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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악녀, 마구간에 가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7 12:01:59

악녀 수칙: 하고 싶은 일에는 내 손을 쓴다.

“말 앞에서 제 값을 깎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내가 말하자 오웬이 입술을 다물었다. 웃음을 참느라 어깨까지 움직였다.

레녹스는 먹구름이 드러낸 이를 보고도 더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망토 자락을 뒤로 걷었다.

먹구름의 귀가 조금 올라왔다.

“망토가 싫은가.”

“아직은 모르죠. 오늘 처음 만났으니까요.”

나는 장갑을 다시 꼈다. 오른손 손가락이 조금 축축해서 끝까지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한나가 장갑 끝을 잡아 주려다 말 쪽을 보았다.

“닦고 끼실걸 그랬어요.”

“벌써 끼웠어.”

“그럼 돌아가서 말려 드릴게요.”

울타리 곁으로 말을 맡은 사람이 왔다. 나는 먹구름의 오른쪽 앞발을 가리켰다.

“오늘 계속 걷게 하지는 말아 주세요.”

“쉬게 했다가 데려가겠습니다. 저택에는 내일 아침에 도착할 겁니다.”

“마구간지기는 베른이에요. 그분에게 인도해 주세요.”

먹구름이 고개를 돌렸다. 고삐가 움직이자 나도 손을 뻗으려다가 멈췄다.

내가 샀다고 당장 내 말을 듣는 건 아니었다. 오늘은 여기서 돌보던 사람 손에 맡기는 편이 나았다.

“내일 보자.”

먹구름은 울타리 위에 코를 대고 문질렀다.

작별 인사는 썩 성의가 없었다. 나도 다시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돌아서는 내 옆으로 레녹스가 걸었다. 오웬이 서류를 들어 보이자 대공은 그제야 멈췄다.

“먼저 가.”

“네. 대공 전하도 하실 일 하세요.”

오웬이 나를 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지나치게 정중했다. 대공의 하실 일을 찾아 준 사람에게 하는 인사였다.

◐

4월 9일 아침, 한나는 장갑을 창가에서 가져왔다.

“다 말랐어요.”

나는 오른손부터 넣었다. 손가락 끝이 걸리지 않고 들어갔다.

한나가 침대 위에 놓인 옷을 펼쳤다. 어제 입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식이 적은 옷이었다. 치맛단 안쪽에 붙은 마른 흙은 모두 털어져 있었다.

“오늘도 밖에 나가세요?”

“마구간.”

“그럼 머리는 단단하게 묶을게요.”

한나는 빗을 들고 내 뒤에 섰다. 평소처럼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는 대신 목덜미에서 묶고, 흘러내리는 옆머리도 함께 모았다.

나는 거울 속 오른손을 폈다.

어제 먹구름의 코가 닿았던 자리였다.

“손이 불편하세요?”

“아니. 아직 남아 있나 봤어.”

“뭐가요?”

“고삐 잡던 자리.”

한나가 빗질을 멈추고 내 손을 보았다.

“그럼 장갑을 더 두꺼운 걸로 바꿔 드릴까요?”

“오늘은 이걸로 괜찮아. 타지는 않을 거야.”

다리가 아픈 말을 샀다. 안장부터 얹을 생각은 없었다.

문밖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한나가 나가서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다.

“말이 도착했대요. 마구간에 들였다고 하셨어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나가 머리끈을 든 채 따라 일어났다.

“아가씨, 아직 안 묶었어요.”

다시 앉았다.

하고 싶은 일에도 준비는 필요했다. 특히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는 상태로는 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

저택 뒤로 돌아가자 젖은 흙이 신발 밑에 달라붙었다.

본관에서 마구간까지는 걸어서 5분이었다. 어릴 때는 그 길에서도 뛰었다. 마구간 문이 보이면 베른이 먼저 손을 들어 천천히 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치맛자락을 잡고 걸었다.

오래 안 왔다고 길까지 낯설어질 줄 알았는데, 발은 갈림길에서 망설이지 않았다.

마구간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서 물통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나는 문을 조금 더 밀었다.

“베른.”

굽은 등을 펴던 베른이 돌아보았다.

큰 손에 빈 바가지가 들려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바가지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잠깐 서 있었다.

“아가씨?”

“응.”

