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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or: 코코넛 서고
“왕야, 부디 제 아들 평안이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당숙께선 제 아들이 출세하는 게 싫으시다고 평안이에게 통령직을 맡기려 하지 않고 계십니다. 어미로서 저는 아들이 평생 전장의 선봉대로 개고생만 하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단 부인 서풍교는 서인경 할아버지의 먼 친척 형님의 딸이자, 단씨 가문의 안주인이며 단은설의 친모였다.

단씨 가문의 외동아들인 단평안은 게으르고 어리석은 자였다.군권은 장악하고 싶은데 밑바닥부터 시작하긴 싫어서 인지 군영에서도 늘 게으름만 부리는 자였다.’

몇 달 전, 할아버지께서 군을 이끌고 출정을 떠날 때 그는 도망병이 되어 경성에 남았다.

군공무로 바쁘신 할아버지께서 여유가 없어 죄를 묻지 않았는데 저쪽에서 먼저 상왕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할 줄이야.

출정을 나간 할아버지께서 돌아올 때가 되니 어떻게든 처벌을 피해가려고 얕은 수를 쓰는 모양이었다.

‘내가 건너온지 며칠이나 됐다고 우르르 몰려와서 말썽이야?’

서인경이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을 때, 연기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군영의 직위는 노장군께서 결정하실 일이고 내가 끼어들데가 아니다.”

서풍교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왕야께서 한말씀만 해주신다면 당숙께서도 감히 거역하시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만 난 직권을 남용할 생각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아니될지어다.”

“그… 그건….”

서풍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왕야… 제 딸 은설이랑….”

“어머니, 제발 그만하세요.”

연기준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버리자, 단은설은 다급히 어미의 말을 끊었다.

“그건 왕비께서 오해하신 겁니다. 저도 이 소문 때문에 곤란해 죽겠는데 어머니까지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감히 내 할아버지를 모함해?’

서인경은 성큼 정원으로 발을 들였다.

“고모님, 할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손자는 궁에 계십니다. 숙귀비 소생의 십오황자님이시죠. 단평안은 단씨이지 서씨도 아닙니다.”

서인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단은설 모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단은설에게 서인경이 변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마주하니 서풍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네가 상왕비라 할지라도 군중 요직에 관한 일에 여인인 네가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다.”

서인경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고모님도 여인 아닌가요? 서가군(고대 장군 가문에서 가문의 성씨로 명명한 군대)의 군공무에 어찌 여인인 고모님께서 감놔라 대추놔라 하십니까?”

“나… 나도 서씨이거늘….”

서인경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 나라에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은 많고도 많습니다. 그들이 다 고모님처럼 뻔뻔하게 굴면 서가군은 혼잡한 시장바닥 꼴이 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너… 너….”

서풍교는 화가 났지만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상왕비마마, 어머니께서 일시적으로 실언한 것이니 너무 탓하지 말아주십시오.”

단은설이 앞으로 나서더니 친한 척 서인경의 옆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저를 만나주시는군요. 저와 왕야 사이는 정말 결백합니다. 이만 의심을 거두어 주십시오.”

서인경은 그녀의 손길을 피해 연기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넌 예전에 내가 이 사람 저 사람 오해하게 유도했지. 매번 내가 세가 규수들에게 시비를 걸게 이간질한 게 너였어. 그런데 피해자가 네가 되니 이제야 그 기분을 이해하게 됐나 보구나?”

연기준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은설은 겁에 질린 척,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억울하옵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한 적 없어요. 왕비께서 오해하신 겁니다. 왕야,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연기준이 뭐라고 하기 전에 서인경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내가 널 의심하는 건데 왜 왕야께 현명한 판단을 부탁하는 거니? 왕야께서 널 혐오하게 돼서 왕비가 되는 길이 막힐까 봐 두려워?”

“서인경!”

갑자기 들려온 연기준의 고함에 놀란 서인경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불여시 참교육 중인데 왜 갑자기 고함을 지르고 난리야?!’

