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
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
“손 씻고 와. 밥은 됐어.”
“아버지는요?”
“이것만 보고.”
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
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
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
“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
“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
“속까지 간이 들어야지.”
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
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
“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
“네 엄마 하던 거.”
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
◈
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릇이나 가져가.”
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탁을 닦다가 내 앞의 물컵을 채웠다.
“먹어.”
무는 젓가락으로 쉽게 갈라졌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밥을 조금 더 떴다.
아버지가 내 젓가락을 봤다.
“짜냐?”
“조금요.”
아버지도 무를 먹었다. 씹던 입이 멈췄다.
“많이 짜네.”
“물을 더 넣으면 돼요.”
“밥 먹는데 또 끓이게?”
“내일 드실 때요. 두부도 같이 넣고.”
아버지는 무 접시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나는 접시를 가운데로 밀어 두고 두부 위에 무를 얹었다. 잠깐 수저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공장에선 말 못 했는데.”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어디까지 알고 그 사람을 데려온 건지 모르겠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투자 얘기요?”
“그것만이면 여기서 밥 먹자고 안 했지.”
아버지는 나를 보지 않고 물을 마셨다. 컵을 놓을 때 바닥에 물이 조금 묻었다.
“네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나는 식탁 아래에서 손을 폈다. 왼손 검지의 굳은살을 엄지로 누르다가 그만뒀다.
“이헌 씨 좋아해요.”
아버지의 손이 컵에서 떨어졌다.
나는 숟가락 옆에 손을 놓았다.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가 나를 봤다.
“서로 같은 마음이에요.”
“언제부터.”
“약혼한 뒤부터요. 그 전에 처음 만났고요.”
“주원이 만나던 때에?”
“약혼식 전날이었어요.”
아버지는 무 접시를 보다가 내게 눈을 돌렸다.
“호텔에서 주원 씨가 다른 여자랑 객실에 들어가는 걸 봤어요. 그 뒤에 바에 갔고, 거기서 만났어요. 그때는 누군지 몰랐어요.”
“그래서 그 사람한테 마음이 갔다는 거냐?”
“그 일 때문에 좋아하게 됐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니에요.”
아버지가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책을 가지고 있었어요. 등이 찢어져서 제가 먼저 말을 걸었고요. 이름도 안 물었어요.”
“다음 날 알았고?”
“네. 약혼식에서요.”
“그럼 거기서 멈췄어야지.”
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러려고 했어요. 그런데 계속 만났어요. 일 때문에 만나기도 했고, 제가 보고 싶어서 만나기도 했어요.”
“나경아.”
“처음 입 맞춘 것도 저예요.”
아버지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나는 눈을 내리지 않았다.
“이헌 씨가 저한테 약혼을 깨라고 몰아붙인 적 없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도 제가 정했어요.”
◈
아버지는 밥을 몇 번 뒤적이다 숟가락을 놓았다. 그릇에는 절반쯤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이 주원이 삼촌인 건 바뀌지 않는다.”
“알아요.”
“알면서 어떻게 만나.”
“숨기면서 만났어요. 그러면 안 되는 것도 알았고요.”
아버지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주원이는 알아?”
“네.”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회장님 생신 잔치 때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약혼을 하고 있어?”
“주원 씨하고 정리하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얘기만 하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면 어떡하려고.”
“결혼 안 해요. 할 생각 없어요.”
나는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 앞의 밥그릇을 봤다.
“그럼 먼저 끝내야지. 그게 순서잖아.”
“맞아요.”
“맞는 줄 알면서 왜 안 했어.”
“제가 끝내겠다고 말하면 공장에 무슨 일이 생길지 무서웠어요. 아버지가 또 쓰러질까 봐 겁났고요.”
아버지의 손가락이 식탁 위에서 굽었다.
“그걸 네가 왜 다 떠맡아.”
“아버지도 저한테 아무 말씀 안 하셨잖아요. 빚이 얼마인지, 제가 약혼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저도 아버지 걱정하실 거라는 이유로 계속 숨겼어요. 그러다 여기까지 왔고요. 이제는 안 그러려고요.”
아버지는 물컵을 잡았다. 안에 물이 남았는데도 마시지 않았다.
“주원이가 널 붙잡는 거냐?”
“처음에는 그랬어요.”
“지금은?”