“정말 아가씨가 사신 겁니까?”

안쪽 칸에서 먹구름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마의 흰 점이 먼저 보였다.

“내가 샀어.”

베른이 바가지를 물통 가장자리에 걸었다.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더니 내 쪽으로 왔다.

“아가씨가 다시 오셨네요.”

나는 문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왔어.”

베른은 내 신발 끝을 내려다보았다. 흙이 묻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뒤따라온 사람이 얼른 닦아 줬을 것이다.

한나는 내 옆에서 자기 신발에 붙은 흙을 털고 있었다.

베른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말이 먼저 와서 놀랐습니다. 이제 큰 말도 직접 고르시는군요.”

“작은 말 골랐을 때는 발이 등자에 안 닿았잖아.”

“그때는 제가 줄여 드렸지요.”

“그걸 맨날 다시 확인했어.”

“아가씨도 맨날 풀어 보셨으니까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베른은 웃으며 먹구름의 칸으로 나를 이끌었다. 바닥에는 깨끗한 짚이 깔려 있었다. 물통도 손 닿기 좋은 곳에 놓여 있었다.

먹구름이 문 너머로 코를 내밀었다.

“물은 마셨어?”

“조금 마셨습니다. 먹이도 손을 댔고요. 길에서 쉬어 오느라 늦어졌다고 하더군요.”

“잘됐네.”

나는 장갑을 벗어 한나에게 맡겼다. 빈 손바닥을 내밀자 먹구름이 천천히 냄새를 맡았다.

이번에는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베른이 내 손을 보았다.

“아직 있네요.”

“뭐가?”

대답하기 전에 나도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베른이 고삐를 잡는 시늉을 했다.

“처음 배우실 때는 너무 꽉 쥐셔서 손이 빨개지곤 했습니다.”

“놓치면 안 되는 줄 알았지.”

“놓는 것하고 힘을 빼는 건 다르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어릴 때라 잘 못 알아들었어.”

“나중에는 잘하셨습니다.”

베른이 웃었다.

나는 손바닥을 편 채 먹구름의 코를 기다렸다. 코끝이 굳은살 자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다시 배우면 되겠지?”

“손은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먹구름이 내 소매를 건드렸다. 베른이 소매 끝을 가볍게 빼 주었다.

“옷도 먹이는 아닙니다.”

“그건 내가 말 안 해 줬네.”

◐

베른은 먹구름을 칸 밖으로 오래 끌어내지 않았다.

통로에서 몇 걸음 움직이게 한 뒤 다시 쉬게 했다. 오른쪽 앞발을 딛는 시간이 여전히 짧았다.

“일단 편히 서 있게 두죠. 낯선 데 와서 긴장도 했을 겁니다.”

“오늘은 안 탈 거야.”

“잘 생각하셨습니다.”

“고칠 수 있을까?”

베른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먹구름의 발을 보고,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 주었다.

“살펴봐야 압니다. 서두르지는 않겠습니다.”

“응. 나도 재촉 안 할게.”

마구간 밖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익숙한 소리였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상대가 자세를 바로잡게 하는 기침.

아버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한나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베른도 내 옆에서 허리를 굽혔다.

나는 손을 내렸다. 먹구름이 따라 코를 내밀어서 손등으로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돌아섰다.

“아버지.”

“말을 샀다는 것이 사실이냐.”

“네.”

아버지는 먹구름을 살폈다. 이마에서 발까지 시선이 내려갔다.

“다리를 저는 말이라고 들었다.”

“맞아요.”

“알면서 샀느냐?”

“경매장에서 걷는 걸 봤어요.”

아버지의 눈썹이 모였다.

“얼마를 썼지?”

“금화 37이요. 제 돈으로 샀어요.”

“돈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돈이 문제였으면 금액을 듣고 끝냈을 테니까.

나는 먹구름의 칸 문을 확인했다. 베른이 빗장을 걸어 놓았다.

아버지는 내 신발과 장갑을 벗은 손을 차례로 보았다.

“숙녀가 마구간이라니. 어릴 때 잠깐 배운 것으로 충분하다.”

“더 배우고 싶어요.”

“말을 타서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

“타고 싶어요. 그게 이유예요.”

아버지가 입을 닫았다.

