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
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
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
“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
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어요?”
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
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
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
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
◈
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
“늦진 않았구나. 앉아.”
“안녕하세요.”
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
“아비는 좀 어떠냐.”
“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
“그래야지.”
회장은 내 얼굴을 보고 서류철 쪽으로 눈을 내렸다. 나는 경란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주원은 내 오른쪽, 이헌은 맞은편이었다.
탁자 하나가 가운데 있었다.
나는 가방을 의자 옆에 걸고 안주머니가 닫혔는지 손으로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삼촌.”
“왔어요.”
이헌의 소매는 손목 위로 접혀 있었다. 손에 붙였던 밴드는 없었다. 나는 그 자리를 오래 보지 않고 앞의 서류철을 열었다.
석진은 회장 옆에 앉으며 금색 시계를 봤다.
“다 모였으니 시작하죠. 오늘은 미룰 것 없이 정합시다.”
경란이 사진을 내 앞에 밀었다.
“식장 꽃은 이걸로 한다. 계절에 맞는 걸로 골랐어.”
주원이 사진을 집어 들었다.
“이만큼 놓으면 입구가 좁아지겠는데요. 손님들 줄 서면 불편할 텐데.”
“그건 호텔에서 알아서 해.”
“그 호텔 일 제가 하잖아요.”
주원은 웃지 않고 사진을 내려놓았다. 경란은 다른 사진을 골라 직원에게 건넸다.
“그럼 입구 것은 빼고. 안쪽만 해.”
나는 펜을 꺼냈다. 종이 위에는 아직 표시하지 않았다.
◈
결혼식 순서가 적힌 종이가 넘어왔다. 입장 시간, 양가 인사, 촬영, 식사 순서가 줄마다 나뉘어 있었다.
경란이 가운데를 짚었다.
“어머니 자리는 비워 두면 눈에 띄어. 다른 어른께 부탁드리는 게 낫겠어.”
“아버지 혼자 앉으실 거예요.”
“사진에도 계속 남는다.”
“아버지께 여쭤봤어요. 혼자 앉겠다고 하셨어요.”
경란의 손가락이 종이에서 떨어졌다. 나는 펜 끝을 해당 줄 옆에 댔다.
“그대로 두어 주세요.”
잠깐 종이 넘기는 소리가 끊겼다. 주원이 내 앞의 순서지를 당겨 보고 말했다.
“동선도 그게 나아요. 다른 어른을 모시면 대기 자리부터 다시 잡아야 해요.”
“너는 꼭 이런 자리에서 호텔 직원처럼 구는구나.”
“제 결혼식이니까 더 봐야죠.”
주원은 순서지를 돌려줬다. 이헌은 물잔에 손을 댔다가 놓았다. 나는 펜 끝으로 작은 표시만 남겼다.
경란은 드레스 사진을 두 장 나란히 놓았다.
“목이 너무 드러나는 건 안 된다. 이쪽이 단정해.”
“다음에 입어 보고 정할게요.”
주원이 손가락으로 방문 일정을 짚었다.
“이날 제가 비울 수 있어요. 같이 가면 되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정하고 있는 어느 것도 실제로 쓰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맞은편에서 이헌이 펜을 내려놓았다.
짧은 소리였는데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이헌은 내 앞의 드레스 사진이 아니라 석진의 서류철을 보고 있었다.
석진은 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준비는 경란이하고 둘이 마저 하고, 오늘 서명 일정까지 잡읍시다.”
나는 사진을 옆으로 옮겼다.
“무슨 서명이요?”
◈
석진이 서류를 한 장씩 나눠 줬다. 내 앞에도 같은 종이가 놓였다.
『혼인 및 해윤제지 협의 일정』
종이 맨 위에 적힌 제목이었다. 혼인과 회사 이름 사이에는 빈칸도 없었다.
“아버지께 먼저 보내신 건가요?”
“오늘 날짜 정해서 보내려고 했지. 각자 바쁜데 여러 번 모일 것 있겠니.”
석진은 펜으로 셋째 줄을 짚었다.
“결혼 전에 부지 관련 의향서를 받고, 식 끝나고 본계약 협의로 넘어가면 돼. 결혼 준비하고 겹치지 않게 잡았어.”
나는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부지를 넘기겠다고 하신 적은 없어요.”
“매각을 확정하는 서류가 아니야. 협의를 시작하자는 거지.”
