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경신은 행복을 안고 본격적으로 이번 생을 제대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경신 님, 지금 기억이 없어 불안하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가 원인이 된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어요.”
“기억 없는 것도 걱정이지만 다가올 운명도 험난할 텐데. 저, 잘 이겨낼 수 있겠죠? 선생님?” “운명도 사람이 개척하는 거예요.”한지원은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말을 해주는 것인지.
경신은 의사가 자신에 대해 뭘 알고 하는 말 같이 들렸기에 다시 울컥해서 조금 전에 받았던 새 티슈로 다시 눈을 찍으며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한지원 선생님. 역시 미국에서도 그리 유명하셨다는데 대단하세요.”
“······미국?” “아 맞다. 아직은 아니구나. 선생님 곧 미국 San Antonio-Northwest S-Medical Center로 발령 나실 거예요. 국위 선양해 주세요.”한지원이 놀라움에 입을 막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길이 한규련과 화야에게 머물렀다.
“어머, 그곳은 최근에 파견 근무를 신청해 놓은 병원인데······.”
거보라는 듯 한규련은 제 고모에게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고 신기함과 두려움을 품은 그들은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경신의 손이 배 위에서 춤추듯 움직였다. 새로운 인생의 서막이 오르리라는 기대감에 젖어,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희망의 싹을 틔우는 듯한 자신의 표정에 한지원의 입가에는 더 짙은 미소가 번져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한지원은 부드러운 억양으로 조심해야 할 사항을 늘어놓았다. 경신은 그 내용을 귀담아듣기 위해 애썼다.
다시 주어진 생, 그리고 다시 주어진 기회.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 그리고 기적.
모든 어둠은 사라지고 이제 리셋된 것이었다.
경신은 한껏 누려보리라고 각오를 다지고는 의사가 하는 말에 다시 귀를 열었다.
*** 하루의 무게가 경신의 어깨를 짓누르듯 내려앉았다. 병실 문을 닫는 순간 경신의 몸이 침대에 무너지듯 눕혀졌다.7시도 되기 전에 경신이 이불을 돌돌 말아 새근거리는 모습에 송화야와 한규련은 폭소를 터뜨렸다. 비로소 둘만의 공간이 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이, 오빠. 보살님 깨겠다.”
“괜찮아. 곯아떨어진 거 확인했어.”한규련은 송화야의 어깨를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고 손도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혀댔다.
“나도 이제 참지 않고 스킨십 팍팍 할 거야.”
“뭐? 어우 야하긴!”화야는 싫지 않은 표정으로 규련과 눈을 마주하고 키득거리며 고개를 돌려 경신을 바라보았다.
“오빠, 나 오늘 뭐에 홀린 것 같아.”
“나도. 태어나서 저런 사람 처음이야.” “오빠, 고마워. 저녁 식사는 내가 쏠게. 병원 식당 가자. 참, 저 보살님 중간에 깨면 어쩌지?” “그럼, 우리 뭐 시켜 먹을까?”Rrrr Rrrr
벨소리가 울리자 규련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경신의 잠든 얼굴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여보세요.”
-한규련 씨.
“아, 건물주님. 웬일이세요?”
-지금 경신은 어떻습니?
“······아, 오늘 뭐 검진 잘 받고요. 환자 개인정보라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지만, 지금은 잘 자고 있어요.”
그 뒤로도 간단하게 대화를 나눈 규련은 침대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고 있는 경신을 바라보며 통화를 나눴다.
*** 결국 태하는 손에 경신이 좋아할 만한 정갈한 간식거리와 고급 디저트 상자들을 들고 직접 병원으로 향했다. 자신을 떠난 여인이 돌아오길 기대하는 구질거리는 것은 자신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몸이 안 좋으면.’
빛이 아닌 그림자 속에서 지켜보는 한이 있더라도 경신의 건강은 챙겨야 했다.
대한종합병원 VIP 복도의 번잡함이 잦아들고, 경신의 병실 문 앞에 도달하자 태하는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
똑똑.
살짝 문을 두드리자, 소리를 듣고 안에서 한규련이 문을 열고 나와 그를 맞이했다.
“아, 건물주님. 우리 경보살 아 아니 경신 양은 잘 자고 있어요.”
규련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태하의 날카로운 시선은 곧바로 병실 내부로 향했다. 벽 쪽에 놓인 침대 위, 동그랗게 부풀어 올라 있는 정체불명의 이불 덩이를 발견한 태하의 눈매가 순간 흠칫하며 좁아졌다.
