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7화. 악녀, 말을 사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7 12:01:52

악녀 수칙: 내가 고른 것은 내가 산다.

커튼을 닫자 한나가 빗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가씨, 아직 머리끈을 안 묶었어요.”

“그럼 앉을게.”

나는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았다. 한나는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었다. 창밖에서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지만, 커튼을 걷지는 않았다.

대공이 저 길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는 몰랐다.

내가 창가에 얼마나 자주 서야 하는지는 알았다. 이제 덜 서야 했다.

화장대 위에 놓인 장갑을 집었다. 오른손을 넣다가 손바닥에 남은 굳은살을 문질렀다.

고삐를 놓은 지는 한참 됐다.

그런데 이건 아직 남아 있었다.

◐

4월 8일 아침, 한나는 침대 위에 드레스를 펼쳐 놓았다.

나는 그 옆의 짙은 색 옷을 골랐다. 치맛자락이 덜 넓고, 소매에 장식이 없는 옷이었다.

“오늘은 이걸 입을래.”

“어디 가세요?”

“말 경매장.”

한나는 드레스를 접던 손을 멈췄다.

“말을 보러요?”

“사러.”

“아가씨가 타실 말이요?”

“응.”

한나가 옷을 내 쪽으로 가져왔다. 단추를 채우는 손이 빨라졌다.

“그럼 신발도 바꿔 드릴게요. 저건 흙이 묻으면 잘 안 지워져요.”

말리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준비가 참 빨랐다.

예전에는 말을 타러 가겠다고 하면 옷부터 바뀌었다. 마구간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혀 놓고, 그런 차림으로 어디를 가느냐고 했다.

나는 결국 옷을 아꼈다.

말보다 옷을 더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숙녀가 말에서 떨어지면 얼마나 볼썽사나운지 아느냐고 하셨거든.”

한나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생각하던 말을 입 밖으로 낸 모양이었다.

“누가요?”

“여러 사람.”

“넘어지면 아픈 게 먼저 아닌가요?”

“그러게.”

나는 신발에 발을 넣었다.

전생에는 그 말을 못 했다. 아픈 것보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가 먼저인 줄 알았으니까.

그렇게 고삐를 놓고 살았는데, 마지막에 듣던 말은 악녀였다.

굳이 잘 차려입고 악녀가 될 필요는 없었다.

서랍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선물로 받거나 쓰지 않고 모아 둔 돈이었다. 입구를 열어 안을 확인한 뒤 끈을 단단히 묶었다.

한나가 내 장갑을 내밀었다.

“마차를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

“너도 같이 가자.”

“저도요?”

“말 고르는 건 내가 할게. 돌아올 때 내가 너무 신나서 뭘 두고 오지 않는지만 봐 줘.”

한나가 웃으며 빈 가방을 챙겼다.

“그럼 가방은 제가 들게요.”

◐

남문 밖 경매장은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말 울음이 담장을 넘어왔다. 짐수레 바퀴가 돌길을 긁었고, 입구에서는 사람들이 접힌 종이를 보며 값을 이야기했다.

한나는 치맛자락을 조금 들었다.

나는 신발 끝에 묻은 흙을 내려다보았다. 벌써 바꿔 신은 보람이 있었다.

입구에서 받은 종이에는 오늘 팔 말의 순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앞쪽 이름들을 훑었다.

혈통. 지난 경주 기록. 발목과 이빨을 살핀 결과.

말보다 소개가 먼저 눈을 붙잡았다.

“아가씨, 저 말은 갈기가 반짝여요.”

한나가 울타리 안쪽을 가리켰다.

갈색 말이 머리를 흔들었다. 털이 고르고 목도 튼튼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걸음이 좋다고 말하자, 말을 잡은 사람이 짧게 원을 돌았다.

나는 발을 보았다.

뒷발이 앞발 자리를 편하게 따라 밟았다. 괜히 내 손까지 움직였다. 장갑 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가 폈다.

“좋네.”

“저 말을 사실 거예요?”

“값부터 들어 봐야지.”

경매장 안으로 들어가니 앞쪽 자리는 이미 찼다. 나는 통로와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한나는 옆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잠시 뒤 아까 본 갈색 말이 나왔다.

처음 부른 값이 금화 200이었다.

나는 돈주머니 위에 올려 둔 손을 얌전히 무릎으로 옮겼다.