“자기가 직접 끝내겠다고 했어요. 그 약속을 어떻게 지킬지 얘기하고 있어요.”
“그 말만 믿고 기다리고 있고?”
“말만 있는 건 아니에요.”
나는 흰 휴대폰에 있던 녹음과 대출 서류 이야기를 꺼냈다. 석진이 서명을 맞추라고 지시했다는 말까지 하자 아버지는 물컵을 내려놓았다.
“그걸 들었어?”
“네. 이헌 씨도 같이 들었어요. 받아 뒀고요.”
“왜 나한테는 안 들려줬어.”
“오늘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아버지가 원하시면 들려드릴게요.”
아버지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가 하지도 않은 빚을 갚겠다고.”
나는 아버지 쪽으로 물병을 밀었다. 아버지는 병을 잡지 않았다.
“따져 볼 거예요. 서류도 그냥 넘기지 않을 거고요.”
“네가 혼자 뭘 어떻게 하려고.”
“혼자 안 해요. 원본 보관해 둔 곳도 있고, 도움받을 사람도 있어요. 그렇지만 제 약혼을 끝내는 건 제가 할 거예요.”
아버지는 식탁에 놓인 내 손을 한동안 봤다.
“작업실에 든 놈들도 그것 때문이냐?”
“누가 시킨 건지는 아직 몰라요. 아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나는 없어진 출력물과 남겨진 종이 이야기도 했다. 다은의 손목 얘기를 할 때 아버지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말을 다 하고 나니 무조림 국물이 식어 있었다. 아버지는 접시 가장자리에 굳은 국물을 숟가락으로 걷어 냈다.
◈
식탁을 치우는 건 같이 했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을 받아 들고 남은 밥을 봤다.
“더 안 먹어?”
“먹었어요.”
“아까부터 얘기하느라 못 먹었잖아.”
“아버지도요.”
아버지는 밥그릇 두 개를 나란히 놓았다. 나는 냄비에 물을 조금 붓고 두부를 넣었다.
“이거 다시 끓여 놓을게요.”
“내가 한다니까.”
“설거지해 주세요. 제가 불 볼게요.”
아버지가 고무장갑을 꼈다. 나는 냄비 앞에 섰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간을 봤다.
뒤에서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그 사람은 너한테 뭘 해 주겠대?”
“약속부터 하지는 않아요.”
“오늘은 공장에 돈 넣겠다고 왔잖아.”
“제가 좋아한다는 말로 투자받으시면 안 돼요. 저 때문에 받아 달라고 하지도 않을 거예요.”
아버지가 수도를 잠갔다.
나는 불을 줄이고 돌아섰다.
“아버지가 거절하셔도 저한테 이헌 씨 만나지 말라고 하신 걸로 생각하지 않을게요. 반대로 투자를 받으셔도 저희를 받아 주셨다고 생각 안 하고요.”
“그렇게 나눠지냐?”
“나눠서 보려고 해야죠.”
아버지는 젖은 손에서 장갑을 벗었다. 손목에 물이 흘렀다. 내가 수건을 내밀자 받아서 닦았다.
“네 엄마가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나는 냄비 뚜껑을 반쯤 덮었다.
“모르겠어요.”
“난 혼났을 거다.”
“아버지 회사 빚 때문에 약혼한 건 맞아요.”
아버지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헌 씨 좋아한 것까지 아버지 때문이라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한 일이에요.”
“내가 널 그 집에 보냈는데.”
“앞으로도 거기 있으라고만 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불을 끄고 냄비를 안쪽으로 밀었다.
“주원 씨하고 정리할 거예요. 그 전에 무슨 얘기가 나와도 저한테 먼저 물어봐 주세요. 제가 직접 대답할게요.”
아버지는 장갑을 싱크대 가장자리에 펴 놓았다.
“오늘 한 말을 내가 금방 받아들일 수는 없어.”
“알아요.”
“네가 그 사람 만난다고 웃으면서 밥 차려 줄 자신도 없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당장 그러시라고 온 건 아니에요.”
◈
가방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는 거실로 나가 식탁에 벗어 둔 돋보기를 집었다.
화면에 이헌의 이름이 떴다.
나는 부엌 문 앞에서 통화 단추를 눌렀다.
“네, 실장님.”
