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귀국 이틀 뒤, 성수동 루시엘 본사 R&D 퍼퓸랩.
여진의 연구실 문에는 금빛 명패가 새로 붙어 있었다.
[ 총괄 디렉터 윤서린 ]
여진은 명패를 지나쳐 보안 토큰을 태그했다. 자신이 작성한 연구 기록과 특허 변경 이력을 법적 절차에 맞게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생산 공정 관리 시스템을 확인하던 여진의 손이 멈췄다.
생산팀 메신저에는 지난 일주일 동안 긴급 지시가 쏟아져 있었다. 충전 라인은 24시간 가동됐고, 품질팀의 보류 요청은 대표이사 지시라는 이유로 묵살돼 있었다.
[ NOIR17_v0.84_BATCH_TEST ]
양산 라인에 투입된 것은 최종 마스터 포뮬러가 아니었다.
석 달 전, 향의 골격만 맞춘 뒤 장기 안정성 시험을 진행하던 테스트 버전이었다. 광산화 방지제와 금속이온 억제제의 최종 비율도 확정되지 않은 처방.
“이걸 왜 생산에 넣었지?”
상세 결재 이력을 열자 답이 나왔다.
여진이 원본 문서에 남겨 둔 경고문이 통째로 삭제돼 있었다.
[ 고온·자외선 노출 시 변색 및 산패 가능성 있음. 6개월 장기 안정성 시험 미완료. 최종 검증 전 양산 절대 금지. ]
삭제된 자리에는 대표이사 강태혁과 윤서린의 승인 서명이 찍혀 있었다.
[ 파리 론칭 일정 준수를 위해 시험 기간 단축. 즉시 양산 진행. ]
문서 수정 시각은 여진이 파리행 비행기에 오른 직후였다. 반박하거나 생산을 멈출 사람을 의도적으로 비운 뒤 승인한 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진이 지정한 차광 코팅 보틀은 원가가 낮은 반투명 용기로 바뀌어 있었다. 불안정한 천연 향료를 빛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선택이었다.
***
이 처방은 처음 2주 정도는 멀쩡하다. 출고 검사에서도 기준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았다. 향수의 안정성 사고가 무서운 이유였다. 공장을 떠날 때가 아니라 소비자의 화장대 위에 오른 뒤 문제가 드러난다.
베르가모트와 장미 향도 유지된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빛과 열을 받은 원료가 빠르게 산화하면 변색과 침전이 시작되고, 상큼한 탑노트는 금속 냄새와 시큼한 산패취로 뒤틀린다. 피부 자극 가능성도 커진다.
여진은 완제품 샘플 한 병을 형광등 아래 들어 올렸다. 아직은 맑은 보랏빛이었다. 하지만 바닥을 기울이자 아주 미세한 탁도가 보였다. 숙련된 사람만 알아챌 수 있는 초기 신호였다.
여진은 잠시 전화기를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생산을 멈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스템에는 이미 자신이 남긴 경고가 있었다. 태혁은 그것을 읽고도 지웠다. 서린 역시 승인란에 서명했다.
태혁에게 전화를 걸어도 그는 또 ‘일정’과 ‘매출’을 앞세울 것이다. 이미 안전성 검토를 건너뛰라는 최종 지시까지 내렸다.
여진은 고의로 결함을 만든 적이 없었다.
안전장치를 제거한 사람은 그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작성한 문서와 접근 가능한 감사 로그를 전자증거 수집 프로그램으로 채증했다. 원본 해시값과 수집 시각은 곧바로 법률 대리인에게 전송됐다.
채증이 끝나자 여진은 사내 감사팀과 품질책임자에게 원본 경고문을 다시 발송했다. 수신 시각과 열람 여부까지 남겼다. 이제 누구도 경고를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때 화면 오른쪽 아래에 알림이 떴다.
[ 〈NOIR 17〉 글로벌 초도 물량 50만 병 선적 완료 ]
여진은 알림을 오래 바라봤다.
