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쇼어 남작에게 돌아갔다. 쇼어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변했다.
“폐하, 저들을 믿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은 도래하는 대출 만기 연장 때문에 균열의 존재를 함구한 것입니다! 상황을 알리라는 황실의 지고한 명조차 지키지 않는 것을 보시고도 모르시겠습니까!
저 요망한 계집년이 놀리는 간사한 주둥이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저 사악한 여인은 사교계의 숱한 여인들을 파멸시킨 표독한 마녀입니다! 그 악독한 저주와 원한이 땅을 병들게 하고 결국 이 제국에 끔찍한 균열을 불러온 것입니다!”
아차 싶었다. 가신 중에 배신자가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하다니. 명백한 실책이다.
뒷골이 당겨오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기분에 눈앞이 어질했다.
그러나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그가 내세운 근거들은 하나같이 물증이라곤 없는 허무맹랑한 말 뿐이었다. 우격다짐으로 하트먼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의적으로 논점을 흐린 남작을 반박하려 했을 때였다.
“쇼어남작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
과거 리하르트와 염문을 뿌렸던 여인들의 지인이 하나둘 과거 지독했던 내 행실에 대해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헬렌 앨파라스 자작 부인을 기억하십니까? 헬렌은 제 동생이었습니다. 저 백작 영애는 그 아이를 핍박하여 사교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고 지금은!……흐윽.”
“황실이 인정한 건축가 루나 카스텔룸은 또 어떻습니까! 비록 평민이었다고는 하나 제국을 대표할 인재였던 그 여인이 지금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뿐입니까! 코르티잔 바이올렛은 어떻구요! 아름다운 외모를 시기해 끈질기게 괴롭히다 독을 먹여 죽이려 했다는 소문도 있지 않습니까!”
기가 막혀 헛웃음이 흘렀다. 사교계의 치정극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두 제 입맛대로 가공된 반쪽짜리 진실이었다. 더군다나 그 일들은 당면한 문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별개의 문제였다.
‘왜 하필이면 지금!’
애먼 입술만 꾹 짓이겼다. 하필 이런 중요한 때에 발언자의 악행에 대해 듣게 되는 것은 실로 좋지 못했다. 심리 저변에 작용할 낙인효과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항변을 하기엔 너무 많은 이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도를 넘어선 비난이 이어지자 황제마저 눈살을 찌푸렸다. 속으로 욕을 수도 없이 뇌까렸다.
결국 황제가 손을 들어 모두 침묵하게 만들었다.
“별개의 일로 회장을 더 이상 소란스럽게 만들지 마시오. 백작가 가솔들은 모두 황궁 감옥에 수감하도록 하게.”
뭐? 어째서 하트먼을 반역죄인들이나 가두는 황궁 감옥에 수감한다는 말인가!
온세상이 흑백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 함정이구나.’
그 순간,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과 함께 무시할 수 없는 확신이 돋아났다. 처음부터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쇼어 남작과 저 승냥이 떼는 그저 완벽한 하트먼의 소백작을 ‘국가를 기만하는 표독스러운 마녀’로 몰아세울 진흙탕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황실은 눈엣가시인 하트먼을 집어삼킬 아주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근위병이 몰려와 가솔들을 황궁 감옥으로 끌고 갔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비웃음을 흘리는 쇼어의 얼굴만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근위병이 쇼어를 노려보고 있는 내 등을 꾹꾹 밀었다.
다리에 힘줘 버티며 쇼어를 향해 포효했다.
“내 오늘 당신의 행동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웃기는군. 마녀 같은 년이.”
떠밀려 가면서도 악에 받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
황궁 지하 감옥은 이제껏 겪어본 모든 상황 중에 최악이었다.
하트먼 백작가 가솔들은 귀족들이 수감되는 귀족 수용실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식솔 전체가 반역의 죄로 끌려왔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대낮에도 어두운 감옥은 곰팡내와 분뇨가 삭아가는 냄새가 뒤섞여 흘렀다. 나무토막을 조각내 만든 것 같은 빵과 비린내가 섞인 수프는 입에 넣으려 할 때마다 구역질을 불러일으켰다.