손이 여기 있는 편이 안전했다.

금화 220. 금화 250.

주변에서 손이 올라갔다. 말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값도 올랐다. 경매봉이 내려왔을 때는 내가 가져온 돈으로는 턱도 없는 값이었다.

한나가 나를 살폈다.

“다른 말도 많아요.”

“응. 눈은 잘 골랐네.”

돈주머니는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음 말도 좋았다. 그다음 말은 더 비쌌다.

나는 종이 모서리를 접었다. 좋은 말 값이 금화 200에서 400 사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알고 오는 것과,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 데려가는 걸 보는 건 조금 달랐다.

갈색 말이 문밖으로 나갔다.

나는 끝까지 발을 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

경매가 뒤로 갈수록 빈자리가 늘었다.

좋은 말을 산 사람들은 일어나 나갔다.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은 사람도 종이를 접고 떠났다.

한나가 가방에서 작은 천 꾸러미를 꺼냈다.

“아침에 남겨 두신 빵이에요.”

“그걸 가져왔어?”

“오래 기다릴 수도 있잖아요.”

나는 빵을 받아 조금 떼었다. 말 사러 왔다가 배만 채우고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배까지 비워 둘 이유는 없었다.

옆 통로에서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통을 나르던 어린 일꾼이 돌아보다가 팔꿈치로 쳐 버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흙이 묻은 종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앞을 보고 다녀야지.”

일꾼이 물통을 내려놓으려 했다. 나는 먼저 종이를 주워 남자에게 건넸다.

“발자국은 안 났어요.”

남자는 종이를 받아 털었다.

“물통도 내려놓을 데가 없네요. 길을 조금 비켜 주시면 지나갈 수 있겠어요.”

통로에 뻗어 있던 남자의 발이 의자 아래로 들어갔다.

일꾼이 고개를 숙였다. 물이 넘치지 않도록 팔에 힘을 주며 지나갔다.

나는 남은 빵을 입에 넣었다.

한나가 작게 말했다.

“아가씨, 손수건 드릴까요?”

장갑 끝에 흙이 묻어 있었다.

“응.”

한나가 손수건 한쪽을 물로 적셔 내밀었다. 나는 손끝을 닦았다. 말 경매장에서는 옷보다 장갑이 먼저 더러워지는 모양이었다.

앞에서 다음 말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검은 수말이 들어왔다.

◐

말은 처음부터 잘 걷지 않았다.

고삐를 잡은 사람이 앞으로 당기자 머리를 높이 들었다. 잠깐 멈춰 섰다가 한 걸음씩 따라왔다.

오른쪽 앞발을 딛는 시간이 짧았다.

한나가 빵 꾸러미를 접던 손을 멈췄다.

“다리가 아픈가 봐요.”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검은 털에 흙이 붙어 있었다. 갈기는 제멋대로 엉켰고, 이마에는 흰 점이 하나 있었다.

그래도 고개는 처지지 않았다.

앞쪽에서 누군가 혀를 찼다.

“경주에 쓰기는 글렀군.”

경매를 맡은 사람이 종이를 들었다.

“다섯 살 수말입니다. 보시는 대로 걸음이 고르지 않습니다. 이 점을 알고 입찰해 주십시오.”

병든 말이 아니라는 말도, 곧 나을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오히려 나았다.

아프지 않다고 우기는데 눈앞에서는 절고 있으면, 말보다 사람부터 살펴야 하니까.

검은 말이 몸을 틀었다. 고삐를 잡은 사람이 다시 앞으로 이끌었다.

다리 위쪽에는 눈에 띄는 상처가 없었다. 대신 발굽을 바닥에 내릴 때마다 귀가 뒤로 눕고, 코끝이 짧게 움찔했다.

한 걸음 더 걷자 말이 멈췄다.

“더 돌리지 않아도 보이겠는데요.”

내가 말하자 경매를 맡은 사람이 이쪽을 보았다.

“확인하셨습니까?”

“네. 저는 봤어요.”

말을 잡은 사람에게 멈추라는 손짓이 갔다. 검은 말은 앞발에 실었던 무게를 조금 덜었다.

종이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었다. 경주에 나갔다는 내용도, 이름도 없었다.

나는 다시 말의 발을 보았다.