“이만 나가 보거라. 서가군의 군무는 전적으로 노장군의 결정을 따른다. 너희가 폐하께 찾아가서 억울함을 토로해도 내가 나서서 간섭할 수는 없다.”

그 말을 들은 서인경은 의아한 눈으로 연기준을 바라보았다.

‘정인을 감쌀 줄 알았더니?’

서봉교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뭐라 하려던 찰나, 서인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모님께서도 방금 말씀하셨듯, 전장은 험난하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입니다. 귀한 외동아들이 전장에 나가서 다쳐서 돌아오기라도 하면 서가군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 이만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더 이상 이 집안 사람들의 면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서인경은 곧바로 관리인을 불러 손님을 배웅하게 했다.

연기준마저 가만히 있으니, 단은설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서봉교를 끌고 돌아갔다.

그들이 떠나자 공기마저 청량해진 기분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십니까?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연기준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에는 서씨 가문과 단씨 가문은 가족이라며 가족끼리는 서로 도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었죠. 그런데 배은망덕한 놈들이 주제를 모르고 날뛰어서 말입니다.”

서인경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결연하게 말했다.

“오늘부로 저와 단씨 가문은 적입니다. 그러니 왕야께서 단씨 가문을 돕고 싶으시다면 저와 이혼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상왕비의 자리에 있는 한, 매일 오늘과 같은 소란이 벌어질 것입니다.”

평소의 서인경처럼 각박하고 매몰찬 말투에 연기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는 서인경이 맞구나.’

그가 아는 서인경이란 시기심 많고 늘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말을 마친 서인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연기준이 입을 열었다.

“넌 내가 화리서를 써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 내 앞에서 수차례 이혼 얘기를 꺼냈다. 목적이 뭐지? 서인경, 나한테 얕은 수작 부리지 말거라!”

“왜 못 써주신다는 건지….”

한바탕 쏘아붙이려던 서인경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원주인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폐하께 찾아가 혼사를 청할 때, 서가군은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었고 부모님이 전장에서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전해졌을 시점이었다.

황제는 충신에 대한 인자함과 자비를 만 천하에 보여주기 위해 이 혼사로서 죽은 서가군의 영혼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황제가 그 자리에 있는 한, 이 혼사는 되돌릴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황제를 건너뛰고 이혼하게 된다면 황명을 거역하게 되는 것은 물론, 황제의 명성에까지 누가 될 수도 있었다.

서인경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얼간이가 싼 똥을 왜 내가 치워야 하는 거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황제가 운명하자마자 연기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원주인을 왕비의 자리에서 폐하고 단은설과 혼인했었다.

‘절대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돼. 어떻게든 이혼해야겠어.’

서인경이 말이 없자, 연기준은 그녀가 정곡을 찔려 할 말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경멸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근래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네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그러니 앞으로 내 관심을 사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말거라. 난 공무가 바쁜 사람이라 너와 놀아줄 여유 따위는 없으니.”

‘이 인간이 지금 뭐라고….’

그러자 서인경이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억지로 관용을 베풀려 하지 마시고 오늘 하나하나 따져 보지요. 제가 맹 소저에게 사과한 것이 잘못됐나요? 아니면 왕야의 정인에게 욕을 한 게 잘못되었나요? 아니면 감히 저 따위가 화리서를 요구한 게 존귀하신 왕야의 자존심을 자극했습니까?”

