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들고 침대에 앉아 업무를 보던 무진은 귀여운 술주정꾼 생각에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고 신경이 쓰였다.밖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욕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하니 성연이 욕실에 들어간지 이미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욕조에 물을 받고 목욕을 했어도 충분할 시간이었다.무진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며 성연의 이름을 불렀다.“성연아, 송성연, 다 씻었어?”그러나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결국 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욕실로 들어가니 욕조의 수면까지 미끄러져 내려간 성연의 긴 머리가 물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도대체 욕조 안에서 얼마나 몸을 담그고 있었는지.깜짝 놀란 무진이 황급히 다가가 손을 뻗어 성연을 붙잡아 올렸다.“콜록, 콜록.” 욕조 속에서 일으켜 앉힌 후 가슴을 압박하자, 성연이 입으로 물을 뱉어냈다. 욕실 안은 온통 성연의 기침 소리로 가득했다.드디어 성연의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눈을 뜬 성연이 자신을 안고 있는 무진을 보고는 와락 밀어냈다.“아저씨…….”지금 알몸인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든 탓이다.무진은 성연의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성연의 눈에서 화염이 쏟아지는 듯하다.“돌아서요!”수줍어하던 기색도 잠시,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었다.아무리 자신을 부르기 위해 들어왔다고 쳐도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강무진이라니.‘마치 색마 같잖아?’갸름한 성연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나는 게 무진의 눈에 들어왔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무진은 끝까지 몸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성연의 얼굴 쪽으로 향한 채 턱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무진이 일부러 성연을 도발하듯이 말했다.“어차피 앞으로 다 볼 건데 뭘. 좀 일찍 보나 늦게 보나 매한가지 아니야?”“누가 보여준다고 그래요? 빨리 몸 돌려요. 안 그러면 정말 화 낼 거예요!”성연의 말투가 차가워지며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강무진이 보는 건
무진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네가 걱정돼서 들어온 거야.”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성연이 입을 열었다.“덕분에 내가 무사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끝장을 봤을 걸요!”방금 전 무진의 반응을 통해 무진이 일부러 자신을 훔쳐보려 했던 게 아니라는 것, 지금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사람이 어쩜 이렇게 못돼 처먹었는지.’옷을 다 입은 성연은 얼굴이 화끈거리며 부끄러웠다.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을 정도로.결국 성연도 이런 방면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여자아이였다.이제 앞으로 절대 술을 마시면 안되겠다고 혼자 속으로 다짐했다. 안 그러면 진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겠다.만약 강무진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정말 욕조에서 익사했을지도 몰랐다.어쨌든 자신의 생명을 구한 거니까 성연은 더 이상 강무진의 실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뺨을 두드리며 열기가 좀 식길 기다렸다가 욕실 문을 열고 나갔다.침착한 척 가장한 성연은 일부러 굳은 표정을 지었다.사실 어떻게 무진의 얼굴을 봐야 할지 몰랐다.숙취해소제와 죽 한 그릇을 쟁반에 담아 온 무진이 성연에게 건넸다.“죽을 먼저 먹어서 위를 좀 달랜 후에 숙취해소제를 먹어. 안 그러면 위에 부담이 갈 거야.”성연이 욕실에 들어간 뒤에 무진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들이다.집사에게 죽을 쑤어 오게 하며 아주 세심하게 성연을 챙겼다.손에 쟁반을 받아 든 채 앞에 놓인 죽과 약을 보는 성연은 마음이 복잡했다.다른 건 몰라도 강무진의 세심함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외할머니가 떠나신 후 자신을 이처럼 세심하게 챙겨 준 사람이 있었던가 싶다.자신에게 이처럼 잘하는 무진을 모습을 보며 성연은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쟁반을 받아 든 성연이 어어 하며 말했다.“고, 고마워요.”“얼른 먹어. 숙취엔 몸이 힘들어. 다 먹으면 가서 쉬어.” 무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리고 한옆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노트북을 보며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성연은 한쪽 옆에서 죽을 먹었다.부드럽게
