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시간을 거슬러
시간을 거슬러
Author: 코코넛 서고

제1화

Author: 코코넛 서고
“서인경, 너는 무고한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간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하여 오늘부로 상왕비의 자리에서 폐하고 평생 안락당에 가둘 것을 명한다. 평생 다시 너와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을 테니, 네가 죽든 살든 앞으로는 더 이상 관여치 않을 것이다.”

서인경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지며, 사내의 냉랭한 목소리가 반복해서 귓가에 울렸다.

‘내가 무고한 사람을 살해했다니?’

‘상왕비는 또 뭐야?’

“죽은 척하지 말고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서인경은 놀라서 번쩍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날카롭고 매정한 누군가의 시선이었다.

“당장 일어나거라! 억울한 사람을 모함하였으면 사과를 해야지!”

사내는 거칠게 서인경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장면들이 서인경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이게 소설에서만 보던 타임슬립 빙의?’

게다가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그녀가 빙의한 상대가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과 지혜를 상실해버린 왕비라는 점이었다.

결국 어리석음의 극치가 무엇인지 보여준 그녀는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당하고 평생 안락당에 갇혀 지내다가 우울하게 생을 마감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시점은 상왕비가 폐위되기 3년 전, 즉 그녀가 간사한 꼬드김에 속아 바람난 상왕을 잡으러 다루, 즉,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듣는 곳으로 와서 난동을 부린 직후였다.

그녀는 맹국공의 딸인 맹은영이 자신의 부군인 상왕 연기준에게 꼬리를 쳤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맹은영은 현장에서 기절한 상황이다.

어릴 적부터 지병을 앓은 맹은영에게는 이런 작은 자극도 치명적이었다.

원주인에게 굴욕적인 욕을 들은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후에 결국 세상을 떠났고, 이 사건 직후로 상왕은 그녀에게 완전히 실망하고 맹국공 가문과 서씨 가문은 앙숙이 되었다.

나중에 서씨 가문이 간신배로 몰렸을 때, 앞장서서 개국공신인 서씨 가문의 탄핵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맹국공이었다.

그리고 깨어나기 전에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던 비정한 말들은 원주인이 죽기 전에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내가 그녀의 얼굴에 화리서(和离书:이혼합의서)를 던지며 했던 말이었다.

“휴.”

서인경이 상처를 후벼파는 그 말을 떠올리자 이 몸에서 강렬한 절망과 비통함이 느껴졌다.

‘21세기 참된 여성으로서 비혼주의를 주장하던 내가 어쩌다가 이런 얼간이의 몸에 빙의된 거지?’

“어휴.”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녀의 연이은 한숨은 연기준의 마지막 인내심마저 날려버렸다.

곧이어 다리에서 강력한 힘이 느껴지더니 서인경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게 되었다.

멍하니 서 있는 그녀가 마음에 안 들어 연기준이 발로 그녀의 다리를 걷어찬 것이었다.

“잘못을 했으면 사과하고 벌을 받는 게 마땅하거늘. 얼른 사과부터 하거라!”

서인경은 길게 심호흡하며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사람들은 상왕을 철없는 사고뭉치 왕비를 잘못 들여 뒷수습하기 바쁜 피해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인경은 그가 진심으로 그녀의 죽음을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죽어야지 진정으로 연모하는 단은설과 혼인할 수 있으니까.

‘망할 남정네, 이 원한은 꼭 기억해 두마.’

“맹 소저, 내가 요사한 자의 이간질에 속아 소저를 오해한 것 같군. 내 이리 사과하지. 정말 진심으로 미안하네!”

깔끔한 사과와 함께 서인경은 고개를 푹 숙였고, 사람들은 경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존귀한 상왕비께서 세가의 딸에게 서슴없이 고개를 숙이다니!

하지만 서인경은 그런 시선들을 일일이 의식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온 이상, 어떻게든 그 비극은 막아야 해. 철따구니 없는 원주인이 친 사고도 내가 수습할 수밖에.’

한편, 연기준의 눈가에도 의아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게야? 당장 왕부로 꺼지지 못할까!”

