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빛나는 삶

이혼 후, 빛나는 삶

By:  백소연In-update ngayon la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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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서린은 오랫동안 짝사랑한 남자와 마침내 결혼에 성공했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온서린은 남편과 과부가 된 형수님의 은밀한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강후 씨, 당신의 아이를 낳게 해줘요.” 그 짧은 한마디는 그녀가 그토록 공들여 지켜온 평화로운 일상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온서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애정을 쏟고 양보로 유지해 온 결혼생활이 실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꾸며진 한 편의 연극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남편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고 ‘옛정'이라는 욕망은 탐욕스럽게 그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정과 연구 성과 그리고 그녀의 미래마저도. 하지만 온서린은 울거나 매달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지금까지 지녀왔던 모든 온정을 거둬들이고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사직서와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아이를 데리고, 오로지 다른 여자에게만 다정한 이 남자를 완전히 떠나기로 결심했다. 삶의 중심을 다시 일로 되돌리자 신기하게도 그녀 주변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잘생긴 외교관, 마음 깊은 부원장, 그리고 그림자처럼 밤낮으로 그녀 곁을 지키는 어린 추종자까지. 심강후는 그제야 자신이 아내에게 얼마나 소홀하고 차가웠는지를 깨달았다. 그녀가 던지고 간 이혼 서류는 그를 순간적으로 정신 차리게 했다. 자신만을 바라보던 아내는 자신이 형수님에게 지나친 마음을 쏟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떠날 결심을 굳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마침내, 누군가 온서린 앞에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그 순간.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심강후가 달려와 그녀를 거칠게 품 안에 가두며 말했다. “나 아직 이혼 서류에 도장 안 찍었어. 중혼죄로 감옥 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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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제1화

심씨 가문의 장남 심강혁은 서른두 살에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심씨 가문은 깊은 침통에 잠겼고 장례를 치른 뒤 열리는 추모식이 바로 오늘이었다.

하루 종일 하늘은 잔뜩 흐렸고 저녁 무렵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본가 저택의 거실은 원래 놓여 있던 자단목 가구들을 모두 치우고 온통 흰빛으로 정돈해 두었다.

단상 앞에는 꽃이 가득했고 정중앙에 놓인 사진 속 심강혁은 맞춤 정장을 입은 채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꽃향기와 향불 냄새가 뒤섞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온서린은 손님을 맞느라 오전 내내 쉴 틈 없이 자리를 오갔다. 오늘 온 사람들은 정 재계 인사들이 대부분이었고 낯익은 얼굴과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밖에는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한 손님이 실수로 술을 쏟자 온서린이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그의 검은 셔츠에는 이미 커다란 얼룩이 번져 있었다.

“김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위에 올라가서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다드릴게요.”

김 대표는 세심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심씨 가문의 둘째 며느리를 바라보며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번거롭게 해드리네요, 사모님.”

“아닙니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온서린은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편 심강후의 모습이 보였는데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을 심강후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 거로 생각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두 형제의 사이가 늘 각별해 보였으니까.

온서린은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3층 세 번째 방에 손님용 여벌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1층의 분주한 분위기와 달리 3층은 훨씬 고요했다. 온서린은 카펫 위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막 문을 열려던 찰나 안쪽에서 여자의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서린은 심장이 조여왔다. 심강혁의 아내, 육채원이었다.

남편을 갑작스레 떠나보낸 그 참담한 충격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눈물을 삼키는 것만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지탱하는 유일한 길일지도 몰랐다.

평소 육채원과 가깝게 지내왔던 온서린은 지금이야말로 그녀의 곁에서 슬픔을 나누며 위로를 건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강후 씨, 추모식이 끝나면 할머니는 저를 외국으로 보내실 거예요. 알고 있어요? 이제 외부인인 제가 회사의 핵심 프로젝트를 맡는 걸 더는 허락하지 않으실 거고 저를 완전히 중심에서 밀어내시겠죠.”

“강후 씨, 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좀 도와줘요...”

문고리에 닿으려던 온서린의 손끝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방 안에서 남편 심강후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도와주면 돼? 정말 출국하기 싫다면 할머니께 내가 말씀드릴 수는 있어.”

“아이를 갖고 싶어요.”