나는 말을 보탤 필요가 없어서 기다렸다.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붙이든 그 뒤부터 따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건강을 위해서라고 하면 산책을 하라고 할 것이다. 교양을 위해서라고 하면 악기를 배우라고 할 것이다.

나는 둘 다 원해서 온 게 아니었다.

“약혼 일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대로 나다니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

“마구간에 오는 건 나다니는 게 아니에요. 우리 집 뒤잖아요.”

“비올레타.”

“네.”

이름을 길게 부르셔도 대답은 같았다.

아버지의 손이 지팡이 손잡이를 꽉 쥐었다.

“네가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

나는 먹구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오늘은 안 타요. 먹구름 다리부터 살피고, 저도 다시 배우려고요.”

베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후작님, 제가 곁에서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베른을 보았다.

“자네가 알아서 허락할 일이 아니야.”

“베른은 말 돌보는 일을 하신 거예요. 제가 샀고, 제가 왔어요.”

베른의 손이 앞치마 위에서 멈췄다.

나는 아버지 앞으로 한 걸음 나갔다. 뒤에 선 사람까지 함께 혼날 이유는 없었다.

“하실 말씀은 저한테 해 주세요.”

잠깐 말이 끊겼다.

안쪽에서 다른 말이 짚을 밟는 소리가 났다. 먹구름도 몸을 고쳐 섰다.

아버지가 그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저녁 식사에는 늦지 마라.”

“네.”

“그 옷 그대로 오지도 말고.”

“갈아입을게요.”

아버지는 돌아섰다. 한나는 문에서 비켜 길을 내주었다.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베른이 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저 때문에 더 꾸중을 들으신 건 아닌지…….”

“내가 할 말을 한 거야.”

나는 아까 벗어 둔 장갑을 집었다.

손가락 부분에 먹구름의 털이 하나 붙어 있었다. 떼어 내다가 그냥 손등에 올려놓았다.

“베른은 이 말 잘 봐 줘. 그걸 부탁하러 온 거니까.”

베른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천천히 허리를 폈다.

◐

“빗은 어디 있어?”

베른이 벽에 걸린 도구들을 가리켰다.

나는 그중 손잡이가 짧은 빗을 집었다. 갈기 사이의 엉킨 털을 풀 때 쓰던 빗이었다.

베른이 다른 솔도 함께 가져왔다.

“털은 이쪽으로 하시면 됩니다. 갈기는 끝부터 조금씩 풀어 주시고요.”

“위에서부터 잡아당기지 말고.”

“기억하시네요.”

“내 머리도 그렇게 빗으면 아파.”

한나가 내 뒤에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나를 보았다.

“많이 아팠다는 뜻은 아니야.”

“아가씨가 먼저 말씀하셨어요.”

반박할 수 없었다.

베른이 먹구름의 칸을 열고 고삐를 잡아 주었다. 나는 옆에서 손등부터 보였다.

먹구름이 내 손을 살폈다. 빗에도 코를 가져갔다.

“먹는 건 아니야.”

코가 떨어진 뒤에야 목덜미를 쓸었다.

검은 털 아래가 따뜻했다. 목을 길게 펴고 있던 먹구름이 조금 낮추었다.

갈기 끝을 나누어 잡았다. 빗이 걸리는 곳은 손가락으로 먼저 풀었다. 작은 짚 조각이 나왔다.

한나가 빈 바구니를 가져와 내 옆에 놓았다.

“여기다 담으세요.”

“고마워.”

나는 짚을 담고 다시 빗을 들었다.

먹구름은 얌전히 있다가 가끔 목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손을 놓았다. 끝까지 붙들면 털이 당길 테니까.

베른은 고삐에 힘을 주지 않고 서 있었다.

“저보다 아가씨 손을 더 오래 보고 있군요.”

“어제도 만졌으니까.”

“한 번 만났다고 다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먹구름의 귀를 보았다. 뒤로 눕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더 빨리 빗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허락했다는 말에 신나서 불편하게 만들면 그건 내 잘못이었다.

엉킨 곳을 하나 풀고 손바닥으로 갈기를 눌렀다.

먹구름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빗을 내렸다. 얼굴 가까이 따뜻한 코가 왔다.

“왜?”

대답 대신 콧김이 터졌다.