서인경은 자신을 대하는 사내의 태도에 굉장히 화가 났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그쪽이고 꺼져야 할 사람도 그쪽이야. 내가 그쪽만 아니었으면 맹 소저를 오해하고 이렇게 비굴하게 사과할 일도 없었다고. 그러니 꺼질 테면 그쪽이 꺼지든가!”

연기준과 사람들은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상왕비가 누굴 욕하는 게 흔한 일이긴 하지만, 상왕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욕을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상왕의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

어쨌거나 연기준과 서인경의 연이은 사과로 맹은영의 기분도 한결 편해진 상태이긴 했지만 말이다.

약을 먹은 후, 어느정도 기력을 회복한 그녀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서인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세요. 존귀하신 왕비께서 어찌 저에게 무릎을 꿇으십니까? 이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서인경은 대수롭지 않게 무릎을 툭툭 털었다.

“괜찮네. 소저가 화가 풀렸으면 된 거지. 내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좀 했네. 이렇게 어여쁜 처자가 상왕 같이 똥 씹은 표정만 하고 다니는 사내에게 마음을 주었을 리가 없지.”

연기준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너무도 빠른 태세 변화에 맹은영 본인도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워낙 귀족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서인경이라 접근조차 하기 싫었던 맹은영이었다.

“상왕비께선 앞으로 누군가를 비난하실 때 사실관계를 잘 알아보고 하셨으면 좋겠군요.”

서인경은 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소저가 날 안 믿어줄 것을 알지만 돌아간 이후로 음식을 유의해서 드시게. 누군가 소저를 해하려 하고 있으니.”

맹은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당신….”

서인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나였으면 이렇게 소저에게 말해줄 이유가 없지.”

원주인의 기억을 통해 서인경은 맹은영이 단순히 화병으로 죽은 게 아님을 추측해냈다.

이는 단씨 가문이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행한 짓이었다.

원주인은 죽는 순간까지 그것도 모르고 엄한 죄를 뒤집어쓴 채 숨이 끊어졌다.

맹은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은영이 돌아가고 더 이상 구경거리가 없게 되자, 사람들도 각자 흩어졌다.

서인경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돌아서려던 때, 검은 인영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지?”

연기준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참 잘생기긴 했는데… 사람이 정이 없어. 원주인은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남자 때문에 망가진 거야?’

서인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혼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준비를 해주십시오.”

다루 안으로 들어서던 단은설이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인경아, 자꾸 이상한 고집 부리지 마. 한낱 여인인 네가 어찌 먼저 이혼을 입에 담을 수 있어?”

아무도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있던 와중에 단은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주변 시선들이 또다시 서인경에게로 쏟아졌다.

상왕비가 이혼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 혼사는 그녀가 가문의 공적을 내세워 억지로 받아낸 것이었다.

심지어는 상왕이 아니면 죽겠다고 하던 그녀가 갑자기 이혼을 주장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또 그녀가 꿍꿍이를 꾸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기준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멈칫하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내가 네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서인경은 한심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왕야께선 단은설과 혼인하고 싶어하시니, 제가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내어드리겠다는 말씀인었사온데,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요?”

그 말을 들은 연기준은 인상을 확 찌푸렸고 단은설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인경아, 그런 헛소리는 하는 게 아니야. 나와 왕야 사이는 결백해.”

서인경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 입꼬리나 내리고 그런 말을 하지. 혼인도 하지 않은 처자가 매일 상왕부에 들락거리면서 결백을 주장하는 꼴이라니.”

단은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억울한 척했다.

“인경아, 난 네가 보고 싶어서 상왕부에 들른 거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날 오해하면 안 되지.”

서인경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다른 사람은 오해해도 되고 너는 안 된다? 애초에 맹 소저와 상왕이 이 다루에서 밀회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사람이 너였어. 너 아니었으면 내가 무슨 수로 이 빠른 시간 안에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단은설의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서인경이 그 사실을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떠벌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예전의 서인경이라면 절대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인경아… 어찌 날… 그런 식으로 모함할 수 있어? 난 동생인 널 진심으로 돕고 싶었는데.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기에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단은설은 마치 큰 상처라도 받은 양,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원주인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급히 사과를 했겠지만 서인경은 그저 이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는 서씨고 너는 단씨야. 난 존귀한 상왕비고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호국공신이시지. 일개 상인의 딸인 네가 내 언니 행세를 하다니, 참으로 우습구나.”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시간을 거슬러   제902화