당당하고 거만한 태도에 연기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여인은 어떻게 하면 그의 화를 자극하는지 너무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서인경, 난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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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시간을 거슬러   제902화

    그 무렵,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온 후궁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황제는 벽돌 하나, 기와 한 장도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듯 후궁을 거의 뒤엎다시피 뒤지고 있었다.그 와중에 서인경은 연기준의 품에 안겨 오랜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잤다.하늘이 환해지고 밖에서 갑옷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들려오자 서인경은 화들짝 눈을 떴다.“들킨 겁니까?”연기준은 그녀를 다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못 들어온다.”후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곳은 금기된 땅이라는 것을.태황태후의 명이 없이 감히 발을 들인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과연 잠시 뒤,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공기는 다시 고요해졌다. 희끗해진 하늘빛을 보던 서인경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우리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합니까?”연기준은 그녀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감아 돌리며 나른하게 웃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둘만의 시간을 좀 더 즐기면 안 되는 것이냐?”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서인경은 지금 상황에서 그가 정말 그런 여유를 부릴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연기준이 낮게 웃었다.“오늘 밤에 움직일 것이다. 황제를 끌어내리고 열셋 째 황자를 올리려 하는 데 어떠느냐?”피로 얼룩질 수밖에 없는 왕위 쟁탈전을 그는 마치 산책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서인경은 잠시 생각했다.“대황자가 황제가 된다면 저희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연무성은 너무 어려 황제가 된다고 해도 버티기 힘들겠지요. 그렇다면 열셋 째 황자가 그나마 나은 선택이긴 하지만 그 아이의 성품이 어떤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연기준은 그녀의 머리끝을 손바닥에 굴리며 말했다.“성품이 어떻든 상관없다. 내가 올릴 수 있으면 다시 끌어내릴 수도 있거든.”그 말에 담긴 자신감은 허세가 아니었다. 서인경 역시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열셋 째 황자가 최선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다만 조정이 뒤집히는 순간마다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여왔다는 사실을

  • 시간을 거슬러   제901화

    하지만 상왕비를 굳이 가둔 것은 황후로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가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그녀조차 갈피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상왕은 야랑국에서 죽었고 야랑국의 적통인 팔황자는 진국에서 죽었다. 그런데 열셋 째 황자는 느닷없이 호국호민의 영웅이 되어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황후는 늘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예감. 이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일 리 없었고 마치 누군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짜 놓은 판처럼 보였다. 만약 정말 그 뒤에 조종자가 있다면 지금은 결코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황후는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자. 산 위에 앉아 호랑이들이 싸우는 것을 관망하는 수밖에.이미 황후는 궁 밖으로 사람을 보내 대황자와 하선준 가문에 전갈을 전해 두었다. 요즘은 괜히 나서지 말고 조용히 지내며 절대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말이다.그런데 뜻밖에도 황제의 한 장 조서가 다시 그녀를 무대 앞으로 끌어냈다.태감이 조서를 읽고 나서 공손히 황후 앞에 섰다.“황후 마마,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금수 대장공주께서 후궁 생활이 지루하시다 하여 황후 마마더러 직접 모시고 궁 밖으로 나가 바람도 쐬고 겸사겸사 변복하고 민정을 살펴보라 하셨습니다.”황후는 나라의 어머니답게 단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알겠다. 물러가거라.”“예.”태감이 물러난 뒤 황후는 고개를 돌려 궁녀에게 물었다.“어젯밤 냉궁에서 있었던 일, 특히 금수 대장공주와 관련된 부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보거라.”궁녀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침에 들은 소문을 신이 나서 풀어놓았다.“냉궁에서 다섯 구의 시신이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어른, 하나는 아이였는데 아이 쪽은 열다섯 째 황자로 확인되었습니다. 몸에서 떨어진 옥패가 증거였고 신비와 금수 대장공주도 직접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폐하께서 열다섯 째 황자를 말리려다