알코올이 들어가 수면을 도운 건지 성연은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머리도 아파하지 않고 정말 달게 잤다.아무 생각 없이 깊이 잠들었던 성연은 전혀 알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무진이 거의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못했다는 사실을.이튿날, 눈을 뜬 성연은 몸도 마음도 아주 개운했다. 그에 반해 무진은 온몸이 찌뿌둥하게 축 가라앉은 상태였다.눈 밑이 시커멓고 낯빛도 차갑게 굳어 있었다.아침 식사 중에도 무진은 정신을 딴데 팔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국그릇에 숟가락을 담근 채 휘이 젓기만 여러 차례. 정작 입에는 대지 않았다.어떤 것에도 관심 없는 듯한 모양새다.이처럼 비정상적인 무진의 태도에 성연이 물었다.“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어젯밤 자신을 살뜰히 챙긴 무진이니 자신도 관심을 좀 가져줘야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완전 인정머리 없어 보일 터.“아니야. 그냥 잠을 못 잤을 뿐이야.”무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성연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마친 후에 등교했다.회사로 출근한 무진은 또 다시 손건호만 달달 볶았다.한바탕 욕을 먹고 나오던 손건호는 복도에서 재무본부장을 만났다.손건호를 한쪽으로 끌고 간 재무본부장이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손 비서, 총괄대표님 요즘 무슨 일 있으셔?”“휴, 말도 마십시오.” 얼굴을 찡그린 손건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계속 이런 식이면 아마 곧 대머리가 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원래대로라면 어젯밤 함께 식사하러 외출했던 대표님과 사모님의 관계는 당연히 좋아져야 했다.오늘 아침 사모님이 대표님에게 먼저 관심을 보여서 두 사람이 화해를 했구나 하는 생각에 희망이 보였었다.‘그런데 어째서 우리 보스는 여전히 저기압 상태인 거야?’‘화해해도 소용없고, 싸워도 소용없고,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지?’‘하아, 수하 비서로 일하기 너무 힘들다.’“손 비서, 좀 도와주게.” 재무본부장이 손건호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의 눈빛을 본 손건호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
성연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무진은 보이지 않고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운경만 보였다.거실로 들어오는 성연을 본 운경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성연이 학교에서 오는 거니? 학교 다니는 건 힘들지 않아?”“고모님, 어떻게 시간이 나셨어요?” 거실을 가로질러 간 성연이 강운경 가까운 곳에 앉았다.“사업상 이 근처에 왔다가 지나는 길에 들려봤어. 왜 반갑지 않아?”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운경이 다소 놀리는 투로 물었다.성연이 넉살 좋게 대꾸했다.“설마요. 환영인사가 늦었네요. 고모님이 날마다 오셨으면 좋겠는 걸요.”마치 서운하다는 듯한 성연의 표정이 운경을 한 차례 웃게 했다.“너 정말 아부도 잘하는구나.”성연이 웃었다.상체를 숙인 운경이 테이블 위의 찬합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정교하게 데코레이션 된 케익이 들어 있었다.“새로 온 주방장이 만든 거야. 할머니는 입에 맞다고 하시는데 너희들한테도 맛을 보여주려고 들고 왔어.”테이블 위의 케익을 보며 속으로 감동받은 성연이 조그마한 음성으로 말했다.“고모님, 다음 번에는 전화 주세요. 제가 가서 먹을게요. 이렇게 또 오실 필요 없이요.”“할머니가 안 보내셨으면 나도 안 왔어. 얼른 먹어보렴.” 운경은 한 조각 잘라 성연에게 건넸다.성연이 한입 베어 물었다. 신선하고 부드러운 케익의 향이 입안에 퍼졌다. 느끼하지 않을 만큼 달콤한 맛이 아주 좋았다. 성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주 맛있어요, 고모님. 감사해요.”“맛있으면 많이 먹어. 물도 좀 마시고, 체할라.” 운경이 성연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자 쌉사름한 차 맛과 달콤한 케익의 맛이 어우러지는 것이 새로운 맛이었다.성연은 몇 차례 더 베어먹은 뒤 남은 케익을 옆에 내려 두었다.운경이 성연을 보면서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성연아, 무진이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야. 무진이 나이 때면 의논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어. 너희들 언제 할머니에게 증손자
