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지만 자신은 알았다.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경신은 자신이 왜 병원에 누워 있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멍하니 이불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얼굴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단발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여자애였다.
“어? 송화야!”
반가운 마음에 경신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이름이 터져 나왔다. 베스트 프렌드 송화야였다. 하지만 경신의 목소리를 들은 화야는 펄쩍 뛰며 들고 있던 물통을 꽉 쥐었다.
“악! 깜짝이야! 오늘 진짜 일진 왜 이래? 저기요, 저를 어떻게 아세요?”
“······응? 야, 웬 존댓말? 나야, 경신!” “저 그쪽 오늘 처음 봤거든요?! 기숙사 욕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계시길래 업고 온 건데,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는 건데요!”화야는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경신은 황당했다. 너랑 나랑 전생 세 번을 모조리 함께 보낸 찐친인데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머릿속에서 어제오늘 일어난 현생의 기억은 까맣게 날아갔지만, 희한하게도 전생 3회차의 수많은 기억들이 물꼬가 터진 듯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기억상실이에요? 어제오늘 뭐 했는지 기억은 나요?”
“어제오늘 일은 모르겠는데······ 화야야, 나 전생 기억은 다 있어. 우리 전생 절친이었잖아. 나 지독하게 연애하다 억울하게 죽었는데. 음, 뭐지? 이 기분은?” “룸메이트님, 제발 냉수 좀 마시고 정신과 진료부터 잡죠.”화야는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물을 건넸다.
경신은 물을 마시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생각할수록 머릿속은 복잡했다. 의미심장하게 꿈인지 망상인지 몰라도 전생 3회차는 주마등처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어쨌든 조신한 모태솔로 인생에 S대 음대 출신 작곡가였던 자신이 지금 화야의 앳된 얼굴을 보니 과거로 회귀했거나, 다른 전생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번 4회차 인생이야말로 전생의 억울함을 씻어낼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경신은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남몰래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화야가 아주 심각하고 자극적인 얼굴로 경신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자신과 절친이었고, 지내다 보면 다시 친해질 터이니 경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은 아주 멀쩡하기 때문에 여기 누워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신 양. 지금 전생이 문제가 아닌 것 같거든요?”
“응? 왜?” “그쪽 쓰러져 있던 화장실 바닥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나왔어요. 방금 간호사님이 산부인과 가자네요. ······축하해요, 임신이래요.” “······쿨럭!”마시던 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경신의 안경이 콧등 밑으로 툭 떨어졌다.
전생 3번 내내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아본 클린녀 인생이었는데, 현생의 기억도 없는 상태에서 임신이라니! 경신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여린 배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 2월 28일. 이제 곧 봄인데도 JJ엔터테인먼트 최고 톱스타에게 제공되는 숙소지만, 느껴지는 온도는 겨울 그 자체였다.과연 자신이 잘나가는 도윤과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지금 이곳에서도 잠자리만 하고 얼른 돌아가야 하는데.
현수는 얇은 이불 끝을 짓쥐며 잘게 몸을 떨었다. 도윤의 침실 안, 짓눌리는 열기 속에서도 머릿속은 차갑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도윤의 얼굴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화려하게 일렁이는 금발과 빚은 듯한 이목구비.
현재 국내 가요계에서 최고의 탑을 달리는 26세의 남성 솔로 가수.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남자였지만, 연예계에서의 위치는 천지 차이였다. 현수는 이제 수명이 다해 잊혀가는 걸그룹의 퇴물 멤버일 뿐이었다. 가요계에서 영영 사라질 기로에 서 있던 그녀에게, 그와 운 좋게 잠자리를 갖게 된 것은 유일하게 잡은 줄이었다.
현수는 입술을 짓씹으며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 남자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잡을 거야! 두고 봐. 그리고 경신, 그 계집애 콧대부터 단단히 눌러줄 테니까.’
어디 감히 태하 님 근처에서 얼씬거리는지 생각할수록 치가 떨렸다.
그 대단한 태하 대표 옆에서 통역이나 해주는 주제에. 도도한 표정으로 명품을 휘두르면서 태하의 생일 파티에서 어디서 듣지도 못한 존재가 공주님처럼 떠받들어지다니.
자신은 태하의 눈길 한번 끌기 위해 온갖 애를 쓰는데, 아무것도 아닌 계집애가 그 보석 같은 남자의 곁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현수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현수의 최종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반드시 태하의 눈에 들어 좋은 곡을 받고 MH로 입성하는 것.
도윤이라는 이 눈부신 남자는 그 정상으로 가기 위한 화려한 징검다리일 뿐이었다.
“저기, 현수 씨. 뭐가 이리 불안해? 요즘 왜 그래?”
