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
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
『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
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
“왜 안 들어오고 있어.”
“작업실에 연락했어요.”
“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
“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
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
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
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
“저건 왜 밖에 있어요?”
“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
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
“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
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
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
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
◈
이헌은 차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나는 아버지 옆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오신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인사를 받았지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룹에서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공장에 오실 일이 있나요.”
이헌은 대답하기 전에 나를 봤다. 나는 가방에서 제안서를 꺼냈다.
“제가 자료를 먼저 받았어요. 종이 라인에 투자하는 건이에요.”
아버지의 시선이 내 손으로 내려왔다.
“넌 그걸 보고 있었고?”
“네. 오늘 같이 설명 듣고 싶었어요.”
“나한테 먼저 주지.”
“설명할 분이 오는 자리에서 보시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서류를 받지 않고 공장 쪽을 봤다. 염 반장이 문 옆에서 장갑을 벗고 있었다.
“반장, 회의실 비었지?”
“비었는데 지금 저거부터 빼야 해.”
염 반장이 마당 끝의 운반대를 가리켰다. 종이 묶음을 받친 판이 비뚤어져 있었다. 한쪽 바퀴 앞에는 뜯긴 포장 끈이 감겨 있었다.
아버지가 소매를 올렸다. 이헌도 봉투를 내게 건넸다.
“어디를 잡으면 됩니까?”
“잠깐 기다려 봐.”
염 반장은 이헌의 손을 보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곧 장갑 한 켤레를 들고 나와 이헌에게 던졌다.
이헌이 가슴 앞에서 받았다.
“일할 거면 끼고.”
“네.”
이헌이 장갑에 손을 넣었다. 나는 봉투를 가방에 세워 넣고 포장 끈이 감긴 바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나경이는 비켜. 손 들어간다.”
염 반장의 말에 손을 멈췄다.
“제가 끈부터 자를게요. 들지는 말아 주세요.”
공구함에서 가위를 받아 감긴 끈을 잘랐다. 아버지와 이헌이 운반대 양쪽을 잡고, 염 반장이 아래에 받침을 넣었다.
“이쪽 먼저. 아니, 발 빼고.”
이헌이 발을 뒤로 옮겼다. 장갑 끝에 검은 자국이 묻었다.
끈을 빼낸 뒤 바퀴를 굴려 봤다. 나는 가위를 접어 공구함에 넣고 일어났다. 아버지는 운반대를 안으로 밀었다. 이헌이 반대편에서 속도를 맞췄다.
문 앞에 있던 직원이 비켜 주며 물었다.
“새로 오신 분이에요?”
염 반장이 장갑을 털었다.
“그건 아직 몰라. 손은 빌렸고.”
이헌은 웃는 대신 운반대가 멈출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
휴게실에서 물을 가져온 직원이 종이컵을 나눠 줬다. 이헌은 장갑을 벗어 난간에 놓았다. 엄지 아래에 쓸린 자국이 있었다.
내가 가방을 열자 이헌이 고개를 조금 저었다.
“괜찮아요.”
나는 꺼내려던 손수건을 도로 넣었다. 아버지가 바로 옆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헌과 내 사이에는 종이컵을 올린 상자가 있었다.
직원들이 문 밖으로 더 나왔다. 안에서 쉬는 시간이 됐다는 말이 들렸다.
아버지가 이헌에게 공장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가시죠.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직원분들도 들으셔야 할 내용입니다.”
아버지의 컵이 입 앞에서 멈췄다.
이헌은 들고 있던 물을 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제가 해윤제지 종이 라인에 투자하려고 합니다.”
주변의 말소리가 끊겼다. 염 반장이 장갑을 든 채 아버지 쪽을 봤다.
아버지가 먼저 물었다.
“서진에서 뭘 더 받겠다는 겁니까?”
“서진 자금이 아닙니다. 제 개인 자금입니다.”
“이름만 바꿔서 들어오면 다른 돈입니까?”
“계약 당사자부터 다릅니다. 서진캐피털 대출과도 묶지 않을 겁니다.”