“왜 저러고 있는 겁니까?”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건지, 안에 진짜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 들 만큼 기묘한 형태였다. 태하의 굳은 표정을 본 규련의 뒤쪽에서 송화야가 배시시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우리 보살님······ 아, 아니, 경신 양은 원래 잠자리 습관이 저렇더라고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날 자신과 잠자리를 하고 나서 먼저 잠자리에 들어 실제 수면 습관은 알 길이 없었다.
몸이 아파 그런가. 아무리 경신의 몸집이 작고 마른 편이라지만, 저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그냥 이불을 동그랗게 뭉쳐 놓은 덩어리 같았다.
한 달 동안 자신을 피해 도망치고, 전화번호까지 바꾸며 차갑게 거절했던 그 도도한 그녀가, 잠들고 나서는 그저 조그마한 이불 뭉치가 되어 다니.
태하는 가져온 먹거리들을 규련에게 건네주며, 천천히 경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이토록 애타게 만들고 피가 마르게 했던 여자가, 저 작은 이불 속에서 골골거리며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허탈함과 함께 묘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이불 밖으로 삐죽 흘러나온 그녀의 작은 어깨 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대로 이불을 헤집고 들어가 그 찬란했던 밤처럼 저 작은 몸을 품안 가득 끌어안고 싶은 욕구가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자신을 그렇게 모질게 밀어내 놓고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꼴이라니. 기숙사에서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 심장이 얼마나 철렁 내려앉았는지 알기나 할까. 태하는 제 이마를 짚으며 나지막이 실소를 흘렸다.
‘귀엽네.’
자신이 건넨 마음은 한 조각도 받아주지 않으면서, 잠드는 모습마저 이토록 마음을 허물어뜨리게 만들다니. 태하는 움켜쥐었던 긴장을 풀어내며, 동그란 이불 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미친놈처럼 스토커나 다름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끝이 자꾸만 그녀를 감싼 이불 근처를 맴돌았다.
차마 닿지 못하고 허공에 머무른 긴 손가락이 미련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윤은 계속 머리가 지끈거렸다.이런 날 현수와 스트레스나 풀고 싶은데. 그녀는 오늘 또 사라지고 없었다.지친 보컬 레슨을 겨우 마치고 잠깐 한가해진 틈을 타, 그는 프라이빗 숙소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하지만 닫히려던 문 사이에 손이 들어오더니 낯익은 인물이 올라탔다. 서정민이었다.“쳇, 오늘 재수 없네.”서정민의 입에서 흘러나온 흉흉한 소리를 듣던 도윤은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거칠게 누르며 쏘아붙였다.“헤어진 전 남친한테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이 마녀.”도윤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서정민은 피식 웃으며 비꼬듯 말을 덧붙였다.“예쁜 쓰레기님아, 그 악녀랑은 친하게 안 지내는 게 좋을 텐데. 끝이 안 좋을 거야.” “현수 씨 욕하지 마. 재수는 누가 없는데, 진짜.”도윤이 가시 돋친 말투로 받아치던 그때, 엘리베이터 내부 모니터에서 화려한 자막과 함께 반가운 뉴스가 흘러나왔다.[질주하는 ‘에스트렐라’, 그 비밀은 바로 띵곡에 있다!]귀를 파고드는 아찔한 멜로디와 더불어 화면 속 멤버들의 눈부신 모습을 보자 도윤은 속이 뒤틀렸다.자신이 히트한 곡 중 그 어떤 것도 서정민이 작곡한 건 하나 없었다.입술을 삐죽거리며 서정민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제발 좋은 곡이나 좀 써. 띵곡 하나 없는 10년 차 작곡가님!”말을 마친 도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아무거나 눌러 버렸다.더는 같이 있기 싫어 문이 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훽 내려버렸다.“뭐! 정말 나랑 싸우자는 거야?” “아니, 싸우는 것도 애정이 있어야 하는 거야. 잘 가, 마녀!”그는 서정민의 목소리는 더 듣기 싫어 바로 몸을 돌렸다.복도를