운경을 배웅한 성연은 혼자 저녁을 먹었다.식사를 하던 성연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강무진, 앞으로 매일 저녁 집에 와서 같이 밥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그런데 겨우 이틀도 못 버텨?’성연이 막 집사에게 물으려고 할 때, 마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성연이 입을 열기 전에 집사가 먼저 정중하게 말했다.“작은 사모님, 도련님은 오늘 저녁에 회사에 긴급한 일이 있어 함께 식사하러 오지 못하신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집사의 말에 성연이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사실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제 막 회사 대표를 승계한 무진인지라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걸.돌아오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라는 것도.그의 입장이 이해되면서 마음속에 일던 울적한 감정이 사라졌다.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강무진이 보이지 않는 순간 왜 저도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았는지.그런데 이제 또 괜찮아졌다.저녁을 다 먹은 후, 성연은 혼자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혼자서도 신나게 게임을 했다.하지만 가끔씩 저도 모르게 돌아갔다. 무진이 서류를 보며 늘 앉았던 곳이 텅 비어 있는 걸 보는 순간 계속 왠지 허전함을 느꼈다.성연은 너무 자주 강무진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세차게 머리를 흔든 성연이 강무진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내몰았다.‘참내, 그 사람을 생각해서 뭘 어쩔려고?’‘요즘 나도 비정상적으로 변한 건가?’잡념을 몰아낸 성연은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성연이 곧 레벨 통과하려던 순간, 휴대폰이 미친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휴대폰 화면을 켜 보던 성연의 안색이 변했다.TV를 끄고 바로 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근 성연이 자신의 노트북을 꺼냈다.방금 휴대폰에 메시지가 떴다. 지금 누군가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작동시키려 한다고.그녀의 휴대폰은 ‘스카이 아이 시스템’과 연동되어 있었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에서 조그마한 움직임이라도 감지되면 즉시 알 수 있도록.‘스카이 아이 시스템’이 강
마침내 성연이 약간 앞서며 무진은 시스템 진입에 실패했다.어찌 되었든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만든 이는 성연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외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지도 더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두 손으로 키보드 위를 내리누르는 무진의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을 눈앞에 두고 놓쳤다는 게 화가 났다.무진의 표정이 북풍한설처럼 차가웠다. 눈에서 뿜어 나오는 냉기는 쳐다보기만 해도 석빙고에 갇힌 듯했다.한옆에 선 손건호는 보스의 노여움이 자신에게 떨어질까 전전긍긍이었다.생각해보니 아무 말 하지 않는 것도 좋지 않은 것 같아 위로의 말을 건넸다.“보스, 패스워드가 정말 복잡하군요. 우리 쪽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연구한 다음에 겨우 대략적인 실마리만 건졌으니 말입니다.”줄곧 먹이사슬의 최상층에서 실패를 맛본 적이 없었던 무진이다.지금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정상이지, 하며 속으로 생각하는 손건호.한기가 가득한 표정임에도 무진의 어조는 꽤나 담담했다.“예전에 찾았던 단서는 이미 쓸모가 없게 됐어. 방금 상대하며 보니, 저쪽에서 이미 기회를 틈타 코드를 변조했더군. 암호방어를 위해 이미 여러 장치를 해 뒀고. 방금 다시 들어가려 했는데 이미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어.”무진은 입을 다문 채 컴퓨터를 노려봤다.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했는지 모른다.심지어 거금을 들여 세계 최고의 해커 팀을 스카우트까지 해서 간신히 실마리를 얻었다 싶은 순간, 코드가 단번에 변조되며 이전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버렸다.조금 전 시스템 해킹을 시도하려는 순간, 그렇게나 빨리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상대방의 대응 속도는 가공할 정도로 빨라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그러나 무진은 여기서 손 놓지 않을 것이다.“보스, 보스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까?” 손건호가 떠보듯이 물었다.무진이 직접 나서는 건 드물지만, 일단 한 번 나섰다면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지금 강무진이 실
