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경계가 발생한 뒤 재빠르게 어머니를 외가로 보낸 결정은 정말 탁월했다. 평생을 고결하게 살아오신 어머니가 이 수모를 겪으셨다면 분명 까무러치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황궁 기사단 중에 가장 말단에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이는 기사단이라고 해도 황제를 가장 측근에서 호위하는 셀레스티얼 가드 기사단 중 하나였다. 그러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글린트 기사단 근위병들의 천박함을 너무 얕잡아 봤던 것일까.
“야야! 이것 봐! 제국 최고 미녀라더니 몸매도 끝장나는데? 내가 포박해도 되나?”
“잘 붙들어봐. 우리도 같이 감상하게—, 크크큭.”
하급 근위병들이 끈적한 시선으로 힐끔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저열한 농담이 그 뒤를 이었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무례를 넘어서서 천박하고 추잡스러웠다.
검을 쥐는 것조차 서투른 말단의 기사 놈들에게 한낱 노리개 따위로 비치다니. 당장이라도 천박한 눈깔들을 파내고 혀를 잘라버리고 싶은 살의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쓰레기 같아도 엄연히 황명을 수행하는 집행관들이었다. 가솔들의 목숨이 걸려 있으니 이 치욕을 씹어 삼켜야 했다.
애먼 입술에 피가 맺히도록 짓이기며 참을성의 한계를 체감하던 때였다.
빡!
제법 날렵해 보이는 선임 근위병 하나가 나를 희롱하던 기사들의 정강이를 빡 소리가 나도록 발로 찼다. 발에 차인 하급 기사들은 정강이를 쥐고 바닥을 굴렀다.
“끄아아악!”
소란을 듣고 다가온 발터 소대장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대체 무슨 소란이지?”
“발터 소대장님께 인사 올립니다. 이 덜떨어진 놈들이 포박은 안 하고 백작 영애 몸매를 두고 품평질을 하기에 훈육했습니다.”
선임병의 말에 발터는 손을 들어올렸다.
퍽—!!
힘이 실린 따귀는 마치 주먹으로 내려친 것처럼 둔탁한 소리가 났다. 당황스러워 헉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갔다. 발터 소대장이 선임 근위병의 뺨을 사정없이 내려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죄인들 포박하는 거지 백작 영애 모시러 온 건 줄 알아! 정신 차려! 세드릭, 이 멍청한 새끼야!” 바닥에 나동그라진 세드릭 선임 근위병은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재빨리 다시 자세를 다잡고 섰다. “시정하겠습니다!”
발터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세드릭의 가슴을 퍽 퍽 소리가 나도록 여러 차례 두들겨 팼다.
퍽 퍽 퍽
“크윽!!”
세드릭은 마지막 주먹에 억눌린 신음을 뱉었다. 발터 소대장은 씩씩대며 얼얼해진 주먹을 펴 털어냈다.
“이제 다 망한 귀족년 얼굴이나 보고 정신들이 빠져선! 하트먼은 이제 전부 반역 죄인이라는 것도 잊었어?”
반역 죄인이라니! 그럴 리 없다. 설마 경계 때문이라면 모든 절차는 제국법을 준수해 진행했고 마지막 보고일까지 아직 이틀의 기간이 남아 있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발터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마치 더러운 매춘부를 본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그 눈빛에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노골적인 멸시에 뱃속 깊은 곳에서 불쾌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눈을 질끈 감은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발터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세드릭! 뭐 하고 있어? 빨리 포박해!”
세드릭은 가슴팍을 문지르며 다가와 포승줄을 걸었다. 폭행당한 세드릭에게 괜한 책임감을 느꼈다. 하트먼은 은원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러니 그에게 반드시 보답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말뿐인 감사일지라도…….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세드릭은 입술을 꾹 다물고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목을 조이는 매듭이 너무 옥죄지 않도록 느슨하게 여유를 남겨주며 뒤돌아 설뿐이었다.
* * *
백작령을 벗어나자 어이없게도 리하르트가 나타났다. 얼굴이 콩알만 해 보일 정도로 먼 거리였으나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포박당해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를 조롱하기 위해 왔을 것이다. 그가 죄인을 조롱할 목적으로 왔다고 한들 벨테레브의 소공작을 일개 황실 기사단이 막을 수도 없었다.
반역이라는 말도 안 되는 누명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황에 그 낯짝을 마주해야 한다니. 이가 뿌득 갈렸다.
리하르트가 능글맞은 그 특유의 미소를 얼굴에 띤 채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결국 내 바닥을, 이 비참한 몰락을 기어코 구경하러 오셨다?’
