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럼 정확히는요?"
윤서가 물었다.
창밖은 어느새 구름뿐이었다.
도혁이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았다.
"기억 못 하시는 게 당연해요. 선배님은 학생회장이셨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선배님은 절 몰라도, 전 선배님을 알 수 있었으니까요."
윤서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전교생이 아는 사람과, 그 전교생 중 한 명으로 남는 것.
그 정도 설명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저는 선배님을 꽤 많이 봤어요."
"왜요?"
도혁이 잠깐 웃었다.
"눈에 띄었으니까요."
"제가요?"
"네."
대답이 너무 빨랐다.
"학생회장이라서?"
"그것도 있고."
"또요?"
도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윤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말을 시작했으면 끝을 내야죠."
"지금 다 말하면 다음에 만날 핑계가 없잖아요."
윤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 사람의 화법은 지나치게 능숙했다.
배우라서 그런 건지, 원래 이런 사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원래 여자한테 이렇게 말해요?"
"아니요."
"그것도 너무 빨리 대답하는데."
"확실한 거라서요."
도혁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윤서는 더 묻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가벼운 농담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혁이 하는 말은 하나씩 마음에 걸렸다.
십 년도 더 된 일을 기억하는 것부터 그랬다.
"그런데 선배님."
"네."
"뉴욕 일정은 길어요?"
"나흘 정도요. 실사 미팅이 있어서."
"바쁘시겠네요."
"아마도요."
도혁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혹시 일정이 비면 저녁 한 끼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윤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전이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결혼한 여자가 남편도 아닌 남자와 해외에서 따로 저녁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남성구는 이 남자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최미연은 왜 도혁을 보는 순간 얼굴이 굳었는지.
그리고 태호는 왜 술에 취해서까지 도혁의 이름을 붙잡고 자신을 추궁했는지.
궁금했다.
그게 전부였다.
"좋아요."
도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신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저에 대해서요?"
"아니요."
윤서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 집안이랑 당신 사이에 뭐가 있는지."
도혁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윤서는 놓치지 않았다.
"우리 집안이라면."
"남성구 의원님이요. 그리고 최미연 관장님, 남태호까지."
도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가볍게 농담하던 남자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갤러리에서 봤으니까요."
윤서는 담담하게 말했다.
"남 의원님은 당신을 반가워했고, 어머니는 당신을 보기 싫어했어요. 태호 씨도 마찬가지였고요."
도혁의 눈빛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관찰력이 좋으시네요."
"제가 한 눈썰미 합니다."
도혁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윤서도 입가를 살짝 올렸다.
"대답은요?"
"여기서 하기엔 좀 긴 얘기라서요."
"그럼 저녁 먹을 때 들으면 되겠네요."
도혁이 윤서를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저도 나흘 동안 잡지 촬영이 있어요. 도착하고 이틀 뒤면 괜찮으세요?"
"저녁이면 돼요."
"어디로 갈까요?"
윤서는 잠시 생각했다.
굳이 낯선 곳을 찾아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묵는 호텔로 오세요. 매리어트예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약속이 잡혔다.
이틀 뒤, 뉴욕.
실사 미팅 첫날 일정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윤서는 현지 법무팀과 재무 자료를 확인하고 인수 대상 회사 담당자까지 만난 뒤에야 호텔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숫자와 계약서만 들여다봤는데도 이상하게 머리는 맑았다. 한국에서 시댁 식구들과 부딪칠 때보다 차라리 이쪽이 편했다.
객실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울렸다.
[1층입니다.]
배도혁이었다.
약속보다 십 분 빨랐다.
윤서는 간단히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로비로 내려갔다.
도혁은 라운지 안쪽에 먼저 와 있었다.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썼지만 눈에 띄는 얼굴까지 감춰지지는 않았다.
윤서를 발견한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왔네요."
"제가 먹자고 했으니까요."
도혁이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를 빼주었다.
윤서는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 자리에 앉았다.
별것 아닌 행동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태호는 한 번도 저런 적이 없었다. 차 문을 잡아주거나, 걸음을 늦춰 맞춰주는 일도 드물었다.
그렇다고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
"뭐 드실래요?"
도혁이 메뉴판을 윤서 쪽으로 먼저 밀어주었다.
"추천해 주세요."
주문을 마친 뒤에는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도혁은 잡지 촬영, 이전에 뉴욕에 와봤던 이야기 등을 주절주절 이야기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편한 사람이었다.
스크린 속 배도혁은 차갑고 말수가 적어 보였는데, 실제로는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말을 걸었고 말이 끊겨도 굳이 침묵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고 얼마쯤 지났을 때 윤서가 물잔을 내려놓았다.