무진의 말을 듣던 순간, 손건호는 머리가 지끈거려 우선 입을 다물었다. ‘스카이 아이 시스템’은 원래 자신들이 수단을 부려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원 주인이 패스워드를 자신들에게 알려주려 하겠는가?“스카이 아이 시스템은, 어쨌든 충분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야. 절대 소소한 게 아니야.”그리고 또 하나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던 손건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누가 개발했는지도 모르는데 어디 가서 찾으려고요?”업계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사실은 여전히 비밀에 싸여 있었다.‘그렇다고 무작정 찾을 순 없잖아?’대강의 생각이나 아무런 단서도 없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아닌가 말이다.무진은 머릿속에서 이미 절묘한 방법을 하나 생각해냈다.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리던 그는 찌푸렸던 미간을 펴며 말했다.“왜 찾아야 하지? 스스로 찾아오게 하면 되지.”“아…….” 망연자실한 듯한 표정의 손건호가 머리를 긁적였다.‘스카이 아이 시스템을 설계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어리석지 않을 거야?’‘그런데 어떻게 먼저 찾아오게 한다는 거지?’그러나 자신만만한 보스의 모습을 보면서 분명 무슨 계획이 있으리라 생각했다.손건호를 힐끗 쳐다본 무진이 말했다.“말을 퍼트려. 이 업계 사람들에게 모두 알리는 게 제일 좋겠군. 내일 저녁 8시, 블랙스톤 클럽에서 ‘스카이 아이 시스템’ 전매 거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물건을 잃어버리고 가장 조급할 사람은 당연 물건의 주인일 터.소식을 듣고 온 첫 번째는 틀림없이 ‘스카이 아이 시스템’의 개발자일 것이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누군가가 그에게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슨 방법을 쓰던 개발자의 입을 열게 할 것이다.어쨌든 그 입을 열게 만들 하나는 있을 터.고개를 살짝 끄덕인 손건호가 지시를 이행하러 나갔다.무진의 공격을 깨부수어 기분이 좋은 성연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목욕하러 들어갔다.목욕을 마치고 나온 성연은 미처 다 끝내지 못했던 게임의
밤이 늦어서야 무진이 집에 돌아왔더니 거실은 온통 게임 음향효과로 시끄러웠다.거실 쪽을 휙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작은 담요를 몸에 두른 채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성연이 눈에 들어왔다.집사가 황급히 다가왔다. “도련님, 식사하셨습니까?”“아직. 아무거나 간단히 준비해 주세요. 너무 번거롭지 않게요.”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 있었던 무진은 시스템 해킹에 실패하니 입맛도 사라졌다.집에 오니 그제서야 배고픔이 느껴졌다.“네, 도련님.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면 주방장은 이미 쉬러 간 상태다. 시간이 되어 바로 퇴근한 상태라 냉장고에 남아 있는 식자재도 없었다. 부득이 집사가 직접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30분 후, 일상적인 작은 메뉴 몇 개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성연 앞에 다가간 무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어.”여전히 게임에 빠진 성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안 먹었으면 얼른 가서 드세요.”“같이 먹어.” 무진이 대답했다.성연은 왠지 모르게 무진의 말투에서 약간 서운해하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게임을 하다 중단한 성연이 고개를 돌려 무진의 얼굴을 보더니 게임기를 내려 놓으며 대답했다.“알았어요, 알았어. 먹는 동안 옆에 있어 줄게요. 하지만 나는 이미 먹었어요.”“그래.” 성연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향하는 무진의 눈에 웃음기가 떠올랐다.식탁에 앉은 성연이 턱을 괸 채 무진을 바라보았다.성연의 주시에도 침착한 무진은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식사하는 동작도 어찌나 우아한지 왠지 보는 눈이 즐거웠다.음식 냄새를 맡으니 약간의 허기를 느낀 성연이 배를 문질렀다.조금 전 간식도 많이 집어먹었는데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또 배고파지네.” 성연이 고개를 들어 무진을 보며 말했다.무진이 손수 성연에게 밥 한 공기를 퍼 주었다.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성연이 가끔씩 다리를 흔들었다. 성연의 기분이 좋다는 걸 알아차린 무진이 물었다.“오늘 무슨 기분
