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보통의 인간들은 뱀파이어에 대해 오해하는 것들이 있다.
뱀파이어가 해빛에 노출이 되면 소멸 된다는 것.
뱀파이어는 낮 시간에도 충분히 활동이 가능했다.
다만 썬크림을 충분히 가리고 한 여름에는 피부에 트러블이 생기지 않도록 긴팔을 착용해야만 했다.
다만 뱀파이어에게 가장 큰 문제는 ‘피의 본능’이었다.
인간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하는 것을 알고 있고 지키며 살아가야 하지만 낮에 인간들과 섞여 있다 보면 무심결에 본능이 고개를 들 때가 있었다.
그 한순간의 유혹이..... ‘사냥’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에, 뱀파이어 사회는 오랜 협약 끝에
스스로 규칙을 만들었다.
인간은 낮에 일하고, 뱀파이어는 밤에 일한다.
인간들과 공존하며 뱀파이어의 존재가 들키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규칙이었다.
그래서, 은재가 일하고 있는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대한민국 굴지의 IT회사 블러드앤코드(㈜Blood & Code)는 자연스럽게 야간조와 주간조로 나뉘어 있었다.
인간 직원들은 “야간 팀은 수당 많이 받겠다~”며 부러워했고, 회사 내부 게시판에는 이런 댓글이 달려 있었다.
“야간조 애들, 진짜 피곤하지 않나?”
“그래도 야근 수당 많이 받아서 정말 좋겠다~”
“야간조 월급 많이 받는거 빼면 볼 거 없던데 ㅋㅋ”
그들은 몰랐다. 그 ‘야간조’가 실제로는 진짜 밤의 존재들이라는 걸.
하은재는 그곳에서 일하는 야간조 개발자 뱀파이어였다.
그의 팀은 모두 뱀파이어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자 코드 대신 혈류 데이터를 다루는 천재들이었다.
밤새도록 깨어 있는 건 기본, 카페인과 혈청이 섞인 커피를 수혈하듯 마시며 새벽까지 프로젝트를 돌렸다.
“피보다 진한 건.... 데드라인이지.”
그의 모니터 속엔 수십 개의 코드 창이 떠 있었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그림자처럼 짙었고, 커피잔엔 루비 아워의 붉은 거품이 남아 있었다.
“커피 배달한 게 언젠데, 이 형은 아직도 깜깜무소식일까?”
하은재는 모니터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화면에는 수십 줄의 코드가 깜빡이고 있었고, 그의 손끝은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굴지의 IT회사 블러드앤코드의 야간조 개발자.
밤새 서버를 지키는, 피보다 진한 카페인으로 살아가는 뱀파이어였다.
조금만 더 늦으면 전화해서 닥달이라도 할까 고민하던 그때—
회사 현관 밖에서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은재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들어 밖을 바라보았다.
IT회사의 보안 특성상 직원의 허락이 있어야 외부인이 출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해일은 벨을 눌렀다.
“네.... 블러드앤코드입니다. 누구십니까?”
신원 확인을 하는 직원의 목소리에 해일은 목적을 전달했다.
“하은재 팀장의 커피 배달로 왔습니다. 조해일 뱀파이어입니다.”
해일이 벨 앞에서 자신이 배달을 왔다는 이야기에 직원은 문을 열어 주었다.
“아!! 조해일 심판자님이시군요!!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조해일이 들어섰다. 오토바이 헬멧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엔 테이크아웃 컵을 두 개 들고 있었다.
그의 재킷에는 여전히 피앤치킨 (Pee & Chicken) 로고가 번쩍였다.
은재는 커피를 본 순간, 모니터 속 코드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이어~!! 내 커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해일의 손에서 커피를 낚아챘다.
눈빛은 커피만 향했고, 해일은 그저 공기 취급이었다.
“커피 한 방울이라도 흘린 건 아니지? 형?”
해일은 잠시 말이 막혔다. 이놈의 커피 집착은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됐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은재를 바라보며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야....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하자? 난 네 커피보다 한 200년은 더 봤잖냐?”
은재는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형 얼굴은 내 코드 에러창보다 자주 봐서 신선하지가 않아.”
해일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은재는 이미 커피와 사랑에 빠져 향을 맡으며 황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해일은 ‘우웩’하는 모션을 취했다.
“야... 토나올 것 같아. 그 표정 좀 어떻게 안되냐?”
은재는 눈동자만 굴려 해일을 잠시 째려보았다가 다시 커피로 시선을 돌렸다.
루비 블렌드의 붉은 거품 위로 빛이 반사되며 살짝 흔들렸다.