육채원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그리고 옷감이 스치는 듯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후 씨, 당신의 아이를 낳게 해줘요. 네?”

그 말에 온서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지?’

“채원아, 진정해.”

“강후 씨, 아직도 내가 그때 당신 형을 선택한 걸 원망하는 거예요?”

심강후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건 할머니 뜻이었고 저한테는 선택권이 없었어요. 그날 밤...”

육채원의 떨리는 울음소리가 다시 새어 나왔다.

“눈을 떠 보니 당신 형이 내 옆에 누워 있었다고요. 강후 씨,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내 마음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그만해. 그런 얘긴 이제 하지 말자.”

“그럼 허락하는 거예요?”

육채원의 목소리에 희미한 기쁨이 스쳤다.

“역시 당신은 내가 외국으로 내쳐지는 걸 모르는 척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채원아, 형이 없다고 해도 난 네가 심씨 가문에 남을 수 있게 지켜줄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

육채원은 흐느끼듯 말했다.

“내가 심씨 가문의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무슨 자격으로 여기 남겠어요? 강후 씨, 서린 씨가 그러더군요. 아린이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해서 평생 돌봐야 하니 더는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고요.”

심강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육채원의 목소리는 더 처연해졌다.

“저한테 따로 말했어요. 강후 씨, 아린이 병은 평생 가는 거잖아요.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 건강한 아이를 낳아줄 수 있어요.”

방 안은 잠시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은밀한 입맞춤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강후 씨, 이건 제 평생 가장 큰 소원이에요. 한 번만 들어주면 안 돼요?”

문밖에 선 온서린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차가워졌다.

한마디도 더 듣기 힘들었던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에 이르자 네 살배기 딸 심아린이 또래 아이들과 사탕을 바꿔 먹으며 폴짝폴짝 뛰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심아린이 해맑게 웃으며 달려와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나 언니 오빠들이랑 게임했는데 진짜 재밌었어요.”

천진하게 웃는 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온서린은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져 왔다.

그녀는 몸을 낮춰 앉아 딸아이 입가에 묻은 사탕 부스러기를 닦아주었다.

그러자 심아린은 작은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초콜릿 두 개를 꺼낸 뒤 온서린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 이거 엄마가 먹어요.”

온서린은 목이 꽉 막혀오는 것 같았다. 서늘한 손끝으로 그녀는 딸이 건넨 초콜릿을 천천히 받아 쥐었다.

그때 멀리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문객들은 추모식장으로 이동해 달라는 안내였다.

온서린은 멍한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린아, 엄마는 아직 손님들 챙겨야 하니까 아주머니한테 가서 먹을 것 좀 달라고 해.”

“네!”

심아린은 해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폴짝폴짝 뛰어갔다.

온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난간을 힘주어 움켜쥔 채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동안 그녀가 믿어온 부부의 화목, 형제의 우애, 동서 사이의 정까지 전부 거짓이었다.

온서린은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주 오는 손님들이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단정한 미소를 얼굴에 걸쳐야 했다.

“김 대표님, 정말 죄송해요. 여벌 옷이 바로 눈에 띄지 않아서요. 대신 새 수건이랑 겉옷을 가져오라고 했으니 우선 좀 닦으시고 걸치고 계세요. 감기 드시면 안 되니까요.”

김 대표는 다시 한번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곧 추모식이 시작되었다. 낮게 깔린 애도의 음악이 집안을 맴돌았고 심강후는 고인의 동생으로서 유가족 대표 추도사를 하기 위해 단상 위에 올랐다.

온서린은 고개를 들어 무대 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정장 차림의 그는 자세가 곧고 얼굴에는 슬픔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6년 동안 한 침대를 써온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짙은 안개에 가려진 사람처럼 낯설었고 도무지 어떤 사람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온서린은 고개를 살짝 돌려 반대편에 선 육채원을 바라보았다.

검은 원피스 차림에 왼쪽 머리 옆에는 흰색 머리핀이 꽂혀 있었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으며 눈가도 퉁퉁 부어 있었다.

양옆에서는 친구 두 명이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고 가련한 모습이었다.

온서린은 평소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던 육채원의 행동들이 떠오르자 순간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추모식이 끝나갈 무렵 창밖의 빗줄기도 한결 약해졌고 손님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심강후는 중요한 손님 몇을 끝까지 배웅한 뒤 미간을 꾹 누르며 온서린 쪽으로 다가왔다.