감옥에 갇히기 전 백작가에서 바른 향유는 향이 바래가면서 벌레들이 꼬이기엔 더없이 좋은 연료가 되었다. 그 탓에 잠시도 바닥에 앉거나 눕지 못한 채, 벌레가 달라붙지 못하도록 어둠 속에서 쉴 새 없이 몸을 뒤척이는 게 고작이었다.
지옥 같은 수감 7일째 되던 날. 적막한 철창 너머로, 예기치 않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찬란한 금발과 심해를 퍼담은 듯한 눈동자.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귀공자의 자태. 오물과 곰팡이가 뒤섞인 이 지옥에 어울리지 않는, 구역질이 날 만큼 고결한 모습. 리하르트였다. 벌레가 들끓는 바닥을 뒹굴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내 처지가 뼈저리게 실감 났다. 그러나 그에게 더 이상 화를 내거나 수치심을 표출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제 꼴이 만족스러우십니까? 굳이 이런 곳까지 보러 오시다니. 악취미군요.”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다.”
말 어미를 길게 끌며 답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안타까움을 띠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그를 바라봤다.
‘!? 왜 저런 표정을⋯⋯.’
이상했다. 이제껏 숱한 여인들을 희롱하면서도 내게는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어째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안위를 살피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물었다. 그러나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는 감출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소공작님, 우리가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닌 걸로 압니다만.”
“왜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소백작, 괜찮습니까?”
괜찮으냐 묻는 그는 차마 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가늠이 되지 않네요.”
내 답에 리하르트는 씁쓸하게 웃었다.
“황실에서 파혼이 성립되었다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제 정말 남이 되었네요.”
“……이젠 그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겠지요.”
가까운 사이라니. 파혼까지 했으니 그와 더는 볼일 따위 없을 것이다.
본래라면 황궁 지하 감옥은 무려 반역자들이 수감되는 곳이었으니 면회 자체가 불가능했다. 황실의 누군가가 그를 도왔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높은 확률로 그와 친분이 있는 해럴드 3황자일 것이다. 고작 전 약혼녀의 망가진 모습 하나를 확인하겠다고 해럴드의 호의를 낭비하다니. 어리석은 짓이었다.
근처에서 우리를 감시하던 간수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 리하르트를 재촉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리하르트는 서늘한 눈빛으로 간수를 돌아보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짤랑
그가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간수에게 건넸다.
“잠시만 자리를 비워주시겠습니까? 오래 약혼을 이어온지라 마지막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은데 영애께서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요. 아주 잠시면 됩니다.”
“크흠! 아까 저쪽에서 쥐새끼가 달려간 것 같았는데……?”
간수는 주머니를 잽싸게 낚아채고 헛기침하며 자리를 비웠다.
간수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리하르트는 철창 가까이 다가왔다. 낮게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가 이전과 다르게 더없이 진중했다.
“곧 감옥에서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소백작, 그대와 내가 약혼할 수 있었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과연 누가 관련되어 있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대의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판을 짜고 당신의 눈을 가린 자가 누구인지 찾으십시오.”“!!”
리하르트의 말이 머릿속에 가시처럼 박혔다.
이것은 명백한 경고다. 누군가 하트먼의 몰락에 관여했다. 대체 그는 무슨 의도로 내게 이런 끔찍한 힌트를 남긴 것일까. 내가 지금껏 놓치고 있던 진실이 무엇이란 말인가.
벨테레브 공작과 황제, 하트먼의 경계를 알고 있었던 장제국의 사신들. 이 일에 관여했을 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리하르트와 나의 약혼까지 생각해 봐야 한다면 반드시 하트먼의 누군가가 관여했다.
