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선배님?"
윤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자신을 그렇게 부를 사람은 없었다.
"채윤서 선배님, 맞으시죠?"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중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윤서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통로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확인한 순간 눈이 조금 커졌다.
배도혁이었다.
며칠 전 진성갤러리에서 봤던 남자.
"저를…… 아세요?"
도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상하리만큼 반가워 보였다.
"모를 수가 없죠."
그 대답에 윤서는 순간 말을 잃었다.
갤러리에서 마주쳤던 시선이 떠올랐다.
남성구는 도혁에게 유난히 다정했고, 최미연은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태호는 그날 밤 술에 취해 도혁의 이름을 붙잡고 늘어졌다.
모두 이 남자를 중심으로 이상하게 얽혀 있었다.
사흘 전이었다.
"저기, 부탁이 있어요."
저녁 식탁을 치우던 윤서가 먼저 말을 꺼냈다.
태호가 넥타이를 풀며 돌아봤다.
"뭔데."
"어머니한테 우리 얘기, 특히 부부 사이에 있었던 일은 말씀 안 드렸으면 좋겠어요."
태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내가 뭘 말했다고 그래?"
"저번에 어머니가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말씀드린 적 없는 것들을 알고 계시던데요."
태호의 얼굴에 순간 짜증이 스쳤다.
그런데 그 짜증 밑에 다른 게 있었다.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 그런 거 말한 적 없는데."
"정말이에요?"
"내가 미쳤다고 엄마한테 그런 얘길 해?"
그렇다면 더 이상했다.
태호도 말하지 않았고 자신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미연은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진 날짜와 간격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윤서는 태호의 얼굴에서 거짓을 찾으려 했다.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믿을 수도 없었다.
"알겠어요. 그래도 앞으로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어머니한테 말씀하지 마세요."
"안 한다니까."
"부부 사이 일은 부부만 아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태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다음 날 아침,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상무님, 말씀드렸던 뉴욕 출장 일정 확정됐습니다. 지사 인수 관련 실사 미팅, 이번 주로 잡혔습니다."
결혼 준비 때문에 한동안 비워두었던 한성유통 상무 자리였다.
"현지 법무팀 일정은요?"
"맞춰놨습니다. 재무팀 자료도 오늘 안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제가 비행기에서 볼 수 있게 정리해서 보내주세요. 인수 대상 최근 3년 매출하고 부채 내역은 따로 빼주시고요."
"네, 상무님."
전화를 끊고 나서야 윤서는 오랜만에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며느리가 아니라 채윤서 상무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최미연은 윤서의 직함을 알면서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여자에게 윤서는 한성유통의 임원이기 전에 남씨 집안의 며느리였고, 하루라도 빨리 손주를 낳아야 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달랐다.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일이 있었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집 밖에 여전히 자신의 자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큼 안심이 됐다.
"저 도혁이에요."
도혁의 목소리에 윤서의 생각이 현실로 돌아왔다.
"배도혁."
"그건 알아요."
윤서가 대답하자 도혁이 작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것까지 설명해야 하나 했는데."
"유명하시잖아요."
"혹시 제 작품도 보셨어요?"
"몇 번은요."
"몇 번."
도혁이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어쩐지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 윤서는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도혁이 말을 이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학교였어요."
"우리 학교요?"
"네. 선배님 3학년 때 제가 1학년이었어요."
윤서는 그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배도혁과 교복을 입은 열일곱 살 남학생을 연결할 만한 기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복도에서 몇 번 뵀어요. 기억 못 하시는 게 당연해요."
"미안해요. 잘 기억이 안 나요."
"미안할 게 뭐 있어요."
도혁은 정말 괜찮다는 얼굴이었다.
"저만 기억하면 되는 거니까."
윤서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렀다.
묘한 말이었다.
단순히 같은 학교를 다녔던 후배가 하기에는.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알아봤어요? 많이 변했을 텐데."
도혁은 대답하지 않고 잠깐 윤서의 얼굴을 바라봤다.
"별로 안 변했는데."
"십 년도 넘었잖아요."
"그래도 알아보겠던데요."
너무 쉽게 나오는 대답이었다.
윤서는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때 도혁이 탑승권을 확인했다.
"3A네요."
윤서도 자신의 탑승권을 내려다봤다.
3B.
"설마."
도혁이 옆자리를 한번 보고는 웃었다.
"옆자리네요."
그가 자연스럽게 안쪽 좌석으로 들어갔다.
