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신생 뱀파이어들로 작은 소란이 있었던 루비 아워를 지율은 천천히 둘러본 뒤 앞치마를 벗으며 해일을 불렀다.
“해일 형.”
해일은 헬멧을 의자에 걸쳐두고 막 혈청 커피 한 모금을 마시던 참이었다.
커피잔을 내려 놓으며 지율을 바라보자 지율의 표정은 평소보다 진지했다.
그 모습을 천천히 뜯어보며 해일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지율을 응시하며 물었다.
“왜?”
지율은 카운터에 팔꿈치를 올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폐하 만나면... 상황 잘 설명해야 해. 증거도 있고 형 말이라면 믿어주시겠지만, 그렇다고 인간 사회나 우리 사회에 피해가 생기면 안 되잖아.”
해일은 지율의 말을 들으며 잠시 침묵했다. 평소엔 능청스럽고 장난도 잘 치지만— ‘왕’ 이야기만 나오면 어깨에 얹힌 보이지 않는 무게가 느껴졌다.
“....알지.”
해일이 짧게 대답했다.
그의 짧은 대답 속에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율은 불안한 듯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인간 사냥꾼들이 점점 대범해지고 있고, 우리 존재를 인식 못하던 인간들도... 눈치채는 건 한순간이야.”
지율의 말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위기였다.
해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심판자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요즘 인간 사냥꾼들은 예전처럼 숨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하지만 대범하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들어내기 시작했고, 사냥 본능에 취해 스스로를 ‘상위 포식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들은 신생 뱀파이어를 이용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있었다.
강제로 감염시키고, 통제하고, 교육해 새로운 군단을 만드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런 애들이 늘어나면....”
지율은 컵을 닦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우리 구역의 안전도 보장 못 해. 인간 사회와 뱀파이어 사회의 균형도 깨질 거야.”
해일은 그런 지율을 진지하게 바라보다가 잔을 내려놓고 낮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고 목소리는 으르렁 거리는 것 같았다.
“정부에서도 상황 예의 주시 중이고, 인간 헌터들도 요즘 평소보다 더 빡세게 움직이고 있어.”
해일은 헬멧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지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겠지. 인간 사회도 비상 걸렸으니까... 형이 중간에서 고생 좀 하겠네.”
해일은 그런 지율을 보며 특유의 자신감으로 활짝 웃었다. 얼굴에서 ‘걱정 붙들어 매’라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걱정하지 마! 나 조해일이야~ 임마!!”
그는 엄지를 세우며 덧붙였다.
“폐하도 말했잖아. 여러 안전 지역들 중에서도 ‘우리 지역이 가장 안정적’이라고. 이번 일? 잘 해결될 거야.”
지율은 해일의 그런 든든한 웃음에 조금은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여전히 불안했다.
해일은 강하고 책임감도 넘치지만— 그만큼 한번 위험에 몸을 던지면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었다.
“...형이 능력 좋은 뱀파이어인 건 알지.”
지율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근데...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오늘처럼 예상 못한 일이 생기면—”
그때 해일이 툭, 지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온기와 힘이 동시에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걱정하지 마.”
해일은 씩, 자신만의 방식으로 웃었다.
“우리에게는 나보다 더 막나가는 은재가 있잖아.”
멀리서 혈청 커피를 마시던 은재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형, 지금 나 디스하는거야? 엉~?? 지율 형~ 나 이렇게 산다~!”
지율은 피식 웃었다. 해일은 한탄하는 은재를 보다가 다시 해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율아. 걱정은 하지 말고 장사나 열심히 해. 여긴 네가 지키고, 밖의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리고는 헬멧을 들어 손에 단단히 쥔 뒤, 문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
그 뒷 모습은 마치 모든 악당은 물리치겠다는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딸랑— 문 위의 작은 종이 울렸다. 해일은 밤거리로 나서며 잠시 뒤돌아보았다.
루비빛 카페의 따뜻한 불빛. 그것이 그가 지켜야 할 ‘안전 지대’, 그리고 그의 가족이었다.
“다녀올게.”
그리고 해일은 위험과 정치, 폭풍이 기다리고 있는 왕의 궁정으로 향해 사라졌다.
뱀파이어들의 고위 관리들이 모여 있는 장소. 대한민국에서도 극비 중의 극비로 분류된 구역.
일반 인간들은 존재조차 알 수 없으며, 그곳은 울창한 숲과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숨어 있는 고딕풍의 건물 한 채— 겉보기에는 오래된 문화재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는 국방부보다 더 철저한 보안을 자랑했다.