  • 시간을 거슬러   제900화

    시신이 금수 대장공주 앞을 지나갈 때, 그녀는 뒤에 서 있던 시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시녀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한바탕 벌어진 대화재는 황제의 입에서 손쉽게 사고로 규정되었다.그날 새벽, 금위군은 후궁 전역을 샅샅이 수색했다.후궁에서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열다섯 째 황자가 냉궁에 잘못 들어갔다가 불운하게 불에 타 죽었다는 것. 그런데도 황제가 무엇을 찾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한순간에 궁 전체가 불안에 휩싸였다. 사람마다 얼굴이 굳었고 어디서든 긴장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열다섯 째 황자의 죽음을 두고 후궁에는 탄식이 가득했다.“후궁에서 어미 없는 아이는 오래 못 산다더니 과연 그렇구나.”“신 황귀비께서 아이에게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 애가 스스로 냉궁에 간 거 아니겠느냐?”이런 소문이 신 황귀비의 침전에까지 전해졌을 때, 마침 황제의 조서도 함께 도착했다. 황귀비 작호를 박탈하고 귀비로 강등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반성하며 석 달간 외출을 금하라는 명도 전해졌다.한때 가장 총애받던 궁전은 순식간에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겼다. 사람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궁녀는 분노에 차 컵을 집어 던질 뻔했다.“밖에서 떠드는 건 전부 개소리예요! 우리 마마가 열다섯 째 황자에게 쏟은 정성은 열일곱 째 황자와 열여덟 째 공주보다도 훨씬 컸는데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입만 살아서 떠들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들 입이 썩고 배가 터질 거예요!”신 황귀비는 웃으며 그녀를 내보냈다.“사람들 말이야 마음대로 하게 두거라. 우리만 떳떳하면 그만이지. 어서 가서 차 한 잔 다시 끓여 오너라. 이 잔이랑 주전자는 값비싼 거니까 조심하고.”궁녀는 입을 삐죽이며 주인이 너무 착하다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나갔다.그때 운 유모가 작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신 황귀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숙 언니만 세간의 헛소문을 믿지 않으시면 돼요.”운 유모는 그녀 옆에 앉았다.“저는 당연히 믿지 않습니다.

  • 시간을 거슬러   제899화

    신 황귀비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거의 후궁 전체가 다 들을 만큼 요란해졌다.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소란에 잠에서 깬 궁인들과 후궁들이 하나둘씩 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다.황제는 분노로 관자놀이의 핏줄이 불거졌다.“그만하거라!”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이게 무슨 소란이냐?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냐?”황제가 미처 막기도 전에 사람들 사이가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 금수 대장공주가 망토를 걸친 채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본궁이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쪽이 시끄러워서 깼다. 두 후궁이 밤중에 질투 싸움이라도 벌인 줄 알았더니 황제와 신 황귀비였느냐? 두 사람은 또 무슨 연극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냐?”말을 하며 금수 대장공주의 시선이 바닥에 놓인 다섯 구의 시신으로 옮겨갔다.그녀는 일부러 놀란 듯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입을 가렸다.“어머, 사람이 죽었구나?”목소리는 과장됐고 표정은 지나치게 연극적이었다. 전장을 누비며 수없이 사람을 죽여 본 인물치고는 반응이 너무 요란했다.황제는 알고 있었다. 이 황고모는 또 구경꾼처럼 끼어들어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이 일은 황제가 조금도 외국 세력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그는 급히 다가가 금수 대장공주의 팔을 붙잡았다.“황고모를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짐의 잘못입니다.””어서 황고모를 모셔 돌아가 쉬시게 하거라. 누구든 다시 황고모를 번거롭게 하면 곤장으로 다스린다!”내시가 막 다가가 부축하려는 순간, 금수 대장공주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방금 신 황귀비가 한 말을 들었다. 저 아이가 열다섯 째 황자라며? 저 옥패, 본궁도 며칠 전에 그 아이가 차고 있는 걸 봤거든. 그럼 옆에 있는 건 누구냐?”황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열다섯 째가 장난삼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우연히 화재를 만난 것입니다. 옆에 있는 건 아마 그를 말리려다 함께 불에 휩싸인 궁녀일 거예요. 사람을 보내 어느 궁에서 궁녀가 사라졌는지 조사하고

