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와."평소 강태준의 무미건조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은은한 보라색과 호박색 조명이 천장에서 부드럽게 내려앉고,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레트로 게임기와 피규어들.그 옆으로는 색깔별로 단정하게 정리된 책장과, 안쪽 깊숙이 놓인 가죽 리클라이너 한 대.먼지 한 톨 없이 정갈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여기, 진짜 팀장님이 좋아하시는 거 다 모아 두신 거구나."루다가 작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태준은 그녀의 한 걸음 뒤에서, 평소답지 않은 조용한 미소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이루다 씨.""네?""이 방에 정식으로 누군가를 들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루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정말로요?""사실 친구가 한 명 있긴 한데, 들인 게 아니라 비밀번호를 알고 알아서 침입하는 겁니다. 물론 남자입니다."쩔쩔매는 태준의 모습에 루다가 결국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팀장님답네요."웃음 끝에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그 짧은 정적 안에서,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쳐져 있던 어떤 견고한 막 하나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루다는 자연스럽게 게임기 진열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벽면 가득 놓인 컬렉션.패미컴, 슈퍼 패미컴, 메가 드라이브, 닌텐도 64.그리고 각각에 어울리는 컨트롤러와 카트리지들이 라벨까지 단정하게 붙여진 채 완벽한 오와 열을 맞추고 있었다.루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어?"루다가 진열장 가까이 다가가 한쪽 칸을 유심히 응시했다.투명한 케이스 안에는 익숙한 모양의 닌텐도 64 본체와, 그 위에 곱게 놓인 카트리지들이 있었다.너무나 익숙한 보존 상태.본체 모서리의 아주 작은 흠집과, 컨트롤러 선에 희미하게 남은 스티커 끈끈이 자국까지.루다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태준을 돌아보았다."이거…… 제가 팔았던 그거 맞죠?"태준이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그렇습니다.""
토요일 오전 11시.평소라면 한 주를 정리하며, 다음 주 계획과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 태준은 그러지 못했다.신사동 골목 안쪽, 인동이 잡아둔 한적한 카페.마주 앉은 인동이 평소의 장난기를 싹 지운 채, 두꺼운 노트와 만년필을 꺼내 들고 있었다."자, 강파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짜자. 마음 단단히 먹어.""…….""내가 너 같은 케이스를 한두 번 본 게 아니야.""한번 무너지면 다 무너져.""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단계가 핵심이다, 차근차근 해보자고."태준이 안경을 한 번 치켜올렸다.평소엔 자신이 시나리오의 전문가였는데, 오늘만큼은 그야말로 P의 화신인 인동이 모든 판을 지휘하고 있었다."좋다. 어떤 스텝으로 가는 거지?""총 5단계.""너무 적으면 충격을 받고, 너무 많으면 피로해져.""다섯 단계가 딱 황금비율이야."인동이 노트를 펼쳐 굵게 줄을 그었다."1단계."태준이 시선을 노트로 내렸다."먼저 네 사적인 공간을 공개해.""너희 집 말이야. 지금껏 한 번도 데려간 적 없지?""……한번 있기는 한데, 정식으로 초대한 건 아니었어.""그러면 정식으로 초대하고, 네가 평소에 진짜로 어떻게 사는지 보여줘.""첫인상이 한 번 묵직하게 박혀야 다음 단계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너무 빨리 드러내면 그쪽이 진짜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기겁할지도 몰라.""…….""2단계. 너의 사적인 차, 시계, 옷.""회사용 위장막 말고 진짜 네 일상의 것들을 서서히 노출해.""평범한 회사원이 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시각적으로 먼저 익숙해지게 만드는 거지."만년필이 종이 위를 사각거렸다."3단계. 이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야.""가족 이야기를 꺼내.""처음부터 '재벌 3세'라고 까지는 절대 마.""'집안이 좀 복잡하다', '아버지가 사업하신다' 정도로 정보를 조각조각 흘려.""4단계.""본가 방문이나 가족과의 식사.""진짜 현실과 직접 마주하게 하는 거다.""……그리고 마지막 5단계."인동
금요일 오전 9시.마케팅 1팀 사무실에는 어제 폭심지를 함께 경험한 동맹 네 사람의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차유진 책임은 어제와 다름없는 완벽한 칼정장 차림이었다.다만 평소보다 10분 일찍 출근해서, 괜히 책상 위를 세번이나 반복해서 닦고 있었다.그리고 김민호 사원은, 평소의 헐렁한 후드티 같은 복장 대신 위아래로 완벽하게 각을 잡은 짙은 네이비 수트를 빼입고 출근했다.심지어 머리에는 왁스까지 발라 깔끔하게 포마드로 빗어 넘긴 폼이, 멀리서 봐도 '나 오늘 중대 발표 합니다'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했다.루다는 그 두 사람의 비장한 뒷모습을 흘긋 바라보며 키보드 위에서 손을 멈췄다.'후, 오늘 드디어...'그때, 키보드 옆 스마트폰에서 사내 메신저 알림이 조용히 떴다.[강태준 팀장: 차유진 책임이 오전 중 공개 선언 예정입니다. 1팀 인원의 적절한 호응 유도와 사후 케어 부탁드립니다.]루다는 답장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렸다.자신의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손끝이 떨려왔다.오전 10시.