발굽 옆으로 은빛이 잠깐 비쳤다. 말이 움직이는 바람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왜 저는지는 몰랐다.

지금 아프다는 건 알았다.

“금화 37에서 시작합니다.”

뒤쪽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저런 말도 그 값을 받나.”

경매를 맡은 사람은 대꾸하지 않고 장내를 살폈다.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한나가 내 돈주머니를 보았다. 나는 끈을 풀지 않고 그대로 쥐었다.

내가 아는 것부터 셌다.

말은 다섯 살이었다. 눈이 흐리지 않았다. 사람 손에 끌려 나왔어도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다리는 절었다.

돈을 쓰고도 못 탈 수 있었다.

나는 장갑 안쪽으로 손바닥을 눌렀다.

그래도 저 말을 더 보고 싶었다.

손을 들었다.

“금화 37.”

경매를 맡은 사람이 나를 가리켰다.

“영애께서 금화 37을 부르셨습니다.”

검은 말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나도 똑같이 고개를 돌렸다. 다만 한나는 나를 보았다.

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났다.

“금화 38.”

나는 손을 든 채 돌아보았다.

은회색 머리.

큰 키.

경매장에 전혀 필요 없어 보이는 북부 털망토.

레녹스였다.

◐

대공의 손이 올라가 있었다.

그 옆에서 오웬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는 레녹스를 보았다. 레녹스도 나를 보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있었던 거지.

그건 나중에 물어도 됐다. 지금 중요한 건 저 손이었다.

“대공 전하.”

“에버린 영애.”

“제가 먼저 골랐어요.”

“봤다.”

보셨으면 더 나빴다.

나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레녹스의 얼굴에서 올라간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얼굴을 보았다.

레녹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네가 사라.”

경매를 맡은 사람이 경매봉을 든 채 멈췄다.

“입찰을 거두시는 겁니까?”

“그래. 아직 낙찰 전이지.”

“예. 그러면 앞서 부르신 금화 37로 돌아가겠습니다.”

레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줄에 남아 있던 사람이 말을 다시 살폈다. 대공이 손을 들었다는 이유로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나 검은 말이 자세를 고쳐 서자 절던 발이 다시 보였다. 그 사람은 접어 둔 종이를 무릎에 놓았다.

다른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경매봉이 내려왔다.

“금화 37에 낙찰입니다.”

그제야 나도 손을 내렸다.

한나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뒤에서 오웬이 작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는 말이 백 마리나 있으시면서.”

“백 마리요?”

내가 돌아보자 오웬이 입을 다물었다.

레녹스는 빈자리를 지나 내 쪽으로 왔다. 망토 자락이 의자에 걸릴 뻔하자 오웬이 뒤에서 잡아 주었다.

나는 의자 옆으로 비켰다.

“그렇게 많으신데 왜 제 말에 손을 드셨어요?”

“저 말이 마음에 들었다.”

“다리를 절어요.”

“봤다.”

“그래도요?”

“그래.”

나는 대공을 잠깐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내가 손을 든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웬이 망토를 놓으며 말했다.

“마음에 든다고 다 데려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하.”

레녹스가 나를 보았다.

“안 데려갔다.”

그건 맞았다. 금화 1을 더 쓰게 하지도 않았다.

나는 돈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제가 계산할 거예요.”

“그래.”

“돈도 안 빌려요.”

“알아.”

한나가 내 옆에서 가방을 꼭 안았다. 웃음을 참는 입가를 보고 나는 먼저 통로로 나왔다.

◐

돈을 치르는 탁자에는 거래 종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물건의 상태를 적은 부분부터 읽었다.

『검은 수말. 다섯 살. 오른쪽 앞다리의 걸음이 고르지 않음. 낙찰가 금화 37.』

종이를 쓴 사람이 잉크 묻은 펜을 내밀었다.

“직접 보셨다는 확인도 함께 받습니다.”

“네.”

나는 서명하고 금화를 꺼냈다.

탁자 위에 돈을 나누어 놓자 한나가 빈 돈주머니를 벌려 주었다. 계산을 맡은 사람은 금화를 세고 종이에 표시했다.

“어디로 보내 드리면 됩니까?”

“에버린 후작 저택이요. 다리가 아프니 서두르지 말고 데려와 주세요. 마구간지기에게 제가 샀다고 전해 주시고요.”