‘그런 예민주가 이렇게 몰락할 줄 누가 알았겠어?’‘결국 5년 동안이나 무진 씨 애인 노릇에 만족해 있었다니!’‘심지어는 오늘 같은 이런 악랄한 짓까지 저지를 정도가 되었으니. 스승님이 아시면 얼마나 섭섭하시겠어.’“송성연, 너 지금 미쳤어! 완전히 미쳤어!”예민주가 언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을까? 연거푸 따귀를 맞은 데다가, 지금은 또 성연의 냉소와 신랄한 조롱을 들어야 했다.큰 소리로 호통을 치는 예민주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원래의 정돈된 헤어 스타일과 잘 차려 입은 옷차림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온몸에 지금 낭패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회의실. 두 시간의 긴 회의가 마침내 끝났다. 무진이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당황한 표정의 손건호가 휴대전화를 들고 다가왔다.무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평소라면 손건호가 절대 이렇게 침착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텐데...’“보스, 예민주 씨가 맞았습니다!”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손건호가 급히 보고했다.“뭐라고?” 무진이 되물었다.“보스, 빨리 사무실로 가 보십시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방금 회의가 끝나갈 때, 손건호는 자료를 찾으러 먼저 회의실에서 나왔다.뜻밖에도 부리나케 달려온 비서실의 비서가 이 일을 알려주었다.무진의 눈동자가 어두워지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아무도 막지 않았어?”무진이 왜 아무도 막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손건호도 대답하기가 곤란했다.‘막고 싶어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지요!’ ‘대표실은 원래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게다가 사모님(!)이 갑자기 뛰어들어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대비도 하지 못했어요.’‘안에서 예민주의 비명 소리가 들려서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안에서 문을 잠궜기에 들어갈 수도 없었어요!’그러나 결국 손건호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표실 앞으로 다가간 무진의 귀에 울음 소리와 함께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리게 되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아이의 몸에 난 상처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그리고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성연은 범인이 바로 예민주라고 생각했다.‘방금 전에도 애들 앞에서 그렇게 헛소리를 지껄였어. 눈앞에 두 아이만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지.’‘그런 여자가 뭘 못하겠어?’‘이 순하기만 한 두 녀석은 엉뚱한 짓을 한 적이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어.’‘충분히 사랑을 받았지만, 그걸 믿고 교만했던 적은 없었어.’‘밖에서는 더 영리하고 깜찍해서 누구나 좋아해. 척 봐도 좋아할 수밖에 없어.’‘그런데 여기에 와서 온몸에 멍이 들다니!’성연의 가슴에서 다시 분노가 폭발했다.딸아이를 가볍게 내려 놓은 성연은,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사무를 보면서 말했다.“동생을 잘 보고 있어. 너희가 당한 억울한 일을 엄마는 절대 그냥 넘기지 않을 거야!”“엄마, 저 아줌마는 나쁜 사람이야! 엄마가 반드시 혼내줘!”여전히 품에 안긴 채, 사진은 재빨리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두 눈에 가득한 억울함을 지금 열심히 엄마에게 표현하려고 했다.“걱정 마. 엄마가 저 여자를 혼내줄게!”바로 일어선 성연이 성큼성큼 예민주 쪽으로 걸어갔다.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예민주는 성연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서한기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쳤지만, 예민주가 어떻게 훈련으로 단련된 남자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놔! 너희들 뭐 하려는 거야?”예민주의 눈빛에는 걱정과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불안한 마음에 가슴은 두근거리면서 발걸음마저 비틀거렸다.짝! 짝!“이건 네게 주는 교훈이자 경고야. 내 아이는 절대 네가 건드릴 수 없어!”“네가 뭔데? 무진 씨 옆에 이미 5년이나 있었지만, 아직도 내 자리를 대신하지 못했지.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겠어!”“이건 첫 번째이자 마지막 경고야! 아이들은 바로 내 마지노선이야. 네가 또 손을 대면 절대 지금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성연은 목소리는 마치 서릿발 같았다. 온몸에서 뿜어내는 싸늘한 기운에 무더운 날씨조차 얼음 세상으로 변하는 듯했
