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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세레나는 남자의 눈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다른 걸 봐야 하지 않을까.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이라든가. 자신의 목을 받치고 있는 차가운 단두대라든가. 혹은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그것도 아니라면. 마지막으로 한 번쯤 하늘이라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남자에게서. 검은 머리카락. 핏기 하나 없는 차가운 얼굴.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 카시엘 에르하르트. 북부의 주인. 제국의 검. 그리고. 자신을 죽일 남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세레나는 입술을 움직였다. 이상했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그리운 걸까. “…….” 말해야 했다. 살려달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이번에는.” 카시엘의 눈이 흔들렸다. “……?” 세레나가 웃었다. 왜 웃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이 살아.” 남자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아니. 무너졌다. “세레나.” 어째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부르는 걸까. 처음 보는 사람인데. “기다려.” 카시엘이 검을 떨어뜨렸다. 챙그랑! “잠깐만.” 그가 다가왔다. “이번에는 안 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세레나는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ERROR] [상충하는 두 개의 운명이 선택되었습니다.] ⸻ “허억!” 세레나가 눈을 떴다. 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 쿵. 쿵. “뭐…….” 손이 가장 먼저 목으로 올라갔다. 있다. 목이 붙어 있었다. “뭐야.” 손끝이 떨렸다. “뭐야, 방금.” 꿈? 아니. 너무 생생했다. 목에 닿던 차가운 공기. 검날에서 번쩍이던 빛.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 세레나는 한동안 목을 붙잡은 채 숨만 몰아쉬었다. 그러다 천천히 주변을 바라봤다. “……어?” 처음 보는 방이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천장에는 화려한 금빛 장식이 새겨져 있었고, 머리 위로는 얇은 레이스가 겹겹이 늘어진 침대 차양이 보였다. 침대만 해도 원래 살던 집의 방 절반은 차지할 것 같았다. 창가에는 붉은 벨벳 커튼. 벽에는 이름도 모를 귀족들의 초상화. 그리고 협탁 위에는— 금으로 된 촛대가 있었다. “……이게 뭐야.” 세레나는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붉었다. “…….” 세레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신의 머리는 검은색이었다. 정확히는 어제까지. 그녀는 천천히 머리카락 한 움큼을 집었다. 짙은 적포도주 같은 붉은색. “설마.” 불길했다.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았다. 방 한쪽에 놓인 거울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미친.” 거울 속 여자를 보았다. 붉은 머리. 보랏빛 눈. 새하얀 피부.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이목구비. 모르는 얼굴이어야 했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세레나…….” 세레나 벨로아. 몇 달 전에 읽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 《황태자의 유일한 장미》. 그 안에서 황태자 레오넬에게 미친 듯이 집착했던 여자. 원작 여주인공 엘리시아를 괴롭히고. 결국 반역 사건에까지 연루되어— “죽는 악녀.” 세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카시엘 에르하르트에게 처형당하는 악녀. 조금 전 꿈속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바로 그 남자에게. “…….” 세레나는 거울을 붙잡았다. “아니지.” 괜찮다. 아직 죽은 건 아니다. 빙의물의 기본이 뭐던가. 원작을 알고 있다. 그러면 피하면 된다. 황태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엘리시아도 괴롭히지 않는다. 반역 같은 건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카시엘? 만나지 않으면 된다. 아주 간단했다. “그래.” 세레나는 거울 속 자신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돼.” 돈도 많다. 집안도 좋다. 얼굴도 예쁘다. 황태자에게 미쳐서 인생을 말아먹지만 않으면 이보다 좋은 조건도 없다. “레오넬은 엘리시아한테 주고.”