“인도하는 사람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거래 종이를 접어 한나의 가방에 넣었다.

뒤를 돌아보니 레녹스와 오웬이 조금 떨어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여기 계세요?”

레녹스가 입구 쪽을 가리켰다.

“들어가는 걸 봤다.”

“그래서 들어오셨어요?”

“그래.”

오웬이 들고 있던 서류를 옆구리에 끼웠다.

“저희는 말 경매장을 방문할 예정이 없었습니다.”

“그건 대공 전하께 말씀하세요.”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대공을 보았다. 레녹스는 오웬의 서류가 아니라 내 빈 돈주머니를 보고 있었다.

“더 살 건가.”

“아니요. 오늘은 저 말이면 돼요.”

레녹스는 더 묻지 않고 길을 비켰다.

나는 검은 말이 기다리는 울타리 쪽으로 걸었다. 뒤에서 망토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았다.

◐

검은 말은 울타리 안에서 혼자 서 있었다.

가까이 가자 귀가 움직였다. 나는 곧장 손을 뻗지 않았다.

“내가 샀어.”

말은 대답 대신 코를 한 번 벌름거렸다.

“나도 네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보고 싶거든.”

한나가 옆에서 물었다.

“이름은 뭐로 하실 거예요?”

검은 목덜미에 흙이 묻어 있었다. 나는 이마의 흰 점을 보고, 그 아래 어두운 눈을 보았다.

“먹구름.”

“먹구름이요?”

“응. 까맣고, 지금 좀 언짢아 보이잖아.”

한나가 말의 귀를 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이름을 싫어하는 건 아니겠죠?”

“아직은 나를 싫어하는지부터 봐야지.”

장갑을 벗었다.

오른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손가락은 모으고, 손바닥은 위로 폈다. 먹을 것을 들고 있는 척하지는 않았다.

먹구름이 목을 뻗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따뜻한 코끝이 손가락 가까이 왔다. 손바닥 냄새를 맡더니 굳은살이 남은 자리에 코를 대었다.

간지러워도 손을 접지 않았다.

먹구름이 콧김을 뿜었다.

손바닥에 축축한 기운이 남았다. 나는 입술을 눌렀다가 조금 웃었다.

“응. 빈손이야.”

뒤에서 레녹스가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먹구름의 고개가 먼저 돌아갔다.

검은 귀가 뒤로 눕더니 입술이 들렸다.

레녹스가 걸음을 멈췄다.

오웬도 멈췄다.

나는 내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먹구름은 내 손보다 대공의 망토 쪽을 보고 있었다.

“대공 전하, 가까이 오지 마세요.”

레녹스가 바로 한 걸음 물러났다.

먹구름은 그래도 이를 감추지 않았다.

오웬이 말과 대공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래도 금화 38은 못 잊은 모양입니다.”

(7화 끝)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80화. 악녀, 결혼하다

    악녀 수칙: 서약할 때는 손을 숨기지 않는다.덮어 둔 수첩 위로 햇빛이 들었다.나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표지를 만졌다. 어젯밤 끼워 둔 쪽지 끝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마지막 장도 아직 비어 있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아가씨, 일어나셨어요?”“응.”한나가 문을 열었다. 양팔에 연보라색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어제보다 눈이 조금 부었지만, 빗을 쥔 손은 멀쩡했다.“오늘은 잘 빗을 수 있겠어?”“네. 안 울 거예요.”“그건 해 보고 말해.”한나는 웃으면서 드레스를 의자에 펼쳤다.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을 열었다. 저택 앞에 마차가 서 있었다. 하인들이 마지막 상자를 실었고, 데릭은 현관 계단에서 장갑을 끼고 있었다. 턱이 말끔했다.잘 깎았네. 결혼식에 늦게 온 데다 수염까지 남아 있었으면 두고두고 말했을 것이다.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앉았다.한나가 머리를 빗어 올렸다. 핀을 꽂을 때마다 어디가 당기지 않는지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접시에 놓인 브로치를 집었다.“이건 네가 달아 줘.”한나가 두 손으로 받았다.“식이 끝나면 바로 떼어 드릴게요.”“급하게 떼지는 말고. 옷에 구멍 난다.”드레스 가슴께에 브로치가 달렸다. 한나는 핀을 확인하고 손바닥으로 옷감을 가볍게 눌렀다.어머니의 면사포는 마지막이었다.상자에서 꺼냈을 때는 길어 보이더니 머리에 얹자 등 뒤로 고르게 떨어졌다. 한나가 끝을 펴 주는 동안 나는 왼손의 은반지를 만졌다.“장갑은요?”“서약할 때 벗을 거야.”“지금은 끼실 거죠?”“응. 고삐 잡으러 가는 건 아니니까.”한나가 장갑을 내밀었다.오른손을 넣기 전에 손바닥을 한번 폈다. 굳은살 위로 아침빛이 닿았다. 새삼 문지르지는 않았다. 없어져야 할 것도 아니었다.화장대 위 수첩은 작은 가방에 넣었다.한나가 문을 열고, 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계단을 내려갔다.아버지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내 옷을 보고는 콧수염 아래 입술을 다물었다. 한나가 뒤에서 면사포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아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9화. 악녀, 전날 밤을 보내다