이미 배는 출항했다.
태혁과 서린이 훔쳐 간 것은 완성된 기적이 아니었다.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은 시한폭탄이었다.
1년 뒤, 파리 8구의 유서 깊은 프라이빗 살롱.[ HAN YEJIN PARFUMS ] [ FIRST SIGNATURE — 〈L’ORIGINE〉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로 세계 각국의 뷰티 에디터와 바이어들이 모였다. 객석 맨 앞에는 연구원들과 품질책임자들이 앉아 있었다. 여진은 누구의 공로도 숨기지 않았다.살롱을 채운 향은 고결한 아이리스와 맑은 화이트 티, 깊은 샌들우드로 이어졌다. 여진이 독립 연구소에서 완성한 안정화 기술을 적용해 빛과 온도 변화에도 잔향이 흐트러지지 않는 첫 작품이었다.6개월 장기 시험과 광노화 검증을 마친 뒤에야 생산됐다. 누구도 경고문을 지우지 않았다.〈L’ORIGINE〉.‘기원’이라는 뜻의 이름.잃어버린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자신의 이름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선언이었다.사전 공개 물량은 파리와 뉴욕, 도쿄에서 매진됐다. 평론가들은 화려한 첫인상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지는 구조를 높이 평가했다.보틀 뒷면에는 개발팀 이름과 생산번호가 새겨졌다. ‘마스터 퍼퓨머 한여진’은 최종 책임자의 정확한 표기였다.여진은 백스테이지에서 보틀을 들었다.처음 이 도시의 무대에 섰던 날, 여진은 다른 여자의 이름이 적힌 〈NOIR 17〉을 쥐고 있었다.오늘 보틀 전면에는 단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누군가에게서 되찾아 온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는 법을 배운 이름이었다.[ HAN YEJIN ]***서재현이 태블릿을 들고 다가왔다.“한국에서 1심 판결 소식이 왔습니다.”강태혁은 업무상 배임과 전산 기록 조작, 허위 광고 및 명예훼손 관련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법원은 품질 경고를 알고도 삭제한 점과 여진에게 책임을 전가
다음 주 화요일, 남산이 내려다보이는 비즈니스 클럽.여진의 맞은편에는 오리온 에셋 투자총괄 서재현이 앉아 있었다.단정한 네이비 수트, 군더더기 없는 말투. 재현은 인사보다 먼저 여진이 건넨 시향지를 받았다.테이블에는 12주 가속 시험 중간보고서도 놓여 있었다. 재현은 그 문서부터 펼쳤다.아이리스의 투명한 첫 향 뒤로 샌들우드의 온기가 천천히 올라왔다. 그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향이 마르는 과정까지 확인했다.“좋군요.”과장 없는 한마디였다.“첫 10분보다 30분 뒤가 더 좋습니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네요.”“아직 최종본은 아닙니다.”“그래서 더 믿음이 갑니다. 완성되지 않은 것을 완성됐다고 말하지 않으니까요.”여진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대부분의 투자자는 첫 향과 포장부터 물었다. 재현은 잔향과 안정성부터 봤다.“3년 전 그라스 엑스포에서도 그랬습니다.”재현이 시향지를 내려놓았다.“다들 화려한 원료를 골랐는데, 한 수석님은 산화된 샘플 하나를 찾아냈죠. 그때부터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오리온은 루시엘의 2대 주주였죠. 왜 더 일찍 연락하지 않으셨습니까?”“기술의 주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건 우리 책임입니다.”재현은 변명하지 않았다.“그래도 루시엘 소속 기술자를 빼오는 방식으로 바로잡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법적 정리가 끝나고 한 대표님이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맞다고 봤습니다.”짧고 분명한 답이었다.***재현은 투자 제안서를 펼쳤다.[ HAN YEJIN PARFUMS 설립안 ]초기 투자금은 미화 3,000만 달러. 연구소 구축과 제품 검증, 해외 진출 성과에 따라 단계별로 집행하는 계획이었다.지분은 한여진