월말 정산으로 바쁜 타자 소리만 울리던 와중, 차유진 책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사무실 한가운데로 나서며 가볍게 헛기침을 하자, 키보드 소리가 일제히 멎었다."잠시만 시간 좀 빌리겠습니다."유진의 목소리에는 어젯밤 카페에서 봤던 떨림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어딘지 모르게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그녀가 옆자리의 민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민호 씨, 일어나요."수트를 쫙 빼입은 민호가 뻣뻣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긴장한 탓에 바지 재봉선을 꽉 쥔 두 손은 땀에 젖어 있었지만, 시선만큼은 흔들리지 않은 채 유진을 향해 있었다.유진이 깊이 숨을 고르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저, 차유진은…… 김민호 사원과 사귀고 있습니다."순간, 사무실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듯한 정적이 흘렀다."만난 지 두 달째고요.""어젯밤 회식 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일부 분들께 먼저 알려진 점, 송구하게 생각합니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우대갈비 한쪽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차유진 책임이었다.천장을 뚫고 승천하던 영혼을 강제 회수한 그녀가, 침착하게 민호의 양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민호 씨, 술 너무 많이 마셨네요.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책임님 어제도 저랑 전화하셨잖아여…….""민호 씨.""왜 자꾸 안 그런 척하시는 거예요오……."유진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는 소리가, 루다에게는 또렷이 들렸다.서은호 수석의 동공이 팝핀 댄스를 추기 시작했고, 주변 팀원들의 귀가 일제히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안 돼! 여기서 걸리면 다 끝장이야!'순간, 루다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쭉 뻗어 맞은편에 앉은 태준의 정강이를 퍽! 하고 걷어찼다."흑……!"갑작스러운 타격에 태준의 무테안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루다는 눈으로 미친 듯이 모스 부호처럼 깜빡이며 입모양으로 뻐끔거렸다.'빨리! 뭐라도 해봐요!'그 절박한 SOS를 순식간에 해독한 태준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그리고 평소 회의실에서 기획안을 반려할 때보다 훨씬 더 서늘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비상 상황입니다."테이블에 쏠려 있던 시선이 일제히 태준에게 집중되었다."방금 본사 서버 모니터링 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픈 예정인 팝업스토어 사전 예약 페이지 트래픽에 치명적인 에러가 발생했습니다.""네?! 에러요?!""지금 당장 실무진의 수동 복구가 필요합니다. 이루다 대리, 노트북 챙기십시오."태준의 시선이 유진을 향했다.유진 역시 그 기가 막힌 임기응변을 0.1초 만에 파악하고는 칼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1팀 협업 라인도 즉시 합류하겠습니다. 김민호 사원, 일어나세요.""어어? 저, 저도 갈까요 팀장님?"서은호 수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나려 하자, 태준이 단호하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서 수석님은 여기 남아주십시오.""네? 저는 왜요?""본부장님을 전담 마크하여 이 자리를 끝까지 사수하는 것
다시 평범한 회사의 일상이 돌아왔다. 화요일 아침 사무실에서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깍듯한 '팀장'과 '팀원'으로 돌아가 있었다. 태준은 평소처럼 루다의 기획안 품의를 빨간 펜으로 난도질했고, 루다는 평소처럼 깨지면서도 묵묵히 수정본을 올렸다. 다만 반려 사유 끝에 '단, 3페이지 도입부 방향성은 우수함'이라는 한 줄이 슬쩍 붙어 있었다. 회사에서 그가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애정 표현이었다.수요일 오후.이날도 루다의 기획안을 어김없이 반려당했다."타깃 분석에 근거가 부족합니다. 재검토."평소와 다를 바 없는 반려였지만, 루다는 더 이상 예전처럼 어깨가 움츠러들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철저히 남남처럼, 그러나 그 남남 사이를 흐르는 온도만큼은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으니까. 다만, 그 미묘한 온도를 자꾸만 곁눈질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야, 이루다." 오후 무렵, 최지원 대리가 슬쩍 의자를 굴려 다가와 속삭였다. "너 요즘 강 팀장님한테 안 까이는 날이 없는데, 표정은 왜 이렇게 좋냐?" "음……까여도 월급은 나오니까?" 루다가 능청을 떨자 지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의심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지만, 결정적 증거 또한 잡히지 않은 루다였다. 바로 그때, 사무실에 청천벽력 같은 공지가 떨어졌다. "내일 저녁, 마케팅 본부 전체 회식 있겠습니다. 6시 30분, 강남 '우대갈비'입니다. 본부장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자리이니, 전원 참석입니다." 태준의 건조한 한마디에 사무실이 술렁였다. 마케팅 본부 전체 회식. 1팀, 2팀, 기획팀까지 수십 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자리였다. 게다가 평소 코빼기도 안 비치던 본부장이 직접 마련한 자리라니. "우대갈비?! 본부장님이 웬일이래?" 서은호 수석이 신난 목소리로 최지원 대리에게 물었다. 회식이라면 일단 좋아하고 보는 인간이었다. "이번에 1분기 본부 실적이 굉장히 좋았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거 때문 아닐까요?" "아 진짜? 이야 그럼 내년에 성과급 좀 기대해
