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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6화

Author: 코코넛 서고
창밖의 태감은 황제가 그런 대답을 내놓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잠시 머뭇거렸다.

“잠깐만요.”

단은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황제의 소매를 붙잡았다.

“폐하, 오늘은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동침하셔야 하는 날입니다. 신첩이 아무리 총애를 받는다 하나 감히 그 분수를 넘어서 황후 마마의 체면을 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디 황후의 침궁으로 거둬 주십시오.”

단은설의 말은 대의를 알고 분수를 아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황제는 몸을 옮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지만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즉위 이래 초하루와 보름마다 황후의 침궁을 비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 밤 이곳에 머문다면 내일 후궁은 발칵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단은설은 밀실 쪽을 힐끗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상왕비 쪽은 신첩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이곳에 오래 계시면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혹여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합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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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을 거슬러   제890화

    대문이 다시 닫히며 쇠사슬이 걸리는 소리가 울렸다. 커다란 전각 안은 또다시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서인경은 바닥을 기어 열다섯 째 황자를 끌어안았다.“연무성, 버텨. 우리는 반드시 여기서 나갈 수 있어.”열다섯 째 황자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두 손을 꽉 쥐고 온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는 눈물이 쏟아질까 두려워 차마 눈을 뜨지 못했고 말 한마디 하려다 아예 숨이 막힐까 봐 입도 열지 못했다.그러나 그의 이가 부딪히는 소리는 서인경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약왕곡으로 들여보냈다. 독을 완화하는 약환 두 알을 꺼내, 하나는 스스로 삼키고 다른 하나는 열다섯 째 황자의 입가로 가져갔다.“입 열고 어서 이것을 삼켜.”열다섯 째 황자는 힘겹게 입을 벌렸고 서인경은 그의 입 안에 약을 넣어 주었다.“조금만 더 버텨. 곧 괜찮아질 거야. 내가 반드시 해독법을 찾아낼게.”그때, 언제 다시 나타났는지 세 마리 악어가 물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그들은 물에서 꽤 멀리까지 몸을 끌며 미끄러져 와 서인경과 열다섯 째 황자 곁에 멈춰 섰다.그중 한 마리가 열다섯 째 황자의 몸을 킁킁거리며 맡았다.[삼일단혼단입니다. 저 황제, 정말 잔인하네요.]악어가 그 약환을 알아보자 서인경은 곧장 물었다.“삼일단혼단이 뭐야? 해독 방법은?”[서역에서 쓰는 특수한 독입니다. 중독되면 온몸의 경맥이 끊어진 것처럼 아파지지요. 사흘 동안 날마다 통증이 심해지고 해독제가 없으면 셋째 날엔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게 됩니다. 해독법은…]악어는 말을 흐렸고 세 마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서인경은 속이 타들어 갔다.“그게 뭐야? 어서 말해!”[일불락 순혈의 피가 있으면 독 발작은 완화됩니다. 헌데 완전히 풀려면 일불락 유적 한가운데 쌓인 눈이 녹은 물을 마셔야 해요.]일불락 유적의 설수. 지금 그걸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그제야 서인경은 깨달았다. 자신의 증상이 비교적 가벼운 이유는 몸속에 일불락 순혈이 흐르고 있어 독성이 일부 억제

  • 시간을 거슬러   제889화

    이치대로라면 황제는 어제 이곳을 떠난 뒤 태의들을 불러 자신의 건강 악화 원인인지 단은설의 혈액 때문인지를 확인했어야 했다. 서인경의 계획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해 황제와 단은설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었다. 태의들이 진단을 했다면 분명 약을 처방했을 것이고 약을 먹었다면 황제의 안색은 최소한 조금이라도 나아졌어야 했다.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경우는 하나뿐. 황제가 서로 상극이 되는 약물을 함께 복용하고 있다는 뜻이다.견기초의 해독제와 상극인 약물은 단 하나, 산호편이라는 식물뿐이었다. 고서에는 산호편이 수명을 늘려준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고 옛사람들은 그것을 갈아 장생불사 약을 만들곤 했다.하지만 서인경은 21세기 교실에서 이미 배웠다. 이 약효는 후대에서 전부 부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산호편은 그저 평범한 수초에 불과했다. 장생불사는커녕 감기 하나 고치지 못하는 아무 쓸모없는 풀일 뿐이었다.황제의 현재 반응을 보아 서인경은 확신했다. 그는 지금 산호편을 먹고 있다. 게다가 태의들은 황제가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서인경은 즉시 알아차렸다. 황제는 태의들 외에도 따로 다른 사람들을 불러 장생불사 약을 연구하게 하고 있었다는걸.황제가 말을 멈춘 뒤, 한참이 지나도록 서인경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가 기대한 것처럼 애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태도는 황제의 오만한 자존심을 정면으로 건드렸다. 그리고 그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약을 먹여라!”자신은 천자였다. 그런데 상왕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상왕비마저 자신을 이렇게 무시하다니.내시들은 명을 받자마자 앞으로 나와 서인경과 열다섯 째 황자를 붙잡았다.열다섯 째 황자가 발버둥 치며 외쳤다.“부황, 두 알 다 저에게 주세요. 제가 사촌 누님 대신 죽겠습니다!”황제는 이 철없는 아들을 노려보았다.“죽고 싶다면 짐이 바로 소원을 들어주지.”서 씨 가