이곳이 바로, 뱀파이어들의 왕 이현명이 머무는 궁정이었다.
이곳에서는 때때로 인간 헌터들이 출입해 회의를 진행했고, 심판자들이 배신자 뱀파이어를 대려와 직접 판결을 다는 곳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뱀파이어 사회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였다.
그런 곳에서— 뱀파이어들의 왕 이현명은 지금 커다란 골칫거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하아....”
그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신생 뱀파이어 사고. 인간 헌터들이 보내 온 산더미 같은 보고서들.... 그리고, 인간 사냥꾼들의 조직적인 움직임.
무엇보다 가장 안전 지대라고 자부했던 카페 루비 아워로 이런 위험한 존재들이 들어간 것. 이현명은 보고서를 읽으며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심판자 박해일.... 신생을 선제처단.”
문장 아래에는 인간 헌터들이 적은 잔소리 섞인 의견서가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멋대로 처단함.”
“조사 절차 생략됨.”
“박해일 심판자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음.”
이현명은 한 번 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해일이 또 인간 헌터들에게 잔소리 들었겠군....... 참, 그놈도 문제야. 능력은 좋은데 앞뒤가 없어.”
이현명은 이미 고위 관리들과 함께 인간 헌터들이 가져 온 산더미 같은 보고서와 카페 루비 아워에서 가져 온 CCTV까지 다 보았고, 해일의 업무 순서 무시에 관련하여 항의 섞인 한탄을 들어야만 했다.
“폐하, 저희는 오늘도 야근을 해야 합니다...”
인간 헌터는 책상 위에 쌓인 보고서 더미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거 보이시죠? 심판자님이 사건을 축소해서 조용히 끝낼 수 있었던 사건을 키웠습니다~! 제발... 오냐오냐 하지 마시고 혼쭐도 좀 내주세요. 일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뱀파이어 고위 관리가 “크흠... 흠! 크흠!!!” 하고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쏟아냈다.
헌터에게 ‘조금 조심하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하지만 인간 헌터들은 전혀 눈치 보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들은 인간 세계에서도 별종 취급받는 용맹한 자들이었고— 눈치 볼 성격이었으면 헌터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희도 절차대로 일하고 싶어요. 근데 박해일 심판자님은... 그게 안 되잖아요. 맨날 ‘급해서 미안~’ 이러고 끝!”
관리들이 난감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왕 이현명은 의자에서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알겠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오늘 해일 심판자를 만나면... 잘 타이르고, 절차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도록 하겠네.”
인간 헌터는 그제야 숨을 내쉬며 말았다.
“....정말 부탁드립니다, 폐하. 안 그러면 저희는 매일 야근합니다....”
왕은 그 말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고위 관리들은 ‘폐하께서 웃으셨다!’며 순간 굳었지만,
인간 헌터들에게는 익숙한 풍경 이었다.
“이제 돌아가서 일들 보게. 이 뒷 수숩은 내가 하도록 하지. 조만간 인간 대통령과도 통화 함세.”
헌터들은 깊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그들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회의실의 공기는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왕 이현명은 기어이 한숨을 내쉬었다.
“해일아....... 널 어찌 해야 하는 것이냐...”
왕의 한탄하는 목소리에 관리들은 하나 둘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폐하. 이번 기회에 해일 심판자 좀 혼 내십시오.”
“이번 일은 잘 마무리 되었다고 하나 독단적이었습니다.”
“폐하!! 절차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 대통령에게는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관리들의 볼멘 소리에 이현명은 손을 들어 그들의 잔소리를 멈추게 했다.
“그만... 그만....”
이현명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대들도 알고 있지만 혜일 심판자는 능력이 좋은 뱀파이어네. 그가 없었으면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겠지.”
그 말에는 질책과 애정,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모두 섞여 있었다. 그때— 문 밖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박해일 심판자께서 오셨습니다.”
이현명은 그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들라 하라!”
궁정 전체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밖에서 대기하던 해일은 자신의 왕이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오랜만에 듣고 몸이 짧게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은 왕에게 총애를 받는 존재였다.
잠시 잔소리는 듣겠지만 애교 좀 부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해일은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권좌에 앉아 있는 왕 앞으로 다가가 멈췄다.
그리고 정확히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심판자 박해일, 들었습니다.”
공기가 고요하게 흔들렸다.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낮고 차분했고, 진심으로 왕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었다.
이현명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해일을 그 누구보다 아끼는 그였지만 오늘 만큼은 혼쭐을 내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문이 열리고 덩치가 큰 그를 그저 말없이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현명의 눈빛은 마치 어떻게 혼내면 아주 잘 혼냈다는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 듯 했다.