화야와 학식을 먹자마자 버스에 오른 경신은 어느새 MH 엔터테인먼트 근처 정류장에 도달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걱정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무슨 낯짝으로 거길 다시 들어가나.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애초에 잡상인 취급을 받으며 문전박대당하면 어쩌나.경신의 머릿속은 이미 복잡한 경우의 수로 가득 찼다. 규련에게 부탁해 한 다리 건너 알아볼까도 생각했지만, 바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아가들아, 엄마가 온 게 정답 맞겠지? 이미 도착해 놓고 물어봐서 미안. 하지만 내가 저지른 실수는 내가 직접 만회해야 하니까.’경신은 잠시 정류장 의자에 앉아 추위가 가신 3월의 봄 풍경을 무심하게 눈에 담았다. 과거의 자신이 수없이 겪어본 계절이었고,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가들과 함께 맞이하는 매 순간은 하루하루가 기적처럼 행복했다.‘과거의 외롭고 슬펐던 기억들이 거름이 되어 지금 내 행복을 키워낸 거야. 그리고 이제 난 혼자가 아니지.’경신은 소중하게 제 배를 문질러 보았다. 이래저래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라 아가들에게 미안함이 컸지만, 지금 누리는 이 평화가 더없이 소중했다. 예전에는 늘 타인에게서 행복을 구걸하듯 살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조금 여유를 되찾은 경신은 상황별 행동 지침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묘했다.‘오늘,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이유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태하가 그곳에 있다면 고맙다는 인사는 반드시 전하고 싶었다.경신은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건물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여학생들도 보이지 않고 주변이 한산했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가 시야에 들어왔다.“아! 있다, 저 차!”저 곳에 주차된 차라
화려한 조명과 진한 향수 냄새가 엉킨 S방송국 JW소속사 위주로 쓰는 전용 대기실.서정민은 제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어린 후배의 어깨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살결이 마찰하며 나는 은밀하고 축축한 소리가 단단히 닫힌 대기실 문 안쪽에 야릇하게 울려 퍼졌다.“선배님······ 진짜 미칠 것 같아요. 존경합니다.” “하흣, 말만 잘하지······.”입가에서는 매끄럽고 아찔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정민의 눈빛은 냉정할 만큼 서늘했다.키스 한번도 안 하면서도 절정에 달해 번들거리는 남자의 표정을 마주하기 싫어 그녀는 유연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뒤에서 해줘.” “네, 선배님. 원하는 대로요.”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등 뒤에서 밀려드는 저돌적인 자극이 척추를 따라 찌릿하게 내달렸다.어린 남자의 거친 패기를 즐기는 것은 정민에게 그저 팽팽하게 당겨진 일상의 지루함을 터뜨리는 가벼운 취미 생활에 불과했다.엎드린 그녀의 시선이 대기실 벽면에 걸린 모니터로 향했다. 화면 속에는 막 사전 녹화를 마친 초특급 신인 그룹 ‘에스트렐라’의 무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압도적인 비주얼, 거친 짐승 같은 피지컬, 완벽한 성량까지. 단숨에 가요계를 씹어 삼킨 사내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정민의 허리를 굳건히 잡고 속도를 올리던 후배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모니터를 바라보며 헐떡였다.“······너, 에스트렐라랑 친해?”정민이 아래에서 밀려드는 쾌감에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낮게 묻자, 후배는 허탈한 한숨을 섞어 쓰게 웃었다.“아니요······ 같이 데뷔했지만 솔직히 넘사벽이라. 이제는 그냥 우러러볼 뿐이죠.” “너희도 꽤 대단하잖아.” “저희는 소속사 빨로 버티는 중이죠. 듣기로는 저 에스트렐라 멤버들, 집안까지 전부 엄친
처음 쓰러졌을 때, 규련은 ‘건물주님’의 도움으로 그녀를 무사히 입원시켰다고 했다.퇴원하는 날, 앞마당을 점령했던 멋들어진 검은색 독일제 명품 SUV 역시 그 정체 모를 건물주님의 선의였다.그 모든 호의의 배후가 태하라는 남자였다니. 경신은 차분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화야를 빤히 바라보았다.“표정 보니 이미 눈치채셨네요. 맞아요, 보살님.”“그럼 나 퇴원할 때 탔던 그 어마어마한 차도 혹시······.”“네. 보살님 쓰러지셨을 때 보살님을 직접 안고 병원까지 데려다준 것도 그 사람이에요.”탄식이 절로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직접 안고 병원까지?악연만큼이나 무서운 게 인연이라더니, 어쩌면 이토록 우연이 겹치고 겹칠 수 있을까.“아, 어떻게 난 태하 씨에게 그런 신세를······.”처음 본다는 뻔뻔한 소리나 늘어놓고,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도망칠 궁리만 했다니.경신은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그날 태하 씨가 얼마나 애틋하게 구셨다고요. 공주님처럼 귀하게 대하셨어요. 보살님이랑 사이 안 좋다고 신신당부해서 그동안 입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다고요.”“허, 헐······. 나 지금 제대로 들은 거 맞니? 태하 씨가 나를 고, 고, 공주님처럼?”“대박 멋졌다니까요. 완전 영화 한편 찍었죠.&rd