낭만적인 밤은 계산서가 나오기 전까지였다.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선 두 사람이 카운터로 향했다.루다가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려 하자, 태준이 한발 앞서 손을 들었다."제가 하겠습니다.""매번 팀장님께서 사주셨는데,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아닙니다. 데이트 신청은 제가 했으니까요. 다음에 기회를 드리겠습니다."태준의 반대에 루다가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14만 5천 원입니다."직원의 안내에 태준이 지갑을 펼쳤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양초 불빛 아래에서 몽글몽글하게 녹아 있던 그의 중앙제어장치가, 바로 그 순간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평소 회사 직원들과 함께 있을 때 쓰던 평범한 신용카드. 그 옆에 무심코 꽂혀 있던, 지난달 본가에 들렀다 무심코 챙겨 나온 카드 한 장.태준의 손가락이, 하필이면 후자를 집어 들었다.매트한 광택을 머금은, 묵직한 무게감의 새까만 카드. 한도 무제한, 최상위 0.1%만이 발급받을 수 있다는 그 물건이 직원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카드를 받아 든 직원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그 짧은 머뭇거림이, 영수증을 받으려 다가오던 루다의 시선을 정확히 그 카드로 끌어당겼다."어? 팀장님!"루다의 부름에 태준은 자신이 카드를 잘못 꺼냈음을 알아차렸다.태준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식은땀 한 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그 카드……."태준의 중앙제어장치가 비상 경보를 울리며 풀가동되기 시작했다."얼마 전에 인터넷 기사에서 봤는데."루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연회비만 수천만 원이라는, 그 재벌들 전용 카드랑 똑같이 생겼네요?"방금 전까지 '어설프더라도 진짜인 사람이 좋다'는 루다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긴 그 심장이, 입으로 튀어 나올 듯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조금 전 식사를 마칠 무렵 인동과의 통화는 종료되었고 무선 이어폰은 이미 꺼져 있었다. 위기의 순간 태준을 구해줄 아군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아…… 이건."태준의 반응이 찰나동안 멈추는
화요일 점심시간.루다는 모니터 옆에 핸드폰을 세워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쇼핑몰 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는 그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원피스? 아니면 투피스? 아, 강쥐님이 나를 어떤 이미지로 생각하실까. 예쁘게 보이고 싶은데…….’도저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루다는 결국 옆자리에서 서류를 검토 중인 태준을 향해 바퀴 달린 의자를 드르륵 끌고 다가갔다."저기, 팀장님.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자문을 좀 구해도 될까요?"태준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지금 점심시간입니다만, 업무 관련입니까.""아
월요일 아침, 마케팅 1팀 사무실.출근하는 직원들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곳으로 쏠렸다. 바로 지난 금요일, 분노의 질주와 블록버스터급 '공주님 안기'를 선보이며 사라졌던 강태준 팀장의 자리였다."팀장님, 오늘따라 유독…… 본체 광택이 남다르십니다?"서은호 수석이 능글맞게 말을 걸었지만, 태준은 모니터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본체 광택이라니. 세차라도 한 줄 아십니까. 그냥…… 주말에 충분한 수면을 취해서 안색이 밝아진 것뿐입니다."태준은 평소처럼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중앙
"으음……."루다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코끝을 스치는 건 퀴퀴한 병원 소독약 냄새가 아니라,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편백나무 향이었다.초점이 흐릿하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눈앞에 보이는 건 드라마 속 재벌 회장님들이나 쓸 법한 어마어마하게 넓고 화려한 1인 특실이었다. 심지어 침대 매트리스는 구름 위에 누운 것처럼 푹신했다.'여기 어디지? 천국인가? 나 사무실 아니었나...?'루다가 멍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움직이지 마십시오."병실 한구석, 최고급 가죽 소파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태준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태준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루다가 보낸 메시지를 수십 번도 더 읽고 또 읽었다. '이루다 대리도 에반게리온에 관심이 있는 건가? 혹시 그녀도 숨겨진 동류인 건가?'태준은 신중하게, 아주 조심스럽게 햇살강쥐로서 답장을 보냈다.[햇살강쥐 : 공주님, 팀장님이 부르신 노래가 혹시 어떤 노래였어요~?][루다공주 : 신세기 에반게리온이었어요!! 정말 멋있었어요!][햇살강쥐 : '신세기 에반게리온'이요? 훌륭한 취향이네요. 공주님도 혹시 메카닉 장르나 생체 병기물에 관심이 많으신 편인가요?][루다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