해일은 마른 침을 삼키며 자신의 왕을 올려다 보았다.
지우는 순간 뒷걸음질을 했다.지율의 단호한 행동과 무서운 표정이 그녀를 더 얼어붙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무서움 때문이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주저 앉은 지우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서러움에 더 어깨를 들썩이며 얼굴을 숙이는 그녀를 지율은 무표정하게 내려다 볼 뿐이었다.지율은 그동안 뱀파이어들의 정체가 인간 사회에 들어나지 않도록 노력 해왔고, 자칫 자신들의 정체가 들어나는 순간 오랜 시간 쌓아 올린 모든 균형이 무너질 수 있었다.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인간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며 살아왔다.루비 아워에서 마주하는 인간들 역시 직원들이거나,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극히 제한된 이들뿐이었다.그런데 지우가 그 깨져서는 안 되는 불가침의 선을 넘었다.지우가 자신의 정체를 몰랐다는 사실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그녀는 상처받은 감정 하나에 휘둘려 익명 게시판에 지율의 이름을 언급했고, 그의 거절을 이유로 루비 아워의 이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지율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지우씨.”지율은 낮게 숨을 고르며 그녀의 어깨에 시선을 떨구었다.“얼굴 들어서.... 날 봐요. 내가 진짜 인간처럼 보이나요?”그의 목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지율의 눈동자가 천천히 변했다.평소에는 따뜻한 갈색을 띠던 눈빛이 피처럼 붉게 번져 올라갔고, 얇게 감춰져 있던 송곳니가 길고 뾰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지우는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던 것을 멈추고 지율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순간— 그녀의 다리가 풀리듯 힘이 빠지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술은 파랗게 떨리고, 숨은 끊어질 듯 가쁘게 들이켜졌다.“하... 하아... 하.... 저...
지우는 방 밖에서 들리는 웅성 거림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 보았다.“엄마, 누구야?”등 뒤에서 들리는 딸의 목소리에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지우야! 방에 들어가 있어! 나오지말고 얌전히 기다려!”복도에서는 인터폰을 타고 들리는 모녀의 대화 소리에 요원들은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어머니!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저희 요구를 계속 거부하는 경우 문을 강제 개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지우는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엄마, 뭐야? 뭔데!!!”그 순간, 현관문 스마트키가 부서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아!!! 열게요!! 열게요!!”지우의 어머니는 공포에 휩싸여 손이 떨리며, 정신을 다잡으려 하다가 결국 현관문을 급히 열었다.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정부 요원들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검은 정장과 군복 차림의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배치되어, 지우의 앞을 가로막았다.“이지우 씨 되시죠?”“네... 그..런데요?”지우는 겁을 먹은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고 답을 하자 상대 남자는 날카로운 눈을 더 치켜 떴다.“저희는 정부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저희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지우는 순간 얼어붙었다.자신 앞에 서서 신분증을 내밀며 ‘동행’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마주한 지우는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잠.... 잠깐요. 무슨... 무슨 일인데요?”
지우가 루비 아워를 그만둔 지 일주일이 지났다.아무리 머릿속을 뒤집어도 자신이 지율에게 들었던 이야기들과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 그 근본적인 이유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그리고, 이솔에게 느꼈던 질투심, 그리고 지율에게 자신의 마음이 거절당했다는 절망감이 한데 뒤엉켜 버린 탓이었다.그 감정들이 조금씩 부패하듯 마음속 깊이 스며들면서, 지우는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루비 아워를 떠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그날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어디에도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속앓이만 계속하던 지우는, 결국 자신이 주로 눈팅만 하던 익명 게시판을 떠올렸다.그곳이라면, 얼굴도 이름도 드러내지 않은 채 마음속 깊이 쌓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익명이라는 그림자 뒤에 숨으면 누군가에게 위로 한마디쯤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결국 결심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익명으로 털어놓기로. 그러나 그 선택이, 지우에게 있어 최악의 한 수가 될지는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지우는 익명 게시판의 작성 칸을 열어놓고 잠시 손가락을 멈춘 채 숨을 골랐다.하지만 한 번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그는 **‘루비 아워’**라는 상호명과 지율의 실명을 적어 넣으며, 자신이 겪었다고 믿는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했다.지율에게 느꼈던 그리움, 사랑 고백이 거절되던 순간의 절망감, 그리고 이솔에 대한 복잡한 질투까지.... 마치 누군가에게라도 꼭 알아주길 바라는 듯, 지우는 기억 속 감정들을 빠짐없이 글로 적었다.“내가 사장님만 바라보면서 루비 아워에 쏟은 정성이 얼만데....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지우는 이성적인 판단을 전혀 할 수 없