“힘들지?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바빴잖아.”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온서린의 이마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정리해 주려 손을 뻗었다.

온서린은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심강후의 얼굴에 잠시 당혹이 스쳤고 허공에 머문 손이 굳어졌다. 온서린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피곤하긴 하네요. 저녁에 아린이 약도 챙겨야 하니까 저는 먼저 아린이랑 같이 집으로 갈게요. 당신은 할머니 곁에 조금 더 있다가 오세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네 살배기 딸은 온서린 품에 안긴 채 잠들어 있었다.

아직 이별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는 잠든 와중에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빌딩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온서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음속이 한순간 텅 비어버린 듯했다.

다정함은 이토록 값쌌고 깊은 정이라 믿었던 것조차 허망한 기만으로 전락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예전과 같은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온서린은 직감했다.

그녀는 손끝으로 딸의 사랑스러운 볼을 살짝 어루만지고는 허리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심아린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천성 심장병 진단을 받았다.

그 사실은 가족 전체에게 큰 충격이었다. 다행히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수술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세심한 보호와 돌봄이 필수였고 먹는 것 하나, 움직이는 것 하나까지 모두 특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오늘 밤 벌어진 일은 온서린의 심장 깊숙한 곳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혔다.

그녀는 이제 더는 집안일만 돌보며 온화하고 다정한 심강후의 아내로 살아갈 수 없었다.

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자기 남편이 이 형제애라는 가면극 속에서 도대체 어떤 역할을 맡고 있었는지.

