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48.거추장스러운 기사들을 전부 수도로 돌려보낸 바실리안은 화려한 옷 대신 시골 마을에 어울리는 수수하고 가벼운 옷가지로 갈아입었다.그러고는 매일 같이 오두막 근처를 기웃거리며,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게 오두막 주변을 배회하고 지켰다. 자신을 부담스러워하는 아그네샤에게 강요 대신 조용히 그녀를 지키기로 결심했다.한편, 아그네샤는 바실리안이 정말로 수도로 완전히 돌아갔다고 믿었다. 첫날은 그가 남기고 간 묵직한 체온과 고백 때문에 밤잠을 설쳤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자 다시 평화롭고 한가로운 일상이 찾아왔다.마음 한편으로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맴돌았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안락한 삶을 되찾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사흘째 되던 날 아침, 바닥난 식재료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아그네샤는 장바구니를 들고 조심스럽게 마을로 내려갔다. 로브 후드를 깊게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며 필요한 식재료들을 구매했다.묵직해진 장바구니를 들고 언덕을 오르던 아그네샤는 수풀 뒤편에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익숙한 마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아그네샤는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수풀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바실리안을 발견했다.“큭… 윽…….”수도로 돌아간 줄만 알았던 그가 마력 폭주를 주체하지 못해 힘겹게 가슴을 옥죄며 신음하고 있었다. 아그네샤의 손에 들린 장바구니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리안!!”아그네샤는 망설일 겨를
47.하지만 자신을 죽여야 할 남주가 자신에게 고백할 줄은 몰랐다. 물론, 부드럽고 다정하게 안아올 때면 작은 기대감과 함께 상상을 해본 적은 있었지만, 현실의 고백은 더 절절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동시에 수도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다시금 목을 죄어왔다. 수도로 올라가는 순간, 그 잔혹한 가짜 성녀의 손에 세라피나처럼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의 이성을 지배했다.“나, 난… 돌아갈 수 없어요. 미안해요… 제발, 제발 그냥 돌아가 주세요, 바실리안.”결국 눈물이 핑 돈 채 고개를 저으며 거절을 내뱉었지만, 바실리안은 이대로 그녀를 포기하고 돌아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씁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아그네샤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제 뺨에 살포시 가져다 댔다.“그대가 정 원하지 않는다면… 그럼, 오늘 딱 하루만 이곳에서 재워주겠나? 그대를 찾아 반나절이 넘게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이곳까지 왔어. 지치고 아파서 더는 움직일 수가 없군.”처량하게 눈시울을 붉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아그네샤는 결국 차갑게 거절하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어요. 침실로 모실 테니 거기서 주무세요. 저는 거실 소파에서 잘게요.”아그네샤가 그를 작은 침실로 안내하고 돌아서려 하자, 바실리안은 참을 수 없이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으나 순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고맙다, 샤샤.”새벽이 깊어지고 거실의 낡은 소파 위에서
46.그의 처절한 애원에 아그네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목소리가 가슴을 짓눌렀지만, 아그네샤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소리쳤다.“가, 가세요! 성녀… 성녀님한테 가세요! 그분이 마력을 정제해 줄 수 있잖아요! 제발… 제발 절 찾지 마세요, 바실리안……!”아그네샤의 절규 같은 거절에 문 너머에서 바실리안의 작고 서글픈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성녀의 정제가 통하지 않았어. 정제는커녕 소름만 끼칠 뿐이었어…….”폭주가 통하지 않는다면 애원이라도 해야 한다. 바실리안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애처로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정제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얼굴만 보여주면 안 될까? 그저 잘 지내고 있는지만 확인할게. 응? 샤샤, 제발…….”제국에서 가장 고귀하고 서늘했던 사내가 문 너머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오열하듯 애원하고 있었다.오직 자신만을 향한 그 애절하고 처량한 태도에 아그네샤의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원작에서 여주에게만 다정했던 바실리안. 그의 다정함이 자신에게 향한 것 같아 가슴이 소란스러워졌다.공포와 경계심으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 한쪽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그네샤는 떨리는 입술을 사정없이 깨물며, 망설이던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달깍. 걸쇠가 풀리는 예리한 소리와 함께 단단히 닫혀 있던 목재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슬그머니 열렸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과 서늘하게 뒤엉킨 바실리안의 마력이 밀려 들어왔다.문밖에 털썩 주저앉아 있던 바실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게 짓물러 핏발이 선 그의 눈동자가 아그네샤를 담아내는 순간, 사나운 광기 대신 짓밟힌 아이처럼 처량하고 서글픈 빛이 터져 나왔다.“샤샤…….”갈증에 목이 마른 사람처럼, 바실리안은 아그네샤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허겁지겁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그의 커다란 손이 아그네샤의 작고 가녀린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다급하게 감싸 쥐었다.부서질까 두려워 억센 힘을 다 풀었지만, 절대로 놓지 않겠다
45.다정하게 굴다가도 미친 듯이 짓밟고 몰아세웠던 자신에게, 그녀 역시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바실리안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충격과 벅찬 열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그렇단 말이지. 내 얼굴이 그녀에게 통하는 무기였던 거군.”어이없으면서도 깊은 안도감이 섞인 나직한 혼잣말을 내뱉은 바실리안이 시선을 내렸다.“알겠네. 그만 나가보게.”“예, 소공작님.”메리가 식은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집무실 문이 열리며 집사가 다급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령이 전해온 기밀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소공작님! 찾았습니다! 발로아 영애님의 흔적을 찾았습니다!”바실리안이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핏빛 눈동자가 미친 듯이 일렁였다.“어디냐?”“영애님의 블론드 헤어가 흔하지 않은지라, 마차를 몰던 마부들이 그 화려한 머리카락 색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애께서 수레와 마차를 여러 차례 갈아타며 흔적을 지우려 하셨으나, 갈아타신 관문 지역마다 수소문하여 추적한 끝에 마침내 최종 목적지를 밝혀냈습니다!”집사는 숨을 헐떡이며 지도의 한 곳을 짚었다. 수도에서 까마득히 멀어진 제국 외곽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마지막 마차가 도달한 곳은… 남부 바닷가 근처의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바닷가 근처 마을.