“협의할지부터 아버지가 정하셔야죠.”
“그러니까 일정을 잡아서 얘기하자는 것 아니니.”
석진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제목 아래의 문장을 읽었다. 중간부터 종이에 붙인 쪽지가 가리고 있었다.
쪽지 끝에 풀이 조금 말라 있었다. 원래 붙은 것이 아니라 떼었다가 다시 누른 자국이었다.
나는 손을 대지 않고 물었다.
“이 부분은 왜 가려 놓으셨어요?”
“수정할 문구라서.”
“그럼 수정한 걸로 보내 주세요. 가려진 상태로는 아버지께 드릴 수 없어요.”
석진이 내 종이를 보다가 자기 것을 내려다봤다.
“꼼꼼하구나.”
“읽을 수 있어야 가져가죠.”
주원이 서류를 빛 쪽으로 기울여 뒷면을 비춰 봤다. 그러고는 곧 탁자에 내려놓았다.
“결혼 일정이랑 분리하는 게 낫겠어요. 제목부터요.”
“네가 볼 서류가 아니다.”
“제 이름도 있는데요.”
주원은 아래쪽을 짚었다. 협의 참석자 칸에 강주원과 윤나경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제가 부지 협의에 왜 들어가요?”
석진이 주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네가 알아야 할 일이니까. 오늘 다 결정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이 종이는 빼도 되겠네요.”
주원이 서류를 접지 않은 채 옆으로 밀었다. 석진은 내 쪽을 봤다.
“나경이도 생각은 같니?”
나는 펜을 닫았다.
“회사 서류는 회사에서 받겠어요. 아버지 앞으로요.”
회장이 만년필을 탁자에 놓았다. 이헌은 등을 의자에 붙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석진이 회장에게 몸을 조금 돌렸다.
“제가 말을 어렵게 했나 봅니다. 일정이 밀리지 않게 미리 챙기자는 건데.”
회장은 대답 대신 종이를 들어 읽었다. 손끝이 떨려 종이 아래가 탁자에 닿았다.
나는 물잔을 밀어 자리를 넓혔다. 회장이 서류를 내려놓을 수 있게 빈 곳을 만들었다.
◈
경란이 꽃 사진을 다시 모았다.
“회사 얘기는 그만하고. 식사 인원부터 맞추자. 공장에서는 몇 명 오시니?”
“아직 명단 안 받았어요.”
“버스는 부를 거야?”
“아버지께 확인할게요.”
경란은 준비 목록 옆에 짧게 적었다.
“그럼 명단은 월요일까지 받아. 주원이 쪽하고 겹치는 분도 있을 테니.”
나는 휴대폰 일정에 적었다. 쓰지 않을 꽃과 드레스는 고를 수 있어도 공장 사람들의 이름을 여기 올리는 일은 달랐다.
“초대장은 제가 직접 드릴게요.”
“직원이 보내면 되는데.”
“공장에 갈 일이 있어요.”
석진이 다시 시계를 봤다.
“기환 사장 만날 때 이 일정도 보여 드려. 회장님 계신 자리에서 얘기 나왔다고 하면 알아들으실 거다.”
나는 휴대폰을 엎어 놓았다.
“회장님께서 정하신 일정은 아니잖아요.”
경란의 펜이 멈췄다. 주원은 나를 보지 않고 서류 모서리를 맞췄다.
석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직 정한 건 아니지.”
석진은 자기 앞의 종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
“그럼 기환 사장에게 가능한 날짜를 적어 달라고 해.”
나는 종이를 받지 않았다.
“부지 협의를 하실 건지부터 여쭐게요.”
석진의 손이 종이 위에 남아 있었다. 이헌이 낮게 말했다.
“그렇게 전달하면 되겠습니다.”
“너한테 묻지 않았다.”
“전달할 내용은 정확해야죠.”
이헌은 석진의 손이 치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 앞의 서류를 가리켰다.
“가져갈 거예요?”
“네. 읽어 보시라고 드릴게요.”
“그럼 가린 문구 없는 걸로 받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경란이 나와 이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열어 서류를 넣을 자리를 만들었다. 안쪽에 넣어 둔 손수건이 보였다. 빨아서 다려 둔 손수건이었다.
경란의 시선이 가방으로 내려왔다.
“뭘 그렇게 챙겨 왔니?”
“필기할 것하고 손수건이요.”
나는 가방을 닫아 의자 옆에 세웠다.