그날 밤 심강후는 본가에 남았다.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 그는 온서린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서린아, 여긴 아직도 중요한 손님들이 몇 분 남아 계셔서 내가 끝까지 있어야 할 것 같아. 아린이를 데리고 먼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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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Kabanata
제1화
심씨 가문의 장남 심강혁은 서른두 살에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심씨 가문은 깊은 침통에 잠겼고 장례를 치른 뒤 열리는 추모식이 바로 오늘이었다.하루 종일 하늘은 잔뜩 흐렸고 저녁 무렵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본가 저택의 거실은 원래 놓여 있던 자단목 가구들을 모두 치우고 온통 흰빛으로 정돈해 두었다.단상 앞에는 꽃이 가득했고 정중앙에 놓인 사진 속 심강혁은 맞춤 정장을 입은 채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공기 중에는 꽃향기와 향불 냄새가 뒤섞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온서린은 손님을 맞느라 오전 내내 쉴 틈 없이 자리를 오갔다. 오늘 온 사람들은 정 재계 인사들이 대부분이었고 낯익은 얼굴과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밖에는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한 손님이 실수로 술을 쏟자 온서린이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그의 검은 셔츠에는 이미 커다란 얼룩이 번져 있었다.“김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위에 올라가서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다드릴게요.”김 대표는 세심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심씨 가문의 둘째 며느리를 바라보며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번거롭게 해드리네요, 사모님.”“아닙니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온서린은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편 심강후의 모습이 보였는데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그녀는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을 심강후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 거로 생각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두 형제의 사이가 늘 각별해 보였으니까.온서린은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3층 세 번째 방에 손님용 여벌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1층의 분주한 분위기와 달리 3층은 훨씬 고요했다. 온서린은 카펫 위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막 문을 열려던 찰나 안쪽에서 여자의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서린은 심장이 조여왔다. 심강혁의 아내, 육채원이었다.남편을 갑작스레 떠나보낸 그 참담한 충격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눈물을 삼키는 것만이 무너져 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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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온서린의 손끝은 얼음처럼 식어 있었다.다음 날은 눈부시게 맑았다.온서린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딸의 옷을 챙겨 입혀 유치원에 보낼 준비를 했다.아이는 잠옷을 입은 채 베개에 엎드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좀처럼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온서린은 부드럽게 달래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은은하게 풍기는 젖 내음에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딸이 자라면서 밤중에 놀라 울던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한두 살 무렵에는 한밤중에 갑자기 코피를 쏟기도 했고 성미가 고집스러워 어른이 닦아주려 해도 끝내 거부하곤 했다.아침이면 마른 코피가 작은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시간을 온서린은 거의 버티다시피 견뎌냈다.심아린은 몽롱하게 눈을 뜨더니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아빠가 유치원에 데려다줬으면 좋겠어요. 이미 약속했단 말이에요.”온서린은 잠시 멈칫했다. 심강후는 유치원으로 갈 때마다 늘 짧은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었고 심아린은 그 시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래서 등교할 때마다 꼭 아빠를 찾았다.“아빠는 지금 본가에서 손님들을 보살피고 있어. 오늘은 엄마가 데려다주면 안 될까?”심아린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곧장 키즈워치를 집어 들어 심강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아린아!”심강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지금 와서 나 유치원에 데려다주면 안 돼요?”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아이의 목소리에 심강후는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심아린을 달랬다.“아린아, 오늘은 아빠가 하교할 때 데리러 가면 안 될까?”“그러면 장난감 사 온다고 약속해요. 그러면 동의할게요.”“알겠어. 아빠가 꼭 사 갈게.”온서린은 침대 곁에 서서 아이가 통화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옷을 입히려 했다.그런데 전화를 끊기 직전, 수화기 너머로 육채원의 가벼운 기침 소리가 스며들었다.“강후 씨, 나 너무 힘들어...”그 말과 함께 전화는 끊겼고 온서린은 옷을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옷을 갈아입은 심아린은 차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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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심강후 씨 전화예요.”온서린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 내내 돌봐주느라 지금 너무 지쳐서 잠들었어요.”육채원의 말끝에는 미묘한 자책과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어디 아프신 건가요?”“어젯밤에 술을 좀 많이 마셨어요. 순간, 마음을 다잡지 못해서...”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이었다.“손목을 그었어요. 다행히 강후 씨가 제때 와서 병원으로 데려가 줬어요.”온서린은 육채원의 말에서 조금의 흠도 잡아낼 수 없었다.