그의 눈빛은 거의 신앙심에 가까웠다.
“완벽하다.... 혈청 2ml, 카페인 2배. 온도도 딱 60도야. 역시 지율 형이야.”
그 모습을 보던 해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 몇백 년을 봐온 사이인데, 넌 진짜 이해가 안 된다. 피가 아니라 커피에 미쳐서 살 줄은 몰랐지.”
은재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시대가 변했잖아, 형. 요즘은 피보다 카페인이 잘 팔린다니까.”
해일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커피머신 옆의 쓰레기통을 가리켰다.
“야, 근데 너 저번에 마늘빵 배달 시켰다며?”
“응. 맛있더라. 요즘은 면역도 코딩으로 해결해.”
“....진짜 또라이 맞네.”
은재는 소중한 커피를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모니터 불빛만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손끝은 여전히 빠르게 움직였고, 그가 들이킨 루비 블렌드의 향이 천천히 머릿속을 깨웠다.
“하.... 이 향, 진짜 정신이 돌아온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코드 줄 사이로 피처럼 붉은 경고창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조차도 커피 한 모금이면 견딜 만했다.
“해일 형.”
은재는 여전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지율 형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해일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너, 그 말을 직접 해본 적 있냐?”
은재는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직접 말하면 또 ‘서비스 추가요금’ 붙는거 뻔히 알면서 그런다....”
“야, 너 진짜 인간 사회에 너무 잘 적응한 거 아니냐?”
“적응이 아니라.... 생존이지.”
그때, 커피잔에서 살짝 김이 올랐다. 은재는 향을 한 번 더 맡으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버틸 수 있겠네.”
해일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커피에 이렇게 감정이입하는 놈은 처음 봤다.”
해일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돌렸다.
“야, 하은재. 형 간다. 일 열심히 해라.”
헬멧을 손에 들고, 오토바이 키를 돌리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의 표정엔 익숙한 피로감과 약간의 걱정이 섞여 있었다.
은재는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커피잔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응. 그래. 조심히 가고, 나 배웅 못해.”
해일은 어련하시겠냐며 웃으며 은재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하은재는 26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2026년의 지금이 가장 행복했다.
그는 늘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인간이든 뱀파이어든, 진짜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시대다.”
사냥도, 굶주림도, 피의 광기도 없었다.
혈청만으로도 충분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었다.
코드를 짜고, 커피를 마시고, 새벽까지 모니터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퇴근 후 자신을 품어주는 집이 있는 삶이었고, 그게 바로 하은재의 ‘불멸’이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 뱀파이어가 된 날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1757년, 조선 영조 33년. 당시 25살의 은재는 어여쁜 아내와 다섯 명의 아이를 둔 평범한 약초꾼이었다.
매일 새벽 산에 올라 인삼과 약초를 캐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어둠이 그를 덮쳤다.
그것은 짐승이 아니었다.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 존재는 그를 사냥했다. 하지만 완전히 죽이지 못했다.
은재의 목을 물고 피를 빨던 괴물은, 자신의 피를 그에게 흘려보내며 사라졌다.
그리고 은재는 살아남았다.
아니, 괴물로 다시 태어났다.
처음 며칠은 지옥 속에서 괴로워했다.
자신의 가족 바로 앞에 있었지만 곁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피 냄새에 몸이 떨리고,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결국 가족들의 곁에서 도망쳤다.
사람도, 사랑도, 기억도 모두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산속의 생활은 정말 끔찍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호랑이가 나타났고, 범죄자들이 나타났다.
그냥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도망치기 바빴지만 괴물이 되어 다시 태어난 은재는 그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신처럼 괴물어 살아나지 않도록 처음부터 피만을 목적으로 한 살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게 피에 대한 본능으로 방황하는 은재는 그날도 호랑이를 잡아 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피가 범벅인 얼굴을 들어 보니 한 무리의 뱀파이어들이 서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그들은 뱀파이어였지만 피에 굶주려보이지 않았다.
의아해 하며 잠시 바라보자,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사냥은 그만하고 우리랑 같이 가는게 어때? 피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그게 은재와 해일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해일을 만난 은재는 뱀파이어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냥을 하지 않고 안전한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워갈 수 있었다.
결국 피 대신 혈청으로 버티는 방법을 찾아냈고, 자신의 사냥 본능을 누르자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괴물이 아니다. 그냥, 오래 사는 인간일 뿐이다.”
지금의 하은재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커피 향이 피 냄새를 덮는 세상, 밤의 뱀파이어가 회사원으로 사는 시대.
모니터 불빛 아래,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게 내 평화야.”
