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시윤은 오후 내내 잠을 자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거실로 내려왔다. 서지혁이 퇴근했을 시간인데 집 안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흔한 가정부 한 명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하시윤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그곳에도 서지혁은 없었다. 대신 아직 잠들어 있는 서정우의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았다.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가정부가 그녀를 보고는 속삭이듯 설명했다.“방금 도련님이 잠시 깨서 놀다가 다시 잠들었어요.”하시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깜짝 놀랐네요. 별일 없어서 다행이에요.”가정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걱정 마세요.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저희가 바로 보고드렸을 거예요.”마음속에 걱정거리를 가득 안은 채 하시윤은 잠시 아이 곁에 서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이번에는 거실에 사람이 보였다. 서인준이었다.그는 하시윤을 보자마자 곧바로 상황을 설명했다.“형 오늘 저녁에 식사 자리가 있어서 좀 늦을 거예요.”하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떼려는데 그가 말을 가로챘다.“아빠랑 엄마도 다들 일이 있으신지 아주 늦을 거라네요.”그러더니 그는 덧붙여 물었다.“할머니는 계속 방에서 안 나오셨죠?”하시윤은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짐작으로 대답했다.“아마 그럴 거예요.”“그럴 줄 알았어.”서인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방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주방에는 오늘 저녁 다들 밖에서 먹을 거니까 준비하지 말라고 해뒀어요.”그가 불쑥 제안했다.“형수님, 저랑 같이 나가실래요?”하시윤이 당황하며 되물었다.“우리 둘이요?”“집에 사람도 없잖아요.”서인준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바람이나 좀 쐬러 가죠. 가실 거죠?”방금 큰일을 겪은 터라 하시윤은 선뜻 내키지 않았다.“그냥 관둘래요. 솔직히 좀 무서워서요.”서인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걱정 마세요. 어제 그건 일부러 낸 사고였잖아요. 지금 경찰 조사가 한창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이 타이밍에 또 건드리겠어요?”
한효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래도 서인준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그만해.”그녀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그만 좀 떠들어. 머리가 울려서 못 살겠다.”실제로 그녀의 안색은 눈에 띄게 파리해져 있었다. 꾀병이 아니라 정말로 두통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밖에서 대기하던 가정부는 옆에서 한효진을 며칠 동안 모셔 왔던지라 그녀의 성미를 눈치채고 얼른 들어와 부축했다.한효진은 기다렸다는 듯 입맛이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에 가서 쉬어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발걸음을 옮겼다.속에서 불이 치미는데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으니 애꿎은 서인준만 타박했다. 아까부터 내려오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내려왔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서인준은 곧바로 웃으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제 잘못이에요, 할머니.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안 올라갈게요.”그는 상체를 돌려 한효진이 나가는 모습부터 계단 입구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뒷모습까지 줄곧 시선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할머니, 푹 쉬세요! 저희는 이따가 바로 출근할 거니까 방해 안 할게요!”한효진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서인준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가볍게 말했다.“자, 이제 우리끼리 편하게 식사하죠.”그 뒤로는 줄곧 무거운 침묵이 식탁을 지배했다.식사를 마친 뒤 서지혁과 서인준은 다시 회사로 향했다.주차장까지 그들을 배웅하던 하시윤은 참다못해 서지혁을 불러 세웠다.“정말로 고의로 낸 사고라는 거야?”“글쎄, 경찰서에 가서 직접 확인해 봐야 알 것 같아.”하시윤의 얼굴에 불안함이 스쳤다.“만약 정말로 작정하고 낸 사고라면 타깃이 나였을까?”하시윤을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서지혁이 다정하게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그가 확신에 찬 목소리
서경민이 한효진의 방에서 나왔을 때, 마침 하시윤도 서정우를 데리고 3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새로 갈아입은 옷 덕분인지 안색이 한결 생기 있어 보였다.아이를 안고 있던 가정부가 서경민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서경민은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았다.“정우야.”그는 곁에 서 있는 하시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서경민이 말을 섞을 기미가 없으니 하시윤 역시 굳이 먼저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서정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할아버지, 안녕하세요.”“오늘 몸 상태는 좀 어떠니?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 자신에게 묻는 말이라고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결국 옆에 있던 가정부가 대신 입을 열었다.“아침 일찍 체온을 쟀는데 정상이었어요. 오늘 컨디션도 아주 좋아 보이네요.”서경민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다행이구나.”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가정부가 조심스레 물었다.“식사하고 가시겠어요?”서경민은 대꾸도 없이 성큼성큼 대문을 나섰다. 민망해진 가정부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집 밖으로 나온 하시윤은 뒷마당 쪽으로 향했다. 금붕어들이 노니는 연못 대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산책을 시작했다.서씨 가문의 뒷마당은 꽤 넓었다. 2층짜리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하나는 가정부들의 숙소였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는 별채였다.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고는 해도 꾸준히 관리를 한 덕에 건물이 낡아 보이거나 흉물스럽지는 않았다.하지만 하시윤이 건물의 정면에 다다랐을 때, 기묘한 광경에 발길을 멈췄다. 별채 1층의 출입문과 창문이 하나도 빠짐없이 판자로 빽빽하게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건물 옆으로 조잡한 철제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것은 2층 테라스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하시윤은 의아한 듯 물었다.“1층은 아예 안 쓰는 건가요? 왜 저렇게 꽁꽁 막아둔 거예요?”곁에 있던 가정부가 대답했다.“예전에