이헌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봉투를 꺼내 건넸다. 손가락이 닿기 전에 봉투 아래를 놓았다.
이헌은 서류를 꺼냈지만 직원들에게 돌리지는 않았다.
“아직 제안 단계입니다. 대표님과 검토하고, 직원분들께도 설명드릴 겁니다. 오늘 도장 받으러 온 건 아닙니다.”
직원 한 명이 종이컵을 구기다가 멈췄다.
“다시 멈추는 일은 없게 해 준다는 겁니까?”
이헌은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헌은 말을 이었다.
“돈만 넣는다고 주문이 늘지는 않습니다. 고쳐야 할 설비와 당장 들어갈 운영비를 나눠서 보자는 제안입니다. 실제 필요한 금액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걸 왜 실장님이 합니까?”
직원은 아버지 눈치를 보고 말을 보탰다.
“저희야 일하면 좋죠. 그런데 여기 땅 때문에 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나는 제안서에 끼워 둔 종이를 뽑았다.
“부지 담보는 안 받는다고 적혀 있어요.”
아버지가 내 손에서 서류를 가져갔다. 나는 표시한 곳을 짚었다.
“여기요. 서진 쪽 채권을 넘겨받는 계약도 아니고요.”
“적혀 있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알아요. 그래서 오늘 결론 내자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는 종이를 넘겼다. 이헌은 기다렸다.
염 반장이 난간에 기대 놓았던 장갑을 집었다.
“그럼 우리한테 오늘 뭘 하라는 거요?”
“지금 멈춘 곳과 다시 멈출 수 있는 곳을 알려 주십시오. 숫자만 보고 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대표한테 들으면 되잖아.”
“매일 기계 앞에 서는 분들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염 반장은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자 반장이 먼저 문을 밀었다.
“들어와 봐. 장갑 다시 끼고.”
◈
기계 옆 통로는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 비어 있었다. 아버지가 앞서고 염 반장이 이헌에게 멈춰 선 장치를 설명했다.
나는 뒤에서 따라갔다. 이헌이 돌아보며 손을 내밀려다 거뒀다. 대신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 물 있어요.”
나는 젖은 곳을 피했다.
염 반장이 장치 덮개를 두드렸다.
“이걸 갈아야 하는데 부품만 갈면 되는 게 아니야. 멈추는 동안 다른 데서 물건을 뽑아 줘야 해.”
“주문 일정과 같이 봐야겠군요.”
“돈 있다고 오늘 뜯고 내일 돌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이헌이 휴대폰에 적었다. 아버지는 장갑을 벗지 않은 채 지켜봤다.
통로 끝 작업표에는 수정한 수량과 확인 서명이 있었다.
이헌이 작업표를 보려 하자 아버지가 앞을 막았다.
“계약도 안 한 사람한테 거래처까지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건 검토 절차를 정한 뒤에 보겠습니다.”
이헌은 물러섰다.
염 반장이 덮개를 닫았다.
“오늘 보는 건 여기까지 해. 돌아가는 쪽은 얘기하다 손 넣으면 안 되니까.”
우리는 들어온 길로 나갔다. 이헌이 문 앞에서 멈춰 나를 먼저 보냈다. 나는 지나가며 낮게 말했다.
“손, 씻고 확인해요.”
“조금 쓸린 겁니다.”
“그래도요.”
이헌이 대답하기 전에 아버지가 문을 잡았다. 나는 가방 끈을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
마당에 나온 아버지가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
“직원들 앞에서 말부터 꺼내면 내가 거절을 못 할 줄 알았습니까?”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뜻은 아니어도 그렇게 됩니다. 저 사람들은 내 말보다 돈 가져온 사람 말을 먼저 들어요.”
이헌은 장갑을 벗었다.
“그 점은 제가 먼저 여쭸어야 했습니다.”
“공장이 어떤지 보고 싶었으면 보고만 가셨어야죠.”
“아버지.”
내가 부르자 아버지는 나를 봤다.
“나경아. 너도 기다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이헌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빚에 묶여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서진 돈이 아니라는 말만 믿고 또 받으라고요?”