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엘리시아랑은 마주치지도 말고.” 둘. “반역은 구경도 하지 말고.” 셋. 마지막으로. “카시엘 에르하르트는…….” 조금 전 꿈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 붉은 눈. 그리고. ‘이번에는 안 돼.’ 세레나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왜 그런 말을 했지? 원작의 카시엘과 세레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카시엘은 황실의 명령에 따라 세레나의 처형을 집행했을 뿐이었다. 그런 남자가 왜— “아니야.” 세레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꿈이다. 빙의하면서 원작 기억이 뒤죽박죽 섞였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아무튼 그 남자는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 완벽하다. 그렇게만 하면 산다. 세레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딩— 맑은 소리가 울렸다. “……?” 세레나가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딩— 또 한 번. 이번에는 바로 눈앞이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빛이 모였다. “……뭐야.” 빛은 네모난 형태를 이루었다. 마치 게임에서나 볼 법한 창. 그 위로 검은 글자가 한 줄씩 나타났다. [플레이어 확인 완료.] 세레나는 눈을 깜빡였다. “……플레이어?”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세레나 벨로아.] [운명의 게임에 참가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 하는데?”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참가가 완료되었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 세레나의 눈썹이 꿈틀했다. “취소.” [불가능합니다.] “탈퇴.” [불가능합니다.] “로그아웃.” [지원하지 않는 기능입니다.] “…….” 뭔가. 굉장히 열받는 시스템이었다. 세레나가 팔짱을 꼈다. “좋아. 그래서 이게 뭔데?” 잠시 후. 화면이 바뀌었다. [현재 플레이어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빛이 한 번 번쩍였다. 그리고. [세레나 벨로아] [현재 생존 예정 기간: 90일.] 세레나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뭐?” 화면 위 숫자가 붉게 변했다. [D-90] 심장이 내려앉았다. “잠깐.” 세레나가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90일?” [그렇습니다.] “왜?” [현재 운명이 유지될 경우 플레이어는 90일 후 사망합니다.] 알고 있다. 원작의 세레나는 죽는다. 하지만— “내가 원작대로 안 살면 되잖아.” [가능합니다.] 세레나가 멈칫했다. “……가능하다고?” [운명은 변경할 수 있습니다.] 그제야 조금 숨이 트였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황태자도 포기하고 엘리시아도 안 건드리고—” [단.] 불길한 한 글자. 세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변경된 운명에는 그에 상응하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무슨 선택?” 그 순간. 방 전체가 어두워졌다. “뭐야?” 세레나가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서 금빛 선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수십 개. 선들은 서로 이어지고 갈라지며 거대한 길을 만들었다. 세레나의 눈이 커졌다. “……게임판?” 정말 그랬다. 바닥을 가득 채운 거대한 보드게임판. 칸마다 작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왕관. 검. 하트. 해골. 모래시계. 그리고 카드. 게임판은 방을 넘어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세레나의 바로 앞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1. 그리고 아주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마지막 숫자. 100. 허공의 창이 다시 빛났다. [운명의 게임 규칙을 안내합니다.] [플레이어에게는 하루에 한 번 주사위를 굴릴 기회가 주어집니다.] [도착한 칸에 따라 사건이 발생합니다.] [특정 칸에서는 운명 카드를 획득합니다.] [카드의 효과는 현실에 적용됩니다.] 세레나가 천천히 물었다. “……안 하면?” 짧은 침묵. 그리고. [90일 후 예정된 운명을 맞이합니다.] 죽는다. 그 말이었다. 세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100번째 칸까지 가면?” 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나타났다. [운명을 변경할 자격을 획득합니다.] “살 수 있어?” [가능합니다.] 세레나는 게임판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함정 있지?” […….] “있네.”