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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Author: 스루삐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4 06:41:39

아버지는 옆구리를 크게 다쳐 타인의 도움 없이는 거동조차 어려웠다. 이대로 회복을 기다리다간 영지민들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할 것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통제해야 했다.

집무실에 모인 가신들은 본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말싸움으로 진을 뺐다.

“기사단이 저꼴인데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균열을 보셨다면 이리 말하지는 못할 겁니다. 무려 산 하나 크기를 넘는다고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서남부 평야 대부분을 잃게 될 겁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괴물들이 들락거리는 균열이라니. 균열의 크기도 상상을 초월했고 생긴 위치도 좋지 못했다.

“서남부 평야의 한복판에 생긴 균열로 인해 농작물이 모두 고사했습니다. 분기 수확은 완료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평야 한 가운데는 총경작 기간이 3년이나 되는 작물이었습니다. 그것을 전부 잃었으니 당장 백작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멀지 않았습니다.”

“그게 문제겠습니까. 이제 제국은 식량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3년이나 키운 작물이 모두 말라 죽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당장 한 달 뒤부터는 파종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야 땅속에서 겨울을 버틴 밀씨앗이 싹을 틔울것이다. 파종 시기를 놓치면 이듬해에 수확 할 수 있는 밀의 품질과 양이 상상을 초월하도록 달라졌다. 이것은 곧 아노리스 제국 전체의 식량사정과 직결되었다.

“괴물이 나타난 뒤로는 겁쟁이들이 전부 도망쳐서 파종은 고사하고 당장 말라죽은 식물들을 걷어내는 것부터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오!”

“그럼 어쩌자는 것입니까! 당장 균열에서 다시 괴물이라도 튀어나온다면요!”

보고된 괴물은 단 두 개체였다. 그러나 그 두 개체가 잘 훈련된 하트먼 기사단 30명을 모조리 쓸어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졌다. 다행이라면 선제공격하지 않는다는 점 뿐이었다.

젊은 가신들은 모두 황실에 알리기를 원했다.

“황실에 먼저 알리셔야 합니다.”

“안 될 말입니다. 먼저 균열부터 처리하고 난 다음에 알려야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움만 청한다고 비난부터 할 게 분명합니다!”

가신끼리 패가 갈려 말싸움을 이어가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결국 나서서 상황을 중재할 수밖에 없었다.

“서남부 평야는 제국 전체의 식량줄입니다. 문제가 생겼다고 다짜고짜 황실에 손을 벌리는 건 하트먼의 위신이 깎이는 일입니다. 게다가 무턱대고 황실에 도움을 요청하면 곧 만기가 도래하는 단기대출들이 연장을 거부하게 될 겁니다. 그땐 상황이 더 복잡해 질 겁니다.

우리에겐 합법적인 삼십 일의 보고 유예 기간이 있습니다. 그 안에 우리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 그만입니다. 만에 하나 우리 선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황실에 정식으로 지원을 요청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불안감을 조성하지 말고 맡은 바에 집중하세요. 비슷한 사례들 먼저 조사해 주세요. 균열을 처리하려면 비슷한 사례 먼저 찾아봐야 할 겁니다. 다행히 이번 분기 수확은 마친 상태이고 비축해 놓은 곡식을 전부 풀면 어느 정도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가을 파종을 놓친다면 봄에 파종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옆에서 회의를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가 은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버지의 미소에 자신감이 솟았다.

“그 안에 균열의 크기, 피해 상황부터 자세하게 확인해주세요. 균열을 없앨 수 없다면 공존해야 할 겁니다. 또, 곡식을 수입할 수 있는 가까운 제국, 왕국, 연합국 전부 확인해주세요.

삼십 일, 우리는 그 안에 모든 것을 처리할 겁니다. 황실에 알리는 것은 그 이후에 하겠습니다. ”

가신들은 입을 꾹 다물고는 서로 눈치를 보기 바빴다. 명확한 대처임에도 친 황실파 가신들이 웅성거렸다. 그중 눈치가 없기로 유명한 쇼어 남작이 나서서 입을 나불대기 시작했다.