    그 무렵,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온 후궁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황제는 벽돌 하나, 기와 한 장도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듯 후궁을 거의 뒤엎다시피 뒤지고 있었다.그 와중에 서인경은 연기준의 품에 안겨 오랜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잤다.하늘이 환해지고 밖에서 갑옷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들려오자 서인경은 화들짝 눈을 떴다.“들킨 겁니까?”연기준은 그녀를 다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못 들어온다.”후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곳은 금기된 땅이라는 것을.태황태후의 명이 없이 감히 발을 들인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과연 잠시 뒤,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공기는 다시 고요해졌다. 희끗해진 하늘빛을 보던 서인경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우리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합니까?”연기준은 그녀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감아 돌리며 나른하게 웃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둘만의 시간을 좀 더 즐기면 안 되는 것이냐?”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서인경은 지금 상황에서 그가 정말 그런 여유를 부릴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자 연기준이 낮게 웃었다.“오늘 밤에 움직일 것이다. 황제를 끌어내리고 열셋 째 황자를 올리려 하는 데 어떠느냐?”피로 얼룩질 수밖에 없는 왕위 쟁탈전을 그는 마치 산책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서인경은 잠시 생각했다.“대황자가 황제가 된다면 저희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연무성은 너무 어려 황제가 된다고 해도 버티기 힘들겠지요. 그렇다면 열셋 째 황자가 그나마 나은 선택이긴 하지만 그 아이의 성품이 어떤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연기준은 그녀의 머리끝을 손바닥에 굴리며 말했다.“성품이 어떻든 상관없다. 내가 올릴 수 있으면 다시 끌어내릴 수도 있거든.”그 말에 담긴 자신감은 허세가 아니었다. 서인경 역시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열셋 째 황자가 최선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다만 조정이 뒤집히는 순간마다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시체가 산처럼 쌓여왔다는 사실을

  • 시간을 거슬러   제901화

    하지만 상왕비를 굳이 가둔 것은 황후로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가 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그녀조차 갈피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상왕은 야랑국에서 죽었고 야랑국의 적통인 팔황자는 진국에서 죽었다. 그런데 열셋 째 황자는 느닷없이 호국호민의 영웅이 되어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황후는 늘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예감. 이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일 리 없었고 마치 누군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짜 놓은 판처럼 보였다. 만약 정말 그 뒤에 조종자가 있다면 지금은 결코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황후는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자. 산 위에 앉아 호랑이들이 싸우는 것을 관망하는 수밖에.이미 황후는 궁 밖으로 사람을 보내 대황자와 하선준 가문에 전갈을 전해 두었다. 요즘은 괜히 나서지 말고 조용히 지내며 절대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말이다.그런데 뜻밖에도 황제의 한 장 조서가 다시 그녀를 무대 앞으로 끌어냈다.태감이 조서를 읽고 나서 공손히 황후 앞에 섰다.“황후 마마,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금수 대장공주께서 후궁 생활이 지루하시다 하여 황후 마마더러 직접 모시고 궁 밖으로 나가 바람도 쐬고 겸사겸사 변복하고 민정을 살펴보라 하셨습니다.”황후는 나라의 어머니답게 단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알겠다. 물러가거라.”“예.”태감이 물러난 뒤 황후는 고개를 돌려 궁녀에게 물었다.“어젯밤 냉궁에서 있었던 일, 특히 금수 대장공주와 관련된 부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보거라.”궁녀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침에 들은 소문을 신이 나서 풀어놓았다.“냉궁에서 다섯 구의 시신이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어른, 하나는 아이였는데 아이 쪽은 열다섯 째 황자로 확인되었습니다. 몸에서 떨어진 옥패가 증거였고 신비와 금수 대장공주도 직접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폐하께서 열다섯 째 황자를 말리려다