남편을 잃은 여자가 결국 무너져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고 시동생은 형수님의 곁을 지키느라 밤새 돌아오지 못했다. 겉으로 보면 너무도 자연스럽고 정당한 일이었다.“그러시군요.”온서린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가라앉았다.“그럼 푹 쉬세요.”육채원은 짧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통화 종료음이 울리는 순간, 온서린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하게 닫혀 있던 문이 조용히 열렸다.육채원은 그녀의 남편을 불러 놓고는 단 한마디의 미안함도 내비치지 않았다.조금 전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온서린은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사람처럼 느껴졌다.한 번 크게 요동치던 슬픔과 분노가 가라앉고 대신 또렷한 이성이 자리를 잡았다.창밖을 바라보며 온서린은 자신을 스스로 다잡았다.딸은 아직 어렸고 아이의 세계는 한없이 투명하고 맑았다. 그 무결한 세계를 그 누구도 흔들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어쩌면 이제는 이 얇은 막을 직접 걷어내야 할지도 몰랐다. 심강후와 육채원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끝까지 확인해야 했다.오전 아홉 시, 온서린은 회사 회의에 참석했다.회의실 안, 심강후는 피곤이 어린 얼굴로 상석에 앉아 있었다.짙은 회색의 잔무늬 맞춤 정장에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흐트러짐보다는 느슨한 위압감이 먼저 느껴졌다.심강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심강후는 그룹 내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키워 왔다.심강혁까지 유고가 생긴 지금은 사실상 심강후가 회사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차분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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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온서린의 움직임엔 일절 멈춤이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사무실로 돌아온 온서린은 문에 등을 기댄 채 크게 숨을 내쉬었다.서류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흐릿한 상태로 거짓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무엇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이 불확실한 상황이 더 두려웠다.잠시 후, 온서린은 책상 앞에 앉아 내선 전화를 들었다.“언니, 리바이탈 과립제 개량 및 서방 기술 적용 프로젝트 자료를 전부 제 메일로 보내 주세요. 오후 세 시 회의에서 중요하게 발표할 사항이 있어요.”전화를 끊고 컴퓨터를 켠 그녀는 곧장 파일을 열었다.이 프로젝트는 심강후의 할머니, 성미경이 직접 연결해 준 일이었다.대외적으로는 동서가 함께 진행하는 협업 프로젝트로 알려져 있었고 성공만 한다면 가문 내에서도, 대외적으로도 훈훈한 미담으로 남을 일이었다.그런데 마무리를 앞둔 지금, 신청 자료를 들여다보니 핵심 해결 방안과 성과에는 모두 육채원의 제제 공정 혁신팀 이름이 적혀 있었고 온서린의 이름은 약리 지원 인력 목록 한쪽에만 덧붙듯 적혀 있었다.“역시, 또 이런 식이군.”온서린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렸다.오후 세 시, 넓은 회의실 상석에는 심강후가 앉아 있었다.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책상 위 문서를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쉽게 읽히지 않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있었다.오늘 회의의 주제는 리바이탈 과립제 프로젝트의 단계별 정리였다. 연구개발부는 물론 관련 부서의 핵심 인력들이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발언 차례가 되자 온서린은 두툼한 자료를 펼쳐 들고 단상 앞으로 나섰다. 프로젝터에 띄워진 문서는 그녀가 직접 수정해 가져온 것이었다.“프로젝트 신청 자료와 원본 기록 사이에 일부 차이가 확인됐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이 자리에서 정리하고자 합니다.”말이 끝나자 회의실 안이 술렁였다.이미 신청 절차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자료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는 건,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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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채원아?”심강후가 계단 아래로 다가갔다.“날이 많이 쌀쌀해졌는데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와?”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육채원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채 차가운 바닥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온서린 씨는 왜 리바이탈 프로젝트를 빼앗아 가려는 거예요? 강후 씨, 그 프로젝트는 반년 동안 제 모든 걸 쏟아부은 일이에요. 온서린 씨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남편을 잃었다고 이제는 온서린 씨를 마저 나를 밀어내는 건가요?”말을 마친 순간 그녀의 몸이 힘없이 휘청였다. 중심을 잃고 계단 위에서 쓰러지려는 찰나, 심강후가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올라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채원아, 진정해.”“강후 씨, 그 프로젝트는 제거예요. 처음에 온서린 씨 아이디어를 참고한 건 맞아요. 하지만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저예요. 저한테는 제 아이 같은 거라고요.”육채원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자 굵은 눈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그 사람이 떠났다고 이제 전 정말 이 집에서 설 자리마저 사라지는 건가요.”“그만하고 일단 올라가서 옷부터 챙겨 입자. 아주머니한테 음식 좀 만들어 놓으라고 할 테니까 뭐라도 좀 먹어.”심강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입맛 없어요.”육채원은 짧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난간을 붙잡고 위태롭게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끝에 다다르자 입술을 감싸 쥐고 어깨를 들썩이다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강후 씨, 저를 버리듯이 해외로 보내지 말아줘요. 전 이 집이 좋아요. 여기서 자랐고 여기가 제 전부예요. 버릴 수가 없어요.”멀어지는 그녀의 가느다란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심강후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이윽고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못을 박듯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있는 한 넌 영원히 심씨 가문 사람이야. 