“오빠, 아빠가 정말, 정말로 우리를 안 받아들일까? 우리가 방금 아빠를 찾았는데.”작은 얼굴에 슬픔을 가득 담은 채, 사진은 간절한 시선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예민주는 지금 자신의 말을 자화자찬하며 한껏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팔짱을 낀 채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승자의 기운이 가득했다.잠시 후 자신에게 벌어질 참상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겠지만...대표 집무실 바깥.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성연은 결연한 눈빛으로 대표실을 향해 다가갔다.쾅-단숨에 집무실 문 앞에 선 성연은 아무런 노크도 없이 바로 방문을 열었다.“너 이 새끼, 정말...”아이 앞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예민주의 말이 성연의 귀에 몹시 거슬렸다.“예민주, 뭐 하는 거야!”자신의 아이들이 눈물 자국이 가득한 채 구석에서 서로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 엄마의 본능이 단숨에 뿜어져 나왔다.“내 애들에게 무슨 짓을 했어!”단숨에 앞으로 나아간 성연은 두 손으로 예민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한 손으로 멱살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바로 예민주의 따귀를 때렸다.“네가 뭔데 내 아이를 혼을 내? 너는 그럴 자격이 없어!”성연의 차가운 눈빛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온몸의 분노가 곧 폭발할 듯이!잇달아 따귀를 때렸지만 때리는 소리는 오히려 점점 더 커져갔다.“엄마!” 성연이 다시 손을 들고 예민주의 뺨을 때리려고 할 때, 문득 익숙한 여린 목소리가 들렸다.순간 성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잠시 멈칫하던 성연은 계속 두드려 맞느라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예민주를 밀쳐낸 뒤 딸아이를 품에 안았다.“아가, 엄마가 늦게 와서 미안해.”성연은 두 손으로 사진을 꼭 껴안은 채 자책했다. 지금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방금 전 예민주를 때릴 때의 그 무시무시한 기세도 모두 사라졌다.슬퍼하는 성연을 보면서, 사무는 두 주먹을 꼭 쥔 채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그러나 엄마가 온 뒤에는 그래도 많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자신이 든든한 후원자가 있기에.성연이
사진은 눈앞의 이 여자가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고,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 예민주의 말은 걸러서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역시 어린아이였다.“오빠, 우리 아빠가 정말 우리를 이렇게 싫어해?”눈물이 그렁그렁한 여동생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당신은 어른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어린아이와 말다툼을 하는 겁니까? 당신이 뭔데, 여기서 우리 아버지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는 겁니까?”지금 예민주 때문에 완전히 분통이 터진 사무는, 온몸에 철갑을 두른 듯한 기세로 똑바로 예민주를 노려보았다.사무의 눈빛에 대해서 예민주는 처음부터 아주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매번 저 자식의 눈을 볼 때마다, 정말 무진 오빠의 눈빛과 너무나도 닮았어. 무진 오빠하고 그야말로 판박이야.’사무가 거기에 서 있을 때는 그야말로 무진의 축소판이었다. 무진의 모습뿐만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에도 성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몇 번 사무 저 새끼와 눈이 마주쳤을 때도 정말 아이러니했어.’‘처음 만났을 때 빨리 도망칠 걸. 정말 후회가 되네.’‘5년 전에 분명히 전혀 상관이 없는 사이가 됐는데, 왜 두 사람 사이에 애가 있는 거야?’‘송성연은 왜 이 두 아이를 낳았지? 무진 씨에게 이미 버림받았는데, 해외에서 편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아?’‘그 여자의 능력이라면 낯선 나라에서도 여전히 잘 지낼 수 있어.’‘왜 운성시에 미련이 남은 거야?’“나를 보지 말고 고개를 돌려!” 결국 예민주는 참을 수가 없었다.사무는 아직 그런 내막을 잘 몰랐기 때문에 여전히 분노한 상태였다.“내 여동생에게 사과하세요!”“이 새끼, 너 지금 나한테 농담하는 거야?”예민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사무를 조롱했다.“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생아 주제에, 아직도 여기서 나한테 이렇게 날뛰다니!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것 아니야?”“이 못된 아줌마!”사진은 지금 지쳤지만 이 여자와 오빠가 이렇게 싸우는 소리를 듣자,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따라서 외쳤다.