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니 백 퍼센트였다. “카드는?” [도착한 칸에 따라 뽑을 수 있습니다.] “뭐가 나오는데?” 화면 위로 여러 문양이 지나갔다. [인연.] [사건.] [재앙.] [권력.] [보상.] [시간.] [운명.] 마지막 단어에서 화면이 잠시 흔들렸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세레나는 다른 글자를 본 것 같았다. [기억.] “잠깐.” 화면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방금 뭐였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기억이라고—” 툭. 무언가 침대 위로 떨어졌다. 세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주사위.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주사위였다. 각 면의 점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세레나는 그것을 한동안 바라봤다. [첫 번째 주사위를 굴리십시오.] “싫은데.” […….] “아직 생각 중이야.” [플레이어에게 남은 시간은 90일입니다.] “알아.” [100번째 칸까지 이동해야 합니다.] “그것도 들었어.” [그러므로 가능한 한 빠르게—] “시끄러워.” 시스템창이 조용해졌다. 세레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주사위를 집었다. 차갑다. 이상할 정도로. 손바닥 위의 작은 물건 하나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선택지는 분명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90일 뒤 죽거나. 이 수상한 게임에 참가하거나. “…….” 세레나는 주사위를 내려다봤다. “한 가지 물어보자.” [질문하십시오.] “여기 적힌 대로만 해야 해?” [질문의 의미를 명확히 해주십시오.] “게임.” 세레나가 주사위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네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냐고.”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글자가 나타났다. [카드의 발생은 강제됩니다.] 그다음. [그러나 선택은 플레이어에게 있습니다.] 세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거면 됐어.” [……?] 입꼬리가 올라갔다. 게임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선택할 수 있다면 방법은 있다. A와 B밖에 없다면. C를 만들면 된다. 세레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해보자.” 주사위를 움켜쥐었다.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응.” 화면이 환하게 빛났다. [운명의 게임을 시작합니다.] 세레나는 주사위를 던졌다. 데구루루— 새하얀 주사위가 붉은 카펫 위를 굴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멈췄다. 세레나가 숫자를 확인했다. 5. 동시에 게임판 위에서 작은 말 하나가 움직였다. 탁. 금빛 불꽃이 터졌다. [5번 칸에 도착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이 발생합니다.] 허공에서 카드 한 장이 나타났다. 붉은 테두리. 가운데에는 깨진 왕관이 그려져 있었다. 세레나가 조심스럽게 카드를 잡았다. 그리고 뒤집었다. [R 사건 카드] 「원작을 거부한 악녀」 24시간 이내 원작과 다른 선택을 하나 하십시오. 성공 보상: 운명 포인트 +10 실패 패널티: 원작 강제력 상승 세레나는 카드를 읽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원작과 다른 선택?” 생각보다 쉽다. 원작의 세레나가 지금 이 시기에 가장 열심히 하던 일이 뭐였더라. 황태자 레오넬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 매일 편지를 보내고. 선물을 보내고. 약혼자가 되겠다며 황궁을 들락거렸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하면 된다. 세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가씨.” 조심스러운 시녀의 목소리였다. “황태자 전하께 보내실 오늘의 꽃을 준비했습니다.” 세레나가 눈을 반짝였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문을 열었다. 시녀가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안고 서 있었다. “마차도 준비해두었습니다. 오늘도 직접 황궁으로—” “안 가.” “……예?” “꽃도 보내지 마.” 시녀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어제 분명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장미를 수도에서 전부 사들이라고—” “팔아.” “예?” “다시 팔아버려.” “…….” 시녀가 세레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바라봤다. 세레나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마차는 준비해줘.” “황궁에 가시는 게 아니십니까?” “가긴 갈 거야.”