태혁은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사랑했어. 지금도 사랑해.”그는 바닥을 기어오듯 다가와 여진의 바짓단을 붙잡으려 했다.“회사 때문에 잠깐 미쳤던 거야. 우리 처음 반지 맞추던 날 기억 안 나? 네가 만든 라벤더 향 맡으면서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했잖아.”여진은 손길을 피했다.“스스로를 속이지 마요.”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당신이 사랑한 건 내가 아니에요.”여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 문장을 말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여진아.”“내가 밤새워 당신 손에 쥐여준 결과물이었지.”여진은 젖은 주식 양도 의향서와 합의안을 내려다봤다.“내가 만든 향, 내가 올려준 회사 가치, 그 덕분에 얻은 대표라는 명예. 당신은 그걸 사랑했어요. 그래서 내 실력은 마음껏 쓰면서도 내 이름은 지워도 된다고 생각한 거고.”“아니야. 난 네가 필요해.”“지금도 ‘사랑한다’가 아니라 ‘필요하다’고 말하네요.”태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래도 5년이야.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한순간에 버려?”“날 무대 뒤에 세우고, 발명자 이름을 빼앗고, 550억 원의 책임까지 뒤집어씌우려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네요.”여진은 휴대전화를 들어 경비업체 긴급 호출 버튼을 눌렀다.“1분 안에 보안요원이 옵니다.”“여진아, 제발.”“이제 당신 몫은 당신이 책임져요.”“내가 감옥에 가도 상관없어?”“그건 제가 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한 일과 법원이 정하겠죠.”여진은 결혼 내내 그의 문제를 먼저 수습하던 습관을 끝냈다.***보안요원들이 들어와 태혁을 일으켰다.그는 문밖으로 끌려가면서도 여진의 이름을 불렀다. 여진은
대표이사에서 해임된 날 밤.한남동 골목에는 장대비가 쏟아졌다.여진의 아틀리에 안은 따뜻한 조명과 아이리스, 샌들우드 향으로 고요했다. 막 마지막 시향을 끝내려던 순간 유리문이 거칠게 흔들렸다.“한여진!”문 앞에는 강태혁이 서 있었다.출입문 비밀번호는 바뀌어 있었지만, 예약 고객이 나가는 틈을 타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그가 지나온 빗물이 길게 번졌다. 여진은 즉시 카운터 아래 보안 버튼 위치를 확인했다.젖은 수트는 흙탕물로 얼룩졌고, 턱에는 며칠째 면도하지 않은 수염이 자라 있었다. 한 달 전 파리에서 샴페인을 들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하지만 여진은 가엾다고 느끼지 않았다. 태혁의 몰골은 누군가가 망가뜨린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내린 선택들이 돌아온 모습이었다.여진은 스포이트를 거치대에 놓았다.“영업 끝났습니다. 나가세요.”태혁의 다리가 풀리듯 꺾였다.그는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제발 한 번만 들어줘.”품 안에서 젖은 서류 봉투를 꺼냈다.자신이 보유한 루시엘 주식 양도 의향서.가압류된 지분을 태혁은 당장 넘길 수 있는 선물처럼 내밀었다.특허 발명자 정정에 전면 협조한다는 확인서.이혼과 민사소송에서 여진의 청구를 수용하겠다는 합의안.“내 지분 전부 네게 줄게. 발명자도 바로잡고, 손해배상도 네가 부르는 대로 할게.”“당신에게 지금 마음대로 줄 수 있는 게 얼마나 남았죠?”태혁의 얼굴이 굳었다.“방법은 만들 수 있어. 네가 동의만 하면 돼.”여진은 서류에 손대지 않았다.“이미 법원과 특허 당국이 처리할 일입니다.”“네가 회생절차에 참여하면 투자자들이 다시 검토하겠대. 한여진이 돌아온다는