그의 방문은 나를 점점 더 피폐해지도록 만들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쉬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잠조차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맥박이 치솟았다. 그보다 더 먼저 그를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온 시간을 리하르트와의 약혼에 관해 생각했다. 먹는 것도, 쉬는 것도 불가능했다. 더 이상 벌레를 쫓을 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자 온종일 힘없이 누워 눈만 꿈뻑거리는 게 다였다.
그러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타올랐다. 감옥에서 나가기만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곱씹고 또 곱씹었다.
“감히, 하트먼을 이런 꼴로 만들어놓다니. 절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쇼어의 비릿한 웃음을 수도 없이 떠올렸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황제와 그 옆에 나란히 선 장제국의 사신들, 내게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 그 모두에게 이 치욕을, 이 굴욕을 되돌려줄 것이다.
결코 나의 하트먼은 이렇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10일가량을 보내고 나니 감옥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게 찾아온 것은 악마가 아닌 정보길드 슈페러였다. 간수로 위장한 그는 면담을 핑계삼아 내게 바깥 상황을 알려왔다.
“의뢰 결과 통보입니다. 보름 전 의뢰하셨던 보고 유예 기한에 대한 특집 기사와 친제국 황제에 관한 특집 기사 모두 게재되었습니다.”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보름 전, 혹시라도 하트먼이 비난받는 상황이 오는 것을 대비한 의뢰였다.
“반응은?”
“솔벤 자작이 주축이 되어 하트먼 구명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하트먼을 방면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것이 신의 한수였다. 혹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겐 해럴드의 샹들리에가 있다.
‘그래, 천하의 하트먼이 쉽게 무너질리 가.’
간수 교대 전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도 그 공지 봤지? 어쩔텐가?”
“어쩌긴 뭘 어째? 갔다가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귀족이 된다잖아. 나 같아도 처자식 없음 바로 갔지!”
“귀족은 무슨, 죽으러 가는 거지 그게!”
“그러니 벨테레브 공작이 진짜 미친 거지. 아무리 저주받았다지만 어떻게 제 새끼를 경계에 보내나, 그래?”
“그 차남은 저주받았잖아! 이번 기회에 처리하려는 거지! 황실에 꼬리도 흔들고 말이야.”
파혼까지 한 마당에 벨테레브라는 이름을 또 들어야 한다니.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다.
별안간 그들의 입에서 내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아주 볼만하겠어. 제 형이랑 붙어먹던 여자랑 결혼이라니!”
귓가로 파고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 뭐라고?’
메마른 손톱이 차가운 감옥 바닥을 긁어내리며 까득, 기괴한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 간수들이 떠드는 소리가 뇌 속에서 수백 배로 증폭되어 내 고막을 잔인하게 찢어발겼다.
“좋은 것은 나눠 먹어야지. 아주 우애좋은 형제야.”
“허! 둘째 공자가 하트먼 영애를 달라고 했다는 것이 뜬소문이 아니었소?”
“오, 순진한 로미오. 이제까지 뭘 들은 것이오? 형의 여자를 탐낸 동생이라니까!”
결혼이라니. 리하르트도 아닌 일면식도 없는 벨테레브 공자와……. 말도 안 된다.
경계에 들어가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벨테레브 공자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결정을 한 것일까. 엄청난 액수의 파혼 위자료를 물고도 하트먼과 혼인을 준비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벌어지고 있었다.
머릿속에 온갖 가설들이 난무했다. 먹은 것도 없이 머리를 굴리니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들려 벽에 머리를 기댄 순간이었다.
끼이익—
지옥문이 열리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감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에스텔 하트먼."
초점 없는 눈을 들어 올리자, 간수가 무심한 목소리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선명하게 찍힌 황실의 인장과, 내 새로운 족쇄가 될 서늘한 흑색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프레데릭 벨테레브.]
“혼약자 프레데릭 벨테레브의 신원보증이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이름이, 이 진흙탕 같은 심연 속으로 날아와 꽂혔다.
나를 대신해 지옥으로 들어가기로 한, 나의 새로운 남편의 이름이.