"배도혁 씨."
도혁이 눈을 들었다.
"남성구 의원님하고 무슨 사이예요?"
도혁의 손이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윤서는 놓치지 않았다.
"홍익문화재단에서 지원받았다는 인터뷰는 봤어요."
"찾아보셨네요."
"궁금했으니까요. 남 의원님은 배도혁 씨를 반가워했고, 어머니랑 태호 씨는 정반대였잖아요."
도혁이 잠시 윤서를 바라봤다.
"관찰력이 좋으시네요."
"제가 한 눈썰미 합니다."
도혁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윤서는 따라 웃지 않았다.
"그래서요?"
도혁의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재단에서 도움을 받은 건 맞습니다."
"그게 다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분 얘기는 식사 끝나고 해도 될까요."
역시 뭔가 있었다.
윤서는 더 캐묻지 않았다.
"좋아요."
그때 라운지 반대편에서 작은 빛이 번쩍였다.
윤서가 고개를 돌렸지만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에요."
윤서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커다란 화분 뒤에서 카메라 렌즈가 다시 그들을 향했다.
한 번.
그리고 도혁이 윤서에게 몸을 기울이는 순간, 다시 한 번.
사진 속 두 사람은 실제보다 훨씬 가까워 보였다.
한국은 새벽이었다.
한 연예매체 편집국으로 사진 두 장이 전송됐다.
호텔 라운지에서 마주 앉은 남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배도혁이잖아."
"여자는?"
사진을 확대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직원이 다른 사진을 열었다.
이번에는 여자의 옆얼굴이 조금 더 선명했다.
검색이 시작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니터에 같은 얼굴이 떴다.
[한성유통 상무이사 채윤서]
직원이 화면을 내리다가 손을 멈췄다.
"어?"
"왜?"
그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채윤서의 이름 아래 붙어 있는 또 하나의 이름.
남태호.
몇 주 전 결혼식을 올린 남편이었다.
편집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 여자, 유부녀야?"
마우스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몇 분 뒤.
빈 기사 작성창 위에 제목 한 줄이 입력됐다.
[톱배우 배도혁, 뉴욕 호텔서 재벌가 며느리와 밀회]
커서가 제목 끝에서 깜빡였다.
며칠 뒤, 최미연은 남성구를 찾아갔다. 국회 근처 개인 사무실이었다.예고도 없이 찾아온 아내를 본 남성구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무슨 일이야.""물어볼 게 있어서요."최미연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도혁이요."남성구의 표정이 굳었다."그 얘기를 왜 해.""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 애가 당신 아들이라는 거."남성구가 한숨을 내쉬었다."최미연.""대답해요."잠시 침묵이 흘렀다."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어."최미연의 손끝이 굳었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입으로 직접 듣자 달랐다."그 애 엄마가 죽은 뒤에도 계속 챙겼고요? 홍익문화재단으로?"남성구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그것까지 알아봤어?""며느리랑 기사가 난 남자인데 그 정도도 안 알아볼 줄 알았어요?"남성구는 더 부정하지 않았다."재단을 통해 지원한 건 맞아.""얼마나요?""그걸 왜 묻는 거야.""그냥 궁금해서요.""당신이 배도혁을 궁금해할 이유가 없잖아."최미연은 남편을 바라봤다."내 남편이 밖에서 낳은 아들인데 이유가 없어요?"남성구의 입이 다물렸다. 최미연은 시선을 돌렸다.책상 한쪽에 놓인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사진 속에는 남성구와 태호가 있었다. 도혁은 없었다. 당연했다.그런데 처음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진에 없다고 해서 피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요즘도 자주 봐요?""가끔.""별일은 없고요? 사고 치거나, 어디 아프거나."남성구가 미간을 찌푸렸다."갑자기 왜 이래?""대답이나 해요.""멀쩡해. 작품 하고 운동하고, 자기 일 하면서 잘 살아."최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미연아."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최미연이 멈췄다."태호 일 때문이야?"처음으로 최미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남성구가 그녀를 바라봤다."요즘 당신 이상해. 태호 검사받았다며."최미연의 표정이 굳었다."누구한테 들었어요?""태호한테.""걔가 그것까지 말했어요?""결과가 안 좋은 거야?"최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
최미연은 마지막 남은 가능성에 매달렸다."정자를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의사는 신중하게 대답했다."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고, 발견된다고 해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인지는 수술해봐야 압니다.""그래도 해볼게요."옆에 앉아 있던 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병원을 바꿔가며 검사받는 것에 짜증을 냈다.이제는 그것조차 없었다."태호야."최미연이 불렀다."네.""수술받자."태호는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마음대로 하세요."수술 당일, 윤서도 병원에 왔다. 태호가 원해서는 아니었다.[수술 날짜 잡혔다.]그 말만 듣고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태호가 수술실로 들어간 뒤 두 사람은 대기실에 나란히 앉았다.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났다. 최미연은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윤서는 말없이 노트북을 열어 회사 메일을 확인했다.