44.신전에서 차갑게 뒤돌아서서 저택으로 돌아온 바실리안은 지친 몸을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이미 아그네샤의 달콤했던 체향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텅 빈 곳이었지만, 그녀가 시간 대부분을 보냈던 침대에 가만히 누웠다.요즘 그는 집무실이 아닌 이곳 침실과 정원의 가제보 소파에서 대부분의 밤과 낮을 보내고 있었다. 그곳만이 유일하게 아그네샤의 흔적이 잔상처럼 남아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어디로 간 걸까. 밥은 제때 잘 챙겨 먹고 있는 걸까…….’고귀하고 유복하게 자란 공녀였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온 그녀가 홀로 세상 밖으로 나가 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미칠 듯이 걱정되었다.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하고 어여쁜 그녀를 누군가 험하게 다루지는 않을지, 험한 꼴이나 안 좋은 일을 당한 것은 아닌지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수백 명의 기사를 제국 전역으로 풀었음에도 어째서 그녀의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만약 그녀를 다시 눈앞에 끌어다 놓는다면, 그 매끈하고 가녀린 발목에 단단한 족쇄를 채워서라도 곁에 영원히 가두어 두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두려워하며 도망친 그녀에게 부드럽게 사랑받고 싶다는 상반된 열망과 집착이 머릿속에서 기괴하게 뒤엉켰다.“…샤샤.”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서늘한 정적뿐이었다. 아그네샤가 사라진 후의 시간은 피를 말리듯 더디게만 흘렀다. 정제되지 않은 마력의 폭주는 밤낮없이 바실리안의 육체를 사정없이 괴롭혔고 그
43.아그네샤가 저택을 빠져나가 자취를 감춘 지 어느덧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있었다. 그 일주일은 아셰라드 공작저의 모두에게 피비린내 나는 지옥 그 자체였다. 저택의 주인인 바실리안의 분노는 날이 갈수록 수그러들기는커녕 제국 전체를 짓밟을 기세로 사납게 날뛰고 있었다.“아직도…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고?”집무실의 서늘한 정적을 깨고 떨어진 바실리안의 낮게 깔린 음성에 수색 기사단장과 저스틴의 등줄기로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송, 송구합니다, 소공작님…! 수도를 빠져나가는 모든 관문과 주요 도로를 완벽히 봉쇄하고 인근 영지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으나, 영애께서 마차를 갈아타며 흔적을 철저히 지운 탓에 포위망을 벗어난 것으로 파악됩니다…….”“무능한 것들.”바실리안의 붉은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핏빛 살기에 기사단장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일주일이었다. 그녀가 제 품을 벗어나 어디론가 숨어버린 지 일주일.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녀의 얇은 발목을 쇠사슬로 묶어두지 않은 저 자신을 자책했고 제 밑에서 울부짖으며 신음하던 그 하얀 살결이 눈앞에 환영처럼 아지랑이 쳐 이성을 마비시켰다.피가 바짝바짝 말라붙고 속이 사정없이 문드러져 내렸다. 그녀가 지금 어디서 누구와 있는지, 혹여 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제국을 떠나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지독한 불안감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그를 괴롭히던 마력의 폭주가 찾아왔다.“크윽……!”바실리안이 묵직한 신음을 내뱉으며 제 가슴을 옥죄었다. 체내에 누적된 마력이 정제되지 못한 채 혈관과 마력 회로 속에서 거칠게 엉겨 붙으며 무서운 기세로 날뛰기 시작했다. 엉킨 마력 덩어리가 온몸의 장기를 짓밟고 근육을 사정없이 찢어발기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습격했다.과거에는 수없이 혼자 견뎌냈던 고통이었지만, 이미 아그네샤라는 완벽한 정제제의 온기를 알아버린 육체는 거칠게 엉겨 붙는 마력의 통증을 버텨내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당장이라도 피를 토하고 기절할 것만 같은 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