◈
회장이 서류를 넘기다 물잔 밑에 깔린 종이를 당겼다.
잔이 넘어졌다. 물이 회장 앞을 지나 탁자 가운데로 번졌다.
경란이 의자를 뒤로 뺐다. 석진은 자기 서류철을 들어 올렸다. 주원은 회장의 젖은 종이를 잡았고, 이헌은 만년필부터 옮겼다.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물을 먼저 막으려 접힌 천을 폈다. 회장 손등에 닿기 전에 손수건 한쪽이 젖었다.
“손 좀 들어 주세요.”
회장이 손을 들었다. 나는 팔목 아래를 닦고 종이에 닿은 물을 눌러 뺐다.
젖은 종이를 주원이 떼어 내려 했다.
“잠깐만요. 붙은 채로 두세요.”
주원이 손을 멈췄다.
“찢어져요?”
“지금 떼면 글씨 있는 데가 벗겨질 수 있어요.”
나는 마른 면을 접어 종이 가장자리에 댔다. 주원은 잔을 세우고 내 손이 닿지 않는 쪽을 들어 줬다.
직원이 수건을 가져왔을 때는 가운데 물까지 닦은 뒤였다.
나는 젖은 손수건을 접었다. 이헌의 것이었지만 돌려줄 수 없게 됐다. 탁자 끝에 내려놓자 이헌이 손수건을 잠깐 봤다.
“손은 안 젖었어요?”
“괜찮아요, 삼촌.”
경란이 내 손을 봤다. 나는 손바닥을 무릎에 내려 물기를 닦았다.
회장은 젖지 않은 서류부터 다시 가져갔다.
“그건 놔둬라.”
주원이 들고 있던 종이를 탁자 빈 곳에 내려놓았다. 물에 젖은 부분은 글씨가 조금 진해져 있었다.
회장의 만년필 뚜껑을 이헌이 닫았다.
탁자 너비는 2m가 넘었다. 손을 뻗어도 이헌에게는 닿지 않았다.
◈
석진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다 젖기 전에 마무리하죠. 식 날짜는 더 바뀔 일 없고, 부지 협의는 제가 기환 사장과 통화하겠습니다.”
나는 서류철을 닫지 않았다.
“아버지께는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그래. 우리 며느릿감이 중간에서 잘해 줘야지.”
주원의 손이 탁자 밑으로 내려갔다. 휴대폰을 꺼내지는 않았다. 나는 주원 쪽을 보다가 맞은편으로 눈을 돌렸다.
이헌은 나를 보고 있었다.
차 안에서 열었던 달력이 떠올랐다. 공개할 날을 정하자는 말에 나는 오늘 날짜를 눌렀다. 그날이 왔는데도 내 앞에는 여전히 결혼 순서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펜을 서류철 안에 끼웠다. 더는 표시할 곳이 없었다.
석진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져갈 것은 새로 보내 줄 테니, 그건 여기 두고 가렴.”
“제가 받은 건 가져갈게요.”
“수정 전이라니까.”
“수정된 것도 같이 주세요. 아버지가 헷갈리지 않게 말씀드릴게요.”
나는 종이를 가방 안에 넣었다. 석진은 손을 거두고 이헌을 봤다.
“너도 결혼식 날 일정 비워라. 이번에는 갑자기 출국할 일 없겠지.”
“없습니다.”
“주원이 일인데 삼촌이 자리를 지켜야지.”
이헌은 의자 양옆에 손을 짚었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았다. 이헌의 시선이 내 손에 잠깐 머물렀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경란이 사진을 모으던 손을 멈췄다. 주원은 탁자 위에 양손을 올렸다. 회장은 만년필에서 손을 뗐다.
이헌이 일어섰다.
“이 결혼, 반대합니다.”
석진은 앉은 채로 이헌을 올려다봤다.
“이유가 뭐냐.”
이헌이 나를 봤다.