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원작의 세레나 벨로아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 세레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황태자한테 차이기 전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먼저 차버려야지.” 그 순간. 아무도 보지 못한 게임판 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10번 칸이 붉게 빛났다. 그곳에 뒤집힌 카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카드의 등급은— SSR. 그리고 카드 뒷면에 새겨진 이름. 카시엘 에르하르트. 세레나는 아직 몰랐다. 자신이 피하려고 했던 죽음이. 이미 게임판 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보다 훨씬 먼 곳. 눈 덮인 북부의 성. 집무실에 홀로 서 있던 한 남자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 카시엘 에르하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문장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플레이어가 돌아왔습니다.] 카시엘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플레이어?” 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단 한 문장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번에는 놓치지 마십시오.]세레나는 아침부터 돈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정확히는 자기 돈이 아니라 루아의 돈이었다.“대공.”“예.”“루아한테 월급을 주면 어떨까요?”카시엘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서 빵에 잼을 바르던 아리엘라는 손을 멈췄고, 엘리시아는 장부를 펼치려다 말고 세레나를 바라봤다.“월급이요?”“응. 루아가 그동안 한 일이 있잖아요. 기록 관리도 했고, 위험한 카드도 분석했고, 우리가 모르는 규칙도 알려 줬고. 그러니까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가능은 합니다.”카시엘의 대답은 빨랐다. 하지만 곧바로 덧붙였다.“다만 먼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뭔데요?”“루아가 그 일을 고용 관계로 인정하고 싶은지부터 물어야 합니다.”세레나는 입을 다물었다.맞다.또 그랬다.자기는 루아에게 돈을 주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정작 루아가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선의라고 해서 언제나 상대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의 자신이 카시엘의 기억을 귀환 좌표로 이용하려 했던 것도, 아리엘라에게 대신 선택하라고 했던 것도, 결국은 누군가를 살리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루아.”『응.’“월급 받을래?”『월급이 뭔데?』“일하고 받는 돈.”『그럼 나는 무슨 일 해야 해?』“지금까지 했던 기록 관리 같은 거?”『그거 이제 내 역할 아닌데.』“……그렇지.”『다시 해야 해?』세레나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아니. 안 해도 돼.”루아는 잠시 조용했다.『그럼 월급 안 받을래.』“왜?”『돈 받으면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세레나의 손끝이 멈췄다.카시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루아가 이어 말했다.『나 이제 아침에 눈 보고 싶으면 눈 보고, 방에 있고 싶으면 방에 있고 싶어. 그런데 돈 받으면 누가 부를 때마다 일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럴 수도 있지.”『그럼 싫어.』세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아리엘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한 보수는?”세레나가 그녀
아침이 되었는데도 세레나는 바로 주사위를 찾지 않았다.현재 보드는 90.다음 고정 지점은 95였다.예전 같았으면 얼마나 남았는지부터 계산했을 것이다. 오늘 몇 칸을 갈 수 있는지, 높은 숫자가 나오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다음 카드가 무엇인지부터 확인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세레나의 시선은 보드가 아니라 다른 곳에 머물러 있었다.[D SLOT ITEM 03.]SYSTEM — QUEST.상태:UNANSWERED.어제까지는 이것만 보였다.질문이었다가 퀘스트가 된 것.그것도 누군가가 명령해서 바뀐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답을 받지 못한 시스템이 스스로 처리 형식을 바꾼 흔적.세레나는 침대에 기대 앉은 채 손가락으로 허공을 두드렸다.“루아.”한 번.대답이 없다.두 번 부르지 않았다.기다렸다.