묶이지 않은 앞머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눈앞에 검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가 이마와 볼에 달라붙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옆에서 한나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베른은 고삐를 잡은 손을 그대로 둔 채 고개를 숙였다. 입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웃어도 돼.”

내가 말하자 한나가 결국 웃었다.

“아가씨, 머리가…….”

“알아. 얼굴에 다 붙었어.”

나는 빗을 든 손으로 머리를 만지려다가 멈췄다. 손에도 말 털이 묻어 있었다.

한나가 손수건을 가져왔다.

“제가 해 드릴게요. 움직이지 마세요.”

먹구름이 다시 코를 내밀었다.

나는 이번에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너는 잠깐만.”

한나가 젖은 앞머리를 떼어 귀 뒤로 넘겼다. 아침에 그렇게 단단히 묶었는데도 짧은 머리카락까지 붙들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묶어야겠어요.”

“여기서는 그냥 둘래. 또 풀릴 수도 있잖아.”

먹구름이 입술을 움직였다. 베른이 고삐를 조금 들어 내 머리와 거리를 벌렸다.

“머리카락도 먹이는 아닙니다.”

“오늘 가르칠 게 많네.”

한나는 손수건을 접으며 또 웃었다.

나는 먹구름의 목을 가볍게 두드렸다. 먹구름은 고개를 돌려 자기 칸 안을 보았다.

내 머리만 엉망으로 만들고 벌써 관심이 사라졌다.

◐

베른은 물통을 갈아 주고 먹구름을 다시 칸 안으로 들였다.

나는 벽에 걸린 솔을 집어 들었다. 갈기만 정리했는데도 손목이 조금 뻐근했다.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할게. 어느 쪽으로 쓸어야 하는지 봐 줘.”

베른이 먹구름의 어깨를 손으로 가리켰다.

“털이 난 방향대로 하시면 됩니다. 세게 누르지 마시고요.”

솔을 대자 검은 털 위에서 먼지가 일었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지 않았다.

조금 전 머리를 고친 한나도 한 걸음 비켰다.

“아가씨, 옷에 묻어요.”

“응. 갈아입고 식사하랬어.”

“후작님이 보시면 다른 말씀도 하실 것 같은데요.”

“식사에는 안 늦을 거야.”

나는 솔을 움직였다. 먹구름의 어깨가 손 아래에서 움직였다.

베른은 내 손목을 보고 솔의 각도를 고쳐 주었다. 직접 대신하지 않고 손잡이 끝만 조금 돌렸다.

그렇게 하니 힘이 덜 들었다.

나는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

“어릴 때는 내가 손만 내밀면 다 해 줬지.”

“처음에는 말을 무서워하셨으니까요.”

“나중에는 안 무서웠는데.”

베른이 나를 보았다.

나는 솔에 붙은 털을 떼었다.

“이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할래.”

“그럼 다 쓰신 도구도 제자리에 거셔야 합니다.”

“그건 기억해.”

“기억하시는 것과 하시는 건 다릅니다.”

한나가 바구니를 들고 고개를 돌렸다. 또 웃으려는 얼굴이었다.

나는 솔을 든 채 베른을 보았다.

“그것도 기억하고 있었어?”

“바닥에 두신 빗을 제가 몇 번 밟을 뻔했는지 모릅니다.”

변명할 게 없었다.

나는 쓰던 솔을 깨끗이 털어 벽에 걸었다. 빗도 옆에 걸었다. 바닥에 떨어진 짚은 바구니에 담았다.

베른이 손잡이를 한 번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먹구름은 그동안 물을 마셨다.

나는 빈 손으로 칸 밖에 섰다. 할 일을 했다는 이유로 계속 만지지는 않았다.

“쉴 때는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예. 오늘은 여기까지 하셔도 됩니다.”

“그럼 좀 보고 갈게.”

베른은 내 옆에 낮은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나는 앉아서 치맛단을 정리했다.

안쪽에서 먹구름이 짚을 헤치는 소리가 났다.

한나가 내 머리끈을 다시 만졌다. 이번에는 내가 일어나지 않아서 금방 끝났다.

◐

마구간 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베른이 먼저 돌아보았다. 한나의 손도 내 머리에서 멈췄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은회색 머리가 보였다.

