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모든 뱀파이어들이 그렇듯 밤에 힘이나고 낮에는 힘이 없다.
하은재 역시 항상 밤에 힘이 났고, 밤이 깊어질수록 집중력은 날카로워지고, 모니터의 빛은 마치 달빛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책상에 놓여있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잔 속의 붉은 루비 블렌드가 마지막 남은 카페인처럼 은은히 흔들렸다.
“역시 밤이 최고야. 피 대신 혈청커피, 사냥 대신 코딩.”
그가 루비 블렌드를 한 모금 마실 때, 창문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비쳤다.
하늘이 점점 푸르스름하게 물들고 있었다.
“자~! 여러분, 벌써 해가 뜨고 있네요. 퇴근합시다.”
하은재가 손을 들어 팀원들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 대신 묘한 뿌듯함이 섞여 있었다.
팀원들은 각자의 모니터에 떠 있는 코드를 저장하고, ‘업무 종료’ 버튼을 누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마우스 클릭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사무실의 불빛이 하나씩 꺼져갔다.
누군가는 혈청 팩을 정리했고, 누군가는 머그잔을 씻으며 하품을 했다.
“오늘도 순조로웠네요.”
“버그 한 마리 안 물리고 끝났네.”
짧은 농담이 오갔고, 모두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들이 사무실을 나서자, 복도 끝 창문 밖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붉은 빛이 천천히 비쳤지만, 그들에게 그건 따뜻함이 아니라 퇴근 신호등이었다.
하은재는 커피잔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중얼거렸다.
“해가 뜨면 인간들이 시작하고, 해가 지면 우리가 이어간다. 이게 진짜 24시간 근무지.”
그는 웃으며 모니터를 껐다. 그리고 문을 나서며 덧붙였다.
“오늘도 잘 버텼다, 나 자신.”
은재는 오늘 밤도 열심히 일한 자신에게 짧은 칭찬을 건네며 가방을 챙겼다.
팀원들 모두 힘들었던 밤을 보낸 후 비척이며 짐을 챙겨 서로에게 간단한 인사만 남긴 후 사무실을 급하게 떠나기 시작했다.
은재 역시 어서 집으로 가서 쉬어야 겠다는 생각뿐이었고, 회사 밖으로 나와 새벽의 첫 햇살이 번지는 거리를 걸으며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인간들은 모른다.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가는 뱀파이어들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다.
뱀파이어 사회와 인간 사회는 서로의 구역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침범하면 안되기때문이었다.
뱀파이어들이 낯 시간에도 인간들과 어울릴 수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들은 더 이상 해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에도, 환한 햇빛 아래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그들 곁을 지나간다.
밤을 살아가는 뱀파이어라도 낮에는 인간처럼 잠이 필요했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뿐, 피로는 피로였다.
은재의 하루는 단순했다.
회사에서 밤을 꼬박 새운 다음 날엔 재택 근무를 하고, 재택 근무 후 다음날은 회사에 출근해서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
‘오늘은 사무실에서 일했으니 낯에 잠깐 쉬고 저녁에 바로 루비 아워로 가면 되겠다...’
길을 걸으며 하루 일과를 정리하는 은재의 표정은 피로한 직장인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재택 근무를 하는 하루는 은재에게 아주 좋은 날이었다.
혈청커피도 원하는 만큼 마실 수 있었고, 사무실에서는 알 수 없는 다양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택 근무의 대부분은 루비 아워에서 이뤄졌다.
지율이 운영하는 그 카페는, 뱀파이어들에게는 안식처이자 은재에게는 두 번째 작업실이었다.
“집에 가서 쉬자...”
은재는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걸어서 출퇴근을 해야했다.
아무리 사냥 본능을 누르고 있다고 해도 인간들 옆에 오래 있으면 피 냄새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 특성상 몸은 피곤한 것을 못 느끼지만 정신적 피곤함은 어쩔 수 없다고 느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루비 아워 근처에 다다르자, 유리창 너머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은재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안을 들여다봤다. 지율은 인간 매니저인 이솔과 함께 매출 정산표와 재고 물품 등을 확인하며 인수인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은재는 익숙한 듯 미소를 지으며 문을 밀었다.