천박한 근위병들에게 당한 끔찍한 치욕과, 멸문지화를 관람하러 온 전 약혼자를 향한 극도의 혐오감이 마지막 한계치까지 위태롭게 쌓였다. 그 위에 그의 모란꽃 같은 미소가 더해지는 순간 툭, 하고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평소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이었다.
“포박당해 끌려가는 꼴을 감상하러 이 새벽에 납시다니, 그 노력이 참 가상하군요. 다 보셨으면 이제 꺼지시지요.”
서릿발이 날릴 것 같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화를 내기는커녕 뺨을 타고 흐르는 타액을 엄지로 스윽 닦아 보란 듯이 혀끝으로 핥아 올렸다.
“소백작, 내 취향은 입술을 맞댄 상태로 나누는 것이니 다음엔 뱉지 말고 입을 맞추시죠.”
격한 혐오감이 일어 미간을 팍 구겼다.
“…… 미친놈.”
그는 오히려 생긋 웃어 보였다. 오만하고 관능미 넘치는 미소는 오히려 불편한 심기를 더 자극했다.
황명과 관련 없는 그를 공격하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검을 빼앗을 요량으로 지척에 있는 근위병을 힐끔 확인했다.
방금까지 나를 희롱하던 근위병들이 옆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발터 소대장도 마찬가지였다.
리하르트 소공작의 눈치를 보느라 내게 함부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다.
정작 그는 내 곁에 뒷짐을 지고 유유히 걸어갈 뿐이었다.
“어떻습니까? 아직 위자료를 보내지 않았으니 파혼이 성사된 건 아니지요? 이럴 때 약혼자 덕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리하르트가 나를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곤 그의 말을 못들은 척 했다.
그가 나타난 뒤로 노골적으로 더러운 욕망을 내비치던 인간들이 잠잠해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 뒤로도 그는 말을 걸거나 조롱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곁에서 함께 걸으며 해가 비치면 양산을 씌워 햇빛을 막아주거나, 사람들이 지나가면 망토 자락을 들어 수치스러운 얼굴을 숨겨 주거나 할 뿐이었다.
정말 내 옆에 딱 붙어서 마치 내 남편이라도 된 것처럼 묵묵히 걷기만 했다.
내 유일한 흠결이었던 그가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천박한 시선들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유일한 방패라는 사실이 지독하게 씁쓸했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곁을 지키는 그 작은 행동이 비참한 지금의 내게는 위안이 되었다는 것을…….
* * *
황궁에 도착하자 기사들이 가솔들을 무릎 꿇렸다. 힐끔 쳐다본 황제 옆으로 낯선 복장의 사람들이 보였다. 팔을 겹친 형태의 옷에, 기이한 문양을 박아 넣은 비단옷을 보니 분명 장제국 사신들이다.
장제국은 곡식을 수입하기 위해 가장 긴밀하게 접촉한 곳이었다. 그 과정에서 경계의 존재가 알려졌다. 저들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교역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황제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하트먼 백작, 어떻게 경계가 생겼다는 것을 감추고 곡식을 풀어 시장을 혼란에 빠뜨릴 수가 있소. 자네가 어찌 황제인 나를 이리도 능멸할 수가 있단 말이오!”
황제는 이미 경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장제국 사신들이 그 가벼운 입을 놀렸을 것이다.
나는 부디 황제가 위정자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황제 폐하, 하트먼의 여식 에스텔입니다. 장제국 사신들을 통해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나 봅니다. 저들이 천년 전 친제국 황제가 어떤 이였는지도 말하였습니까?”
사신들은 황제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그들이 있는 그대로 황제에게 고해바쳤을 리 없다. 어떻게든 이 점을 이용해 황제를 설득해야 했다.
“과거 친제국은 대규모 제사를 지냈지요. 그로 인해 엄청난 수의 제국민이 굶어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경계는 굳건했고 결국 인신 공양을 했습니다. 이 일로 친제국 황제는 무려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희대의 폭군이자 최악의 난군이라 불립니다.”
장내가 웅성거리는 소리로 요란해졌다.
쾅!
나는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발을 크게 굴렀다. 소란하던 장내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백작가에서 미곡을 풀고 경계가 생긴 것을 함구한 것은 시장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계의 크기와 피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한 시간을 벌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조차도 합법적인 ‘보고 유예 기간’ 내에 이루어진 일이지요.
아노리스 제국엔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고 관리할 인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노리스 황제께서는 폭군이자 난군이었던 친제국 황제의 전철을 밟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서늘한 음성이 알현장의 공기를 갈랐다. 장내에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폭군이니, 난군이니 하는 말에 황제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조용한 가운데 에네스트 공작이 거수해 의견을 표했다.