레녹스가 한쪽 어깨를 문틀에 기대고 서 있었다. 어제의 두꺼운 망토 대신 짧은 겉옷을 입고 있었다.

먹구름이 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대공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오셔도 된다고는 안 했는데요.”

“물어보러 왔다.”

“무엇을요?”

“들어가도 되나.”

나는 손에 묻은 먼지를 내려다보았다. 한나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받아서 손가락 사이를 닦았다.

베른은 벽에 걸린 도구를 괜히 한 번 더 정리했다. 문가에는 나와 대공이 모두 지나갈 만큼 자리가 있었다.

레녹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말 보러 오셨어요?”

“네가 여기 있다고 들었다.”

나는 손수건을 접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는 지나가던 길이라고 했다. 경매장에서는 내가 들어가는 걸 봤다고 했다.

오늘은 말이 아니라 나였다.

먹구름이 문 쪽으로 코를 들었다. 나는 칸 밖으로 나와 대공을 보았다.

“왜 계속 따라와요?”

“네가 가는 곳이니까.”

(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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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녀 수칙: 우는 사람에게는 빗을 맡기지 않는다.한나는 빗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아직 아가씨 머리를 다 못 빗었는데요.”“네 눈부터 닦아.”“안 울었어요.”나는 한나를 봤다.한나도 나를 보다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조금만요.”“조금 울어도 울긴 운 거야.”빗을 들고 돌아올 때부터 코끝이 빨갰다. 면사포 상자를 닫다가 눈을 훔치는 것도 봤다. 내가 거울만 보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한나는 내 뒤로 와서 풀린 머리카락을 모았다.“정말 조금만 더 하면 돼요. 이쪽이 아직 엉켜서요.”“그럼 그것만 풀고 앉아.”나는 빗을 돌려줬다.한나는 머리 끝부터 조심스럽게 빗었다. 익숙한 손이었다. 잡아당기지도 않았고, 엉킨 곳을 억지로 내리지도 않았다.문제는 빗질이 자꾸 멈춘다는 데 있었다.거울 속 한나가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다.“아프세요?”“아니.”“그러면 조금 더…….”말끝이 작아졌다.한나의 손이 내 머리 뒤에서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뒤로 내밀었다.“빗.”한나는 이번에는 순순히 건넸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나를 의자에 앉혔다. 한나가 벌떡 일어나려 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내가 앉으라고 했지, 벌 받으라고 했니?”“아가씨가 제 머리를 빗어 주시면 이상하잖아요.”“머리카락은 네 게 더 얌전해.”한나의 머리핀을 뺐다. 단단히 말아 올린 머리가 목 아래로 풀렸다. 한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덮고 거울을 쳐다봤다.“왜 우는데?”“내일 결혼하시니까요.”“그건 알아.”“좋아서요.”나는 빗을 머리 끝에 댔다.“그런데 왜 사람 장례 치르는 얼굴이야.”한나가 웃다가 코를 훌쩍였다. 웃기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엔 소리가 축축했다.손수건을 건네자 한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아가씨가 북부로 가셔도 저를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는데, 자꾸 여기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어 드리는 것 같아서요.”“내일도 빗어 줘야지.”“네.”“모레도.”한나가 손수건 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북부에서도. 거기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8화. 악녀, 드레스를 고르다