  • 시간을 거슬러   제888화

    “사촌 누님, 만약 오늘 제가 돌아가지 못하면 신 황귀비마마께서 걱정하실 거예요.”열다섯 째 황자는 사실 모후가 걱정할까 봐 두려웠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모후는 늘 말했다. 자신이 다시 궁에 돌아온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고. 특히 사촌 누님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 경우 그녀까지 연루될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서인경 역시 바깥 하늘빛을 보고 있었다.황제는 애초부터 열다섯 째 황자를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 아이를 인질 삼아 서인경을 압박하려는 것일 터. 열다섯 째 황자가 여기 있는 한, 서인경은 결국 장생불사 약을 써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 황귀비 쪽에는 황제가 이미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두었을 가능성이 컸다.다만 신 황귀비가 이 상황의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있는 몸에 위에는 황후까지 얹혀 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무슨 일이 생기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서인경은 속으로 걱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열다섯 째 황자를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폐하께서 너를 여기 남겨두셨다면 신 황귀비마마가 의심하지 않도록 이미 손을 써 두셨을 거야. 신 황귀비마마도 똑똑한 분이니 폐하의 뜻을 나름대로 판단하실 거고.”열다섯 째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모후도, 신 황귀비마마처럼 자신 때문에 무모한 짓은 하지 않기를.서인경이 마음속으로 불안해하던 순간, 밖에서 철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세 마리 악어는 동시에 물속으로 휙 사라졌다.문이 열리기 전까지 수면은 다시 고요해졌고 남아 있던 물거품도 이내 사라졌다. 가장 먼저 빛에 반사된 한 쪽 다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석양을 등지고 황제가 천천히 걸어 들어와 서인경 앞에 섰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먹 자국을 힐끗 내려다보았다.종이는 두 장. 한 장은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누가 봐도 열다섯 째 황자의 필체였다. 다른 한 장은 몇 획밖에 없었고 글씨는 너무 못생겨 팔다리가 잘린 듯 보

  • 시간을 거슬러   제887화

    연기준은 도면을 받아 펼쳐 잠시 훑어보았다. 그 그림은 예전에 서 씨 가문의 서재에서 보았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았다. 그는 즉시 이 도면이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 짐작했다. 연기준은 붉은 점이 찍힌 위치를 머릿속에 단단히 새긴 뒤, 다시 내시에게 도면을 돌려주었다.“신 황귀비께 돌려드린 후 잘 보관하라고 전하거라. 훗날 다시 쓸 일이 있을 것이다.”내시는 냉궁이 신 황귀비에게 무슨 쓸모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도면을 챙기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자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내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후궁에서만 이십 년을 지냈지만 저런 경공은 대내의 최고 고수들조차 쉽게 보여주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오늘 밤 후궁에는 분명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바람 한 줄기가 스치자 내시는 목덜미가 싸늘해지는 느낌에 움찔했다. 그는 목을 움츠린 채, 작은 걸음으로 서둘러 신 황귀비에게 돌아갔다.냉궁.서인경은 턱을 괴고 앉아 흰 종이 위에 붓으로 이런저런 선을 그어가며 낙서를 하고 있었다. 열다섯 째 황자는 그녀 옆에 바짝 앉아 며칠 전 스승이 내준 숙제를 조용히 베껴 쓰고 있었다.어머니는 언제나 말씀하셨다. 어떤 상황에서도 학문만큼은 놓지 말라고.그 말을 그는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서인경이 그렇게까지 빡세게 안 해도 된다고 말해줘도 그는 끝내 붓을 놓지 않았다.물론, 그는 빡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끝내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연못가에서는 세 마리 악어가 나란히 턱을 물가에 얹은 채, 육지 위의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저 개 같은 황제, 장생불사 약이 그렇게 갖고 싶다면서? 그럼 내가 하나 만들어 줄까? 약환이랑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주지. 예전에 설산에 있을 때도 가짜로 속여먹는 데는 내가 최고였는데, 뭐!]악어 한 마리의 말을 듣고 서인경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페하가 바보도 아니고, 궁 안에 태의들만 몇 명인데. 네가 약환 하나 내놓으면 바로 가짜인 거 들통나겠지

