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서로에게 진심을 담아, 마음을 반죽하여 빵처럼 부풀어오른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한 이후의 날들은,예상보다도 훨씬 더 가만가만 조용했다.마치 오래전부터 서로를 사랑하며 그래왔던 일상인 것처럼.처음 맞는 하루지만 이질적일 정도로 낯설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여전히 같은 공간을 오가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한없이 비슷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어느새 서로가 없었던 시간의 농도보다 서로가 함께 보낸 농도가 더 어지러울 정도로 짙어질 무렵이었지만,그러나 그 평온함의 가장자리에서는,이상하리만치 선명한 떨림이 일어나고 있었다.전과는 확연히 달랐다.괜히 조용해서 더 이상했다.익숙한 모든 것이 낯설어지는, 이상한 침묵과 정적.하연은 여전히 따뜻했다. 맑게 웃었다.지원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하지만 그 조심스러움은 전과는 다른 온도를 띠고 있었다.예전엔 '아가씨와 새언니의 관계야. 누가 정상으로 봐줄까?'하는 넘지 않으려는 경계를 지키려는 마음이었지만,'..하지만 사랑이니까, 사랑하니까.'이제는 이미 넘어버린 경계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그 감정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복잡하고도 무겁게 헤아리는 조심스러움이었다.그건 단지 사랑이라는 말을 주고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그 말이 남긴 잔향이,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지원에게도, 그리고 아마, 하연에게도.*그리고 그 주 금요일,지원은 전화를 하면서 동시에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며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응. 어? 아.. 그게.. 아니, 아니야. 갈 수 있어. 응, 응. 내 자리 비워둬. 알았다니까. 응. 이따가 보자, 그래."지원은 오랜만에 예전 직장 동료들과 만나서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했다.이게 얼마만인지,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날 생각에 기쁘기도 했지만, 동시에 홀로 저녁 식사를 할 하연이 걱정되기도 하는 지원.하연에게 말하는 입가엔 하연만을 향하는 익숙한 웃음이 걸려 있었지만,목소리는 어딘가
지원은 결국 퇴근 후 집에 가는 길에, 무작정 마트에 들렀다.장바구니에 손이 가는 대로 담았다.감자, 바지락, 쑥갓, 두부, 된장.그리고 고등어 한 마리.하연이 좋아하던 것들이었다...하연이 들었으면 또 언니 좋아하는 것들만 사왔으면서 왜 내 핑계대냐고 뭐라고 웃으며 찡얼댔겠지만. 그 모습에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려다가 홀로 카트를 끄는 자기 모습에 씁쓸하게 내려갔다.어쨌든 오늘은 지원이 손끝이 재료들을 쥐는 순간.그러나 그 순간마다 지원은 자신이 지금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화해하려고 사는 거야? 아니면.. 그 애가 그냥 그리운 거야?’답은 자명했다.둘 다였다.언제나 함께였으니 앞으로도 언제나 함께일 거라고, 그렇게 될 둘이라고 말하지 않으면,이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사랑이라는 단순한 말도,가족이라는 판에 박힌 말도지금 지원이 느끼는 솔직하고도 깊은 감정에 미치지 못했다.*집에 돌아온 지원은천천히 장 봐온 것을 냉장고에 정리할 것들 정리하고, 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감자를 깎고,무를 썰고,바지락을 해감해 물에 담그고.지원의 모든 동작은 굼뜨고 무거웠다.마음에 바위 하나가 얹혀있어 말이든, 생각이든 뭐 하나가 떠오를 때마다 바위에 툭, 툭 걸리었다.무릎을 바닥에 붙이고 앉아 양파를 썰 때,눈 따갑도록 자극적으로 양파 기운이 올라왔다.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리는 지원의 두 눈.“왜 울어.양파 때문에...내가 양파냐.”지원이 어렸을 때 환장하고 봤던 인소의 명대사.아직까지 농담을 하거나 혼잣말을 할 때 지원은 그 대사들을 따라했다.혼잣말을 뱉으면서도,양파을 써는 칼과 손은 멈추지 않았다.국물이 끓기 시작할 무렵,등줄기 뒤로 싸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고개를 천천히 돌리자하연이 방 문 너머에서 조용히 지원을 바라보고 있었다.자세히 보니,하연의 두 눈은 새빨갰다.그 애도, 울었던 거야.지원은 찌개를 휘휘 저으며말없이 한 숟가락 떠보았다.“오늘은.. 짠맛보다, 그리