윤서는 조금 황당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갤러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도 이상했는데, 며칠 뒤 뉴욕행 비행기에서 다시 만났다.
심지어 옆자리였다.
도혁이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선배님은 뉴욕에 무슨 일로 가세요?"
"회사 일이요. 지사 인수 건 때문에요."
"회사?"
"한성유통이요."
도혁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계속 일하고 계셨네요."
윤서가 그를 바라봤다.
"그것도 알아요?"
도혁이 웃었다.
"기사에서 봤어요."
"제 기사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을 텐데."
"찾아보면 나오던데요."
이번에는 윤서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했다.
복도에서 몇 번 봤다는 후배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봤다.
십 년이 넘었는데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자신이 한성유통에서 일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윤서는 몸을 조금 돌려 그를 바라봤다.
"정말 저를 기억해요?"
"네."
"복도에서 몇 번 본 것뿐이라면서요."
도혁의 눈이 윤서에게 향했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눈빛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것뿐이라고는 안 했는데요."
윤서는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마침 기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혁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윤서는 창밖을 바라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제대로 몰랐던 남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보다 이 남자가 자신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한동안은 피할 수도 없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올라갔다.
뉴욕까지, 이 남자와 나란히.
병원 진료실, 태호는 의사 앞에 앉아 있었다.지난번 결과에서 정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뒤, 의사는 한 번의 검사로는 확신할 수 없다며 재검을 권했다.오늘이 그 결과를 듣는 날이었다. 처음엔 혼자 오겠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최미연이 굳이 따라나섰다.의사가 차트를 넘겼다."지난 검사에 이어 재검에서도 정액 내 정자가 관찰되지 않았습니다."태호가 의사를 바라봤다."그게 무슨 뜻인데요?""무정자증입니다."진료실 안이 조용해졌다. 태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그게…… 확실한 건가요?""두 차례 검사에서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원인을 정확히 확인하려면 추가 검사가 필요하지만, 현재로서는 무정자증으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이번에는 최미연이 물었다."치료 방법은 없나요?""원인에 따라 다릅니다. 폐쇄성인 경우 수술이나 시술을 통해 정자를 채취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치료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우선 추가 검사를 받아보셔야 합니다.""그럼 애를 아예 못 갖는다는 뜻은 아니죠?""지금 단계에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최미연은 그제야 조금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태호는 의사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무정자증. 그 단어 하나만 머릿속을 맴돌았다.진료실을 나온 뒤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복도를 걷던 태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최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엄마, 뭐라고 말 좀 해봐요."그제야 최미연이 걸음을 멈췄다."괜찮아."태호가 허탈하게 웃었다."뭐가 괜찮아요?""의사가 아직 방법이 없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추가 검사도 받고, 치료할 수 있는지 알아보면 돼.""만약 안 되면요?"최미연의 입이 다물렸다."치료해도 안 되면 어떡할 건데요. 손주 그렇게 노래하더니.""태호야.""윤서한테는 그렇게 병원 다니라고 하면서, 정작 문제는 나였네요."최미연의 표정이 굳었다."아직 다 나온 거 아니야.""무정자증이라잖아요. 재검까지 해서 나온 결과인데...