잠시 후 목소리가 들렸다.『응.’“잘 잤어?”『나는 안 자.’“알아. 그냥 인사.”『그럼 잘 잤어.’세레나가 피식 웃었다.“거짓말이잖아.”『인사라며.’“그것도 맞네.”루아의 방이 생긴 뒤부터 이런 순간이 늘었다.예전에는 루아를 부르면 시스템 안쪽에서 즉시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는 다르다. 온실을 보고 있을 수도 있고, 자기 방의 창밖을 보고 있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을 수도 있다.그래서 기다려야 한다.세레나는 그 기다림이 싫지 않았다.“어제 그 QUEST.”『응.’“밤새 뭐 달라진 거 있어?”『있어.’세레나가 몸을 바로 세웠다.“뭔데?”『나 혼자 봐도 되는지 먼저 물어봤어.’“누구한테?”『시스템.’세레나가 눈을 깜빡였다.“뭐래?”『안 된대.’“왜?”『PLAYER01 접근 권한 필요한 기록이래.’“그럼 잘했네.”『뭐가?’“혼자 억지로 안 열어 본 거.”루아가 잠시 조용해졌다.『나 이제 관리자가 아니니까.’“응.”『세레나 기억도 내 거 아니고.’“응.”『QUEST도 내 거 아니야.’세레나가 천천히 웃었다.“맞아.”『그래서 기다렸어.’“그럼 같이 보자.
[RETURN01 LIFE RECORD.]검증 준비.GAME TIME:LOCAL LIFE TIME:—숫자가 나타나기 직전 멈춘 창을 세레나는 한참 바라봤다.GAME TIME.그 숫자가 예전이었다면 꽤 무서웠을 것이다.현대에서 살았던 시간이 실제로는 흐르지 않았다거나, 자신이 기억하는 수많은 날이 전부 게임이 만들어 낸 임시 기억이었다거나, 혹은 RETURN01이 귀환이 아니라 거대한 환상에 불과했다는 식의 결론부터 떠올렸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세레나는 이미 70번에서 자신의 현대 생활이 실제로 이어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GAME 신호가 끊긴 동안에도 그 세계의 시간은 흘렀고,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과 사건은 계속 움직였다. 월세 계약은 갱신됐고, 급여가 들어왔고, 병원 기록이 남았으며, 자신조차 잊고 있던 사소한 생활의 흔적들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졌다.그러니 0은.없었다는 뜻이 아니다.“게임이 못 셌던 거네.”카시엘이 그녀를 바라봤다.“무엇을 말입니까.”“내 시간.”세레나는 창을 손끝으로 가리켰다.“GAME TIME이 0이라고 해서 내가 거기서 0초를 살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게임이랑 연결이 끊겼으니까 게임 기준 시간이 없었던 거야.”[해석 일치.]시스템이 곧바로 답했다.세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이번엔 바로 인정하네.”[BOARD70에서 RETURN01 독립 생애 연속성 검증 완료.][현재 검증 항목은 ‘존재 여부’가 아닙니다.]“그럼?”[시간의 소유권.]세레나의 표정이 멈췄다.카시엘도 창을 봤다.[GAME이 관측하지 않은 시간을 PLAYER01의 생애로 인정할 것인가.]세레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그걸 왜 게임이 인정해?”[기존 GAME 기록 규칙상 비관측 시간은 PLAYER LIFE TIME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그러니까 그 규칙이 틀렸다고.”[BOARD90에서 검증 예정.]“아니.”세레나가 단호하게 잘랐다.“검증은 해. 자료도 볼 거고.”잠깐.“근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세레나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시스템창이 아니었다.창가였다.밤새 내리던 눈은 멎어 있었다. 유리창 가장자리에는 하얀 눈이 얇게 쌓여 있었고, 새벽빛이 그 위에 번지면서 방 안까지 희끄무레한 빛이 들어왔다. 세레나는 이불 속에서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어젯밤 온실에 두고 온 거울을 떠올렸다.“루아.”대답이 없다.예전 같으면 심장이 먼저 내려앉았을 것이다.연결이 끊겼나.사라졌나.83번에서 DEALER 역할을 종료한 게 잘못됐나.그런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하지만 세레나는 기다렸다.하나.둘.셋.그리고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응.’세레나가 눈을 깜빡였다.“뭐 했어?”『눈 보고 있었어.’“내가 불렀는데.”『들었어.’세레나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그런데 바로 대답 안 했어?”『응.’“왜?”루아가 너무 태연하게 말했다.『조금 더 보고 싶어서.’세레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그리고 웃었다.“그래.”『화 안 나?’“왜 화가 나.”『예전에는 부르면 바로 대답했잖아.’“그때는 네가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었으니까.”『지금도 연결돼 있잖아.’“연결돼 있는 거랑 항상 대답해야 하는 건 다르지.”루아가 조용해졌다.세레나는 몸을 일으켰다.“앞으로도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대신 위험한 일 생겼을 때 내가 급하게 부르면 그건 좀 빨리 대답해 줘.”『얼마나 빨리?’“음.”세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세 번 정도 부르기 전에?”『세레나.’“응.”『그건 규칙이야?’“아니. 부탁.”잠시 후.『그럼 할래.’세레나는 웃었다.이런 게 달랐다.명령.규칙.조건.선택지.그런 것이 아니라.부탁하고.듣고.싫으면 거절하고.원하면 받아들이는 것.루아가 DEALER가 아니게 된 첫 아침은 그렇게 별것 아닌 대화로 시작됐다.그리고 그 별것 아닌 대화가 세레나는 마음에 들었다.⸻아침 식사 자리에는 온실에서 회수된 거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하인이