귓가를 간지럽히는 도윤의 목소리에 현수는 정신을 차리고 달력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은 이번 봄에 꼭 도윤과 듀엣 곡을 내야 했다. 그래야 ‘얼굴 없는 사라진 여가수’가 아닌, 당당한 솔로 가수로 재기할 수 있으니까.
“도윤 씨는 오늘도 멋지네? 잠자리에서 뭐 그리 말이 많아? 할 일이나 해.”
현수가 도발적인 눈빛으로 살짝 쏘아붙이자, 도윤이 낮게 실소를 터뜨리며 그녀의 허리를 깊숙이 안아 왔다.
“하하, 섹시한 악녀네. 이런 자기, 난 아주 마음에 들어. 그리고 난 자기 목소리가 너무 좋거든. 나와 합이 잘 맞을 것 같아.”
더는 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듀엣, 올봄에 확실히 하는 거지? 내 목적은 그거 하나야.”
현수가 눈을 빛내며 직구로 묻자, 도윤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느긋하게 응수했다.
“이런 속물 기질도 좋아. 그래, 당장 사장님께 말씀드리지 뭐. 내가 하자는 건 다 해주실 거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JJ의 황태자가 하는 말이니 속물 중의 속물인 빌런 서정우는 다 들어줄 터.
지독하게 현수 자신을 무시하고, 나이도 많고 스타성도 없다며 늘 뒤로 빼기만 하는 서정우 콧대를 콱! 눌러주고 태하가 경영하는 MH로 가고 싶었다.
도윤을 징검다리 삼아 차트 정상에 오르고 나면, 그때는 태하 역시 자신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했다.
원하던 답을 얻어낸 현수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계산대로 움직여주는 도윤을 내려다보며, 현수는 미련 없이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던졌다.
벌써 3월 4주 차 금요일이었다.S대 학생생활관 한편, 여학생 기숙사의 아침은 오늘도 여지없었다. 2월 말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이 어수선한 풍경은 이제 완벽한 일상이 되어버렸다.“보살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아, 나 정말 미치겠어!”오늘도 경신은 격렬한 이불킥에 여념이 없었다. 죄 없는 이불에 화풀이하는 경신을 향해 화야가 따끔한 일침을 날리며 아침을 열었다.“임산부가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계속되는 모닝 이불킥은 폐 건강에 해롭다고요. 먼지 날리잖아요!” “미안해, 화야. 근데 정말 미칠 것 같아. 나 어떡하면 좋니?” “뭘 어떡해요. 그냥 MH 엔터에 가서 두고 온 물건들 찾아오면 끝날 일인데!”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악수까지 하면서 ‘바이 바이’ 하고 쿨하게 돌아섰는데······ 이제 와서 다시 가라고? 그 민망함은 온전히 내 몫이잖아. 그냥 새로 살까? 아님 없는 대로 살까?” “그 말만 벌써 일주일째거든요? 지겹지도 않아요? 가서 찾아오는 게 정답이에요!”경신도 알고 있었다. 화야는 언제나 옳다는 것을.지난주, 소강당에서 쓰러지며 안경을 두고 온 것은 물론 핸드폰까지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다시 사면 그만이겠지만, 멀쩡한 돈을 길바닥에 버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핸드폰엔 고작 한 달 남짓이지만 그녀의 새로운 인생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저장된 인연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포기하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하지만 문제는 그곳을 다시 제 발로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인연을 끊으려 작정했는데, 물건 때문에 다시 엮이러 가다니.“그냥 다녀오세요.” “휴······ 화야.” “사실, 가고 싶잖아요?”화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경신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날,
태하는 들뜬 마음을 갈무리하고 VIP 관계자석으로 돌아왔다. 사람 좋은 마호와 MH 엔터테인먼트의 유일한 아티스트인 에스트렐라 멤버들은, 평소 AI처럼 무미건조하던 태하의 희귀한 반응을 두고 수군거리기 바빴다.“태하 님, 그 여학생 몸은 괜찮은 겁니까?” “어.” “진짜 성격 화통하던데, 생일 파티 때 초대하신 그 과외 선생님 맞죠?” “그래.”시온과 도국의 질문까지는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정기범은 날이 서 있었다.“그 여자랑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여학생, 선생님, 그리고 '그 여자'. 모든 화살표가 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하는 팔짱을 낀 채, 조금 전까지 경신이 서 있던 빈자리를 묵묵히 응시했다.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절대 다가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억을 잃고 먼저 나타난 그녀였다.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당부. 요즘은 나쁜 남자가 대세라는 엉뚱한 궤변.이어 그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그녀를 공략해야 할지 선명한 이정표가 보였다.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잘해 보려고.”