“폐하, 그 괴이한 균열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으니 실태를 파악하고 관리할 이들을 추려야 한다는 하트먼 소백작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하트먼이 보고 유예 기한 마감 전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셨지 않습니까. 균열의 크기와 그 일대의 환경, 생태 변화, 괴물에 대한 상세한 자료까지. 하트먼이 상황 파악을 하고자 시간을 썼다는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다. 한달이라는 기간 동안 하트먼의 그 누구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균열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앙을 어떻게든 이겨보겠다는 하트먼의 의지가 담긴 보고서였다. 그러니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황제는 에네스트 공작의 발언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하트먼의 에스텔, 자네의 영특함은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지. 하트먼 백작 또한 누구보다 아노리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이 제국 안에 내게 충심어린 직언을 아끼지 않는 것이 하트먼 뿐임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
'됐다. 거의 다 넘어왔어.'
황제의 표정이 풀어졌다. 법을 어긴 적 없는 하트먼을 죄인처럼 끌고왔으나 너그럽게 용서하는 형태를 취하려는 것이다. 황제의 영향력을 뭇귀족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줄 두번다시 없을 기회인데다 하트먼에 멍에를 씌워 제 발 아래 두고 충성심을 확인하려는 것이리라.
하트먼은 여전히 황제에게 충성한다는 단 한 마디면 되었다. 그 한 마디로 이 끔찍한 연극은 막을 내릴 것이다. 나는 그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깊은숨을 들이켰다.
그때였다.
정적을 찢고, 누군가의 악의 어린 목소리가 비수처럼 꽂혀 들었다.
“저는 하트먼 백작가 가신 쇼어입니다! 황실에 알려야 한다는 의견을 묵살한 백작과 그 여식의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폐하!”
“레이야!” 내 다급한 부름에 문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짐승이나 다름없었던 리하르트가 내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레이야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세상에, 도련님이 잠드셨잖아!” 하녀 하나가 내 옆으로 다가와 손짓을 섞어가며 물었다. “세상에, 부인, 뭘 하신 거예요? 대체 무얼 어찌하신 겁니까. 저희가 열 명이 넘게 달라붙어도 제어하지 못했는데…….” 시종들의 혼란스러운 눈빛에 그간의 팽팽했던 긴장이 무너지며 허탈한 헛웃음이 흘렀다. “아무 짓도 안 했어. 소공작은……그저 제 풀에 지쳐 잠들었을 뿐이야.” 내 대답에 사용인들의 눈이 존경심으로 반짝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레이야가 먹먹해진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레이야는 내 손을 쓰다듬었다. 손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리하르트를 힐끔 돌아봤다. 짐승처럼 헐떡이던 숨이 안정되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익숙한 듯이 움직였다. 의연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이런 상황을 여러차례 겪었을 것이다. 리하르트가 했던 말을 천천히 떠올렸다. 내성이 있다고 했던 말은 아마 거짓일 것이다. 레이야가 따뜻
대본성의 공작 부인 전담 시녀가 꽃꽂이 중인 공작 부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공작 부인은 분노에 휩싸여 꽃 머리가 잘려 나가는 것도 모르고 가위질을 계속했다. “하하하. 리하르트가 왜 이렇게 속을 썩일까?” 알렉시스와 황제가 기사단에 심어놓은 끄나풀은 고작 여섯. 그중 두 명이 식을 올리기도 전에 리하르트 손에 죽임을 당했다. 하트먼 영애의 침실을 훔쳐보았다는 사유였다. 공작 부인은 남은 끄나풀들의 근무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부 기사단장에게 엄청난 돈을 쏟았다. 그렇게 겨우 끄나풀을 첫날밤 아비스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네 명이 모두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공작 부인은 전지가위를 바닥으로 내던지며 물었다. “그래서 소공작이 기사들을 처리한 사유가 뭐라고 하더냐?” “소공작 독살 미수 혐의입니다. 소공작께서 직접 처단하셨고,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는 하나 독을 대량 들이마셔서 현재는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시다고 합니다.” “고작 그런!” 리하르트는 최음향으로 앓고 있는 것을 독살 미수로 교묘하게 바꿔 끄나풀들을 전부 해치워버렸다. 공작 부인은 증오심이 깃든 그 파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어린 시절의 리하르트를 떠올렸다. “하……. 네가 구원해야 할 건 프레드잖니, 리키.” 으그극! 공작 부인의 손아귀에 꽃봉오리가 잔인하게 으스러졌다. 전담 시녀가 공포감에 손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늦은 밤, 소공작의 주도로 아비스의 호위가 한차례 바뀌었다. 그 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듯한 사람이 드디어 아비스 별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비스 별관을 지키던 사용인들은 이미 언질을 받아 익히 알고 있었다. 까만 가면에 까만 로브,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까만 차림의 사람이 아비스로 온다면 그건 틀림없이 프레데릭 공자라는 것을.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신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 문을 열자 실신해 있는 에스텔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얼굴에 늘어붙은 적갈색 가발을 벗어 까만 가면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활짝 열린 창으로 스며든 한기에 서늘해진 침실의 온도가 그제야 피부에 와 닿았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그녀의 옆에 누웠다. 에스텔은 옆에 다가온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온통 땀투성이에 비정상적으로 빠른 맥박, 높은 체온. 프레드는 지독한 열병을 앓는 그녀를 안으며 죄책감에 미간을 구겼다. 리하르트가 발 빠르게 사람을 보내온 것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끔찍한 상황을 제때 알지 못했을 것이다. ‘리키도 지금쯤 제정신이 아닐 텐데…….’ 프레드는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뒤 황제와 공작의 첩자들을 직접 청소하고 있을 리하르트에게 잠시나마 깊은 감사를 느꼈다.