하은재는 모니터 앞에서 오류가 난 코드를 찾아내고 있었다. 키보드 소리가 일정한 리듬으로 울렸다. ‘딸칵, 딸칵, 딸칵.’
그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눈을 좁히며 버그를 찾아내고, 몇 줄의 코드를 수정하자 화면의 붉은 경고창이 사라졌다.
“좋아, 한 방에 잡혔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루비 블렌드의 향이 천천히 퍼졌다.
그의 주위엔 다섯 명의 야간조 개발자들이 있었다. 모두 뱀파이어였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했다. 말도, 잡담도, 음악도 없었다.
오직 코드와 화면만이 그들의 대화였다.
눈빛은 날카로웠고, 손끝은 인간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커피 대신 혈청 블렌드를 마시며 새벽까지 집중하는 것이 그들의 ‘생활 습관’이었다.
회사에선 이미 소문이 돌았다.
“야간조 애들은 진짜 로봇이라니까.”
“저 팀은 10분이면 버그를 잡아. 인간들이 절대 못 따라가.”
실적표에서도 차이가 뚜렷했다. 인간이 오전에 처리하는 업무량보다 야간 뱀파이어 팀이 세 배는 더 많았다.
그래서 인간 직원들은 늘 말했다.
“야간조는 괴물들이야.”
정답이었다. 그들은 정말 ‘괴물’이었다. 하지만 하은재에게 그건 자부심이었다.
그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효율은 피에서 온다니까.”
팀원 한 명이 살짝 고개를 들고 물었다.
“하 팀장님. 또 커피 주문하실거에요?”
“응. 루비 블렌드 두 잔. 하나는 내 거, 하나는 버그용.”
그 말에 팀원들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 그 짧은 웃음은, 밤의 사무실을 잠시 인간적으로 만들었다.
현목이 뱀파이어 세계의 새로운 황제에 오른 뒤, 매체는 온통 그의 이야기로 가득했다.새로운 황제의 즉위는 세계 뱀파이어 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각국의 언론에서는 현목의 과거와 가족관계, 황제로서의 행보까지 앞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정작 당사자인 현목은 그런 관심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예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고, 처리해야 할 업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그동안 자신을 따라다니며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던 비서는 약속했던 대로 휴가를 떠났다.덕분에 현목은 한동안 혼자서 업무를 처리해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불평하지 않았다.자신이 선택한 자리였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반면....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온 이현명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뱀파이어가 되어버렸다.수백 년 동안 황제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던 그에게 갑자기 주어진 것은 자유였다.하지만 막상 자유를 얻고 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궁을 나온 이현명은 한동안 자신의 차 안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그래서 이제 뭘 하지?’황제였을 때는 하루의 모든 일정이 정해져 있었다.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누군가가 끊임없이 알려주었다.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자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주지 않았다.이현명은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았다.황제로 지내는 동안 받았던 급여는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궁에서 생활하다 보니 식비며 생활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궁에서 알아서 준비해 주었다.그렇게 수백 년 동안 쌓인 돈은 어느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자
시간은 차근 차근 흘러 승계식 당일이 되었다.고위 뱀파이어들이 모이고, 현 뱀파이어 황제인 이현명이 주관하는 아주 큰 행사였다.몇 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현명이 통치해 온 한국의 뱀파이어 세계에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다는 소식은 세계의 뱀파이어 사회에서도 큰 뉴스거리였다.그래서, 승계식이 열리는 행사장은 고위 뱀파이어들과 각국의 뱀파이어 기자들이 모여들었다.그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시현은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준비한 핏물이 가득 고인 스테이크를 준비했고, 현목의 부인이 운영하는 와인바에서는 최고급 와인들이 공급되었다.지율이 운영하는 루비 아워에서는 다양한 혈청 커피가 놓여있었고,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은 행사 진행이 원활하도록 서포트 해주고 있었다.하이브리드 뱀파이어의 등장은 세계 각국의 순혈 뱀파이어들의 또다른 큰 뉴스였다.‘한국에는 순혈 뱀파이어만 있는 것이 아니었군...’‘하이브리드 뱀파이어가 존재하는 것인가?’그 사실만으로도 각국의 기자들에게는 수많은 의문이 생겨났다.자신들의 나라에도 하이브리드 뱀파이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한국의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은 순혈 뱀파이어들과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또한 순혈 중심의 뱀파이어 사회에서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수많은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쏟아지고 있었다.“하윤아 우리 괜찮은거 맞지?”“긴장하지마. 우리가 처신을 잘 해야 세계에 퍼져있는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에게 도움이 될거야.”하이브리드 뱀파이어의 곁에는 지율이 지키며 행사 진행 전반에 걸쳐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지율은 행사장 곳곳을 살피며 하이브리드 뱀파이어들에게 필요한 지시를 내리고, 진행 상황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현목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하며 충분한 행복을 느꼈다.함께 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정원을 거닐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그렇게 가족들과 보내는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며 며칠을 보낸 뒤, 목요일 아침이 되었다.현목은 다시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이번에는 사위인 백도진이 직접 차를 운전했다.두 사람이 함께 차에 올라타자, 조금 전까지의 편안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차 안에는 묘하게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현목이 먼저 입을 열었다.“자네, 그동안 잘해왔겠지만.....”백도진이 룸미러를 통해 현목을 바라보았다.“2주 뒤면 승계식이니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걸세.”“예. 전하. 알고 있습니다.”백도진은 앞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저도 승계식까지는 최대한 업무에 집중할 생각입니다.”“그래야지.”현목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현목이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승계식이 이루어지면.... 자네 장모는 궁으로 모셔오게.”“궁으로 말씀이십니까?”백도진이 의아한 듯 되묻자 현목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궁에는 왕비궁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나.”현목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지금 폐하께서는 혼인을 하지 않으셨으니 왕비궁이 비어 있었지.”“아....”