이틀째,하연은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신발장에 출근용의 불편하고 딱딱한 구두를 벗어 넣으며 지원은 다시 한 번 집의 요새 특히 낯선 조용한 공기 속에 들어섰다.하연의 방문 앞에 선 지원.손을 뻗어 문을 두드려볼까, 조심스롭게 하연이 이름을 불러볼까, 하다가 만다.집은 여전히 깨끗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컵받침은 그대로였고,부엌에 놓인 컵도 그대로였다. 물 한 모금 따른 흔적 없이.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적거리던 집은, 마치 혼자 산지 오래된 곳처럼 고요하고 동시에 고독했다.대신 식탁 위엔도시락과 하연의 필체로 쓴 쪽지 한 장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언니, 아침엔 이거라도 챙겨 먹고 가요. 하연 드림.]그러나 그걸 봤으면서도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못 본 척, 출근했던 지원.쪽지 옆에 가지런히 놓인 도시락.지원은 조심스레 통을 열었다.그 작은 도시락 안에서 나는 다 식어버린 김밥의 참기름 냄새가,지원의 숨을 갑자기 죄어왔다.“이 애는.. 이러니까 더 밉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못하지. 탓하지도 못하고.”혼잣말을 내뱉으며 지원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뚜껑을 열기도 전에, 김밥보다 먼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그녀의 목을 타고 울음을 밀어올렸다.지원은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꾸역꾸역 김밥을 입에 밀어넣었다.이토록 사소한 도시락 하나로도,하연은 자신을 감히 미워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그 덕분에 지원은 하연에게 핑계나 탓을 하지도 못했다.하연의 그 모든 행동들, 지원을 향해 다가오는 그 순수한 걸음들이 지원같은 개미들에겐 지진과 같은 울림일지도 모른 채로.그게 더 잔인하단 걸, 왜 몰라. 대체, 왜. 너는.정말로 멀어지고 싶었으면, 이런 식으로 따뜻하게 굴지 말았어야지.금기를 넘고 싶지 않다면, 그 관계로 영원히 서로를 응원하며 사는 것에 만족했다면,넘었더라도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았다면 그랬어야지.나까제 흔들지는 말았어야지.하지만 돌이켜보면 하연은 변함없이 항상 그랬다.순수하게 들
"뭐가?""음.. 모르겠어요. 그냥 전체적인 느낌이?"“..너가 봤을 때도 그래 보여?”“응. 분명히 우리는 이렇게 나란히, 같이 앉아있는데 뭔가 자꾸, 언니가 나보다 멀리 있는 기분. 바라보는 건 같은데.. 같은 거리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목적지가 다른 마라톤을 가는데, 그냥 중간에 겹쳐지는 길이 와서 같이 가는 느낌..?”한참이나 말없이 앉아 있었다. 국이 식는 것도, 새하얀 김이 눈앞에서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하연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언니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 사실 요즘 좀 무서워요.”지원이 고개를 들었다.“언니가 내 손 잡아줬을 때, 그게 너무 기뻐서.. 그 다음이 더 욕심나기 시작했거든요.”지원은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식탁에 부딪히는 쇠젓가락의 소리가, 괜히 크게 울렸다.“그건.. 네 잘못 아니야.”“그러니까요. 그래서 더 무서워요. 언니가 나한테 물러서게 되면, 그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내가 가진 소중한 것들 다 잃게 될 것 같아서. 결국 난 내 잘못이 하나도 없어도 전부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하연의 말은 조용했지만, 그 울림은 깊었다.지원은 손끝으로 식탁을 천천히 문질렀다. 반투명한 나무결을 따라 흐르듯.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언가를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이 될 것 같지 않았다.하연은 지금, 하연과 지연, 둘의 사랑의 속도를 묻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속도를 맞추고 싶어 하면서도, 어쩌면 자신이 이미 너무 앞서가거나, 뒤에 처져서 버려졌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지원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미안. 미안해.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래.”“뭐가 그렇게 겁나는데요?”지원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지금 이 감정이, 이 관계가.. 내가 너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릴까 봐.이미 남들이 봤을 땐 충분히 이상한 우리 관계가, 더 이상해질까 봐. 그리고 애꿎은, 잘못한 거 하나 없는 너가 다칠까봐.”하연은 그