누구도 널 내보낼 순 없어.”육채원이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붉게 젖은 눈으로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가을 저녁의 어둠은 유독 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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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온서린의 입술 끝이 가늘게 떨렸다.심강후는 집안의 모든 사람, 그들의 입장과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고 배려하면서도 정작 그녀의 마음만은 안중에도 없었다.심강후는 미동도 없이 곧게 펴진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의 어조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서늘한 엄중함이 서려 있었다.“당신이 먼저 채원이를 찾아가서 관계를 좀 풀었으면 해.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란 소리야. 회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이것이 온서린이 아는 심강후였다. 늘 자신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감정이 다치는 일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형수님을 따로 찾아갈 생각 없어요.”온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전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찰나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버린 심강후의 얼굴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뒤돌아 침착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경의 전화가 걸려 왔다.“서린아, 이번 주 토요일 아빠 생신이야. 가족들 모여서 식사하려고 하는데 심 서방이랑 아린이 데리고 같이 와.”최하경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부드러웠다.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서린의 눈가가 시큰하게 저렸다.“네, 엄마. 갈게요.”온서린은 감정을 추스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네 형수님은 어때? 좀 괜찮아? 남편이랑 사이도 좋았잖아. 갑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던 남편을 잃었으니 얼마나 힘들겠니. 너랑도 사이좋았으니까 시간 나면 네가 많이 챙겨줘.”어른으로서 건네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그 말에 온서린은 심장이 더 조여오는 것 같았다.“엄마, 저 지금 좀 바빠서 이만 끊을게요. 토요일에 아린이 데리고 일찍 갈게요.”“그래.”최하경은 괜히 딸의 일을 방해할까 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온서린이 컴퓨터 화면을 힐끗 살폈다. 5분 뒤면 비전 3상 재검토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었다.그녀는 중요한 자료를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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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채원이는 형이 정식으로 맞이한 아내예요. 이 집에서 십 년 넘게 살아온, 엄연한 식구라고요. 형이 안 계신 지금, 우리한테는 채원이를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어요.”심강후는 말을 멈추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짚듯 바라본 뒤,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채원이는 국내에 남을 겁니다. 본가에 머물든 밖에 나가서 살든 그건 본인의 뜻에 맡길 거예요. 한생 제약에서 직위도 그대로 유지될 거고요. 만약 할머니께서 여전히 반대하신다면 앞으로 그 사람에게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제 개인 자산으로 지출하겠습니다.”온서린은 묵묵히 딸을 챙기며 티슈로 아이의 작은 입가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남자의 단호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손길이 서서히 멎었다.육채원을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성미경의 권위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조차 불사하는 모습.심지어 마지막 한마디는 육채원을 완전히 자신의 울타리 안에 넣고 보호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성미경은 화자 치밀어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손가락으로 심강후를 가리키며 말했다.“이제 이 집안이 네 세상이라 이거냐? 정녕 할미를 화병 나 죽게 하려는 게야?”심강후는 말투를 부드럽게 바꿨으나 입장만큼은 굽힐 생각이 없는 듯했다.“할머니, 집안의 모든 일은 언제나 할머니 뜻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채원의 일은 회사와 연관된 문제이기도 해요. 이 일만큼은 할머니 뜻을 따를 수 없으니 이해해 주세요.”식당 안에는 죽은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성미경이 손자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자 오나영이 적절한 시기에 나서 달래듯 입을 열었다.“어머님, 강혁이가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하늘에 있는 그 아이도 채원이가 이런 대접을 받는 걸 원치 않을 거예요.”심강후는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남은 와인을 단숨에 비웠다.목울대가 크게 일렁였고 조명 아래 드러난 옆얼굴의 선은 그지없이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아빠... 증조할머니랑 싸우지 마세요. 저 무서워요...”줄곧 세심한 보살핌만 받으며 자란 심아린은 이 무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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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심강후가 입고 온 짙은 색 정장은 어제 그대로였다. 갈아입을 틈조차 없었던 듯, 옷자락에는 하루의 흔적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단정히 곧은 체형과 흠잡을 데 없는 용모는 이 소박한 마당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이질적이었다.“어머님, 이건 아버님 생신 선물입니다.”그는 아랫사람으로서의 송구함과 온화함이 어린 미소를 띠며 손에 들고 있던 고급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건넸다.안에는 최상급 보이차와 찻잔 세트가 담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가격대임을 알 수 있는 귀한 물건들이었다.뒤이어 그의 비서인 박윤재가 차에서 최고급 와인과 양주 몇 병을 꺼내 와 테이블 옆에 차곡차곡 내려놓았다.