차를 몰아 궁을 빠져나와 자신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향하는 현목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2주가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궁에 머물며 승계식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황위에 오르는 일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닌 만큼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하지만 이제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현목은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추면서도 입가에 번진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집에 가서 부인이랑 뭐부터 할까.......”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어디에서 어떻게 데이트를 해야 잘 했다고 칭찬을 받을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부인과 함께 시현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까.아니면 오랜만에 느긋하게 루비 아워에서 혈청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까.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옆에 붙어 있을까.생각할수록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아니.”현목이 피식 웃었다.“일단 얼굴부터 봐야겠지.”그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운전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현목은 차량을 주차장에 세운 뒤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굉장한 부촌에 자리 잡은 현목의 집은 넓은 마당을 갖추고 있었다.아내가 좋아하는 텃밭이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각종 나무와 꽃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궁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익숙한 풍경이었다.현목은 마당을 잠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현목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비서는 결국 머리를 쥐어뜯었다.“전하~!!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비서의 절규가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그러자 현목은 한숨을 내쉬며 비서에게 다가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그의 양손을 잡아 얌전히 아해로 내려주었다.“이봐..... 그러다가 머리카락 다 빠지겠어.”“......”비서는 멍하니 현목을 바라보았다.자신의 머리카락을 걱정하는 현목을 바라보며 ‘지금 내 머리카락을 걱정할 때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벙찐 표정으로 잠시 할 말을 잃었다.그러나 이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전하!”팡!“지금 제 가슴이!”팡!“이렇게 답답합니다!”팡!“정말 터질 것 같다고요!!!”비서의 절규에 현목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전하 때문에 걱정하는 겁니다!!”“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나.”“그 말이 제일 불안합니다!!!”비서의 절규가 다시 한번 집무실을 울렸지만 현목은 결국 웃을 수 밖에 없었다.“하하하!”반면 비서는 웃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대체 저분을 어떻게 말려야 하지?’비서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현목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인기척에 현목은 잽싸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표정을 관리했다.“똑, 똑.”“전하, 기자들 도착했습니다.”문밖에서 들려오는 비서의 목소리에 현목은 목시늉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들어오게.”입가에 감돌던 음습한 미소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는 일국의 전하다운 정갈함과 범접할 수 없는 품위만이 매끄럽게 묻어났다.문이 열리며 비서가 들어섰고, 그 뒤로 카메라와 녹음기를 든 기자들이 머뭇거리며 발을 들였다.현목은 책상 위에 정갈하게 정돈된 서류에 손을 가볍게 올려놓은 채, 안경알 너머로 들어오는 이들을 향해 완벽하게 계산된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방금 전 서류에 서명하며 감돌던 기괴한 피로감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맑고 기품 있는 얼굴이었다.“바쁜 발걸음 하느라 고생들 하였소.”현목의 기품 있는 인사에 기자들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으며 셔터를 눌러대기 바빴다.사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가자, 비서가 “큼!” 하고 얕은 헛기침을 던졌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살짝 놀라며 준비된 석상에 급히 자리를 잡았다.“전하, 안녕하십니까.”“바쁘신 와중에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기자들이 저마다 깍듯이 인사를 건네자, 현목은 그 인사를 너그럽게 받아주듯 온화한 미소를 띤 채 그들의 맞은편 상석에 천천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자...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지.”기자는 카메라의 영상 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