    악녀 수칙: 남이 정한 색을 입지 않는다.“데려갈 거예요.”내 대답에 베른이 먹구름의 고삐를 고쳐 잡았다.“그럼 꽃 장식에 익숙해지게 해 둬야겠습니다.”먹구름은 제 결혼식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턱을 높이 들었다. 나는 검은 목을 두드렸다.“꽃은 먹는 게 아니야.”먹구름이 내 손바닥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레녹스 쪽으로 코를 돌렸다.“그쪽도 없대.”레녹스가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먹구름은 기어이 주머니 끝까지 냄새를 맡았다. 사람 말을 믿지 않는 건 좋은데, 너무 철저했다.베른이 고삐를 당겨 검은 코를 떼어 놓았다.“옷을 물지 않는 연습도 해야겠네요.”“그건 꼭 해 주세요. 제 치마는 길어질 테니까.”레녹스가 나를 봤다.“정했나.”“아직요. 색부터 고르려고요.”“같이 가지.”“드레스 고르는 데도요?”“그래.”베른은 먹구름을 보고, 레녹스를 보고, 다시 고삐를 잡았다.“둘 다 아가씨가 가는 데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먹구름이 콧김을 뿜었다. 레녹스는 부정하지 않았다.나는 극장 계단을 내려가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3월 30일, 드레스 가게의 창에는 하얀 옷이 걸려 있었다.치마를 풍성하게 벌리고 소매에는 고운 자수를 놓았다. 허리에 묶인 띠도 하얬다. 흠잡을 곳 없이 예쁜 옷이었다.내가 입고 싶은 옷은 아니었다.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나는 내 망토를 받아 들었고, 레녹스는 문을 닫고 곧장 따라 들어왔다.주인의 시선이 레녹스에게서 멈췄다.“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고르시나요?”“구경만 해요.”내가 먼저 대답했다.레녹스는 내 옆에 섰다.“필요하면 돕겠다.”“단추 잠그는 건 한나가 해 줘요.”“그럼 기다리지.”주인은 창가의 넓은 의자를 권했다. 레녹스가 앉으려다 내 쪽을 봤다.나는 가게 안쪽의 거울을 가리켰다.“저는 저기 있을 거예요.”레녹스는 의자를 조금 옮겼다. 거울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한나가 내 망토를 접다가 웃었다.“전하, 제가 옷을 가리면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7화. 악녀, 수도로 돌아가다

    악녀 수칙: 마음에 드는 날은 내 것으로 삼는다.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레녹스가 내 장갑을 주워 들었다.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낀 채 장갑을 끼우려니 손가락 끝이 자꾸 안쪽에 걸렸다.“빼고 낄까.”“싫어요. 방금 꼈는데.”레녹스는 장갑 입구를 넓혀 줬다.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은반지가 천 아래로 가려졌다.괜히 손등을 한 번 쓸었다.“내려가면 벗으면 되지.”“알아요.”“계속 만지길래.”나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레녹스의 손을 잡았다.“이건 만져도 되잖아요.”“그래.”계단 아래에서 데릭이 우리를 올려다봤다.“차 식는다!”한나가 바로 데릭의 옆구리를 눌렀다. 오웬은 찻잔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요리사는 접시 가운데에 과자를 더 쌓았다.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다.레녹스도 손을 잡은 채 따라 내려왔다. 빈 의자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오웬이 굳이 두 의자를 조금 더 붙였다.“너무 가까운데요.”내 말에 오웬이 의자를 도로 밀려 했다.나는 먼저 앉았다.“옮기라는 말은 안 했어요.”오웬이 손을 거뒀다. 데릭은 차를 마시다 웃었고, 한나는 결국 손수건을 꺼냈다.레녹스가 내 앞에 과자 접시를 놓았다.나는 장갑을 벗고 은반지를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 손에 붙었다.“차 식는다며.”데릭에게 말하자 그제야 다들 찻잔을 들었다.◐3월 28일, 수도로 들어가는 길은 북부보다 훨씬 질었다.바퀴가 물기 섞인 흙을 밟을 때마다 마차가 조금씩 기울었다. 나는 창밖의 길을 보다가 무릎 위에 올린 편지를 다시 펼쳤다. 어제 묵은 곳까지 달려온 수도의 전령이 건넨 편지였다.왕의 허락은 짧았다.『레녹스 발트하임 대공과 비올레타 에버린 영애의 혼인을 허락한다. 왕궁 정원을 예식 장소로 내주겠다.』끝에 찍힌 왕의 인장이 종이를 접어도 조금 튀어나왔다.그 밑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었다.왕궁 정원을 쓸 수 있다는 말보다 그쪽이 더 뜻밖이었다.『4월 1일은 어떠냐. 준비는 해 두겠다. 네가 싫다면 다른 날로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6화. 악녀, 청혼을 받다