예약된 날 아침, 태호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씻고 나와 정장을 입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 넥타이를 매다 말고 시간을 확인하더니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윤서는 출근 준비를 하다 그를 바라봤다."오늘 병원 가죠?""응.""같이 갈까요?"태호가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당겼다."됐어. 혼자 갈게.""어머니는요?""엄마까지 왜 와. 검사 하나 받는데 사람을 몇 명이나 끌고 가려고."윤서는 더 권하지 않았다. 현관을 나서는 태호의 얼굴에는 긴장보다 불쾌함이 짙었다.비뇨기과 대기실에 앉은 태호는 휴대폰만 들여다봤다.맞은편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오는 내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검사받고 아무 문제 없다는 결과지만 가져다주면 끝이었다.어머니도 더는 닦달하지 않을 테고, 윤서도 자신에게 검사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것이다.그런데 막상 병원에 와 있으니 기분이 더러웠다."남태호 님."이름이 불렸다.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가 차트를 확인했다."결혼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몇 달 됐습니다.""배우자분은 먼저 검사받으셨고요?"태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네.""특별한 이상은 없으셨고?""그렇다던데요."의사는 몇 가지 생활 습관을 확인했다."음주는 얼마나 하십니까?""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요."실제로는 그보다 많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흡연은요?"질문이 이어질수록 태호는 점점 귀찮다는 표정이 됐다."이런 것도 다 상관있어요?""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을 확인하는 겁니다."의사가 차트를 내려놓았다."우선 기본 검사부터 하겠습니다. 결과는 며칠 정도 걸립니다.""오늘 바로 나오는 거 아니에요?""확인할 항목이 있어서요. 결과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태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에 끝날 줄 알았던 일이 며칠 더 이어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병원을 나온 태호는 곧바로 최미연에게 문자를 보냈다.[검사 받았어요.]답은 금방 왔다.[그래. 결과 나오면 바로 연
최미연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태호를 집으로 불러 마주 앉혔다.거실 조명 아래, 두 사람 사이에는 며칠 전 식사 자리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흘렀다."다음 주로 병원 예약 잡았어. 이번엔 무조건 가.""싫다고 했잖아요.""태호야."최미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윤서는 받을 검사 다 받았어. 병원에서도 너도 받아보라고 했다잖아.""그게 왜 제가 받아야 할 이유가 돼요?""그럼 언제까지 윤서만 병원에 보내?"태호의 표정이 굳었다."엄마가 보냈잖아요.""그래. 내가 보냈어. 애가 안 생기니까 뭐가 문제인지 알아보려고.""그럼 걔한테 문제가 없으면 그냥 기다리면 되잖아요.""언제까지?"태호가 입을 다물었다. 최미연은 한동안 아들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걱정과 조바심이 뒤섞여 있었다."너 계속 이러면 나도 더는 가만히 못 있어.""뭘 어떻게 하게요.""병원에서 하라는 검사 하나도 안 받으면서 애는 갖겠다고? 그럼 내가 널 어떻게 믿니.""엄마.""검사받고 아무 문제 없으면 끝이야."최미연이 잘라 말했다."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윤서한테 더 검사받으라는 소리 안 해도 되고."태호가 헛웃음을 쳤다."결국 윤서 때문에 이러는 거네요.""걔 때문이 아니라 네 자식 문제야."태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왜 자꾸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해요?""누가 문제 있대?""지금 그러고 있잖아요.""그러니까 가서 확인하라고. 멀쩡하면 그걸로 끝나는 일을 왜 이렇게까지 버티니?"태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문제가 있을까 봐 두려운 건 아니었다.그런 검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윤서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이제 자신이 확인받아야 할 차례가 됐다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무엇보다 어머니와 윤서가 자신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은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난 멀쩡해요.""그럼 보여줘.""뭘 보여줘요?""검사받고
최미연에게 다시 연락이 온 건 며칠 뒤였다. 점심 약속이 있다는 말에 나갔지만, 막상 도착한 곳은 진성갤러리 근처 호텔 라운지였다. 윤서가 자리에 앉자 최미연은 차부터 권했다."요즘 회사 많이 바쁘니?""네. 뉴욕 건도 정리해야 하고요.""그래도 몸은 챙겨야지."말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것 같았다. 윤서는 찻잔을 내려놓았다."무슨 말씀 하시려고요?"최미연이 잠시 윤서를 바라봤다."병원 한번 더 가자."역시나였다."지난번에 검사받았잖아요.""그건 기본적인 것만 본 거고. 이번에는 제대로 확인해보자고.""특별한 문제 없다고 했어요.""그때는 그때고."최미연은 이미 알아본 게 있는 듯 병원 이름까지 꺼냈다."난임 쪽으로 잘 보는 선생님이 있대. 예약 잡기 어려운데 내가 부탁해놨어."윤서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에게 묻기도 전에 알아보고, 부탁하고, 이제는 통보하고 있었다."어머니. 왜 자꾸 저만 검사받아야 해요?"최미연의 손이 멈췄다."무슨 말이니?""아이 가지려고 검사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저만 해요?"최미연의 표정이 조금씩 굳었다. 