아버지의 손이 돋보기 위에서 잠깐 멎었다.
“식사했어요?”
“네. 아버지랑 먹었어요.”
“손수건은 제가 갖고 온 줄 알았는데 차에 없어서요.”
“제 가방에 있어요.”
나는 가방 바깥 주머니를 열었다. 공장에서 접어 넣은 손수건이 손끝에 닿았다. 말라 있었지만 접힌 안쪽에는 물 자국이 남았다.
문 하나 건너 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지 않았다.
“금요일에 드릴게요.”
“급한 건 아니에요.”
“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지금 같이 계세요?”
“네.”
“제가 할 말이 있으면 갈게요.”
“오늘은 제가 할게요.”
“알겠어요.”
나는 가방 주머니의 단추를 채웠다. 이헌은 전화를 먼저 끊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서류는 더 보실 거예요.”
“기다리겠습니다.”
“손에 붙인 밴드, 젖었으면 바꿔요.”
낮보다 목소리를 줄였다. 거실 쪽에서는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바꿨어요.”
“그럼 내일 연락할게요.”
“네. 집에 갈 때도요.”
나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화면이 꺼진 뒤에야 가방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아버지는 제안서를 다시 식탁 위에 펴 놓았다. 나는 맞은편에 앉았다.
“왜 실장님이라고 불러.”
“아버지 앞이라서요.”
“나 없을 때는?”
나는 가방을 무릎에 놓았다.
“이헌 씨라고 해요.”
아버지는 돋보기를 벗어 서류 위에 놓았다.
“그 사람은 뭐라고 부르는데.”
“제 이름 불러요.”
아버지는 더 묻지 않았다. 나는 가방 끈이 꼬인 곳을 풀었다.
◈
아버지가 식탁에서 일어났다. 나는 빈 물컵을 모아 쟁반에 올렸다.
“금요일에 본가에서 가족 회의 해요.”
아버지는 찬장 앞에서 멈췄다.
“결혼 준비 얘기겠지.”
“네. 부지 얘기도 나올 수 있고요. 서명하라는 거 오면 바로 하지 마세요. 저도 먼저 읽게 해 주세요.”
“이젠 네가 내 서류까지 봐야겠냐.”
“종이에 이상한 데가 있는지는 볼 수 있어요.”
아버지가 찬장 위 제안서를 집어 식탁 서류와 포갰다.
“이건 네가 표시해 놓은 데부터 읽으마.”
나는 쟁반을 내려놓았다.
“모르는 건 같이 물어봐요. 저도 다 아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는 서류 모서리를 맞추다가 손을 멈췄다.
“작업실은 문 고쳤고?”
“네. 다은이는 무거운 거 못 들게 하고 있어요.”
“내일 반장한테 같이 가 보자고 하마. 쓰러진 선반 있으면 세워 주고.”
“아버지 허리도 안 좋잖아요.”
“손목 다친 애보다는 낫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서 있던 곳 옆에는 작은 서랍장이 있었다. 엄마 바느질 도구와 오래된 영수증을 넣어 두던 가구였다.
아버지가 맨 위 칸을 당겼다. 안에 있던 봉투를 옆으로 옮기고 손을 넣었다.
“네 엄마가 남긴 거 있지.”
“도구 상자요?”
아버지는 서랍 안을 보고 있었다.
“작업실에 갖다 놨댔나.”
“네. 잠겨 있어서 그대로 뒀어요.”
나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꺼낸 손 안에서 작은 열쇠가 보였다.
“엄마 상자 열쇠. 내가 갖고 있었다. 무서워서 못 줬다.”