그렇게 팔짱을 끼고 선전포고를 하듯 정기범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예전부터 거슬렸는데. 여전히 정기범은 수컷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우와, 상남자.” “남자는 직진이죠.” “태하 님, 순정파군요. 하하!”휙, 태하가 고개를 돌려 수다 삼매경에 빠진 멤버들에게 따가운 눈빛을 보냈다. 자신과 경신에 대해 가볍게 떠드는 꼴을 단 한마디도 들어줄 요량이 없었다.“다들, 조용히 해.”서늘한 경고 한마디면 충분했다. 소강당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오디션은 무거운 긴장감 속에 이어졌다.태하는 다시 곱씹어 보았다. 경신이 한 말을 말이다.“Hombre malo(나쁜 남자)······. 그거 해줘야겠네.”경신의 목소리를 되새기던 태하의 입술 사이로 낮은 혼잣말이 슬그머니 새어 나왔다. *** 경신은 회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도망치듯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
경신이 너무 진지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대기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도윤은 그 정적을 비웃듯 다시 경신에게 다가와, 만개한 노란 국화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런······ 예쁜아, 우와. 감동인데? 나 방금 눈물 날 뻔했잖아. 그래, 고마워.”오늘 경신은 도윤의 낯선 민낯을 보긴 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좋았던 기억조차 얼룩질까 두려워 더는 과거를 들추지 않기로 했다. 그를 폄하하는 것도 멈추기로 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으니까.그때, 눈치 없는 현수가 다시 다가와 경신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독설을 내뱉었다.“너, 볼일 끝났으면 어서 꺼져. 시시한 너 따위를 상대할 정도로 여기 사람들 한가하지 않거든? 설마 관심 끌어보려고 아픈 척 연기한 건 아니지?”아, 저 어여쁜 입술에 칼날이라도 달린 걸까. 사람 심장을 콕콕 쑤셔대는 말을 어쩜 저리도 찰지게 할까. 아마 태하나 도윤이 경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못견디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경신은 아가들에게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 피한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현수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현수 씨, 내가 시시하다면서 왜 그렇게 신경을 써요? 원래 세상은 내 맘 같지 않은 거에요. 자꾸 그렇게 심술부리면 얼굴 더 못생겨져요.”여자들만의 서늘한 기 싸움 끝에 승자는 역시나 경신이었다.“야! 너 뭐라고?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현수가 다시 발끈하며 달려들려던 찰나, 쾅ㅡ! 태하가 과격하게 일어서며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굉음을 냈다.“아, 시끄럽게.”의자 하나로 상황을 평정한 태하는 나른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좌중을 훑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서늘한지 경신의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가 다정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린 순간이었다.“아, 놀라라. 태하 씨, 젊어서 그런가 힘이 넘치시네?”“자자! 나도 피곤하고 지쳤다. 오디션 마무리해야 하니까 다들 돌아가!”얼른 태
태하는 지금 눈앞이 캄캄했다.기억조차 온전치 못하다는 경신이 제 품 안에서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꺾여 쓰러지다니. 대기실로 안고 들어가 소파에 그녀를 뉘어두고 119를 부르려던 찰나, 다행히 경신이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평소에도 이렇게 위태롭게 살았던 건지, 제 가슴 한구석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정신이 들어?”이 와중에 마호와 도윤, 그리고 현수까지 줄줄 사탕처럼 뒤를 쫓아오는 바람에 대기실은 이미 포화 상태라 더 정신 없을 것 같았다.“아······ 네. 괜찮아요. 하하.”사람들과 시선을 맞추는 것조차 버거워 보일 정도로 기력이 쇠한 건지, 경신은 그저 해사하게 웃으며 눈만 깜뻑거렸다.“예쁜이가 몸이 약하네. 현수 씨, 아까 너무 긁어댄 거 아니야?” “도윤 씨! 그냥 저 여자애가 혼자 쓰러진 거라니까!”그때, 쿵ㅡ!경신의 안색을 살피던 태하가 싸늘한 눈빛으로 소파 테이블을 거칠게 걷어찼다. 둔중한 타격음이 정적을 깨부수었다.“쉿, 환자 앞이야.”단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서릿발보다 날카로웠다. 태하의 폭발 직전인 감정을 읽어낸 듯,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이 일순간 숨을 죽였다. 태하는 서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어 보다 경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원래 빈혈이 좀 있어서 그래요. 바쁘실 텐데 폐를 끼쳤네요.”경신의 사과가 떨어지기 무섭게 도윤이 다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태하와 경신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민 그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그나저나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더니. 저번엔 연예인 뺨치게 화려한 스타일이더니, 오늘은 청초한 모범생 버전이네?” “연예인 뺨을 쳐요? 제가요?”자신에 대한 기억이 전무한 상태에서 말을 섞을수록 의아한지 경신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마호가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따더니 경신에게 건넸다.“우리 경신 양은 실제로도 과 수석을 하는 모범생이자,