쨍그랑!!손에 들린 잔이 바닥으로 힘없이 곤두박질쳤다.잔을 떨어뜨렸음에도 손이 처참할 정도로 떨렸다. 구석구석 예민한 곳까지 일깨우는 듯한 열감이 분노를 만나 순식간에 온몸을 집어삼킨 탓이다.흘러내린 독주에 치맛자락이 볼품없이 젖어 들었다.리하르트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에스텔?”예민해진 감각은 작은 움직임조차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도발로 다가왔다.‘정신 차려야 해.’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날 선 고통으로 이 지독한 혼미함을 떨쳐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얼마 전 허벅지에 생긴 상처를 떠올렸다. 아문 지 얼마 안 되었으나 그 연한 살을 헤집는다면 그 어떤 곳보다 강한 고통을 줄 것이다.깨진 유리 조각을 향해 힘겹게 한 발짝 내디뎠다. 눈앞이 일렁이고 어지러웠다. 몸이 비틀, 하고 크게 휘청이자 어느새 다가온 리하르트가 내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하아…… 미치겠군. 당신의 그 가혹한 취향에 장단을 맞춰주기엔, 내 인내심이 그리 훌륭하지 못해서요."그의 뜨거운 입김이 목선을 타고 올라와 귓불을 아찔하게 스쳤다. 평소라면 기겁하며 그를 경멸하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옷자락을 꽉 쥔 채 입술 틈새로 미처 다 삼키지 못한 야릇한 신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스루삐입니다. 한가위 명절을 맞이하여 연휴기간 업로드분을 선행하여 21~23일 총 3일간 연참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기간 : 9월 21~23일 (총 3일)대상 회차 : 22~27회차 (총 6회차)업로드 방식 : 1일 2회 연속 업로드정상 연재 복귀일 : 27일 연참은 본 연재 시간이 아닌 오후 6:03~6:05분에 업로드 되며 2회차분이 연속 업로드됩니다. 연참 이후 3일간 휴재, 27일부터 오전 6:41분에 정상연재 됩니다.풍요로운 한가위 보내세요 :)스루삐 올림.
“고, 공작 부인!” 잔뜩 상기된 얼굴로 공작 부인을 불렀다. 내 자존심을 짓밟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어떻게 똑같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쌍둥이 아들에게 동생의 여인을 취하라고 말할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사고방식에 한마디하려는 찰나, 리하르트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만류했다. “공작 부인께서 아우 내외를 걱정하는 마음이 이리 깊으실지 몰랐습니다. 저 또한 아우가 소중하답니다. 걱정할 일은 만들지 않겠습니다. 들어가 쉬시지요.” “리하르트 벨테레브! 후—. 벨테레브는 손이 귀하다는 걸 명심하세요. 내 첫째 아드님 또한 결국엔 벨테레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공작 부인은 다시 서릿발이 날릴 것 같은 목소리로 경고하고 뒤돌아섰다.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리하르트의 팔을 거칠게 쳐냈다. “설마, 공작 부인의 명을 따르려는 건 아니겠죠?” “아마 이 공작저에 있는 모든 사람 중 그대의 티아라를 벗겨줄 사람은 저뿐일 겁니다. 제가 끝내 거절한다면 공작이 이 자리를 대신할 테니까요. 이 공작저에 남아 있는 벨테레브라곤 저와 아버지 둘뿐이니까요. 그래도 한때나마 약혼자였던 사람이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미치지 않고서야. 말도 안 되는 모욕이었다. 손이 귀한 벨테레브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 나를 출산 도구처럼 사용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겐 내 몸속에 자리 잡을 아이가 벨테레브의 피를 이었다면 그 아비가 누구든 상관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