서재를 나서는 서지혁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굳어 있었다.하지만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순식간에 모든 감정을 지워버렸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하시윤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살며시 문을 열고 안을 살피니 그녀는 이미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별 탈은 없어 보였다.그는 한참 동안 그녀의 잠든 얼굴을 지켜본 뒤에야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뜻밖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뱉었다.“앞으로는 방 비울 때 문이라도 잠가야겠네.”서인준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서재 갔다 오는 거야?”서지혁은 대꾸 없이 갈아입을 옷을 챙기러 향했다. 서인준이 다시 물었다.“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별거 아니야.”서지혁이 무심하게 답했다.“심씨 가문에 대해 좀 물어봤어. 오늘 거기 다녀오셨다기에 무슨 말이 오갔나 싶어서.”“그래서, 뭐라셔?”서인준이 다그치듯 묻자 서지혁이 말을 이었다.“중요한 건 없었어. 심연정 몸이 안 좋은 건 순전히 자기 문제라고 했대.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진 않았나 봐.”서인준은 형을 가만히 응시하며 몇 초간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정말 그게 다야?”“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어?”말을 마친 서지혁이 아차 싶은 듯 덧붙였다.“아, 오늘 밤에 있었던 교통사고 말하는 거라면 아빠한테는 입도 뻥긋 안 했어. 말해봤자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까.”그는 욕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됐으니까 너도 이만 가서 자. 시간 늦었다.”“형.”서인준이 그를 불러 세웠다.“나한테 숨기는 거 없지?”“내가 너한테 숨길 게 뭐가 있어.”서지혁의 말투는 담담했다. 서인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형의 뒤를 쫓아갔다.“형이 나한테 숨기는 게 아주 많은 것 같아. 형뿐만 아니라 식구들 전부 다 나만 빼고 뭔가를 감추고 있는 기분이야.”그는 욕실 문틀에 몸을 기대며 씁쓸하게 덧붙였다.“이런 기분, 진짜 별로거든.”칫솔에 치약을 짜던
본가로 돌아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새로 보충된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아까 서경민의 발길질에 박살 났던 테이블은 이미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장식장과 대형 화분 역시 원래 자리에 채워져 있었다. 자잘한 소품들까지는 다 채우지 못했으나 굵직한 가구들이 자리를 잡으니 거실은 언제 난장판이었냐는 듯 말끔한 모습이었다.청소를 막 끝낸 가정부가 밖으로 나가려다 일행을 보고 멈춰 섰다. 서인준이 물었다.“다들 집에 계세요?”가정부는 그렇다며 모두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고 전했다. 서인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지혁과 하시윤을 돌아보며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우리도 이만 쉬죠.”그는 다시 하시윤을 살피며 덧붙였다.“혹시라도 어디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말해요.”하시윤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세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하시윤은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려던 찰나 방문이 열리더니 서지혁이 들어왔다. 놀란 하시윤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할 말이라도 있어?”“아니.”서지혁이 낮게 대답했다.“그냥 좀 보러 왔어.”그는 다시금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정말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지?”사고에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시윤은 그를 안심시키려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진짜 괜찮아. 걱정 마. 조금이라도 이상했으면 벌써 말했을 거야.”서지혁은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그냥 자. 나 여기 좀만 앉아 있다가 너 잠드는 거 보고 갈게. 눈앞에 없으면 도저히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하시윤은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자리에 누웠다.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녀는 몇 분 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지혁은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을 때까지 한참을 지켜본 뒤에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발길이 향한 곳은 서경민의 서재였다.넓은 서재 한쪽 벽면은 책으로 가득했고, 다른 쪽 선반에는 온갖 트로피와 상패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
충돌 직전 급브레이크를 밟았는지 정면으로 들이받았음에도 충격이 아주 파괴적이지는 않았다.여기에 서지혁의 차가 워낙 견고한 덕도 컸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차체가 앞뒤로 크게 울렁였을 뿐, 다행히 전복될 정도의 대형 사고로 번지지는 않았다.서지혁은 찰나의 순간 브레이크를 끝까지 밟아 차를 세우는 동시에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하시윤을 감싸 안았다. 혹시라도 유리창이 터져 파편이 튀지 않을까 싶어 그녀를 제 품 안으로 완전히 숨겼다.하시윤은 그 짧은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쥔 채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뒷좌석의 서인준 역시 제 몸 하나 돌볼 겨를도 없었다. 그는 앞좌석 사이의 좁은 틈으로 상체를 들이밀며 이미 하시윤을 안고 있는 서지혁의 등 위로 팔을 뻗어 두 사람을 동시에 보호하려 애썼다.다행히 유리는 무사했고 거칠게 흔들리던 차체도 이내 멈춰 섰다.가장 먼저 팔을 푼 건 서인준이었다. 그는 창밖 상황을 살피더니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네.”서지혁도 그제야 하시윤을 품에서 놓아주며 다급하게 물었다.“어디 부딪친 데 없어? 몸 괜찮아?”배를 꼭 움켜쥐고 제 몸을 살피던 하시윤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멀쩡해.”그제야 서지혁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량 파손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헤드라이트가 깨지고 트렁크 쪽이 찌그러졌을 뿐이었다.서인준은 차가 멈추자마자 먼저 내려 곧장 뒤쪽에 있는 차로 다가가더니 한 손으로 문을 확 열어젖히고 운전기사를 그대로 끌어냈다.운전기사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낡아빠진 승합차에서 끌려 내려온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하루 종일 배달 일을 하느라 너무 졸려서 순간적으로 액셀을 브레이크로 착각했다는 구차한 변명과 사과를 쏟아냈다.하지만 서인준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중년의 멱살을 잡아채 차 앞으로 질질 끌고 갔다.그는 찌그러진 차 트렁크를 가리키며 서슬 퍼런 분노를 터뜨렸다.“이 안에 임산부 타고 있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