문 위의 작은 종이 ‘딸랑’ 하고 울렸다.
“형, 일은 끝난 거야?”
그의 말에 지율이 고개를 들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은재 왔어? 나 잠깐 인수인계만 하고 퇴근할 거니까 잠깐만 기다릴 수 있어? 같이 가자.”
지율은 김매니저에게 인수인계를 하며 은재를 잠시 바라보았다.
다크서클이 광대를 넘어 턱까지 내려오기 직전이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단정하고 잘생겼다.
지율은 그런 은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은재야, 얼굴 상태 심각한데?”
은재는 그 말에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찡그렸다.
“왜, 내 얼굴이 그렇게 쓰레기 같아?”
그의 인상은 순식간에 구겨졌다. 자신의 외모에는 꽤 자신이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지율과 옆에서 인수인계를 받고 있던 이솔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쓰레기 같다고 표현한 은재의 얼굴은 웬만한 아이돌 보다 더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잘생기셨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솔의 말에 은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미간의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그 모습에 지율은 더 크게 웃었다.
“됐어, 됐어. 그런 표정이 더 웃기다니까.”
“왜!! 지금 내 표정이 어떤데!! 김매니져 나 그렇게 웃겨?”
은재의 다그침에 이솔이 난처한 듯 표정을 굳히자 지율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때, 카페 문이 ‘딸랑’ 소리와 함께 열렸다.
“여기 다 모여 있었네? 김매니저~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아?”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와 함께 해일이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이솔은 해일의 인사에 반갑게 화답하며 그녀의 시선이 은재와 지율, 그리고 해일을 오갔다.
매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만 세 남자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다들 잘 생겼단 말이지.... 이 뱀파이어들은 하나같이 다 사기급들이야.’
이솔은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보통의 인간들 중 뱀파이어들이 인간 사회 속에 섞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
인간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은 뱀파이어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자신처럼 안전 구역에서 거주하며 뱀파이어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비밀을 공유할 수 밖에 없었다.
이솔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율이 그녀의 어깨를 ‘톡톡’하고 건드렸다.
“아! 네.. 사장님!!”
“이솔씨, 지난 저녁에 대한 인수인계는 끝났어요. 오늘 잘 부탁해요.”
“네! 사장님!”
지율과 이솔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거울 앞에서 은재가 진지하게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해일이 그 모습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야, 하은재. 지금 뭐하냐?”
“형, 내 얼굴 좀 봐봐. 이상해?”
“이상하지. 아주~ 아주~ 이상해....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는데? 거의 좀비야.”
“뭐라고?! 좀비??? 어디서 그런 것들과 날 비교해??!!!”
은재가 인상을 구기자, 해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는 뱀파이어가 아니라 이제 언데드야, 언데드.”
지율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카페 안 공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지율은 김매니저와의 인수인계를 마무리한 뒤, 거울 앞에서 투닥거리고 있는 두 뱀파이어에게 다가갔다.
“이봐, 두 분. 뱀파이어님들~ 이제 퇴근하실까요?”
그의 말투에는 피곤함보다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은재와 해일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지율을 바라봤다.
“그래~ 가자! 형!!”
“야, 지율아 너도 이녀석 얼굴 좀 봐봐. 진짜 웃기지 않냐? 나 이녀석 좀 더 놀리고 가면 안되냐?”
해일의 말에 은재가 즉시 인상을 구겼다.
“해일 형..... 내 얼굴 평가할 여유가 많은가보지?”
지율은 한숨을 쉬며 웃었다.
“아직 해 뜨기 전인데, 벌써 피 터지게 싸울 기세네.”
지율은 두 뱀파이어의 등을 가볍게 밀며 문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안쪽의 이솔을 향해 머쓱하게 웃었다.
“이솔씨, 시끄럽게 해서 미안해요. 오늘 수고하고~ 저녁 여덟 시에 봅시다!”
이솔을 향해 친절한 미소로 대답한 지율은 다시 은재와 해일을 향해 외쳤다.
“이봐들, 거기서 밍기적거리지 말고 빨리 가서 쉬자! 좀!!”
은재가 투덜거리며 뒤돌아봤다.
“형이 밀어놓고 뭐래....”