    악녀 수칙: 우는 사람에게는 빗을 맡기지 않는다.한나는 빗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아직 아가씨 머리를 다 못 빗었는데요.”“네 눈부터 닦아.”“안 울었어요.”나는 한나를 봤다.한나도 나를 보다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조금만요.”“조금 울어도 울긴 운 거야.”빗을 들고 돌아올 때부터 코끝이 빨갰다. 면사포 상자를 닫다가 눈을 훔치는 것도 봤다. 내가 거울만 보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한나는 내 뒤로 와서 풀린 머리카락을 모았다.“정말 조금만 더 하면 돼요. 이쪽이 아직 엉켜서요.”“그럼 그것만 풀고 앉아.”나는 빗을 돌려줬다.한나는 머리 끝부터 조심스럽게 빗었다. 익숙한 손이었다. 잡아당기지도 않았고, 엉킨 곳을 억지로 내리지도 않았다.문제는 빗질이 자꾸 멈춘다는 데 있었다.거울 속 한나가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다.“아프세요?”“아니.”“그러면 조금 더…….”말끝이 작아졌다.한나의 손이 내 머리 뒤에서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뒤로 내밀었다.“빗.”한나는 이번에는 순순히 건넸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나를 의자에 앉혔다. 한나가 벌떡 일어나려 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내가 앉으라고 했지, 벌 받으라고 했니?”“아가씨가 제 머리를 빗어 주시면 이상하잖아요.”“머리카락은 네 게 더 얌전해.”한나의 머리핀을 뺐다. 단단히 말아 올린 머리가 목 아래로 풀렸다. 한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덮고 거울을 쳐다봤다.“왜 우는데?”“내일 결혼하시니까요.”“그건 알아.”“좋아서요.”나는 빗을 머리 끝에 댔다.“그런데 왜 사람 장례 치르는 얼굴이야.”한나가 웃다가 코를 훌쩍였다. 웃기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엔 소리가 축축했다.손수건을 건네자 한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아가씨가 북부로 가셔도 저를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는데, 자꾸 여기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어 드리는 것 같아서요.”“내일도 빗어 줘야지.”“네.”“모레도.”한나가 손수건 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북부에서도. 거기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8화. 악녀, 드레스를 고르다