본래가 그렇다.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당사자의 몸과 마음은 손짓 하나, 생각 하나, 그 사소한 것들에 더 조심스러워진다.이게 지원이 그간 하연을 향한 복잡한 마음의 정의였다.창 밖에서는 이틀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기상 예보에 따르면 아직 채 장마가 시작되기도 전이어야 하는데, 이 도시는 이미 오래된 이불처럼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콘크리트 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이름 모를 누군가의 숨결처럼 느릿했고, 창문마다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홀로 삭이려고 마음 속에 간직하려던 기억을 더듬듯 끈질기게 귓가를 두드렸다. "..뭔 비가 이렇게 오냐."지원은 회색빛 거리 위를 걸었다. 하연이 부득불 들고가라며 손에 쥐어준 헬로키티 우산을 들고는 있었지만 어깨와 소매는 이미 축축했고, 발끝으로 스며드는 빗물에 신경이 쓰이기보다, 머릿속이 더 무거웠다.그렇게 편의점 앞을 지나칠 때, 문 옆에 쌓여 있는 음료 박스들 사이에서, 익숙한 초록색 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하연이 좋아하는 탄산음료. 평소였다면 망설이지 않고 가게에 들어가 하연의 것 하나, 지원의 것 하나를 집어 들었을 테지만, 오늘, 지원은 가볍게 시선을 떼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이미 충분하게 행복한데, 분명히 행복한 상태인데, 왜 자꾸 마음은 무거워지는 걸까.지원에게, 그 질문은 언제나 매일같이 반복되었고,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하지 않은 건지, 하지 못한 건지.어차피 지원은 몰랐거나 몰랐어야만 했고...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는 얘기다.*띠띠띠띠.번호키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하연은 거실 바닥에 길게 누운 채 책을 들고 있었다. 얼굴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던 그 모습은, 여전히 순하고 맑고 환했다.아직 책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듯 멍하니 눈을 돌려 현관을 바라보다가,지원임을 알고 하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어! 언니 일찍 왔네요? 뭔 일이래?”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젖은 우산을 접었다. 신발장 옆에 기대어 두었
[지원저녁엔 뭐 먹고 싶어? 약속 없으면 집에서 먹자.언니가 퇴근하고 집 가는 길에 사가지고 갈게.]그 문장은 아무렇지 않은 척 위장한 마음이었다.어느샌가부터 이런 문자 하나도, 하연에게 보내기엔 지원은 큰 용기를 내야 했다.하지만 손끝은 솔직하게, 조금 떨렸다.답장은 금세 왔다.[하연아무거나요.언니가 나랑 먹고 싶은 거!]그 말 한 줄에,지원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이 아이는 정말,이젠 나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였을지도 모른다.지금은 죽은 남편에게 자기 동생이라며 소개받았을 때에유난히 귀를 붉히던 중학생 아이가 보내는 시그널이,이제야 도달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그런데.. 나는 준비됐나?"홀로 작게 중얼거리는 지원.*그날 저녁.지원은 퇴근길에 시장에 들렀다.매일 구매하는 일상적인 고등어나 두부 대신,하연이 좋아하는 닭강정과 딸기, 샤인머스캣,그리고 작고 귀여운 와인 한 병까지.별 것도 아닌데도,계산대에 진열된 것들을 바라보며지원은 괜히 낯간지러워 고개를 숙였다.'뭔 기념일도 아닌데.. 왜 이러지, 나는.'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하연이 반쯤 벌어진 현관에서 웃으며 뛰어나오는 순간,그 모든 고민은 흐려졌다.“언니,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나 부르지.. 안 무거웠어요?”“무겁긴 뭐가 무겁다고. 그리고.. 그냥.. 가끔은 이런 것도 좋잖아?”지원은 물끄러미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하연은 와인 병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라벨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영화에서 보니까 주인공들은 이럴 땐, 키스하면서 어서오라고 말해주던데.”순간, 지원의 심장이 멈췄다.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하연의 표정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마치 그 말이,진짜 바람 같기도 하고, 아니길 바라는 도전 같기도 해서.지원은 입을 열었다.“..너 이제 영화랑 미드 금지야.""아, 왜요!"하연의 코를 꼬집는 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