(80화 끝 · 4권 끝)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는 명함을 뒤집어 뒷면까지 확인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걱정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어요. 제 서류를 보여 드리지는 않을 거예요.”변호사는 내 가방에서 손을 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연락 주시면 되는 겁니다.”“필요하면 제가 연락할게요.”명함은 진술서와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이헌이 문을 잡아 주었다. 다은이 먼저 나갔고, 나는 문턱을 넘기 전에 경찰관에게 고개를 숙였다.밖으로 나오자 다은이 얼음팩을 내려다봤다.“이거 돌려줘야 해.”내가 받으려 하자 다은이 오른손을 뒤로 뺐다.“이건 들 수 있어. 잠깐만.”다은은 지구대로 돌아갔다. 유리문 안에서 순경에게 수건까지 돌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이헌은 내 옆에 서 있었다. 변호사는 문 안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저 사람, 그냥 보내도 돼요?”내가 묻자 이헌이 대답했다.“여기서 따져도 답은 안 할 겁니다. 명함은 갖고 있어요.”“부회장님한테 전화하실 거예요?”“지금은 안 해요.”이헌이 내 가방 끈을 봤다. 나는 어깨에서 흘러내린 끈을 다시 올렸다.“먼저 작업실로 가요. 문 수리부터 확인하고요.”다은이 문을 밀고 나왔다. 나는 변호사 쪽으로 다시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문 수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손님 책을 잠기는 장 안으로 옮겼다. 다은은 목록에 표시만 했다. 무거운 책을 들려다 내 눈에 걸린 뒤로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그 종이, 원래 붙어 있던 겁니까?”계단을 올라온 경찰관이 내 휴대폰 화면을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어제 문 닫을 때는 없었어요.”경찰관은 문턱 밖에서 벽을 확인하고, 뒤따라온 동료에게 안쪽을 가리켰다. 다은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다.“안에 누가 있는지 먼저 보겠습니다.”나는 다은의 가방을 들고 계단 쪽으로 물러났다. 경찰관들이 작업대 뒤와 3층을 살피는 동안 할머니가 과자 상자를 내밀었다.“밟을까 봐 계단 것만 주웠어요. 안에는 안 건드렸고.”경찰관은 상자와 계단을 번갈아 찍었다.안에서 나오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문턱 바로 안쪽에 멈췄다. 운동화 밑에서 작은 유리가 눌렸다.“없어진 물건부터 확인해 주세요. 손은 대지 마시고요.”내 서랍 앞에 쪼그려 앉았다. 대출 서류를 대조해 둔 봉투가 바닥에 있었다. 입구를 묶었던 실은 끊어졌고, 사진을 끼운 투명 덮개만 남아 있었다.“이 안에 사진 출력물이 있었어요. 해윤제지 대출 서류를 찍은 것들이요.”“현금이나 물건은요?”다은이 뒤에서 말했다.“제 서랍에 현금 통이 있어요. 그쪽은 안 열렸어요.”경찰관이 서랍을 열게 하고 안을 찍었다. 다은이 말한 돈은 그대로였다. 컴퓨터와 카메라도 남아 있었다.나는 벽의 종이를 가리켰다.“저걸 두고 간 사람이 사진을 가져간 것 같아요.”“같은 사람이 한 건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은 침입해서 물건을 가져간 절도로 보고 접수하
『오늘 일정: 10월 25일 토요일, 작업실 정리』“나경아, 계단에서 조심해. 유리 있어.”휴대폰 너머로 다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건물 현관에 들어서다 멈췄다.“무슨 유리?”“우리 출입문. 누가 깨고 들어왔어.”계단 위에서 빗자루가 바닥을 긁었다. 나는 가방을 몸 앞으로 당겼다.“너는 어디 있어?”“복도. 안에는 아무도 없어. 불 켜고 나오다가 넘어졌어.”“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마. 바로 올라갈게.”전화를 끊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난간 밑에 유리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위층에서 할머니가 빗자루를 세웠다.“가운데로 와. 벽 쪽은 아직 못 쓸었어.”가끔 가계부를 고치러 오는 할머니였다. 손에는 쓰레받기 대신 빈 과자 상자가 들려 있었다.다은은 2층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받친 채였다. 나는 다은 앞에 쪼그려 앉았다.“머리는 안 부딪혔어?”“손만 짚었어. 불이 꺼져 있어서 바닥에 뭐가 있는지 못 봤거든.”다은의 바지 무릎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은 움직였지만 손목을 들자 입술을 깨물었다.“삐었나 봐.”“움직이지 마. 손바닥 좀 보여 줘.”긁힌 곳은 없었다. 손목 바깥쪽이 조금 부어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은 손 밑에 접어 넣었다.복도 끝의 출입문은 잠금장치 옆 유리가 깨져 있었다. 안쪽 문고리에 유리 조각이 걸려 있었다.다은이 내 팔을 잡았다.“컴퓨터는 있어.&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