“믿고 받으시라는 뜻은 아닙니다. 따로 검토할 사람을 정하셔도 됩니다.”
“그 비용도 내주실 겁니까?”
“필요하면 부담하겠습니다. 검토하는 분은 대표님이 고르시고요.”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헌의 시선이 내 쪽으로 왔다가 돌아갔다.
“해윤이 부지를 넘기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투자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아버지, 저도 이 제안을 다 아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돈을 받자고 나서는 게 아니에요. 약혼으로 기한을 늘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도 검토해 보자는 거예요.”
아버지의 턱이 굳었다.
“그 얘기를 여기서 하자고?”
나는 직원들이 서 있던 문 쪽을 봤다. 염 반장은 장갑을 모아 들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문이 닫힌 뒤에 말을 이었다.
“계속 미루면 저도 아무 말 못 해요.”
아버지는 내 손의 봉투를 봤다. 나는 그중 제안서만 빼서 내밀었다.
“검토하고 거절해도 돼요. 대신 제가 몰라서 가만히 있는 걸 동의한 걸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아버지가 서류를 받았다. 종이 끝이 장갑에 걸려 접혔다. 아버지는 벗은 손으로 그 자리를 폈다.
이헌은 말없이 기다렸다.
안에서 누군가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잠깐 들어갔다 오겠다고 하고 공장 문을 열었다. 나는 문이 닫힐 때까지 서 있었다.
◈
이헌이 수도 앞에서 손을 씻었다. 나는 가방에서 작은 밴드를 꺼내 수도 옆에 놓았다.
“작업실에서 챙긴 거예요.”
“고마워요.”
이헌이 손의 물기를 털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손수건을 받는 손과 내 손 사이가 잠깐 좁아졌다. 나는 먼저 놓지 않고 이헌의 엄지 아래를 봤다.
“거기 붙여요.”
“여기요?”
“네. 물 닿으면 따가울 거예요.”
이헌은 손을 닦은 뒤 밴드를 붙였다. 나는 포장지를 받아 가방 바깥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불편하게 했어요.”
“저한테 사과하지 마세요. 아버지한테 하셨잖아요.”
“당신도 같이 서 있었으니까요.”
“오늘 저 때문에 투자한다고 말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이헌이 나를 봤다.
“그 말로 아버지를 설득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서류를 더 보고 싶고요.”
“그러세요. 모르는 항목은 남겨 두고요.”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안에서 발소리가 나자 나는 손수건을 가방에 넣었다.
아버지가 돌아와 우리 사이에서 멈췄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헌도 수도 옆에 그대로 섰다.
아버지는 제안서를 반으로 접으려다 멈췄다. 종이를 편 채 내게 물었다.
“오늘 저녁에 온다고 했지.”
“네.”
“집으로 와.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그럴게요.”
아버지가 이헌에게 서류를 들어 보였다.
“이건 두고 가십시오. 읽어는 보겠습니다.”
“연락 주시면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버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밴드를 붙인 이헌의 손을 보고, 내 가방 쪽으로 눈을 옮겼다. 나는 벌어진 가방 입구를 닫았다.
아버지가 서류를 작업복 옆구리에 끼웠다.
“약혼자의 삼촌이 웬 투자야.”