해일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율아. 너 괜찮냐? 너는 꼭 피곤하면 말이 거칠어진다니까.”
지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형 때문에 더 피곤해. 얼른 집으로 가자. 계속 이러면 진짜 쫓아낼 거야. 나 건물주야, 형~”
그 말에 해일은 ‘쳇’ 하고 혀를 찼다.
“건물주면 다냐....”
그러면서도 결국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지율은 그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그들이 함께 사는 그 집— 지율이 몇 세기 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오래된 건물이었다.
재개발과 리모델링을 거쳐 항상 트랜디한 외관과 집안 인테리어며.... 지율의 손길이 많이 묻어있었다.
루비 아워를 중심으로 하는 안전 구역은 지율이 일본으로부터 해방 이후 매입한 땅이었고, 인간 정부의 도움으로 뱀파이어들이 모여 거주할 수 있도록 개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율이 가지고 있던 많은 땅들은 개발지역으로 승인이 나면서 엄청난 부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고, 안전 구역을 개발할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을은 서울의 외딴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자연스럽게 인간들과 안전 구역의 뱀파이어들은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부는 이 마을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이상할 만큼 간섭하지 않았다.
이곳의 뱀파이어들은 인간을 해치지 않았고, 뱀파이어 헌터들조차 이 구역만큼은 조용히 지나쳤다.
그곳은 일종의 중립지대, 밤과 낮이 공존하는 작은 평화였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뱀파이어가 존재했다. 자신의 사냥 본능을 억누르고 인간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자들, 그리고 본능을 제어하지 못한 채 인간을 사냥하는 자들.
후자의 존재는 곧 헌터들의 출현을 불러왔다.
헌터들은 인간 사회를 지키기 위해 룰을 어기고 인간을 사냥하는 뱀파이어들을 사냥했고, 그들에게 붙잡힌 뱀파이어들은 결국 동족의 손에 의해 소멸되었다.
이렇게 룰을 어기고 헌터들에게 붙잡힌 뱀파이어들은 심판자라는 동족 뱀파이어들에 의해 소멸이 되는데 그것은 평화를 위한 최후의 수단이자 사회를 공포로 물들이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다.
안전 구역에 거주하는 뱀파이어들은 모두 평화를 선택한 뱀파이어들이었고 이들의 피 속에 흐르는 사냥 본능은 각자의 위치에서 다스리는 방법을 몇 백년 동안 다스리고 잠재우고 있었다.
지율은 루비 아워라는 카페에서 커피 향을 느끼고 친절한 사장님으로 칭찬을 받는 것으로, 해일은 오토바이를 운전하며 자유를 만끽하거나 심판자로서 일을 하고 은재는 오류가 난 코드들을 수정하고 개발하며 사냥 본능을 해소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해일과 지율, 은재는 이미 떠오는 해를 보며 정말 수고했다고 서로를 다독였다.
카페 루비 아워에서 매니저로 근무 중인 이솔은 요즘 상당히 난감했다.몇 년 동안 루비 아워에서 주간에 근무하면서 인간 손님들을 상대하는 이솔은 가장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누고 농담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뱀파이어는 지율 뿐이었다.지율은 언제나 밝고 친절하게 인사했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누구보다 부드러웠다.그래서 이솔 역시 자연스럽게 지율의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반면 해일과 은재는—말 그대로 가끔. 일 년에 몇 번 볼까 말까 한 뱀파이어들이었고, 그마저도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다.특히 해일은 근처 건물에 사는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과는 전혀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아주 가끔 마주치는게 다였다.평소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오히려 신비로울 정도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이솔이 출근할 때, 루비 아워 출입문 앞에 서서 담배를 피고 있다거나, 이솔이 퇴근할 때, 지율과 함께 퇴근한다며 찾아 왔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까지도 그냥 타이밍이 겹쳤나 싶었다.그런데....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카페 앞, 주차장 입구, 심지어 분리 수거를 하기 위해 쓰레기장으로 향할 때 조차 해일이 있었다. 심지어....“아, 이솔씨.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이솔은 마치 심장 깊숙한 곳을 누군가 건드린 것처럼 툭 하고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심장이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이솔은 순간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에게 수고했다며 인사를 건네는 해일을 바라보았다.