예민주는 곧바로 기분이 나빠졌다.원래 길을 잃은 두 아이가 펑펑 울게 만든 다음에, 무진에게 아이들이 그다지 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었다.그러나 예상 외로 아이들은 영리한 데다가 일찌감치 철도 들었다. 졸지도 떠들지도 않은 데다가 얌전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 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무진은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점심 휴식 시간이 제한적이었다.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여기에 좀 더 머물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예민주도 아직 좋은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두 아이가 이렇게 영리한 핑계를 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들 부자 세 사람만 지낼 기회를 절대 줄 수가 없었기에.결국 세 사람이 대표 집무실에 함께 있게 되었다.“어떻게 된 거야? 이건 그렇게 둘러댈 일이 아니야.”“너 계속 큰소리로 말하지 마! 이렇게 시끄러운 것도 몰라?”이제 세 사람은 이미 오후 내내 함께 있게 되었다. 특히 지금 무진은 회의를 하러 갔기에, 대표실에는 그들 세 사람밖에 없었다. 예민주는 이미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나른한 자태로 소파에 기댄 예민주의 얼굴에는 온통 경멸하는 표정만 가득했다.집에서도 이렇게 엄하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사진은 정말 억울해서 입을 열었다가 다시 예민주에게 말려들곤 했다.사진이 낮은 소리로 울먹이면서 말했다.“그런데 아줌마, 우리는 그냥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예민주는 이제 숨기지 않고 냉담한 목소리로 바로 호통을 쳤다. “조용히 해! 아무도 너희들 응석을 받아주지 않아!”예민주의 말투는 아주 야박해서 두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전혀 꺼리지 않았다.역시나 예민주의 말이 막 떨어지자, 사진은 이미 엉엉 울기 시작했다.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초롱초롱한 사진의 두 눈은 지금 완전히 눈물에 젖은 가련한 모습이었다.사무는 평소 집에서는 여동생을 싫어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사실은 몹시 마음이 아팠다.한 손으로 여동생을 가볍게 안고 달래면서 말했다.“괜찮아, 괜찮아. 좀 있다가 아
“예민주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 성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었다. 예민주의 모습을 떠올리자, 한바탕 구역질이 났다.클래식한 파텍필립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서, 다음 순간 성연은 이미 성큼성큼 방문을 나섰다.“빨리 안 따라오고 뭐 해!” 문 앞에 도착한 성연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서한기를 보면서 소리쳤다.10여 분 후, WS그룹 1층.두 손으로 운전대를 꼭 잡은 채, 성연은 아주 멋진 드리프트 솜씨로 차를 건물 입구에 세웠다.주차 도우미 직원과는 불과 1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만 남았기에, 직원은 이미 쓰러질 지경이었다.“무즌 주차를 이렇게 해요?” 이렇게 거친 주차 방식을 보자, 직원은 마음속으로 화가 났다.무의식적으로 차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한바탕 퍼부으려고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운전석의 차문이 열리고 성연이 차에서 내렸다.자신에게 다가온 직원의 눈길을 마주하고서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한바탕 퍼부으려던 직원은 성연의 깊은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말문이 막혔다.“차는 주차장으로 옮기지 말고 여기에 그래도 놔 둬요!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 차가 다른 곳에 있다면, 당신은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겁니다!”“하지만 아가씨, 이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성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거리낌 없이 말했다.“나를 믿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말이 끝나자, 성연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갔다. 마치 뒤에 천군만마가 있는 것처럼 당당하고 기세 등등한 걸음걸이였다.성연의 곁에는 아무도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1층의 안내 데스크.“대표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데스크의 여직원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기에, 방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한눈에 볼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억누른 채 최선을 다해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약속을 하셨습니까?”성연은 입술을 오므린 채 가볍게 웃었다.“대표님은 어디 계세요?”“죄송합니다만, 대표