(78화 끝)
『오늘 일정: 11월 4일 화요일, 해윤 이사회』편지를 넣을 보존 봉투를 접었다.마지막 줄의 이헌 이름까지 한 번 더 읽고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작업대에 놓인 주주명부 사본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제 회사 도장을 받아 온 서류였다.다은이 내 가방 옆에 확대경을 놓았다.“이것도 가져가. 서류 본다며.”“오늘은 글자 읽으러 가는 건데.”“작은 글자는 글자 아니냐.”나는 확대경을 천집에 넣었다. 가방 안쪽에는 주식 증서 사본과 오늘 회의 자료가 있었다. 원본은 작업실 서랍에 두고 잠갔다.다은이 내 소매에 붙은 실을 떼었다.“전화 못 받아도 돼. 손님한테는 내가 말할게.”“급한 건 문자 줘.”“알았어. 밥 거르지 말고.”가방을 들자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이헌에게 온 문자였다.『공장에 먼저 와 있어요. 투자 검토 자료만 전달하고 나갈 겁니다.』나는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편지에 적힌 일을 물어볼 때마다 이헌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오늘은 그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끝나고 연락할게요. 회의는 제가 들어갈게요.』답은 내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왔다.『네. 기다릴게요.』◈공장 계단에는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난간을 잡고 올라가자 염 반장이 걸레를 밀고 있었다. 작업복 바지 끝이 젖어 있었다.“밑에서 손 씻고 올라온 놈이 물을 흘렸어. 조심해.”“제가 할게요.”“오늘 여기서 네 일은 이게 아니잖아.”염 반장이 걸레를
『오늘 일정: 11월 1일 토요일, 엄마 상자 열기』열쇠가 반 바퀴쯤 돌다가 멈췄다.나는 힘을 빼고 상자를 식탁 안쪽으로 당겼다. 놋쇠 자물쇠 아래로 가루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행주를 가져오자 빈 접시를 내밀었다.“여기에 놔주세요. 가루부터 볼게요.”“녹슨 거냐?”“먼지예요. 억지로 돌리면 안에서 부러질 수도 있어요.”아버지는 행주를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어제 회의에서 받아 온 일정표가 그 옆에 있었다. 부지 의향서 제출 칸을 펼쳐 놓았지만, 아버지는 상자를 가져온 뒤로 그쪽을 보지 않았다.나는 가방에서 붓을 꺼내 열쇠 구멍을 털었다. 호두나무 뚜껑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모서리가 닳은 자리에 손을 대자 검은 자국이 손톱 아래 묻었다.“이거 어디 두셨어요?”“장롱 아래 칸. 네 엄마 옷 있던 데.”“가끔 꺼내 보셨어요?”아버지가 접시를 조금 밀었다.“꺼내기만 했다.”열쇠를 살짝 들어 돌렸다.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나는 잠금쇠를 빼 접시에 놓았다.아버지 손이 뚜껑 앞으로 왔다가 멎었다.“내가 열어도 되겠니.”나는 상자를 아버지 쪽으로 돌렸다.“네.”뚜껑을 열자 접힌 앞치마가 나왔다. 어깨끈 한쪽에 매듭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듭을 만지지 않고 앞치마 밑에 손을 넣었다. 천에 싸인 도구들이 함께 올라왔다.실패가 먼저 굴렀다. 내가 손바닥으로 막자 아버지가 빈 밥그릇을 가져왔다.“거기 넣어. 떨어지겠다.”그릇 안에 실을 옮겼다. 누런 실 끝이 실패에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이헌의 시선이 내 앞에서 멎었다. 나는 탁자 끝에 둔 젖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들었다.탁자 건너 석진이 금색 손목시계를 봤다.“이유를 물었다.”이헌은 나를 보던 눈을 석진에게 돌렸다.“해윤 부지 건으로 내부 감사를 요청합니다.”석진의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경란은 무릎 위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내 옆의 주원은 의자에 등을 붙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결혼 반대 이유가 감사라고?”“이 결혼을 전제로 부지 관련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절차부터 확인해야 합니다.”“해윤이 빚을 갚지 못해서 협의하는 거다.”“대출이 늘어난 과정과 부지 매각 절차를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회장은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앉아서 해라.”이헌이 앉았다. 내 맞은편에서 비어 있던 의자가 탁자 쪽으로 당겨졌다. 서류철 사이로 이헌의 접은 소매가 보였다.나는 손수건을 탁자 가장자리로 옮겼다. 물을 먹은 모서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그걸 왜 지금 꺼내니.”경란이 이헌을 봤다.“애들 결혼 준비하는 자리잖아. 회사 일은 회사에서 하면 되지.”“방금 형님이 해윤 부지 서류 일정을 결혼 준비에 넣으셨습니다.”석진은 웃으며 앞에 놓인 종이를 넘겼다.“일정이 겹치니 확인한 거야. 결혼식 전에 복잡한 일 끝내 주겠다는 뜻이고.”“누구에게 복잡한 일입니까.&rdqu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