지우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지율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해일과 은재는 그를 위로하며 고생하고 있는 그 시간..... 이솔은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었다.이솔은 버스 창문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햇빛은 유리에 부딪혀 눈부신 반짝임을 만들고, 도심은 점점 멀어지며 산과 들이 펼쳐지고 있었다.“또 여행을 가도 되는 걸까....”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곧 작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돌아가면 더 열심히 하면 되지.”지난 휴가 때 우연히 보았던 강릉의 바다는 아직도 선명했다.거센 파도 대신 잔잔하고, 바람도 부드러워 마음을 편하게 해주던 그 순간.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다시 찾아갈 이유가 있었다.이번 여행을 다녀오면 해일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훨씬 선명해질 거라 믿으며, 이솔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환하게 웃었다.강릉 터미널에 도착한 이솔은 바로 택시를 타고 바로 바다로 향했다.그동안 고민으로 답답했던 마음은 바다를 보면 해결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이솔은 강릉의 바다를 보며 자신의 모든 고민들을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버린 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자고 마음 먹었다.루비 아워에서 근무를 시작 후 몇 년동안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여행을 해본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보며 해일에 대한 생각도 해보았다.루비 아워로 돌아가면 자신은 해일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예전의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보는 것이 가능할까.... 고민을 해보았다.해일이 자신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강릉으로 오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또렷하게 깨달았다.그가 보내온 작은 신호들, 가까워지려는 눈빛과 말투... 뒤늦게 떠올려보니 모두 의미가 있었다.그리고 이솔은
지우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심장만이 요동쳤다.‘출근을 하지 말라니?’순간 머릿 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율을 바라보았다.“사장님....?” 목소리가 떨렸지만, 끝내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지율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시선을 돌렸다.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그 냉정함이 지우의 마음을 더 깊이 찔렀다.지우는 입을 달싹거렸지만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지율을 보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말씀드린 대로 오늘 퇴근하세요. 그리고... 다시 출근할 일은 없을 겁니다.”지우는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처를 껴안은 채, 단호하게 자신을 밀어내는 지율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사장님... 오늘은 정말 죄송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직원 휴게실로 들어가 자신의 사물함을 열어 가방을 챙겨 나왔다.지율에게는 목례만 한 채, 무겁게 발걸음을 옮겨 루비 아워를 나섰다.밖으로 나오자마자 지우는 코너를 돌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마음속 울분과 상실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눈물이 쏟아졌다. 발걸음도 채 가뿐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결국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지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비 아워 매니저 자리가 앞으로 2주 동안 비게 된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마음속으로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지만, 일단 현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루비 아워 문이 열리고 인간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하기 시작했다.평소와 달리 김매니저가 아닌 지율이 있는 모습을 보고, 직원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지우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루비 아워 문을 밀었다.차가운 아침 공기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매장 안에서,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지난 밤 정리해둔 생각들을 다시 떠올렸다. 어제 내내, 마음 한편이 뒤죽박죽이었다.짜증, 섭섭함,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조금의 질투까지.하지만 감정만을 앞세워 말을 꺼내면, 오히려 더 어린 티만 날 것 같았다.정확하게. 침착하게. 버벅거리지 말고. 지우는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뇌었다.지율 앞에 서면 늘 마음이 괜히 조급해지고 목소리도 이상하게 높아졌지만, 오늘만큼은 그러면 안 됐다.그는 사장이고, 자신은 직원이다. 그리고 자신의 불만과 감정은 분명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문제였다.지우는 직원 휴게실 안 자신의 사물함 앞에 서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좋아.... 오늘은 꼭 제대로 말하자.’루비 아워 매장 한켠에는 지율이 늘 그랬듯, 퇴근 전 매니저에게 꼼꼼히 인수인계를 정리해 둔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지우는 직원 휴게실 문 밖으로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살폈다.심장이 괜히 조금 빨리 뛰었다.오늘은 꼭 말해야 해. 흔들리지 말자. 문을 밀고 나간 순간, 지율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지우 씨, 인수인계해야 하니까 이쪽으로 와요.”그 목소리는 따뜻했고, 말끝은 다정하게 내려앉았다.딱 그 한마디에 지우는 숨이 잠깐 멎은 것 같았다.가슴이 간질거리고, 눈길을 피하고 싶을 만큼 떨렸다.하지만—오늘만큼은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됐다. 지우는 황홀함에 휘말릴 뻔한 자신을 다잡으며 머릿속의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그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