꼬여도 한참 꼬인 하루였다.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파편들 때문에 뭘 조심해 보려 애를 썼건만, 결국은 새드 엔딩이었다.이번 생은 사랑 따위에 목매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혼자 가리라 다짐하며 미신 따위 믿지 않으려 했건만······. 현재의 위험인물과 전생의 인연을 세트로 마주한 지금, 경신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경신은 가슴이 들썩이도록 크게 심호흡하며, 태하의 넓은 어깨 너머로 슬쩍 도윤을 바라보았다.과거의 도윤은 잘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능글맞은 사회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던 사내였다. 지금의 그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늘이 내린 스타이자, 경신이 홀로 가슴에 품었던 남자.두 손을 배에 얹고 몸을 웅크린 채 아가들의 눈을 가려주고 싶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저 사람이 바로······ 엄마가 첫 번째 인생에서 짝사랑했다가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주고, 평생을 그리워했던 남자야.’예쁜 쓰레기, 황도윤. 그것이 경신의 첫사랑에 대한 정의였다.태하의 눈치를 살피니 기색이 영 좋지 못했다. 할 말은 많으나 억지로 삼키는 듯한 기색이었다. 두 남자가 대화를 시작하자 태하는 그저 물끄러미 경신을 지켜보았다.“어휴, 태하 님. 우리 사이에 왜 이러실까.”“무슨 사이?”“하하, 앞으로 곡 받고 노래 부를 사이죠.”“설마.”도윤이 성큼 태하의 옆을 지나 움츠려 있는 경신에게 순식간에 다가왔다.“저번에 보니 태하 님이 예쁜이한테 좀 신경 쓰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이미지가 다르네?”하지만 태하는 도윤의 농담에 아랑곳하지 않고 권태로운 눈빛으로 서늘한 말을 흘렸다.“입 다무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아이고, 살벌해라. 몸도 얼굴도 예쁜 귀염이에게 말 좀 걸었다고, 질투하시는 건가?”경신은 이 죄 많은 몸뚱이를 어찌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경신은 이제 더는 도윤식 농담에 흔들리지 않았다. 뱃속 아가들과의 무지갯빛 미래를 생
평소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서늘한 위압감을 풍기던 MH 엔터테인먼트의 젊은 수장.그런 그가 웬 여자를 보자마자 무엇에 홀린 듯 다가서더니,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여 품 안에 가둬 버리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소강당을 채우던 팽팽한 오디션장 공기는 경신의 난입과 태하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일순간 정지 화면처럼 굳어버렸다.매사 시큰둥한 표정으로 감정도,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아 ‘인간의 탈을 쓴 AI’라 불리던 태하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기는커녕, 눈앞의 여대생 하나를 씹어 삼킬 듯 탐욕스럽고 뜨겁게 벼려져 있었다.이 희귀하고도 야릇한 긴장감을 숨죽인 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MH엔터가 배출한 초특급 데뷔 2년 차 괴물 신인 그룹, ‘에스트렐라’의 멤버들이었다.“형들, 저 사람 혹시 태하 님 생일 파티 때 왔던 그 냉미녀 맞아? 분위기가 너무 다른데?”팀의 막내 시온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자, 운동선수급 피지컬을 자랑하는 도국이 팔짱을 낀 채 낮게 혀를 찼다.“어쨌든 청춘 드라마치고는 수위가 너무 아슬아슬한데.”“태하 님 한국어 과외 선생님, 맞는 거 같은데. 호랑아, 안 그래?”날카로운 인상의 조각 미남 세용이 안경을 올려 쓰며 턱짓으로 무대 쪽을 가리키자, 그룹의 리더이자 비주얼 센터인 압도적인 외모를 자랑하는 예명 '호랑'을 쓰고 있는 정기범이 인상을 사납게 찌푸렸다.“아, 몰라. 오늘 진짜 피곤하네.”저돌적이고 야성적인 체구, 날이 바짝 선 짐승의 눈빛을 한 기범은 지금 태하의 손안에 갇혀 있는 경신에게서 시선을 단 한 치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눈동자엔 일렁이는 불쾌감과 서슬 푸른 분노가 노골적으로 얽혀 들었다. “호랑 형, 참! 오늘도 서정민이 케이크 보냈다며? 팬클럽 자격으로 보냈다는데, 봤어? 일단 도국이 형하고 먹으려다가 참았어.”옆에서 시온이 눈치 없이 어깨를 톡톡 두드렸지만, 가슴속에서 짐승 같은 적의를 들이켜던 기범은 낮게 으르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