수요일 오전 10시, 루시엘 임시 주주총회.강당은 소액 주주와 기관 투자자, 채권자들의 항의로 소란스러웠다. 입구에서는 위임장과 의결권 수를 다시 확인했고, 회의 전부터 해임 찬성표가 압도적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단상에 선 사외이사가 의사봉을 들었다.“제1호 의안, 강태혁 사내이사 해임의 건을 상정합니다.”맨 앞줄의 태혁이 벌떡 일어났다.“제가 이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해외 유통망과 투자 네트워크도 전부 제가 만들었습니다. 지금 저를 내보내면 루시엘은 정말 끝입니다.”태혁이 준비한 매출 그래프의 제품 대부분은 여진이 개발한 것이었다. 자신의 자료가 오히려 그녀의 기여를 증명했다.2대 주주인 오리온 에셋 측 대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우리가 투자한 이유는 독보적인 R&D와 제품력이었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그 기술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지우고, 검증되지 않은 처방을 강행해 회사를 550억 원의 위험에 빠뜨린 경영자를 더 신뢰할 수 없습니다.”대리인은 연구 기록을 띄웠다. 매출 상승 시점은 여진의 신제품 출시 시점과 겹쳤다.강당 곳곳에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터졌다.태혁은 마이크를 붙잡았다.“한여진이 돌아오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설득하겠습니다.”“한 수석은 이미 복귀 의사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마지막 방패까지 사라졌다.태혁은 투자자들에게 개인 보증까지 서겠다고 했지만 이미 자산은 가압류 상태였다. 대표직을 유지할 명분도, 회사를 살릴 자금도 내놓지 못했다.***“표결 결과, 찬성 94.8%로 강태혁 사내이사 해임안이 가결됐습니다.”의사봉이 세 번 울렸다.이어 기업회생 절차 신청과 강태혁 전 대표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안건도 통과됐다.
월요일 오전, 윤서린의 단독 인터뷰가 공개됐다.[ 윤서린 “강태혁 대표의 가스라이팅에 속은 피해자” ]영상 속 서린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눈물을 닦았다. 뒤에는 조명도 브랜드 로고도 없었다. 파리 무대에서 완벽하게 계산했던 표정과 달리, 이번에는 약자로 보이기 위한 연출이었다.“저는 마케팅 디렉터로 참여했을 뿐입니다. 강 대표가 ‘검증이 끝난 기술이고 한여진 수석도 동의했다’고 말해 믿었습니다. 발명자 등록과 생산 승인 과정은 전혀 몰랐습니다.”그녀는 강태혁을 사기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밝혔다.인터뷰 기사는 ‘첫사랑에게 이용당한 여성 임원’이라는 제목으로 포장됐다. 서린은 자신이 먼저 여진을 범인으로 몰았다는 사실도, 품질회의에서 연구진을 압박한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550억 원의 책임과 형사 수사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선 긋기였다.***압류 통지서가 쌓인 대표실에서 기사를 본 태혁은 휴대전화를 집어 던질 뻔했다.“윤서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태혁은 비서도 없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회사 안에서 그의 지시를 받아 줄 사람은 거의 남지 않았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소리쳤다.- 사실대로 말한 거예요.“네가 이름 단독으로 넣어달라고 했잖아! 파리 무대에서 네가 만든 향수라고 떠들 때는 좋았지?”- 그 무대를 만든 건 당신이에요. 나는 당신이 준비한 대본을 읽었고.“특허 서류에 직접 서명한 건?”- 대표가 시키니까 한 거죠. 내가 법률 전문가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요?서린의 목소리는 눈물 섞인 인터뷰와 달리 차갑고 또렷했다.“우리가 어떻게 사랑했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사랑?짧은 웃음이 들렸다.- 성공한 뷰티 회사 대표라서 만난 거예요. 550억 빚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