    악녀 수칙: 남이 정한 색을 입지 않는다.“데려갈 거예요.”내 대답에 베른이 먹구름의 고삐를 고쳐 잡았다.“그럼 꽃 장식에 익숙해지게 해 둬야겠습니다.”먹구름은 제 결혼식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턱을 높이 들었다. 나는 검은 목을 두드렸다.“꽃은 먹는 게 아니야.”먹구름이 내 손바닥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레녹스 쪽으로 코를 돌렸다.“그쪽도 없대.”레녹스가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먹구름은 기어이 주머니 끝까지 냄새를 맡았다. 사람 말을 믿지 않는 건 좋은데, 너무 철저했다.베른이 고삐를 당겨 검은 코를 떼어 놓았다.“옷을 물지 않는 연습도 해야겠네요.”“그건 꼭 해 주세요. 제 치마는 길어질 테니까.”레녹스가 나를 봤다.“정했나.”“아직요. 색부터 고르려고요.”“같이 가지.”“드레스 고르는 데도요?”“그래.”베른은 먹구름을 보고, 레녹스를 보고, 다시 고삐를 잡았다.“둘 다 아가씨가 가는 데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먹구름이 콧김을 뿜었다. 레녹스는 부정하지 않았다.나는 극장 계단을 내려가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3월 30일, 드레스 가게의 창에는 하얀 옷이 걸려 있었다.치마를 풍성하게 벌리고 소매에는 고운 자수를 놓았다. 허리에 묶인 띠도 하얬다. 흠잡을 곳 없이 예쁜 옷이었다.내가 입고 싶은 옷은 아니었다.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나는 내 망토를 받아 들었고, 레녹스는 문을 닫고 곧장 따라 들어왔다.주인의 시선이 레녹스에게서 멈췄다.“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고르시나요?”“구경만 해요.”내가 먼저 대답했다.레녹스는 내 옆에 섰다.“필요하면 돕겠다.”“단추 잠그는 건 한나가 해 줘요.”“그럼 기다리지.”주인은 창가의 넓은 의자를 권했다. 레녹스가 앉으려다 내 쪽을 봤다.나는 가게 안쪽의 거울을 가리켰다.“저는 저기 있을 거예요.”레녹스는 의자를 조금 옮겼다. 거울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한나가 내 망토를 접다가 웃었다.“전하, 제가 옷을 가리면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7화. 악녀, 수도로 돌아가다

    악녀 수칙: 마음에 드는 날은 내 것으로 삼는다.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레녹스가 내 장갑을 주워 들었다.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낀 채 장갑을 끼우려니 손가락 끝이 자꾸 안쪽에 걸렸다.“빼고 낄까.”“싫어요. 방금 꼈는데.”레녹스는 장갑 입구를 넓혀 줬다.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은반지가 천 아래로 가려졌다.괜히 손등을 한 번 쓸었다.“내려가면 벗으면 되지.”“알아요.”“계속 만지길래.”나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레녹스의 손을 잡았다.“이건 만져도 되잖아요.”“그래.”계단 아래에서 데릭이 우리를 올려다봤다.“차 식는다!”한나가 바로 데릭의 옆구리를 눌렀다. 오웬은 찻잔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요리사는 접시 가운데에 과자를 더 쌓았다.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다.레녹스도 손을 잡은 채 따라 내려왔다. 빈 의자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오웬이 굳이 두 의자를 조금 더 붙였다.“너무 가까운데요.”내 말에 오웬이 의자를 도로 밀려 했다.나는 먼저 앉았다.“옮기라는 말은 안 했어요.”오웬이 손을 거뒀다. 데릭은 차를 마시다 웃었고, 한나는 결국 손수건을 꺼냈다.레녹스가 내 앞에 과자 접시를 놓았다.나는 장갑을 벗고 은반지를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 손에 붙었다.“차 식는다며.”데릭에게 말하자 그제야 다들 찻잔을 들었다.◐3월 28일, 수도로 들어가는 길은 북부보다 훨씬 질었다.바퀴가 물기 섞인 흙을 밟을 때마다 마차가 조금씩 기울었다. 나는 창밖의 길을 보다가 무릎 위에 올린 편지를 다시 펼쳤다. 어제 묵은 곳까지 달려온 수도의 전령이 건넨 편지였다.왕의 허락은 짧았다.『레녹스 발트하임 대공과 비올레타 에버린 영애의 혼인을 허락한다. 왕궁 정원을 예식 장소로 내주겠다.』끝에 찍힌 왕의 인장이 종이를 접어도 조금 튀어나왔다.그 밑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었다.왕궁 정원을 쓸 수 있다는 말보다 그쪽이 더 뜻밖이었다.『4월 1일은 어떠냐. 준비는 해 두겠다. 네가 싫다면 다른 날로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6화. 악녀, 청혼을 받다