일이 손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최미연과 나눌 말도 없었다."윤서야."한참 만에 최미연이 불렀다."네.""너한테 미안하다는 말, 내가 한 적 없지?"윤서의 손이 멈췄다. 최미연은 윤서를 보지 않았다."병원 끌고 다닌 것도 그렇고. 애가 안 생기는 걸 전부 네 문제처럼 몰아간 것도 그렇고."윤서는 노트북을 천천히 닫았다."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그냥. 내가 너무 급했나 싶어서."사과라고 하기에는 늦었다.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는 말도 아니었다. 윤서는 잠시 최미연을 바라보다 말했다."저한테 미안하시면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시면 돼요. 저도 아이를 가지기 위해 결혼한 건 아니니까요."최미연의 입술이 굳었다.윤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두 사람이 이 결혼을 바라보는 방향이 얼마나 다른지는 충분했다.수술은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담당의가 나오자 최미연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떻게 됐나요?""일부 조직에서 정자세포가 확인되긴 했습니다."최미연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빛이 돌았다."그럼 된 거죠?""상태가
최미연은 첫 번째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며칠 동안 국내에서 이름난 대학병원을 알아봤고, 일주일 뒤 태호를 데리고 다시 비뇨기과를 찾았다. 태호는 접수대 앞에서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여기까지 와야 돼요?""확실히 해야지.""두 번이나 검사했잖아요.""병원이 바뀌면 결과도 다를 수 있어.""무정자증이 병원 바꾼다고 없어져요?"최미연의 걸음이 멈췄다."그런 소리 하지 마."태호가 헛웃음을 쳤다."의사가 한 말인데.""그러니까 다른 의사 말도 들어보자는 거야."최미연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이전 병원의 검사 기록을 한참 들여다봤다."두 차례 모두 정자가 관찰되지 않았네요."최미연이 곧바로 물었다."검사가 잘못됐을 가능성은 없나요?""검사가 잘못됐다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그럼 치료는요?""우선 원인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무정자증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경우는 아니거든요."의사는 모니터를 돌렸다."정자를 만드는 기능에는 문제가 없는데 배출되는 통로가 막힌 폐쇄성일 수도 있고, 정자 생성 기능 자체에 문제가 있는 비폐쇄성일 수도 있습니다.""폐쇄성이면 치료할 수 있나요?""경우에 따라 수술적 치료가 가능하고, 정자를 채취해서 보조생식술을 시도하기도 합니다."최미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럼 그것부터 확인해주세요.""추가 검사가 필요합니다.""필요한 건 전부 해주세요."옆에 앉아 있던 태호가 어머니를 돌아봤다."엄마. 내가 한다고 했어요?"최미연의 얼굴이 굳었다."여기까지 와서 또 무슨 소리야.""그냥 물어보는 거예요.""확인해야 치료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니니."태호는 더 말하지 않았다.검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혈액검사와 초음파를 비롯해 필요한 검사가 이어졌고, 결과를 확인하기까지 다시 시간이 걸렸다.그동안 최미연은 병원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태호는 반대였다. 병원에서 연락이 와도 바로 받지 않았고, 추가 일정도 최미연이 확인해야 움직였다.윤서에게도
병원 진료실, 태호는 의사 앞에 앉아 있었다.지난번 결과에서 정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뒤, 의사는 한 번의 검사로는 확신할 수 없다며 재검을 권했다.오늘이 그 결과를 듣는 날이었다. 처음엔 혼자 오겠다고 했지만, 이번만큼은 최미연이 굳이 따라나섰다.의사가 차트를 넘겼다."지난 검사에 이어 재검에서도 정액 내 정자가 관찰되지 않았습니다."태호가 의사를 바라봤다."그게 무슨 뜻인데요?""무정자증입니다."진료실 안이 조용해졌다. 태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그게…… 확실한 건가요?""두 차례 검사에서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원인을 정확히 확인하려면 추가 검사가 필요하지만, 현재로서는 무정자증으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이번에는 최미연이 물었다."치료 방법은 없나요?""원인에 따라 다릅니다. 폐쇄성인 경우 수술이나 시술을 통해 정자를 채취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치료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우선 추가 검사를 받아보셔야 합니다.""그럼 애를 아예 못 갖는다는 뜻은 아니죠?""지금 단계에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최미연은 그제야 조금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태호는 의사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무정자증. 그 단어 하나만 머릿속을 맴돌았다.진료실을 나온 뒤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복도를 걷던 태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최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엄마, 뭐라고 말 좀 해봐요."그제야 최미연이 걸음을 멈췄다."괜찮아."태호가 허탈하게 웃었다."뭐가 괜찮아요?""의사가 아직 방법이 없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추가 검사도 받고, 치료할 수 있는지 알아보면 돼.""만약 안 되면요?"최미연의 입이 다물렸다."치료해도 안 되면 어떡할 건데요. 손주 그렇게 노래하더니.""태호야.""윤서한테는 그렇게 병원 다니라고 하면서, 정작 문제는 나였네요."최미연의 표정이 굳었다."아직 다 나온 거 아니야.""무정자증이라잖아요. 재검까지 해서 나온 결과인데...