  • 시간을 거슬러   제900화

    시신이 금수 대장공주 앞을 지나갈 때, 그녀는 뒤에 서 있던 시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시녀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한바탕 벌어진 대화재는 황제의 입에서 손쉽게 사고로 규정되었다.그날 새벽, 금위군은 후궁 전역을 샅샅이 수색했다.후궁에서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열다섯 째 황자가 냉궁에 잘못 들어갔다가 불운하게 불에 타 죽었다는 것. 그런데도 황제가 무엇을 찾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한순간에 궁 전체가 불안에 휩싸였다. 사람마다 얼굴이 굳었고 어디서든 긴장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열다섯 째 황자의 죽음을 두고 후궁에는 탄식이 가득했다.“후궁에서 어미 없는 아이는 오래 못 산다더니 과연 그렇구나.”“신 황귀비께서 아이에게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 애가 스스로 냉궁에 간 거 아니겠느냐?”이런 소문이 신 황귀비의 침전에까지 전해졌을 때, 마침 황제의 조서도 함께 도착했다. 황귀비 작호를 박탈하고 귀비로 강등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반성하며 석 달간 외출을 금하라는 명도 전해졌다.한때 가장 총애받던 궁전은 순식간에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겼다. 사람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궁녀는 분노에 차 컵을 집어 던질 뻔했다.“밖에서 떠드는 건 전부 개소리예요! 우리 마마가 열다섯 째 황자에게 쏟은 정성은 열일곱 째 황자와 열여덟 째 공주보다도 훨씬 컸는데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입만 살아서 떠들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들 입이 썩고 배가 터질 거예요!”신 황귀비는 웃으며 그녀를 내보냈다.“사람들 말이야 마음대로 하게 두거라. 우리만 떳떳하면 그만이지. 어서 가서 차 한 잔 다시 끓여 오너라. 이 잔이랑 주전자는 값비싼 거니까 조심하고.”궁녀는 입을 삐죽이며 주인이 너무 착하다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나갔다.그때 운 유모가 작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신 황귀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숙 언니만 세간의 헛소문을 믿지 않으시면 돼요.”운 유모는 그녀 옆에 앉았다.“저는 당연히 믿지 않습니다.

  • 시간을 거슬러   제899화

    신 황귀비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거의 후궁 전체가 다 들을 만큼 요란해졌다.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소란에 잠에서 깬 궁인들과 후궁들이 하나둘씩 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다.황제는 분노로 관자놀이의 핏줄이 불거졌다.“그만하거라!”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이게 무슨 소란이냐? 또 무슨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냐?”황제가 미처 막기도 전에 사람들 사이가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 금수 대장공주가 망토를 걸친 채 하품을 하며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본궁이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쪽이 시끄러워서 깼다. 두 후궁이 밤중에 질투 싸움이라도 벌인 줄 알았더니 황제와 신 황귀비였느냐? 두 사람은 또 무슨 연극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냐?”말을 하며 금수 대장공주의 시선이 바닥에 놓인 다섯 구의 시신으로 옮겨갔다.그녀는 일부러 놀란 듯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입을 가렸다.“어머, 사람이 죽었구나?”목소리는 과장됐고 표정은 지나치게 연극적이었다. 전장을 누비며 수없이 사람을 죽여 본 인물치고는 반응이 너무 요란했다.황제는 알고 있었다. 이 황고모는 또 구경꾼처럼 끼어들어 불난 집에 기름을 붓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이 일은 황제가 조금도 외국 세력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그는 급히 다가가 금수 대장공주의 팔을 붙잡았다.“황고모를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짐의 잘못입니다.””어서 황고모를 모셔 돌아가 쉬시게 하거라. 누구든 다시 황고모를 번거롭게 하면 곤장으로 다스린다!”내시가 막 다가가 부축하려는 순간, 금수 대장공주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방금 신 황귀비가 한 말을 들었다. 저 아이가 열다섯 째 황자라며? 저 옥패, 본궁도 며칠 전에 그 아이가 차고 있는 걸 봤거든. 그럼 옆에 있는 건 누구냐?”황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열다섯 째가 장난삼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우연히 화재를 만난 것입니다. 옆에 있는 건 아마 그를 말리려다 함께 불에 휩싸인 궁녀일 거예요. 사람을 보내 어느 궁에서 궁녀가 사라졌는지 조사하고

