서도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편법을 쓰는 거구나.’그렇게 부러워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맹국공부 적녀 맹은영 소저께서 38번에게 금 백 냥이나 지불하셨습니다!”서인경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는데, 근처 다루의 2층에서 맹은영이 난간에 기댄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녀의 불타는 화염을 닮은 붉은색 치맛자락이 바람 따라 흩날리고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넋을 놓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순식간에 호성강에 몰린 인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물론 이곳에 온 사람들 중 대부분은 풍류를 즐기는 공자들이나 집에 돈이 좀 많은 부인들이었지만, 아무리 진국이 시대를 앞서간다고 해도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처자가 이런 곳에 발을 들이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대부분은 구경만 하러 온 사람들이었기에, 실제로 이렇게 큰 금액을 제시한 사람은 맹은영이 첫 번째였다.그녀는 단 한번에 모두의 관심을 끌어버렸다.곧이어 그녀의 시종이 황금 백 냥을 들고 내려왔다.사람들은 일제히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터주었다. 38번 미남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우승자는 누가 뭐래도 그의 차지였다. 소년은 앞으로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감격에 겨워 맹은영이 있는 곳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마마, 맹 소저께서 저런 취향이셨군요.”평이는 서인경이 사람들에게 쓸려가지 않도록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눈은 반짝이는 황금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서인경이 못 말린다는 듯이 물었다.“너는 38번이 부러운 거니, 아니면 은영이가 부러운 거니?”평이는 고민도 않고 답했다.“당연히 맹 소저죠. 돈 많고 얼굴 예쁘고 기개가 있잖아요. 모두가 부러워하고 있어요.”서인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럼 일단은 나와 함께 열심히 돈을 벌어. 나중에 너도 재산이라는 게 생기면 저런 미남도 데려올 수 있겠지.”평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서인경을 꽉 껴안았다.서인경은 맹은영이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