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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그럼에도, 너라서

Autor: 데이지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5-01 13:45:17

그날 저녁. 시아는 조용히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었다.

소리 하나 없이 옷을 개고, 서랍을 열어 정리한 작은 물건들을 넣었다.

무심히 던져진 인형 하나, 도윤이 생일이라며 사다 준 머플러 하나,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그 모든 것이 짐이 아닌 기억이었다.

거실로 나오자, 도윤이 마주 앉아 있었다.

“…도망치는 거야?”

시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켜주고 싶어서 그래.”

“누가 누구를?”

“내가 널.”

“…넌 지금 나한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 하고 있는 거 알아?”

“도윤아…”

“네가 그런 말 하면 난 너를 포기할 수가 없어지잖아.”

그는 무너지기 직전의 얼굴로 시아를 바라봤다.

한 번도 그렇게 간절하게, 누군가를 바라본 적 없다는 듯.

“사람들이 뭐라든, 네가 어떤 과거를 가졌든,

지금의 너는… 나랑 함께 웃고, 밥 먹고, 같은 이불 속에서 잠든 사람이야.”

“…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네가 나를 그렇게 기억하게 되는 게.”

시아의 목소리는 떨렸다.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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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 대행   81. 그럼에도, 너라서

    그날 저녁. 시아는 조용히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었다.소리 하나 없이 옷을 개고, 서랍을 열어 정리한 작은 물건들을 넣었다.무심히 던져진 인형 하나, 도윤이 생일이라며 사다 준 머플러 하나,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그 모든 것이 짐이 아닌 기억이었다.거실로 나오자, 도윤이 마주 앉아 있었다.“…도망치는 거야?”시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지켜주고 싶어서 그래.”“누가 누구를?”“내가 널.”“…넌 지금 나한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 하고 있는 거 알아?”“도윤아…”“네가 그런 말 하면 난 너를 포기할 수가 없어지잖아.”그는 무너지기 직전의 얼굴로 시아를 바라봤다.한 번도 그렇게 간절하게, 누군가를 바라본 적 없다는 듯.“사람들이 뭐라든, 네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금의 너는… 나랑 함께 웃고, 밥 먹고, 같은 이불 속에서 잠든 사람이야.”“…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네가 나를 그렇게 기억하게 되는 게.”시아의 목소리는 떨렸다.“언젠가… 너도 날 미워하게 될까 봐. 그게 더 끔찍해.”도윤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끝으로 백시아의 눈가를 어루만졌다.“…난 널 미워할 수 없어.”“왜?”“사랑하니까. 넌 나한테,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사람이니까.”시아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결국 조용히 눈을 감았다.“…그러면 나한테도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사람이 되어줘.”“무슨 뜻이야.”“나… 잠깐만 사라질 거야. 영영은 아니야.”도윤의 손이 멈췄다.“잠깐이면… 돌아오는 거지?”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도윤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며칠 뒤. 도윤은 조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그냥… 그 사람 놓아줄 수 있어?”'놓아주는 게, 그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거일 수도 있어.'“그래도… 기다릴게. 언젠가, 그녀가 돌아오면 그땐 말 안 할 거야.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그녀 안에 뭐가 있는지, 내가 다 알 것 같으니까.”진혁은 아무 말 없이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잠

  • 아내 대행   80. 그림자와 입맞춤

    시아는 그날 밤, 혼자 조용히 일어났다.잠든 도윤의 손을 조심스레 떼고 부엌으로 나가 가장자리까지 깨끗이 닦인 유리잔에 물을 따랐다.컵을 들고 창가에 선 그녀의 뒷모습이 문득 투명하게 느껴졌다.‘다시, 이럴 수는 없어.’사람이란, 자꾸만 과거를 미화하거나, 아예 지워버리려 드는 존재다.하지만 백시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지워지는 과거는 없다는 걸.남겨지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몸에 새겨지는 감각이라는 걸.그녀는 휴대폰을 켰다.기록을 뒤지고, 다시 켜고, 끄고, 익숙한 번호 하나를 망설임 끝에 눌렀다.“여보세요.”낮은 목소리. 조진혁이었다.“…나야.”“…시아 씨?”“혹시… 지금 나 좀 볼 수 있어요?”잠시 침묵. 그리고 곧, 조진혁은 묻지도 않았다.“어디로 갈까요.”한밤중. 도시 외곽의 조용한 카페.불은 꺼져 있었지만 진혁은 조용히 문을 열어 백시아를 안으로 들였다.“이런 데서 일하던 적이 있었어요.사건 때문에 숨어 지낼 때, 여기 사장님이 도와주셨거든요.”시아는 말없이 앉았다.그리고 천천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나, 기억이 하나 떠올랐어요.”“기억?”“내가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진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때, 내 손에 쥐고 있던 건 칼이 아니라… 나비핀 하나였어요.”그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정말 먼, 아주 오래된 장면을 꺼내듯.“계부였어요. 나를 팔려고 했던 사람. 도망치던 날, 그 사람이 내 목덜미를 잡고벽에 내리쳤는데… 정신이 돌아왔을 땐, 그 사람 목에 그 핀이 박혀 있었어요.”“…시아 씨…”“내가 찔렀는지도 몰라요. 기억이 없었으니까. 근데… 그때부터였어요. 이상하게, 숨이 트이기 시작한 건.”그녀는 고개를 떨궜다.“그런데 도윤이랑 있으면, 그 숨이 다시 막혀요.”“왜요?”“행복해지니까. 행복해지면, 잃을 게 생기잖아요.”진혁은 그 말을 듣고 오래 숨을 삼켰다.“…도망치지 마요.”“…”“내가 붙잡을게요.”시아가 고개를 들었다.“진심이에요?”“항상