“출소 준비해.”
“……!”
“레이야!” 내 다급한 부름에 문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짐승이나 다름없었던 리하르트가 내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레이야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세상에, 도련님이 잠드셨잖아!” 하녀 하나가 내 옆으로 다가와 손짓을 섞어가며 물었다. “세상에, 부인, 뭘 하신 거예요? 대체 무얼 어찌하신 겁니까. 저희가 열 명이 넘게 달라붙어도 제어하지 못했는데…….” 시종들의 혼란스러운 눈빛에 그간의 팽팽했던 긴장이 무너지며 허탈한 헛웃음이 흘렀다. “아무 짓도 안 했어. 소공작은……그저 제 풀에 지쳐 잠들었을 뿐이야.” 내 대답에 사용인들의 눈이 존경심으로 반짝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레이야가 먹먹해진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차를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레이야는 내 손을 쓰다듬었다. 손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리하르트를 힐끔 돌아봤다. 짐승처럼 헐떡이던 숨이 안정되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익숙한 듯이 움직였다. 의연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 이런 상황을 여러차례 겪었을 것이다. 리하르트가 했던 말을 천천히 떠올렸다. 내성이 있다고 했던 말은 아마 거짓일 것이다. 레이야가 따뜻
대본성의 공작 부인 전담 시녀가 꽃꽂이 중인 공작 부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공작 부인은 분노에 휩싸여 꽃 머리가 잘려 나가는 것도 모르고 가위질을 계속했다. “하하하. 리하르트가 왜 이렇게 속을 썩일까?” 알렉시스와 황제가 기사단에 심어놓은 끄나풀은 고작 여섯. 그중 두 명이 식을 올리기도 전에 리하르트 손에 죽임을 당했다. 하트먼 영애의 침실을 훔쳐보았다는 사유였다. 공작 부인은 남은 끄나풀들의 근무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부 기사단장에게 엄청난 돈을 쏟았다. 그렇게 겨우 끄나풀을 첫날밤 아비스에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네 명이 모두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공작 부인은 전지가위를 바닥으로 내던지며 물었다. “그래서 소공작이 기사들을 처리한 사유가 뭐라고 하더냐?” “소공작 독살 미수 혐의입니다. 소공작께서 직접 처단하셨고,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는 하나 독을 대량 들이마셔서 현재는 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시다고 합니다.” “고작 그런!” 리하르트는 최음향으로 앓고 있는 것을 독살 미수로 교묘하게 바꿔 끄나풀들을 전부 해치워버렸다. 공작 부인은 증오심이 깃든 그 파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어린 시절의 리하르트를 떠올렸다. “하……. 네가 구원해야 할 건 프레드잖니, 리키.” 으그극! 공작 부인의 손아귀에 꽃봉오리가 잔인하게 으스러졌다. 전담 시녀가 공포감에 손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늦은 밤, 소공작의 주도로 아비스의 호위가 한차례 바뀌었다. 그 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듯한 사람이 드디어 아비스 별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비스 별관을 지키던 사용인들은 이미 언질을 받아 익히 알고 있었다. 까만 가면에 까만 로브,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까만 차림의 사람이 아비스로 온다면 그건 틀림없이 프레데릭 공자라는 것을.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신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 문을 열자 실신해 있는 에스텔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얼굴에 늘어붙은 적갈색 가발을 벗어 까만 가면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활짝 열린 창으로 스며든 한기에 서늘해진 침실의 온도가 그제야 피부에 와 닿았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그녀의 옆에 누웠다. 에스텔은 옆에 다가온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온통 땀투성이에 비정상적으로 빠른 맥박, 높은 체온. 프레드는 지독한 열병을 앓는 그녀를 안으며 죄책감에 미간을 구겼다. 리하르트가 발 빠르게 사람을 보내온 것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끔찍한 상황을 제때 알지 못했을 것이다. ‘리키도 지금쯤 제정신이 아닐 텐데…….’ 프레드는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뒤 황제와 공작의 첩자들을 직접 청소하고 있을 리하르트에게 잠시나마 깊은 감사를 느꼈다.