윤서는 그대로 물었다."태호 씨는요? 태호 씨도 같이 검사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최미연이 황당하다는 듯 윤서를 바라봤다."멀쩡한 애가 무슨 검사를 받아.""저도 멀쩡해요.""여자는 겉으로 멀쩡해도 모르는 거야.""남자는 안 그래요?""윤서야."목소리가 낮아졌다."괜히 말 이상하게 만들지 마. 내가 너한테 문제가 있다고 했니?""그럼 확인은 왜 저만 하는데요?"최미연이 입을 다물었다. 윤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저도 검사받을 수 있어요. 필요한 검사라면 받을게요. 대신 이번에도 아무 문제 없으면 태호 씨도 검사받게 해주세요.""그건 나중에 생각해. 일단 너부터 제대로 확인하고."또 그 말이었다. 윤서는 더 실랑이하지 않았다."알겠어요."최미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 괜히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마. 다 너희 생각해서 그러는 거니까."윤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윤서는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로 올라갔다. 채명수는 다음 달 유통사업부 투자 계획서를 훑어본 뒤 몇 군데를 지적했다."이건 다시 잡아. 수익률이 너무 보수적이야.""시장 상황 반영한 거예요.""그러니까 더 공격적으로 가야지. 요즘 경쟁사들 확장 속도 봤잖아."윤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명수는 회사 일에서만큼은 늘 이런 식이었다. 사적인 이야기는 최대한 미루고, 숫자와 계획부터 확인했다.일 얘기가 한참 이어졌다. 어젯밤 식사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윤서가 서류를 정리하다 먼저 물었다."아버지. 어제 어머니가 무슨 말씀 안 하셨어요?"채명수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무슨 말.""그냥요. 저희 일 관련해서요.""부부끼리 싸웠으면 둘이 풀어. 부모들까지 끼어들 일 만들지 말고."역시 그게 전부였다. 윤서는 더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이런 식으로 선을 그었다. 딸의 결혼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는데 책상 한쪽에 놓인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한빛정책연구소 후원의 밤]걸음이 멈췄다. 처음 보는 이름이 아니었다. 결혼 당시 지참금 사용처를 확인하면서 봤던 곳이었다. 얼마 전 최미연이 가져온 한약의 거래명세표에도 같은 이름이 찍혀 있었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두 장의 서류에, 같은 이름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다."왜 안 가?"채명수의 목소리에 윤서가 시선을 거뒀다."아니에요. 서류 가지고 갈게요."밖으로 나오자 비서가 서류를 받으러 다가왔다. 윤서는 자연스럽게 물었다."아버지 다음 주 일정에 한빛정책연구소 행사가 있던데요.""네. 후원의 밤 말씀하시는 거죠?""매년 참석하세요?""네. 제가 입사했을 때도 이미 후원하고 계셨어요.""그게 언젠데요?""5년은 넘었죠."결혼 전이었다. 그것도 한참 전. 시댁과 얽히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이미 그 이름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아버지가 거길 왜 후원하시는지 아세요?""정확한 건 모르죠.
최미연에게 연락이 온 건 오후였다. 오늘 저녁 시간 비워둬. 윤서는 결재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무슨 일인데요?"네 부모님하고 저녁 먹기로 했어. 태호한테도 얘기해뒀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갑자기요?"가족끼리 밥 먹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니? 최미연은 장소와 시간만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저녁 약속은 시내 한정식집이었다. 윤서가 도착했을 때는 채명수 부부와 최미연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태호도 잠시 뒤 들어왔다."우리 며느리 왔네."최미연이 반갑게 윤서를 맞았다. 며칠 전 집에서 봤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앉아. 회사 끝나고 오느라 힘들었지?"윤서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식사가 시작되자 최미연은 분위기를 주도했다."결혼식 끝나고 진작에 식사 자리를 마련했어야 했는데 늦었네요. 애들 때문에 걱정이 많으셨죠?"윤서의 어머니가 난처하게 웃었다."부부가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거죠."최미연은 그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사돈 내외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던 눈치였다."그럼요. 태호도 요즘 많이 반성하고 있어요."윤서의 시선이 태호에게 향했다. 태호는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정작 윤서에게는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다 지난 일이니 이제 좋은 것만 생각해야죠."최미연이 웃으며 태호의 잔을 채웠다. 채명수도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애들이 알아서 잘하겠지.""사돈어른 말씀이 맞아요. 우리 윤서가 워낙 똑 부러지는 애라 제가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우리 윤서.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최미연은 사람들 앞에서 윤서의 손까지 잡았다."내가 딸이 없어서 그런가, 윤서가 들어오고 집안이 얼마나 환해졌는지 몰라요."윤서는 손을 빼지 않았다. 대신 웃지도 않았다.식사가 끝나갈 무렵, 최미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윤서야. 잠깐 나 좀 보자."윤서도 뒤따라 복도로 나왔다. 문이 닫히자 최미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다음 주 화요일 비워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