  • 아내 대행   79. 처음이자 마지막 경계선

    “이번엔 끝내러 왔어.”시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그 안엔 과거의 그림자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이강식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끝이라… 네가 무슨 수로?”그는 천천히 한 발 내디뎠다.그에 맞춰 백시아도 움직였다.더는 피하지 않는 거리, 마지막 경계선 위에 두 사람의 발끝이 섰다.“…내가 끝내. 내가 시작했으니까.”“아니지, 시아야.”그는 조용히 중얼이며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다.“넌 늘 누군가의 시작일 뿐이었지. 끝내는 건, 나 같은 놈들이 하는 거야.”백시아는 망설임 없이 총을 꺼내 그의 이마를 겨눴다.“…더는 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할 거야.”이강식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그리고 그 순간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시아!”창고 안으로 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단번에 백시아의 얼굴이 흔들렸다.“도윤…?”그녀는 본능적으로 총을 내렸다.그 짧은 찰나, 이강식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움직였다.찰나의 위협. 도윤이 달려들며 백시아를 감쌌고,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탕! 총성이 울렸다.창고 안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도윤을 감싸 안았다.“괜찮아? 어디 다쳤어?”“아니… 넌?”“…난 괜찮아.”하지만 시아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도윤의 얼굴을 더듬었다.“왜 왔어… 왜…”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그런 눈으로 나 떠나려고? 그게 네가 나한테 줄 마지막이었어?”“…….”“넌 날 속이더라도, 이렇게 위험한 데서 혼자 끝내려고 하지 말았어야지.”도윤의 손이 시아의 뺨을 감쌌다.그녀의 눈에서 울지도 못한 눈물이 고였다.“난 이제, 널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라”그는 잠시 멈췄다.“널 함께 살아가고 싶어서 쫓아온 거야.”그 순간, 창고 문이 또 한 번 열렸다.조진혁이었다.총을 든 채 주변 상황을 파악하며 단숨에 세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무기 내려. 이강식.”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도윤 씨, 백시아. 지금부터는 내가 처리합

  • 아내 대행   78. 그녀의 그림자

    그날 밤, 시아는 도윤의 병실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열지 못한 문, 그 너머에 누운 사람.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그 존재가 이제는 그녀가 지켜야 할 이유가 되어버렸다.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도윤은 벽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작은 숨소리, 고르고 편안한 숨결.시아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그의 옆에 앉았다.그녀의 손끝이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너무… 고맙다.”시아는 속삭이듯 말했다.“내가 다시 살아보자고 마음먹게 만든 게… 네가 처음이야.”조심스레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 그녀는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병실을 나섰다.병원을 나선 시아는 곧장 한 낡은 건물로 향했다.낯선 골목, 오래된 철제 문.주변을 살핀 그녀는 무표정하게 손을 뻗어 벨을 눌렀다.“누구야.”문 너머에서 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래된 친구야. 잠깐 얘기 좀 하자.”잠시의 정적 후, 문이 열렸다.안쪽엔 퀭한 눈으로 백시아를 바라보는 중년 남자가 있었다.과거 조직에서 정보를 팔던 인물, 백시아에게 빚이 있는 자였다.“그 이름… 이강식. 지금 어디서 움직이는지 말해.”시아의 말투는 단호했고, 표정에는 타협이 없었다.“…….”“알아낸 대로만 말해. 나 지금 웃을 기분 아니니까.”남자는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며칠 전… 부산 쪽에서 연락받았어. 그 새끼 살아있었고… 거기서 몇 명 끌고 움직이고 있었어. 근데”“뭐?”“백시아, 널 찾고 있었어. 가짜 이름으로 숨은 여자. 그 여자가 살아있다고.”시아는 숨을 들이켰다.차갑게 식은 심장이 한 번 더 내려앉는 듯했다.“…또 시작이네.”남자는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근데 이번엔, 그때랑 달라. 지금 그놈, 완전히 미쳐 있어. 정상이 아냐. 네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시아는 조용히 그의 말을 끊었다.“알아서 해.”“…뭘?”“그 새끼 있는 곳, 추적해. 내일 아침까지 알려줘.”“백시아, 너…”