(79화 끝)
『오늘 일정: 11월 4일 화요일, 해윤 이사회』편지를 넣을 보존 봉투를 접었다.마지막 줄의 이헌 이름까지 한 번 더 읽고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작업대에 놓인 주주명부 사본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제 회사 도장을 받아 온 서류였다.다은이 내 가방 옆에 확대경을 놓았다.“이것도 가져가. 서류 본다며.”“오늘은 글자 읽으러 가는 건데.”“작은 글자는 글자 아니냐.”나는 확대경을 천집에 넣었다. 가방 안쪽에는 주식 증서 사본과 오늘 회의 자료가 있었다. 원본은 작업실 서랍에 두고 잠갔다.다은이 내 소매에 붙은 실을 떼었다.“전화 못 받아도 돼. 손님한테는 내가 말할게.”“급한 건 문자 줘.”“알았어. 밥 거르지 말고.”가방을 들자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이헌에게 온 문자였다.『공장에 먼저 와 있어요. 투자 검토 자료만 전달하고 나갈 겁니다.』나는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편지에 적힌 일을 물어볼 때마다 이헌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오늘은 그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끝나고 연락할게요. 회의는 제가 들어갈게요.』답은 내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왔다.『네. 기다릴게요.』◈공장 계단에는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난간을 잡고 올라가자 염 반장이 걸레를 밀고 있었다. 작업복 바지 끝이 젖어 있었다.“밑에서 손 씻고 올라온 놈이 물을 흘렸어. 조심해.”“제가 할게요.”“오늘 여기서 네 일은 이게 아니잖아.”염 반장이 걸레를
『오늘 일정: 11월 1일 토요일, 엄마 상자 열기』열쇠가 반 바퀴쯤 돌다가 멈췄다.나는 힘을 빼고 상자를 식탁 안쪽으로 당겼다. 놋쇠 자물쇠 아래로 가루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행주를 가져오자 빈 접시를 내밀었다.“여기에 놔주세요. 가루부터 볼게요.”“녹슨 거냐?”“먼지예요. 억지로 돌리면 안에서 부러질 수도 있어요.”아버지는 행주를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어제 회의에서 받아 온 일정표가 그 옆에 있었다. 부지 의향서 제출 칸을 펼쳐 놓았지만, 아버지는 상자를 가져온 뒤로 그쪽을 보지 않았다.나는 가방에서 붓을 꺼내 열쇠 구멍을 털었다. 호두나무 뚜껑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모서리가 닳은 자리에 손을 대자 검은 자국이 손톱 아래 묻었다.“이거 어디 두셨어요?”“장롱 아래 칸. 네 엄마 옷 있던 데.”“가끔 꺼내 보셨어요?”아버지가 접시를 조금 밀었다.“꺼내기만 했다.”열쇠를 살짝 들어 돌렸다.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나는 잠금쇠를 빼 접시에 놓았다.아버지 손이 뚜껑 앞으로 왔다가 멎었다.“내가 열어도 되겠니.”나는 상자를 아버지 쪽으로 돌렸다.“네.”뚜껑을 열자 접힌 앞치마가 나왔다. 어깨끈 한쪽에 매듭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듭을 만지지 않고 앞치마 밑에 손을 넣었다. 천에 싸인 도구들이 함께 올라왔다.실패가 먼저 굴렀다. 내가 손바닥으로 막자 아버지가 빈 밥그릇을 가져왔다.“거기 넣어. 떨어지겠다.”그릇 안에 실을 옮겼다. 누런 실 끝이 실패에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이헌의 시선이 내 앞에서 멎었다. 나는 탁자 끝에 둔 젖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들었다.탁자 건너 석진이 금색 손목시계를 봤다.“이유를 물었다.”이헌은 나를 보던 눈을 석진에게 돌렸다.“해윤 부지 건으로 내부 감사를 요청합니다.”석진의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경란은 무릎 위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내 옆의 주원은 의자에 등을 붙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결혼 반대 이유가 감사라고?”“이 결혼을 전제로 부지 관련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절차부터 확인해야 합니다.”“해윤이 빚을 갚지 못해서 협의하는 거다.”“대출이 늘어난 과정과 부지 매각 절차를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회장은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앉아서 해라.”이헌이 앉았다. 내 맞은편에서 비어 있던 의자가 탁자 쪽으로 당겨졌다. 서류철 사이로 이헌의 접은 소매가 보였다.나는 손수건을 탁자 가장자리로 옮겼다. 물을 먹은 모서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그걸 왜 지금 꺼내니.”경란이 이헌을 봤다.“애들 결혼 준비하는 자리잖아. 회사 일은 회사에서 하면 되지.”“방금 형님이 해윤 부지 서류 일정을 결혼 준비에 넣으셨습니다.”석진은 웃으며 앞에 놓인 종이를 넘겼다.“일정이 겹치니 확인한 거야. 결혼식 전에 복잡한 일 끝내 주겠다는 뜻이고.”“누구에게 복잡한 일입니까.&rdqu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