    악녀 수칙: 좋은 일 앞에서는 괜히 도망가지 않는다.나는 먹구름의 고삐를 받아 들고 성 꼭대기를 다시 봤다.“몇 시에요?”“저녁 먹고.”“거기까지 올라가서 또 경주하자고 하시는 건 아니죠?”레녹스가 내 손에 감긴 고삐를 풀어 줬다. 먹구름이 갑자기 고개를 들면 손가락이 조일 만큼 감겨 있었다.“말은 두고 와라.”“그럼 제가 불리한데요.”“이길 필요 없다.”고삐가 손바닥에 느슨하게 놓였다. 레녹스는 마지막으로 내 손가락을 살피고 놓았다.나는 탑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따뜻하게 입고 가면 돼요?”“그래. 바람이 분다.”“알았어요.”먹구름이 내 소매를 물었다. 당근이 남았다는 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나는 소매를 빼내고 주머니를 뒤졌다. 레녹스는 먹구름이 당근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먼저 들어가셔도 되는데요.”“같이 가겠다.”“마구간 안까지요?”레녹스가 먹구름을 봤다.“싫어하나.”검은 주둥이가 레녹스의 빈손을 한 번 더 확인했다.“손님이 빈손으로 왔다고 좀 아쉬운가 봐요.”레녹스가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그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오늘은 충분히 먹었어요.”손이 순순히 내려갔다.먹구름만 몹시 불만스러웠다.◐3월 23일, 나는 저녁 식사를 평소보다 빨리 끝냈다.그렇다고 접시를 비우지도 않고 일어난 건 아니었다. 북부 요리사는 남은 음식을 보면 어디가 아픈지부터 물었다. 괜히 걱정을 살 필요는 없었다.문제는 옆자리에 앉은 데릭이었다.내가 수저를 내려놓자 데릭도 얼른 내려놓았다.“다 먹었어?”“응.”“배부르냐?”“그걸 왜 물어?”“그냥.”데릭의 접시에는 감자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접시를 가리켰다.“오빠는 더 먹어. 훈련하고 왔다며.”“나도 배부르다.”맞은편의 한나가 물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잔을 들지도 않고 입술만 꾹 누르고 있었다.오웬은 그 옆에서 빵을 뜯었다. 이미 다 먹은 빵을 다시 뜯을 수는 없어서, 손끝에는 작은 부스러기만 남았다.나는 셋을 차례로 봤다.“뭐 있어요?

  • 악녀가 되기로 했는데 남주가 따라왔다   75화. 악녀, 먹구름과 달리다

    악녀 수칙: 이겼으면 받고 싶은 것을 직접 고른다.나는 계단 앞에서 발을 멈췄다.오웬의 질문 뒤로 잠깐 조용해졌다. 집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조금 뒤에는 발소리도 들렸다.나는 손수건을 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영애.”오웬이 복도 끝에서 나를 불렀다. 아까 들고 있던 서류는 없었다.“길을 물으러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맞아요. 먹구름이 달릴 만한 곳이 있나 해서요.”오웬은 내 얼굴을 보고 집무실 쪽을 한번 돌아봤다.“남쪽 들판에 길이 있습니다. 눈을 걷어 둔 곳인데, 상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고마워요.”“전하께서도 같이 가실 겁니다.”“제가 같이 가자고 안 했는데요.”오웬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웃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 뒤에서 오웬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길을 물었더니 동행부터 정해지는 성이었다.◐3월 22일 아침, 먹구름은 내가 들고 온 안장보다 주머니를 먼저 봤다.주둥이가 망토 옆을 꾹 눌렀다.“당근은 이쪽 아니야.”먹구름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치가 빨랐다. 처음 샀을 때부터 사람 말도 이만큼 잘 들었으면 베른의 허리가 덜 아팠을 텐데.나는 잘라 온 당근을 손바닥에 올렸다. 먹구름이 입술로 조심스럽게 집어 갔다.“오늘은 좀 달릴 거야.”남은 당근을 달라는 듯 고개가 더 내려왔다.“알았어. 준비부터 하고.”마구간 문이 열렸다. 찬바람을 따라 레녹스가 들어왔다. 두꺼운 망토 아래에 승마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오셨네요.”“네가 간다기에.”“오웬이 벌써 동행을 정해 줬어요.”레녹스는 내 옆에 멈춰 섰다.“싫으면 여기 있겠다.”먹구름이 내 어깨 너머로 코를 뻗었다. 레녹스는 주머니에서 각설탕을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검은 주둥이가 손바닥으로 향했다.나는 먹구름의 목을 가볍게 쳤다.“넌 좋겠지.”“너는.”레녹스는 각설탕을 먹이는 동안에도 나를 봤다.“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그럼 간다.”정하기 쉬웠다. 대공을 데리고 들판에 나가면서 결재할 종이도, 납득시킬 사람도 없었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