쨍그랑!!손에 들린 잔이 바닥으로 힘없이 곤두박질쳤다.잔을 떨어뜨렸음에도 손이 처참할 정도로 떨렸다. 구석구석 예민한 곳까지 일깨우는 듯한 열감이 분노를 만나 순식간에 온몸을 집어삼킨 탓이다.흘러내린 독주에 치맛자락이 볼품없이 젖어 들었다.리하르트의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에스텔?”예민해진 감각은 작은 움직임조차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도발로 다가왔다.‘정신 차려야 해.’나는 바닥에 흩뿌려진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날 선 고통으로 이 지독한 혼미함을 떨쳐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얼마 전 허벅지에 생긴 상처를 떠올렸다. 아문 지 얼마 안 되었으나 그 연한 살을 헤집는다면 그 어떤 곳보다 강한 고통을 줄 것이다.깨진 유리 조각을 향해 힘겹게 한 발짝 내디뎠다. 눈앞이 일렁이고 어지러웠다. 몸이 비틀, 하고 크게 휘청이자 어느새 다가온 리하르트가 내 허리를 단단히 휘감았다."하아…… 미치겠군. 당신의 그 가혹한 취향에 장단을 맞춰주기엔, 내 인내심이 그리 훌륭하지 못해서요."그의 뜨거운 입김이 목선을 타고 올라와 귓불을 아찔하게 스쳤다. 평소라면 기겁하며 그를 경멸하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옷자락을 꽉 쥔 채 입술 틈새로 미처 다 삼키지 못한 야릇한 신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스루삐입니다. 한가위 명절을 맞이하여 연휴기간 업로드분을 선행하여 21~23일 총 3일간 연참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기간 : 9월 21~23일 (총 3일)대상 회차 : 22~27회차 (총 6회차)업로드 방식 : 1일 2회 연속 업로드정상 연재 복귀일 : 27일 연참은 본 연재 시간이 아닌 오후 6:03~6:05분에 업로드 되며 2회차분이 연속 업로드됩니다. 연참 이후 3일간 휴재, 27일부터 오전 6:41분에 정상연재 됩니다.풍요로운 한가위 보내세요 :)스루삐 올림.
“고, 공작 부인!” 잔뜩 상기된 얼굴로 공작 부인을 불렀다. 내 자존심을 짓밟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어떻게 똑같이 자기 뱃속으로 낳은 쌍둥이 아들에게 동생의 여인을 취하라고 말할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사고방식에 한마디하려는 찰나, 리하르트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만류했다. “공작 부인께서 아우 내외를 걱정하는 마음이 이리 깊으실지 몰랐습니다. 저 또한 아우가 소중하답니다. 걱정할 일은 만들지 않겠습니다. 들어가 쉬시지요.” “리하르트 벨테레브! 후—. 벨테레브는 손이 귀하다는 걸 명심하세요. 내 첫째 아드님 또한 결국엔 벨테레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공작 부인은 다시 서릿발이 날릴 것 같은 목소리로 경고하고 뒤돌아섰다.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리하르트의 팔을 거칠게 쳐냈다. “설마, 공작 부인의 명을 따르려는 건 아니겠죠?” “아마 이 공작저에 있는 모든 사람 중 그대의 티아라를 벗겨줄 사람은 저뿐일 겁니다. 제가 끝내 거절한다면 공작이 이 자리를 대신할 테니까요. 이 공작저에 남아 있는 벨테레브라곤 저와 아버지 둘뿐이니까요. 그래도 한때나마 약혼자였던 사람이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네? 그게 무슨!” 미치지 않고서야. 말도 안 되는 모욕이었다. 손이 귀한 벨테레브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 나를 출산 도구처럼 사용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겐 내 몸속에 자리 잡을 아이가 벨테레브의 피를 이었다면 그 아비가 누구든 상관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