  • 시간을 거슬러   제898화

    냉궁 밖.황제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서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얼음처럼 차갑고 섬뜩했다. 반경 십 미터 안에는 측근 내시들 외에는 누구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그는 눈앞에서 새까맣게 탄, 크고 작은 두 구의 시신이 잿더미 속에서 끌려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함께 타버린 네 마리 악어의 시체 조각까지 들려 나왔다.황제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말도 안 된다! 안에는 강물이 있지 않았느냐? 그렇게 물이 많았는데 어떻게 불이 날 수 있단 말이냐!”내시는 몸을 떨며 아뢰었다.“폐하, 신도 이유를 알지 못하옵니다. 불이 나기 직전, 안에 있던 물이 갑자기 전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악어 네 마리도 전부 타 죽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사라졌다?황제는 선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안의 물과 악어는 모두 연강호가 설산에서 함께 데려온 것이라고.겉보기엔 고인 죽은 물 같았지만 백 년이 지나도록 마르지도 않았고 썩지도 않았다. 보통 물이었다면 악어는 진작 죽었을 터였다.그렇다면 신비로운 설산의 물도 불에는 약한 것일까? 불을 만나면 그대로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황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물은 이미 서인경이 전부 약왕곡으로 옮겨 버렸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에도 네 마리 악어는 그 안에서 신나게 날뛰고 있었다.내시의 보고를 들을수록 황제의 분노는 더욱 치밀었다.“금위군은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 왜 첫 순간에 이곳을 봉쇄하지 않았느냐!”금위군 통솔자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냉궁은 본래 신의 관할 구역이 아니 옵니다. 폐하의 명이 없이는 감히 직무를 이탈할 수 없었사옵니다.”쿵!황제는 발길질로 그의 어깨를 세게 걷어찼다.“너희는 머리 달린 시체냐? 이 정도 융통성도 없어서야! 짐이 너희를 둔 게 무슨 소용이냐!”통솔자는 억울했지만 땅에 엎드린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때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열다섯 째 황자! 혹시 그 아이인 것이냐?”“신 황귀비 마마

  • 시간을 거슬러   제897화

    희태비는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서인경의 마음속에서 그녀에 대한 존경은 더욱 깊어졌다.“그럼 태황태후께서 계속 어머님을 견제한 것도 혹시 어머님과 그 시녀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 아닐까요?”연기준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닐 거야. 태황태후께서 알았다면 이곳을 이렇게 오랫동안 두려워하지도 않았겠지. 그녀가 모비를 싫어한 건 단순해. 그녀는 열셋 째 황숙에게 수많은 귀족 규수를 소개했지만 황숙 눈에는 늘 모비밖에 없었거든. 태황태후 눈에 모비는 나라를 망치는 요물 같은 존재였지. 열셋 째 황숙의 마음을 완전히 끊어내려고 한때는 그를 후궁 지하 밀실에 가둬 두고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모비를 잊게 만들려고 말이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황숙은 그 밀실에서 나온 뒤로 다시는 모비를 찾지 않았고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서인경은 조용히 듣다가 문득 자신이 단은설의 침전 밀실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급히 품속에서 반달 모양의 옥패를 꺼냈다. 옥패에는 포효하며 달려가는 호랑이가 새겨져 있었다.달빛이 비쳐 서인경의 손바닥을 환하게 밝혔다.연기준의 시선이 옥패에 멈췄고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서인경은 옥패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이거 압니까? 단은설 밀실에서 발견한 겁니다. 혹시 그 밀실이 예전에 열셋 째 황숙을 가둬 두었던 곳이 아니었을까요?”그 안에 있던 형구들을 떠올리자 서인경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태황태후가 아무리 미쳐 있었다 해도 설마 친아들에게까지 형벌을 가했을까?연기준은 옥패를 받아 달빛 아래서 한 번 더 살폈다. 확인한 뒤 그는 그것을 단단히 손에 쥐었다.서인경은 그의 반응이 이상해 보여 물었다.“이걸 압니까?”연기준의 검은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성조 선제 때, 흑갑군이라는 비밀 군대가 있었다. 오직 연 씨 황실에만 충성하는 군대지. 이건 그 흑갑군을 움직이는 호부다. 대대로 진국 황제에게만 전해졌고 오직 역대 황제만이 병권을 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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