벌써 3월 4주 차 금요일이었다.S대 학생생활관 한편, 여학생 기숙사의 아침은 오늘도 여지없었다. 2월 말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져 온 이 어수선한 풍경은 이제 완벽한 일상이 되어버렸다.“보살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아, 나 정말 미치겠어!”오늘도 경신은 격렬한 이불킥에 여념이 없었다. 죄 없는 이불에 화풀이하는 경신을 향해 화야가 따끔한 일침을 날리며 아침을 열었다.“임산부가 아침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계속되는 모닝 이불킥은 폐 건강에 해롭다고요. 먼지 날리잖아요!” “미안해, 화야. 근데 정말 미칠 것 같아. 나 어떡하면 좋니?” “뭘 어떡해요. 그냥 MH 엔터에 가서 두고 온 물건들 찾아오면 끝날 일인데!”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악수까지 하면서 ‘바이 바이’ 하고 쿨하게 돌아섰는데······ 이제 와서 다시 가라고? 그 민망함은 온전히 내 몫이잖아. 그냥 새로 살까? 아님 없는 대로 살까?” “그 말만 벌써 일주일째거든요? 지겹지도 않아요? 가서 찾아오는 게 정답이에요!”경신도 알고 있었다. 화야는 언제나 옳다는 것을.지난주, 소강당에서 쓰러지며 안경을 두고 온 것은 물론 핸드폰까지 떨어뜨린 게 분명했다.다시 사면 그만이겠지만, 멀쩡한 돈을 길바닥에 버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핸드폰엔 고작 한 달 남짓이지만 그녀의 새로운 인생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저장된 인연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포기하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하지만 문제는 그곳을 다시 제 발로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인연을 끊으려 작정했는데, 물건 때문에 다시 엮이러 가다니.“그냥 다녀오세요.” “휴······ 화야.” “사실, 가고 싶잖아요?”화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경신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그날,
태하는 들뜬 마음을 갈무리하고 VIP 관계자석으로 돌아왔다. 사람 좋은 마호와 MH 엔터테인먼트의 유일한 아티스트인 에스트렐라 멤버들은, 평소 AI처럼 무미건조하던 태하의 희귀한 반응을 두고 수군거리기 바빴다.“태하 님, 그 여학생 몸은 괜찮은 겁니까?” “어.” “진짜 성격 화통하던데, 생일 파티 때 초대하신 그 과외 선생님 맞죠?” “그래.”시온과 도국의 질문까지는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정기범은 날이 서 있었다.“그 여자랑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여학생, 선생님, 그리고 '그 여자'. 모든 화살표가 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하는 팔짱을 낀 채, 조금 전까지 경신이 서 있던 빈자리를 묵묵히 응시했다.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절대 다가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억을 잃고 먼저 나타난 그녀였다.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당부. 요즘은 나쁜 남자가 대세라는 엉뚱한 궤변.이어 그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그녀를 공략해야 할지 선명한 이정표가 보였다.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잘해 보려고.”그렇게 팔짱을 끼고 선전포고를 하듯 정기범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예전부터 거슬렸는데. 여전히 정기범은 수컷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우와, 상남자.” “남자는 직진이죠.” “태하 님, 순정파군요. 하하!”휙, 태하가 고개를 돌려 수다 삼매경에 빠진 멤버들에게 따가운 눈빛을 보냈다. 자신과 경신에 대해 가볍게 떠드는 꼴을 단 한마디도 들어줄 요량이 없었다.“다들, 조용히 해.”서늘한 경고 한마디면 충분했다. 소강당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오디션은 무거운 긴장감 속에 이어졌다.태하는 다시 곱씹어 보았다. 경신이 한 말을 말이다.“Hombre malo(나쁜 남자)······. 그거 해줘야겠네.”경신의 목소리를 되새기던 태하의 입술 사이로 낮은 혼잣말이 슬그머니 새어 나왔다. *** 경신은 회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도망치듯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