  • 시간을 거슬러   제886화

    연기준은 편지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고 그대로 맹경운에게 건넸다.“요동 쪽 사람들이 진국에 이렇게 오래 머무른 데에는 역시 문제가 있었군.”맹경운도 받아 들고 잠깐 읽어보더니 이내 머리를 짚었다.“저 금수 대장공주... 시집간 지가 몇 년인데 이제 와서 진국의 황위를 넘보겠다는 겁니까?”연기준의 표정은 담담했다.“그 여자는 어려서부터 성조 선제의 말등 위에서 자랐다. 야망은 성조 선제를 닮았고 성정은 태황태후를 닮았지. 목적을 이루기 전엔 절대 멈추지 않는 성격이야. 젊을 때 품은 집념은 한 번쯤 직접 해보지 않으면 결국 후회로 남는 법이지.”맹경운이 걱정스레 물었다.“그럼 지금은 어떻게 할 겁니까? 저 여자가 갑자기 끼어들면 계획이 망가질 수도 있잖아요.”연기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요동 쪽 첩자들에게 연락하거라. 요동 황후가 궁을 비운 지 너무 오래됐다. 후궁이 이렇게 조용하면 정상이 아니지.”맹경운은 순간 몸이 서늘해졌으나 곧 뜻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후궁에 불장난을 하려는 거군요. 재미있습니다. 요동 황제도 그 여자한테 그렇게 오래 눌려 살았으니 그녀 없는 사이에 한 번쯤 숨 좀 쉬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맹경운이 주루를 나설 즈음엔 이미 해질녘이었다. 서쪽 하늘로 기울어진 노을이 금빛으로 대지를 덮고 있었다. 주루 문을 막 나서자마자 맹은영이 숨 가쁘게 달려와 그를 불렀다.“셋째 오라버니, 큰일 났습니다! 진짜 큰일이예요!”맹경운은 피곤하다는 듯 대꾸했다.“너희 셋째 오빠는 아주 잘 살아 있다.”맹은영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밀었다.“장난 아닙니다! 방금 사람 하나를 본 것 같아요.”맹경운은 혹시라도 연기준을 봤다는 말이 나올까 봐 식은땀이 났다. 이 아이는 말을 거르지 않고 내뱉어, 흥분하면 쓸데없는 말까지 죄다 흘리고 다니는 성격이었다.그는 맹은영의 뒷깃을 붙잡고 사람 없는 쪽으로 끌고 갔다.“길거리에 널린 게 사람이다. 헌데 네가 본 사람이 뭐가 대수라고.”끌려가며 맹은영이 말했다.“헌데 내가 본 사

  • 시간을 거슬러   제885화

    금수 대장공주는 곧바로 반박했다.“본궁은 그저 순간 감정에 휩쓸려 내뱉은 말이었을 뿐이야. 화가 나서 한 말이었단 말이야.”서왕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허나 저는 태황태후의 뜻을 받들어 혼인한 것이 순간의 충동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마마와 한 길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성조 선제께서는 저를 길러주신 은인이셨고 저는 일생 동안 연 씨 황실을 지키고 진국의 백성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 맹세를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헌데 마마께서는 오직 위로 오르는 것만을 원하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서왕부 전체를 금란전 구오지존의 자리에 올려놓고 싶어 하셨지요. 허나 그런 선택은 반드시 조정을 뒤흔들 것입니다. 그 순간 진국은 안으로는 혼란에 휩싸이고 밖으로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 조금만 삐끗해도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연 씨 황실은 뿌리째 흔들릴 겁니다. 마마께서 원하시는 것은 너무 많습니다. 송구하오나, 저는 그것을 감당해 드릴 수 없습니다.”서왕은 한때, 전장에서 바람처럼 달리던 그 소녀를 진심으로 좋아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독수리처럼 하늘을 집어삼키려는 그녀의 야망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그는 인정했다. 아마도 자신은 그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맹세를 어기고 백성의 생사를 외면할 만큼은 사랑하지 못했다. 성조 선제를 배신하는 일은 그에게는 더더욱 불가능했다.금수 대장공주는 처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그녀가 급히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 서왕은 이미 혼인한 뒤였다. 두 사람이 다시 마주했을 때, 그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남겼을 뿐,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후 그녀가 분노에 차 요동으로 시집가 버린 뒤로는 이런 말을 들을 기회조차 사라졌다.지금에 와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들어도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이 남자에게 더 깊은 실망만 쌓일 뿐이었다.“너는 아버지를 저버릴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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