예약된 날 아침, 태호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씻고 나와 정장을 입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 넥타이를 매다 말고 시간을 확인하더니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윤서는 출근 준비를 하다 그를 바라봤다."오늘 병원 가죠?""응.""같이 갈까요?"태호가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당겼다."됐어. 혼자 갈게.""어머니는요?""엄마까지 왜 와. 검사 하나 받는데 사람을 몇 명이나 끌고 가려고."윤서는 더 권하지 않았다. 현관을 나서는 태호의 얼굴에는 긴장보다 불쾌함이 짙었다.비뇨기과 대기실에 앉은 태호는 휴대폰만 들여다봤다.맞은편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오는 내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검사받고 아무 문제 없다는 결과지만 가져다주면 끝이었다.어머니도 더는 닦달하지 않을 테고, 윤서도 자신에게 검사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것이다.그런데 막상 병원에 와 있으니 기분이 더러웠다."남태호 님."이름이 불렸다.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가 차트를 확인했다."결혼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몇 달 됐습니다.""배우자분은 먼저 검사받으셨고요?"태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네.""특별한 이상은 없으셨고?""그렇다던데요."의사는 몇 가지 생활 습관을 확인했다."음주는 얼마나 하십니까?""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요."실제로는 그보다 많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흡연은요?"질문이 이어질수록 태호는 점점 귀찮다는 표정이 됐다."이런 것도 다 상관있어요?""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을 확인하는 겁니다."의사가 차트를 내려놓았다."우선 기본 검사부터 하겠습니다. 결과는 며칠 정도 걸립니다.""오늘 바로 나오는 거 아니에요?""확인할 항목이 있어서요. 결과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태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에 끝날 줄 알았던 일이 며칠 더 이어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병원을 나온 태호는 곧바로 최미연에게 문자를 보냈다.[검사 받았어요.]답은 금방 왔다.[그래. 결과 나오면 바로 연
최미연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태호를 집으로 불러 마주 앉혔다.거실 조명 아래, 두 사람 사이에는 며칠 전 식사 자리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흘렀다."다음 주로 병원 예약 잡았어. 이번엔 무조건 가.""싫다고 했잖아요.""태호야."최미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윤서는 받을 검사 다 받았어. 병원에서도 너도 받아보라고 했다잖아.""그게 왜 제가 받아야 할 이유가 돼요?""그럼 언제까지 윤서만 병원에 보내?"태호의 표정이 굳었다."엄마가 보냈잖아요.""그래. 내가 보냈어. 애가 안 생기니까 뭐가 문제인지 알아보려고.""그럼 걔한테 문제가 없으면 그냥 기다리면 되잖아요.""언제까지?"태호가 입을 다물었다. 최미연은 한동안 아들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걱정과 조바심이 뒤섞여 있었다."너 계속 이러면 나도 더는 가만히 못 있어.""뭘 어떻게 하게요.""병원에서 하라는 검사 하나도 안 받으면서 애는 갖겠다고? 그럼 내가 널 어떻게 믿니.""엄마.""검사받고 아무 문제 없으면 끝이야."최미연이 잘라 말했다."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윤서한테 더 검사받으라는 소리 안 해도 되고."태호가 헛웃음을 쳤다."결국 윤서 때문에 이러는 거네요.""걔 때문이 아니라 네 자식 문제야."태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왜 자꾸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해요?""누가 문제 있대?""지금 그러고 있잖아요.""그러니까 가서 확인하라고. 멀쩡하면 그걸로 끝나는 일을 왜 이렇게까지 버티니?"태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문제가 있을까 봐 두려운 건 아니었다.그런 검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윤서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이제 자신이 확인받아야 할 차례가 됐다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무엇보다 어머니와 윤서가 자신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은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이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난 멀쩡해요.""그럼 보여줘.""뭘 보여줘요?""검사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