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anda / 로맨스 / 아기를 품고 도망친 그녀 / #6. [마음을 허락받지 못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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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음을 허락받지 못한 남자]

Penulis: silver구슬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9-20 11:18:19

“실은, 아기 아빠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경신의 파격적인 고백에 진료실 안은 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듯 적막해졌다. 지원의 눈빛이 멍하니 흔들렸고, 뒤에 서 있던 규련과 화야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속 알맹이는 수십 년을 살아냈지만, 임신은 인생 4회차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몇 번의 삶을 거치며 쌓아온 산전수전의 경험도, 미래를 아는 능력도 '아기 아빠의 부재'라는 황당한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몰라도 상관없어요.”

단호함이 서린 경신의 목소리가 고요를 깨트렸다. 미혼모든 비혼주의든 상관없었다. 자신이 오래 살아서 아이들을 무사히 키워내는 것만이 최우선 과제였다. 뒤늦게 기묘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경신은, 의심 어린 시선들 속에서 차오르는 민망함을 눌러 담으며 허겁지겁 변명을 덧붙였다.

“아! 저기, 오해는 마세요. 저 문란하게 산 사람 아니에요! 실은 제가 기억이 좀 없어서 그래요.”

“네? 기억이라니요?”

“오늘 병원에서 눈을 떴는데, 현생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갔더라고요. 살던 모습도, 아기 아빠가 누군지도 전부요.”

화야가 성큼 다가와 눈을 가늘게 떴다.

“보살님, 우리에 대해서는 줄줄 꿰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 기억만 없다는 건가요?”

“화야야, 맞아. 진짜야.”

지원은 펜 끝으로 차트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고라도 당했나요?”

“음, 다사다난했죠. 사실 전생은 또렷하게 잘 기억하는데, 전생엔 임신을 해본 적이 없어서 당황하는 중이에요.”

'전생'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화야와 규련은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지원 역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환자분은 제가 평생 만난 환자 중 가장 특별하시네요.”

“선생님, 아마 앞으로도 저 같은 환자는 또 없을 거예요.”

경신은 짐짓 의연하게 웃어 보였지만, 배 위에 올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웃음기 어린 낯빛 뒤로, 참아왔던 서러움과 아득한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전생에서의 자신은 늘 요절하는 단명 팔자였다. 만약 이번에도 형벌처럼 1년 뒤 죽어버린다면? 엄마의 온기조차 알지 못하고,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홀로 남겨질 아이들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가슴을 짓눌러오는 서늘한 죄책감에, 호기롭던 눈동자엔 금세 그렁그렁 수분이 맺히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제 배를 가만히 감싸 쥐는 경신을 보며 지원이 하얀 티슈를 건넸다.

“큰 충격으로 인한 해리성 기억상실증일 수 있어요. 힘내세요, 경신 님. 아기를 위해서라도 긍정적인 생각만 하셔야 합니다.”

따뜻한 진심이 담긴 위로에 경신은 눈을 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다짐이 귓가를 울렸다.

'그래, 난 잘될 거야. 전생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이번 생은 반드시 내 아이들을 지켜낼 거야.'

“역시 명의시네요. 마음까지 치료해 주시고, 용기가 생겼습니다.”

“아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경신 씨 덕분에 제 마음도 따뜻해졌는걸요.”

훈훈해진 분위기에 소파에 있던 규련과 화야도 다가와 거들었다.

“보살님, 어린 나이에 아이가 생겼는데도 진심으로 기뻐 보이네요.”

“전생에 너무 외롭게 살아서요. 내 편인 가족이 생긴다니······ 그저 행복해요.”

경신은 구질구질한 신세타령을 털어내듯 눈에 힘을 주며, 아직 납작하지만 분명히 숨 쉬고 있을 제 배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

그날 밤이 깊었다.

태하는 오늘 밤, 평소처럼 독한 위스키를 기울이는 대신 경신이 좋아했던 향기 좋은 커피를 내려 머그잔을 쥔 채로 테헤란로 자신의 펜트하우스 거실에서 30층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경신. 그 이름 두 글자만 떠올려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오만한 자존심과 야속함이 뒤엉켜 들끓었다.

지난 1월 28일 밤.

평생 남에게 숙여본 적 없는 자신은 오만함을 내려놓고 지금 이 집에서 그녀를 안았다. 

세상 그 무엇도 손에 쥐지 못한 적이 없던 그가, 유일하게 안달하고 갈구했던 단 한 사람. 

그래도 몸이 더욱 가까워지면 경신이 쌓은 벽이 허물어질 것이라 믿었던 것은 오직 태하만의 착각이었다.

경신은 그날 밤이 지나자마자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려 한 달이었다.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차갑게 돌아선 그녀는 심지어 전화번호마저 완전히 바꿔 버렸다.

‘날 그렇게 떠나고 싶어 하다니.’

태하는 실소했다. 절대 다가오지 말라는, 제 인생에 다시는 간섭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자 완벽한 거절이었다.

갈 곳도 없고, 차가운 성격 탓에 사람과 담을 쌓고 살아 변변찮은 지인조차 없는 경신이었다.

그런 여자가 대체 한 달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다 나타난 것인지, 누구의 도움을 받은 것인지 생각할수록 피가 말랐다. 

자신이 그렇게나 싫어서 숨어버렸어도 졸업은 해야겠다고 기숙사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래도 안심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녀가 기숙사에서 쓰러졌다니. 혹시나 하고 휴학을 했을까 싶어 보호자 자격으로 S대 들렀다가 들었던 그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쓰러진 거지?’

태하는 직접 달려가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경신과의 약속은 지켜야 했기에 그녀 앞에 나서지 못했다. 대학로 연건 캠퍼스 제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의대생 규련의 연락만을 건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처지였다.

태하의 흉흉하고 깊은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손꼽히는 부와 권력을 쥐고 세상을 다 가졌다는 소리를 듣는 그였지만, 단 한 사람, 경신의 마음만은 단 한 조각도 허락받지 못했다니.

경신을 위해 노력했던 모든 세월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일까. 

태하는 그저 자신을 이토록 모질게 밀어내는 경신이 원망스러웠다.

저 멀리 대한종합병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이 오만한 자존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규련의 보고가 오기도 전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경신에게 모습은 드러내지 않아도 무사한지 확인해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지배했다. 

태하는 책상 위에 놓인 한규련에게 빌려준 차가 아닌 다른 차키 중 하나를 부서뜨릴 듯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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