해일은 예전처럼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도 아니고, 정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해일은 잠시 멈칫하며 은재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평소 무뚝뚝하고 냉정한 그의 표정과는 다른, 어딘가 당황스러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평소 무뚝뚝한 표정의 해일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에 오히여 은재가 더 당황했다.당황해하는 은재를 보며 해일은 헛기침을 했다.“아니.... 뭐.... 큼!! 뱀파이어도 갱년기 올 수 있나? 아무튼!!!”해일은 오늘 루비 아워에서 환생한 자신의 아내를 만날 생각에 상당히 들뜬 상태였다. 그래서, 은재의 어이없어하는 반응도 이해가 갔다.“해일형..... 오늘 이상해? 응?”해일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지체 할 수 없었기에 어서 은재와 함께 루비 아워로 가야했다. 그녀가 퇴근 하기 전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은재야. 내가 나중에 진짜 다~~~ 말해줄테니까 어서 가자!!!”은재는 정말 나중에 모든 비밀을 알게 되면 그때 온 우주의 기운을 빌어 놀려주겠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짐을 챙겨 루비 아워로 향했다.루비 아워에 도착해 안을 들여다 보자 이미 지율은 출근을 해서 이솔과 함께 인수인계 중이었고, 인간 직원들도 퇴근 전 마감을 위해 정리 중인 것이 보였다.해일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자신의 아내가 루비 아워 안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 옛날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기 전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병간호를 하느라 힘들어하던 아내였지만 지금은 생기가 넘쳐흘렀다.감정이 그대로 들어나는 얼굴로 루비 아워 안을 들여다보는 해일을 지켜보던 은재는 대충 감이 오기 시작했다.오랜 시간 그의 곁에서 지켜 본 바로 저 표정과 몸짓은 환생한 아내를 바라보는 것이었다.루비 아워에 해일의 환생한 아내가 있다는 것에 조금은 놀란
이현명은 잠시 해일을 바라본 뒤, 자신이 전달받은 보고서를 조심스럽게 건넸다.“해일 심판자, 이리 와서 이 보고서를 확인해 보게. 그대의 환생한 아내의 신상이 적혀 있네.”해일은 떨리는 손으로 보고서를 받아들였다.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의 몸을 차갑게 스며드는 전율이 휘감았다.오래 묵혀둔 죄책감과 집념, 그리고 이제 막 드러난 진실이 한꺼번에 몰려와, 심장은 말 그대로 얼어붙는 듯했다.“폐하... 이게... 진짜입니까?”해일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지만, 그 눈빛은 보고서의 내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오랜 세월을 환생한 아내를 찾았고 멀리서만 지켜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던 해일이었다.그래서, 이번에는 그녀와 자신의 시간이 겹쳐 만날 수 있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이현명은 해일을 내려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맞네. 몇 번이나 확인해보았지만, 그 사람이 틀림없네.”해일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러움을 느꼈다. 손끝이 떨리고, 이미 멈춰버린 심장이 다시 살아난 듯 박동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폐하..... 지율 형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해일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지만, 보고서 속 진실을 확인하고 싶은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지율은 모르네.”이현명은 잠시 숨을 고르고, 한숨처럼 낮게 이어 말했다.“알았다면 이미 그대에게 말했을 걸세. 그 사람은 지금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청년이야.”해일은 잠시 보고서를 내려다보며, 환생한 아내가 자신 바로 앞에 있었고 그것도 모른채 있었다는 사실에 혐오를 느낄 지경이었다.이
사형수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은 단 하나였다."살려주세요......“하지만 은재는 그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분명 그가 죽어가던 소녀에게도 살려 달라는 애원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외면했다.그래서일까. 이제 와 제 목숨을 구걸하는 그 목소리는 은재에게 헛웃음조차 아까울 만큼 공허하게 들렸다.순간, 은재는 주저 없이 사형수의 목덜미로 얼굴을 파묻었다.이빨이 피부를 찢고 들어가자, 목 깊숙이 숨은 급소가 강하게 떨렸다.은재가 단번에 물기 위해선 목뼈와 경동맥, 주변의 연골을 한 번에 으깨야 했다.짧은 파열음과 함께 피가 뜨겁게 분출했고, 은재는 그 붉은 흐름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사형수는 그렇게 마지막을 맞이했다. 은재는 깊게 들이쉰 숨을 내쉬며 피 묻은 손을 털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이어 안전 지대로 몸을 옮긴 그는 맞은편 관찰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뒤, 첫 번째 사형수 때와 동일하게 의사가 공식적인 사망 판정을 내렸다. 교도관들이 들것을 밀고 들어와 차갑게 식은 시신을 조심스레 실어 나갔고,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들것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이 남았다.이로써 두 번째 사형 집행이 끝났다. 은재는 작은 숨을 내쉬며 머릿속을 스치는 혼란을 정리했다.혼란스럽고 사냥 본능으로 어지러웠던 머리가 조금씩 가라앉으며, 그의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지고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그 후로 또 세 명의 사형수들이 은재의 손에 의해 차례로 숨을 거두었다.다섯 명 모두의 사형이 마무리되자, 혹여라도 신생 뱀파이어로 되살아나는 일을 막기 위해 마지막 절차가 진행되었다.의료진이 물러나자 은재는 직접 사형수들의 심장을 확인했다