  • 시간을 거슬러   제898화

    냉궁 밖.황제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 서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얼음처럼 차갑고 섬뜩했다. 반경 십 미터 안에는 측근 내시들 외에는 누구도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그는 눈앞에서 새까맣게 탄, 크고 작은 두 구의 시신이 잿더미 속에서 끌려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함께 타버린 네 마리 악어의 시체 조각까지 들려 나왔다.황제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말도 안 된다! 안에는 강물이 있지 않았느냐? 그렇게 물이 많았는데 어떻게 불이 날 수 있단 말이냐!”내시는 몸을 떨며 아뢰었다.“폐하, 신도 이유를 알지 못하옵니다. 불이 나기 직전, 안에 있던 물이 갑자기 전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악어 네 마리도 전부 타 죽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사라졌다?황제는 선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안의 물과 악어는 모두 연강호가 설산에서 함께 데려온 것이라고.겉보기엔 고인 죽은 물 같았지만 백 년이 지나도록 마르지도 않았고 썩지도 않았다. 보통 물이었다면 악어는 진작 죽었을 터였다.그렇다면 신비로운 설산의 물도 불에는 약한 것일까? 불을 만나면 그대로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황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물은 이미 서인경이 전부 약왕곡으로 옮겨 버렸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에도 네 마리 악어는 그 안에서 신나게 날뛰고 있었다.내시의 보고를 들을수록 황제의 분노는 더욱 치밀었다.“금위군은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 왜 첫 순간에 이곳을 봉쇄하지 않았느냐!”금위군 통솔자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냉궁은 본래 신의 관할 구역이 아니 옵니다. 폐하의 명이 없이는 감히 직무를 이탈할 수 없었사옵니다.”쿵!황제는 발길질로 그의 어깨를 세게 걷어찼다.“너희는 머리 달린 시체냐? 이 정도 융통성도 없어서야! 짐이 너희를 둔 게 무슨 소용이냐!”통솔자는 억울했지만 땅에 엎드린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때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열다섯 째 황자! 혹시 그 아이인 것이냐?”“신 황귀비 마마

  • 시간을 거슬러   제897화

    희태비는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서인경의 마음속에서 그녀에 대한 존경은 더욱 깊어졌다.“그럼 태황태후께서 계속 어머님을 견제한 것도 혹시 어머님과 그 시녀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 아닐까요?”연기준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아닐 거야. 태황태후께서 알았다면 이곳을 이렇게 오랫동안 두려워하지도 않았겠지. 그녀가 모비를 싫어한 건 단순해. 그녀는 열셋 째 황숙에게 수많은 귀족 규수를 소개했지만 황숙 눈에는 늘 모비밖에 없었거든. 태황태후 눈에 모비는 나라를 망치는 요물 같은 존재였지. 열셋 째 황숙의 마음을 완전히 끊어내려고 한때는 그를 후궁 지하 밀실에 가둬 두고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모비를 잊게 만들려고 말이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황숙은 그 밀실에서 나온 뒤로 다시는 모비를 찾지 않았고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서인경은 조용히 듣다가 문득 자신이 단은설의 침전 밀실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급히 품속에서 반달 모양의 옥패를 꺼냈다. 옥패에는 포효하며 달려가는 호랑이가 새겨져 있었다.달빛이 비쳐 서인경의 손바닥을 환하게 밝혔다.연기준의 시선이 옥패에 멈췄고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서인경은 옥패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물었다.“이거 압니까? 단은설 밀실에서 발견한 겁니다. 혹시 그 밀실이 예전에 열셋 째 황숙을 가둬 두었던 곳이 아니었을까요?”그 안에 있던 형구들을 떠올리자 서인경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태황태후가 아무리 미쳐 있었다 해도 설마 친아들에게까지 형벌을 가했을까?연기준은 옥패를 받아 달빛 아래서 한 번 더 살폈다. 확인한 뒤 그는 그것을 단단히 손에 쥐었다.서인경은 그의 반응이 이상해 보여 물었다.“이걸 압니까?”연기준의 검은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성조 선제 때, 흑갑군이라는 비밀 군대가 있었다. 오직 연 씨 황실에만 충성하는 군대지. 이건 그 흑갑군을 움직이는 호부다. 대대로 진국 황제에게만 전해졌고 오직 역대 황제만이 병권을 쥘 수 있었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