    악녀 수칙: 좋은 일 앞에서는 괜히 도망가지 않는다.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받아 들고 성 꼭대기를 다시 봤다.“몇 시에요?”“저녁 먹고.”“거기까지 올라가서 또 경주하자고 하시는 건 아니죠?”레녹스가 내 손에 감긴 고삐를 풀어 줬다. 먹구름이 갑자기 고개를 들면 손가락이 조일 만큼 감겨 있었다.“말은 두고 와라.”“그럼 제가 불리한데요.”“이길 필요 없다.”고삐가 손바닥에 느슨하게 놓였다. 레녹스는 마지막으로 내 손가락을 살피고 놓았다.나는 탑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따뜻하게 입고 가면 돼요?”“그래. 바람이 분다.”“알았어요.”먹구름이 내 소매를 물었다. 당근이 남았다는 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나는 소매를 빼내고 주머니를 뒤졌다. 레녹스는 먹구름이 당근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요.”“같이 가겠다.”“마구간 안까지요?”레녹스가 먹구름을 봤다.“싫어하나.”검은 주둥이가 레녹스의 빈손을 한 번 더 확인했다.“손님이 빈손으로 왔다고 좀 아쉬운가 봐요.”레녹스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그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오늘은 충분히 먹었어요.”손이 순순히 내려갔다.먹구름만 몹시 불만스러웠다.◐3월 23일, 나는 저녁 식사를 평소보다 빨리 끝냈다.그렇다고 접시를 비우지도 않고 일어난 건 아니었다. 북부 요리사는 남은 음식을 보면 어디가 아픈지부터 물었다. 괜히 걱정을 살 필요는 없었다.문제는 옆자리에 앉은 데릭이었다.내가 수저를 내려놓자 데릭도 얼른 내려놓았다.“다 먹었어?”“응.”“배부르냐?”“그걸 왜 물어?”“그냥.”데릭의 접시에는 감자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접시를 가리켰다.“오빠는 더 먹어. 훈련하고 왔다며.”“나도 배부르다.”맞은편의 한나가 물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잔을 들지도 않고 입술만 꾹 누르고 있었다.오웬은 그 옆에서 빵을 뜯었다. 이미 다 먹은 빵을 다시 뜯을 수는 없어서, 손끝에는 작은 부스러기만 남았다.나는 셋을 차례로 봤다.“뭐 있어요?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5화. 악녀, 먹구름과 달리다

    악녀 수칙: 이겼으면 받고 싶은 것을 직접 고른다.나는 계단 앞에서 발을 멈췄다.오웬의 질문 뒤로 잠깐 조용해졌다.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조금 뒤에는 발소리도 들렸다.나는 손수건을 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영애.”오웬이 복도 끝에서 나를 불렀다. 아까 들고 있던 서류는 없었다.“길을 물으러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맞아요. 먹구름이 달릴 만한 곳이 있나 해서요.”오웬은 내 얼굴을 보고 집무실 쪽을 한번 돌아봤다.“남쪽 들판에 길이 있습니다. 눈을 걷어 둔 곳인데, 상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고마워요.”“전하께서도 같이 가실 겁니다.”“제가 같이 가자고 안 했는데요.”오웬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웃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 뒤에서 오웬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길을 물었더니 동행부터 정해지는 성이었다.◐3월 22일 아침, 먹구름은 내가 들고 온 안장보다 주머니를 먼저 봤다.주둥이가 망토 옆을 꾹 눌렀다.“당근은 이쪽 아니야.”먹구름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치가 빨랐다. 처음 샀을 때부터 사람 말도 이만큼 잘 들었으면 베른의 허리가 덜 아팠을 텐데.나는 잘라 온 당근을 손바닥에 올렸다. 먹구름이 입술로 조심스럽게 집어 갔다.“오늘은 좀 달릴 거야.”남은 당근을 달라는 듯 고개가 더 내려왔다.“알았어. 준비부터 하고.”마구간 문이 열렸다. 찬바람을 따라 레녹스가 들어왔다. 두꺼운 망토 아래에 승마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오셨네요.”“네가 간다기에.”“오웬이 벌써 동행을 정해 줬어요.”레녹스는 내 옆에 멈춰 섰다.“싫으면 여기 있겠다.”먹구름이 내 어깨 너머로 코를 뻗었다. 레녹스는 주머니에서 각설탕을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검은 주둥이가 손바닥으로 향했다.나는 먹구름의 목을 가볍게 쳤다.“넌 좋겠지.”“너는.”레녹스는 각설탕을 먹이는 동안에도 나를 봤다.“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럼 간다.”정하기 쉬웠다. 대공을 데리고 들판에 나가면서 결재할 종이도, 납득시킬 사람도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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