최하경은 이토록 훤칠하고 능력 있는 사위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뿌듯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빈손으로 오지 뭘 이렇게 잔뜩 들고 왔어요. 서린이 아빠는 아린이 데리고 공원에 산책 좀 한다고 나갔어요. 서린아, 심 서방 좀 챙겨. 난 아주머니랑 요리 몇 가지만 더 해놓고 나올게.”최하경이 서둘러 말을 건넸다.“네.”온서린은 이내 차를 준비했다. 그때 마침 심강후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그는 휴대전화를 쥔 채 마당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받았다.온서린은 물을 받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시 멍해졌고 그사이 물이 넘쳐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당황한 그녀는 서둘러 휴지를 꺼내 넘친 물기를 닦아냈다.“오늘 아버님 생신인 거 왜 말 안 했어?”언제 들어왔는지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서린은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물기를 정리하며 담담히 답했다.“바쁜 줄 알고 따로 말 안 했어요.”“앞으로 이런 중요한 날이 있으면 잊지 말고 미리 귀띔해 줘.”말을 마친 심강후는 소파로 가 앉았다.온서린은 끓어오르는 주전자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듯 손끝이 미세하게 말려들었다.심강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남편으로서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그간의 갈등과 편애, 날 선 논쟁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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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래요.”강도윤은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고 들고 있던 꽃다발을 최하경에게 건넸다.“이건 사모님께 드리는 겁니다.”최하경이 기분 좋게 꽃다발을 받아 들며 말했다.“뭐 이런 것까지 챙겨. 고마워.”온서린은 곁에서 꽃다발을 건네받으며 짧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꽃을 꽂아둘 화병을 찾아 자리를 떴다.강도윤의 시선이 그 모습을 스치듯 지나갔다. 옅은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피로가 맑은 얼굴 위에 희미하게 내려앉아 있었다.원래도 차분한 기질이었지만 이제는 그 단정함이 더 깊어져 심씨 가문의 며느리라는 자리와 서서히 하나가 되어가는 듯했다.강도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잠시 뒤, 온승호가 심아린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집 안은 더 북적이기 시작했다.친척과 지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어느새 상이 세 개나 차려졌다.온서린은 딸을 안고 심강후 옆에 앉았다. 심강후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연스럽게 새우를 까 심아린의 입에 넣어 주었다.아이는 투정 섞인 표정을 짓다가도 결국 받아먹었다.겉으로 보기엔 흠잡을 데 없는 부부였다. 몇몇 여성들은 은근히 부러운 시선으로 온서린을 바라보았다.좋은 집안에 시집가 남편의 배려까지 받는 모습이 더없이 안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그들의 딸이 선천적인 심장 질환을 안고 있다는 점이었다.강도윤은 가볍게 술 두 잔을 비운 뒤 병원 일이 바쁘다며 식사를 마치자마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떠나기 전 그는 온서린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수요일에 아린이 검사 있어. 잊지 말고 와. 해외에서 온 교수님이 잠깐 진료 보시는데 같이 한 번 보시게 해줄게.”온서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고마워요, 오빠. 수요일에 아침 일찍 데리고 갈게요.”“그래.”짧게 답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심강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강후야, 나 먼저 가볼게.”심강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오후 두 시가 조금 지나 심강후도 먼저 자리를 떴다.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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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온서린은 심강후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오늘 밤은 좀 피곤해요.”심강후의 단정한 눈썹이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곧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알겠어. 그럼 일찍 쉬어.”심강후는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은은한 나무 향이 바람처럼 번졌다.온서린의 심장은 그 순간 망치에 맞은 듯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꾹 감았다. 그가 원하는 것을 처음으로 거절해 본 밤이었다.다음 날 아침, 온서린은 이른 시간에 일어나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단지를 두 바퀴 달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거실 소파에는 심강후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이미 옷을 갈아입은 심아린이 그의 곁에서 블록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아침 햇살이 거실 안으로 깊숙이 흘러들었고 두 사람의 모습은 정적 속에서 따뜻하게 빛났다.“엄마!”심아린이 밝게 외치며 달려와 온서린의 품 주변을 맴돌았다. 온서린은 물잔을 들어 천천히 물을 마시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점심에 소민 이모랑 밥 먹으러 갈 거야.”“와, 나도 갈래요!”심아린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심강후는 고개를 들어 그런 온서린을 바라보았다.온서린은 아무 말 없이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단정한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고운 몸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엄마, 너무 예뻐요.”심아린이 감탄하듯 소리쳤다.“나도 예쁜 치마 입고 나가고 싶어요!”온서린이 미소를 지었다.“벌써 예쁜 걸 이렇게 좋아해서 어쩌나.”“입을래요!”아이가 투정을 부리자 온서린은 심아린에게도 예쁜 원피스를 입혀주었다.심아린은 심강후 앞에서 빙글빙글 돌아보며 물었다.“아빠, 새 치마 예뻐요?”심강후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예쁘네. 우리 아린이는 뭘 입어도 예쁘지.”그 말에 온서린의 마음 한쪽이 불편하게 조여들었다.육채원을 지키기 위해 차가운 결단을 내리던 심강후의 모습을 떠올리자 온화한 그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가짜처럼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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