“함구해? 균열이 감춰지는 것도 아니고! 당장 황실에 상황부터 알려야지. 황실이 하트먼을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저러니 벨테레브 소공작께서도 일찌감치 다른 영애에게 눈을 돌리신 게…….”

쾅!!

쇼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주먹이 테이블을 강하게 강타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쇼어 자네, 아직도 내 딸을 소백작으로 인정하지 못했는가? 자네가 그리 찬양하는 황실이 인정한 소백작인데도 말이야! 자네의 안목이 나나 황제보다 더 뛰어난가 보지?”

아버지는 한바탕 분노를 쏟아내곤 크윽, 하는 신음을 뱉었다. 이윽고 아버지의 옆구리를 감싼 붕대를 뚫고 핏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괜찮았다. 나의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무대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나 부상을 입은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려 피를 보게 한 것은 그냥 둘 수 없었다. 진심으로 쇼어의 목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남작, 건방이 도를 넘는군요. 시건방 떠는데만 사용할 것이라면 그 머리, 이제 붙어있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검코등이를 밀어올리자 쇼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백작님. 제가 연구에만 몰두해 있는지라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괘씸했으나 영지를 위해 희생한 그의 노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연구는 영지에 꼭 필요했다.

“후— . 용서하겠습니다. 그러나 남작이 범한 무례는 반드시 그 값을 받아야겠습니다. 땅의 작물이 모두 고사되었다면 토질에도 문제가 생겼을지 모릅니다. 쇼어 남작은 토질 변화를 확인해주세요.”

균열을 막고 영지를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다. 두둑하게 받아낼 파혼 위자료가 있으니 어떻게든 당분간은 버틸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한 달. 거대한 재앙이 하트먼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그 한 달이면 충분했다.

* * *

조용한 백작가 소백작 집무실.

홀로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균열이 발생한 지 겨우 한 달. 균열의 크기가 도저히 감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황실에서 몇 차례 현 상황에 대해 보고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백작가는 균열을 파악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인간의 무력함만 깨달았을 뿐이다.

보고 기한도 이미 두 차례나 연장했다. 이젠 정말 보고를 마쳐야 한다.

입술을 잘근 깨물고 한참 들여다보던 서류 하나를 옆으로 툭 내려놓았다.

천 년 전 동대륙 친(Chine)제국에 발생한 ‘경계’에 관한 보고서였다. 시공간을 깨트리며 생겨난 경계에서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 튀어나왔고 사람들을 해치고 잡아먹었다는 기록이었다.

그 형태에 대한 묘사는 지금 서남부 평야에 뚫린 균열과 소름 끼치도록 일치했다. ​ 놀라운 것은, 그 거대했던 경계가 어느 날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

‘친제국의 황제가 불로불사의 영약을 찾겠다며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대거 파견한 직후…….’ ​

머릿속에 보고서 한 구절이 계속 맴돌았다. 승자의 기록이 감춘 추악한 이면이었다. 친제국의 황제는 경계를 닫기 위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을 자행한 것이 분명했다. ​

균열과 경계가 동일한 것이라면, 아노리스의 황제 역시 친황제가 그랬듯 제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끔찍한 짓을 되풀이하려 들것이다. ​답답함에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이젠 공존하는 것 뿐인가.”

균열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얼핏 잠에 들었는지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려는 찰나,

쾅!!

그 누구도 쉽게 넘지 못했던 백작저 저택의 대문이 국수가락처럼 휘어졌다.

고요했던 새벽의 어둠을 찢고 무장한 군화 발소리가 거침없이 저택으로 밀려들었다. 황궁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말단이라 불리는 글린트 기사단이 백작저에 들이닥쳤다.

"하트먼 백작을 비롯한 가솔 전원을 포박하라!"

스루삐

5회차 26.09.04일 밤 9시 20분경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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