은재는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그는 사형수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고, 냉혹하게 목의 급소를 물어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사형수는 저항할 틈조차 없었다.사형 집행 하루 전..........교도관은 사형수 다섯 명을 각각 독립된 방에 모아, 사형 집행 방식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었다.“너희가 다음 날 경험하게 될 것은... 뱀파이어가 직접 목의 급소를 물어 사형을 집행하는 방식이다.”그 말을 들었을 때 사형수들은 믿지 않았다. 사형이란 것이 보통 인간식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었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사형수라는 이름만 있을 뿐 집행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그래서, 자신들은 20년 정도만 교도소에 있으면 가석방 자격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었다.그런데, 뱀파이어라니..... 자신들은 뱀파이어라는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았다.뱀파이어라는 존재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만나던 존재아니었었나.....사형수들은 즉각 반발하기 시작했다.“한국은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교도관님 세상에 뱀파이어가 어디있습니까?”“이런식으로 저희 겁주지 마십시오. 교도관님.”믿지 못하겠다는 듯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사형수들을 바라보는 교도관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믿지 못하겠다면 믿지마라. 다만 한가지 사실은 너희들은 내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는 것이다.”사형수들은 교도관의 말에 몸을 굳혔다. 내일이면 자신들은 죽게된다. 그것도 존재의 유무도 모를 뱀파이어에 의해서 말이다.........그리고 현재 첫 번째 사형수가 사형 집행실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이 보고
은재는 최근 들어 스스로도 놀랄 만큼 불안정했다.신생 뱀파이어를 사냥한 이후 사냥 본능은 겨우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제어를 잃어 해일에게 피해를 줄 뻔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가슴 한가운데 박혀 있었다.그 생각만 떠올라도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다.“하... 진짜....”괜히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그래서 은재는 요 며칠 동안 해일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었다. 해일이 먼저 챙겨주고, 먼저 다가오고, 늘 조용하지만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주던 사람이란 걸 너무 잘 알기에... 더 미안했다.그 앞에 서면 죄책감이 도리어 더 커졌다.회사에 출근해 모니터 앞에 앉아 코딩 작업을 해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화면 속 코드가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자신의 이런 고민이 무색하게 해일이 사무실 문을 열며 아무렇지 않게 “배달왔습니다!!”라고 하며 자신에게 커피를 내어 주며 표정까지 읽어내는 해일에게 자신은 영원히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번 주말은 은재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한 날이었다.인간 사형수들의 사형 집행이 예정된 날.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사형 집행관’으로서 죄수들을 사냥해야 했다.오랜 시간 반복되어 온 역할이지만, 지금의 은재에게 그것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사냥을 하면 사냥 본능의 주기가 다시 안정기에 들어가고, 그 안정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일상에서 더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특히— 해일에게 피해를 줄 뻔했던 그 일을 떠올리면, 이번 사형 집행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은재는 책상 앞에 앉아 혈청 커피를 천천히 들이켰다. 따끈한 혈청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그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