『눈 오는 온실.』『카시엘이 좋아한다는 소리.』『나도 들어 보고 싶어.』루아가 처음으로 구체적인 장소를 골랐다.따뜻한 곳.사라지지 않아도 되는 곳.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대가가 되지 않아도 되는 곳.그동안 루아가 말한 것은 전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눈 오는 온실.장소가 생겼다.세레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 웃었다.“좋아.”『진짜?’“응.”『어떻게?’세레나가 멈칫했다.루아는 아직 몸이 없다. 눈도 없고 귀도 없다. 세레나가 보는 것을 직접 보는 것도 아니고, 세레나가 먹는 맛을 그대로 느끼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야 세레나의 감각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감각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을 뿐이다.온실로 데려간다.말은 쉽다.하지만 어떻게?“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지.”『모르면서 된다고 했어?’“가고 싶은 데가 생겼으면 가는 방법을 찾으면 되잖아.”루아가 조용해졌다.『또 만든다고?’“응.”『방법 없으면?’“만들어.”잠깐.루아가 웃었다.『세레나 그 말 진짜 좋아해.’“나도 이제 인정했어.”세레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시스템.”[확인.]“DEALER가 외부 환경을 독립적으로 관측할 수 있는 방법.”[현재 DEALER는 D SLOT 및 GAME 관리 구조에 연결되어 있습니다.]“그건 아는데. 내가 보는 거 빌려 보는 방식 말고.”[현재 독립 감각 기관 없음.]“몸 만들어 달라는 말 아니야.”[확인.]“관측만. 루아가 보고 싶을 때 보고, 싫으면 끌 수 있고, 내가 뭘 보고 있는지랑 상관없이.”잠시.[기존 기능 없음.]세레나가 웃었다.“그럼 만들면 되겠네.”[신규 기능 생성에는 안정적 독립 존재 기록이 필요합니다.]“현재 얼마.”그런데 시스템이 띄운 숫자를 보는 순간 세레나의 미간이 좁아졌다.[DEALER 독립 존재 지속성:71%.]세레나는 숫자를 한참 봤다.“잠깐.”『왜?’“이거 이상한데.”루아가 조용해졌다.세레나는 지난 기록을 머릿속에서 빠
[FIXED FATE POINT 78.]과거 기록 제목 복구 중.「이번 생도……」금빛 문장은 거기에서 멈춰 있었다.세레나는 한동안 78번 칸을 바라봤다.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칸이 먼저 반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경고도 아니었고, 위험을 알리는 붉은 빛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좋은 결과를 약속하는 축복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그저 이상하게 익숙했다.손끝이 먼저 카시엘을 찾았던 것도 그래서였을까.세레나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힘을 풀었다. 하지만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카시엘도 마찬가지였다. 잡아 두지도, 먼저 놓지도 않은 채 그녀가 결정할 만큼의 힘만 남겨 두었다.“루아.”『응.’“아까 78에서 내가 누군가를 뽑았다고 했지.”『응.’“누구였는지는?”긴 침묵.『몰라.’“카시엘이었을 가능성은?”『……모르겠어.’루아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좋다.세레나도 더는 답을 유도하지 않았다.“한 번이 아니라고 했고.”『응.’“그건 확실해?”『그건 알아.’“기억이 아니라 감각인데도?”『응.’루아의 목소리가 조금 답답해졌다.『설명하기 어려워. 카드 여러 장을 섞었는데, 같은 카드 모서리만 계속 손에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야.’세레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같은 사람을 여러 번 뽑았다는 뜻인지, 같은 종류의 선택을 여러 번 했다는 뜻인지는 모른다.”『응.’“좋아. 거기까지.”카시엘이 세레나를 바라봤다.“확인하지 않습니까?”“78 가면 나오겠죠.”“예.”“그리고 지금부터 ‘분명 대공이겠지’ 하고 생각하면, 나중에 뭐가 나와도 그쪽으로 끼워 맞출 것 같아서.”세레나는 78번 칸을 다시 봤다.이번 생도.그 말부터 위험하다.이번 생.저번 생.마치 자신이 몇 번이나 같은 삶을 반복한 것처럼 들린다.하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그런 무한 회귀가 아니었다.INSTANCE0의 삶.GAME01.RETURN01 이후 실제 현대 생활.그리고 GAME02.연결된 삶의 구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