  • 아내 대행   77. 네 이름을 부른 사람

    총성은 찰나의 바람처럼, 폐병원 지하를 날카롭게 찢고 스쳐갔다.시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며 뒤편 도윤을 감쌌다.가슴에 쿵, 하고 울린 박동이 뇌까지 진동처럼 전해졌다.“…씨…발…”방금 전 총을 겨눴던 남자는 허벅지를 감싸쥐고 쓰러져 있었다.그의 총은 바닥에 나뒹굴었고, 검은 셔츠에는 피가 번지고 있었다.“내가 먼저 맞았네.”총을 쏜 사람은 조진혁이었다.그는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뛰어내려오며 총을 집어넣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무슨 짓을 하려던 거냐, 그놈.”그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앞에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하지만 시아는 진혁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멍하니 도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도윤아... 도윤아...”그녀는 천천히 도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피로 얼룩진, 창백한 얼굴.하지만 이마 한가운데에 맺힌 땀,천천히 떨리는 콧날. 그건 살아 있는 증거였다.“도윤아, 나 왔어. 일어나줘... 응?”시아의 손끝이 그의 뺨을 스쳤다.도윤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리고, 그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시아…?”세 글자. 그것으로 충분했다.시아는 조용히, 허물어졌다.입술을 꼭 다문 채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그래… 나야. 내가 왔어.”도윤은 눈을 뜨기 힘들어하면서도그녀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약하게, 하지만 분명히 손을 뻗었다.시아는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온기와 온기가 서로를 잡아당겼다.다시 살아 있는 실감, 그녀는 그 순간을 목숨처럼 끌어안았다.한편 진혁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검거하고 지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는 백시아에게 조용히 말했다.“여긴 곧 경찰들이 올 거야. 도윤을 데리고 먼저 나가.”“…진혁.”그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고마워.”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내 등을 돌리며 말없이 움직였다.그녀의 고백과 감사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밖으로 나오는 길. 시아는 도윤을 부축하며, 그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 아내 대행   76. 사라진 사람, 놓지 못한 손

    밤은 깊었고, 도시의 끝자락에선 잠들지 못한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시아는 오래전 인연이 끊긴 ‘연락망’의 몇몇 인물들을 다시 꺼내 들었다.이미 절연했다고 믿었던 인물들도 그녀의 연락을 받자 단숨에 응답했다.그만큼, 그녀의 이름엔 여전히 무게가 있었다.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무게.“그 여잔 아직도 움직여.”“…백시아가 도윤 씨 때문에 움직이고 있다고?”소문은 빠르게 퍼졌다.도시 뒷골목, 유흥가, 그리고 불법 경매장까지.백시아의 이름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한편, 진혁은 도윤이 사라진 후의 시간대를 되짚으며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탐문하고 있었다.도윤의 동료 중 하나가 말했다.“사실, 도윤 씨… 요즘 조금 이상했어요.”“이상하다니요?”“회의하다가도 멍하니 앉아 있다든가,출근하고 한참 뒤에 들어오기도 했고…무슨 생각에 빠진 것처럼요. 아무래도… 백시아 씨 때문 아닐까요?”진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는 이미,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었던 걸까.’그날 밤, 시아는 ‘오래된 장소’ 하나를 다시 찾았다.과거, 한때 도윤과 처음으로 손을 잡고 걷던 골목.그녀가 정체를 숨기고 도윤과 처음 웃었던 거리. 그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곳.그곳의 벽 한가운데 익숙한 낙서 하나가 눈에 띄었다.“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와 걸었다.”그건 도윤이 장난처럼, 혹은 진심처럼 손가락으로 벽돌 틈에 긁어 새겼던 문구였다.그 앞에 선 시아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도윤이 남긴 메모. ‘닭강정 사올게요 :)’라고 쓰여 있던 작고 구겨진 쪽지를 꺼내 그 벽 아래 조용히 붙여두었다.“혹시… 네가 이 길을 지나치게 된다면, 여기라도… 널 기다릴 거라고 알려주고 싶었어.”그녀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그러니까… 무사히 돌아와. 내가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도, 다시는 놓치지 않게.”동시에, 진혁은 또 다른 인물을 만나고 있었다.과거 백시아와 조직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였던 자.지금은 이름을 바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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