‘그 여자는 분명히 그 다른 쪽이라고 했어. 즉, 그 여자가 알려준 건 잘못된 방향이었어.’‘만약 그 여자가 방향을 몰랐다면, 위치를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그 여자는 그렇게 자신있게 위치를 말했어.’‘그건 자신이 있다는 말이야!’이렇게 생각하자, 예민주에 대한 사무의 인상은 더욱 좋지 않았다.다음 순간, 턱을 살짝 든 사무가 두 여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제 여동생이 아직 저쪽에 있어요. 잠깐만요, 제가 가서 여동생을 데리고 올게요.”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듣자 좀 놀랐지만, 소년이 돌아서는 걸 보자 그제서야 비로소 대답했다.“아, 여동생! 그래, 그래.”화장실에 간 후, 사무와 사진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못된 여자가 혹시 함정이라도 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기에.하지만 아버지가 아직 거기에 있다는 걸 떠올리자,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한다는 첫 교훈도 얻게 되었다. 이 놀이는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한편 다른 한쪽. 시재 백화점에 갔다가 별장으로 돌아온 성연은 양 손에 큰 봉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온갖 장난감이 가득했다.이것들은 모두 성연이 업무를 마친 뒤에 특별히 아이들을 위해 고른 장난감이다. ‘요 며칠 동안 정말 너무 바빴어. 집에 돌아오면 이미 늦은 밤이거나, 좀 일찍 집에 돌아와도 저녁을 먹고 다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성연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빚을 진 듯한 느낌이었다.집을 열자 거실은 조용했다. 위층에서도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우리 사진이, 사무? 엄마가 돌아왔어!”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성연이 말했지만, 아이들의 열정적인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사진아? 사무야? 너희들 집에 있니?”“사무야?”아래층에서 계속 몇 번이나 소리쳐도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 큰 집에 성연 자신의 목소리만 울릴 뿐.“보스, 아이들은 지금 집에 없습니다.”이때 서한기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집에 없다니?” 성연이 눈썹을 바짝 세웠다. 순간 마음속에
“그 여자는 이전에 엄마하고 알고 지냈던 것 같아. 다만 아직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르겠어.”“그럼 이따가 우리 어떡하지?” 사진이 약간 지친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오전 내내 이곳을 왔다갔다했으니 아이에게는 에너지 소모가 컸다.그리고 방금 위층으로 올라갈 때, 아이들은 여전히 아주 자신있게 서한기보고 먼저 가라고 했다. 그때는 자신감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후회막심’이다.‘지금 아직 한기 아저씨가 있다면. 바로 집에 가서 편하게 누워서 쉴 텐데.’“일단은 우리 계획대로 그 여자한테 엄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온 건 그 여자하고 상관이 없어.”원래 신중한 사무지만, 지금 사무의 말은 오빠라는 사무의 입장과 아주 딱 맞게 진지했다.두 아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전에 화장실에 가겠다고 한 건 핑계였지만, 막상 바깥에 나오자 화장실에 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한참을 가도 식당 창문이나 작은 방은 곳곳에 있는데, 예민주가 말한 화장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 여자가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지?”억울한 듯이 분홍색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사진은 움직이기도 귀찮았다.여동생의 이런 모습을 보자, 사무는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반짝이며 한 바퀴 둘러보았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딴 데 가지 말고. 알았지?”말을 마친 사무는 왔던 길을 다시 달려갔다.“오늘 가지는 좀 맛이 없어.”“그래도 괜찮은데. 먹기 싫으면 나한테 줘.”사무는 식사 중이던 두 아가씨의 앞으로 갔다.“누나, 실례합니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에 있어요?”목소리는 여리지만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밥을 먹고 있던 두 아가씨는 그 말을 듣자 먹던 동작을 멈췄다. 사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눈빛을 반짝였다.‘어디서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온 거야?’ ‘뚜렷한 이목구비에 심플한 검은색 스웨터만 입었는데도 잘 어울리는 걸.’‘얼굴의 통통한 젖살이 큐티 작살인데!’‘그야말로 너무나 귀여운 아이야!’사무는
두 아이를 보면서 예민주는 더욱 초조했다.마음속에 잘 기억해 놓은 뒤, 예민주의 노기는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다시 아이들을 바라볼 때는 이미 이전의 온화한 모습을 회복했다.“사진아, 너희들은 이전에 외국에서 잘 살았다면서? 그런데 왜 갑자기 귀국한 거야?”마치 큰 언니가 아이들을 배려하는 듯 예민주는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지금 두 아이는 이미 이 여자의 목적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엄마의 집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엄마가 한번 가보자고 해서 돌아왔어요.”목소리는 아직 어린 티가 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해맑은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하는 사진의 대답은 가히 ‘예술의 경지’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아까까지만 해도 술술 잘 말하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빈틈이 없어진 거야?’예민주는 기분이 좀 꿀꿀했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이번에 돌아와서 낯선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니? 너희들이 오늘 이곳에 와서 아빠를 찾는 것 같은데, 누가 너희들에게 뭔가 말한 거 아니야?”예민주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계속 집요하게 물었다. 무진이 자신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진에게 등을 진 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사진은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눈썹을 찌푸린 채 예민주를 쳐다보았다.“아줌마, 우리하고 함께 여기서 논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계속 그런 거만 물어봐요?”“맞다. 아줌마, 우리 엄마 알지요? 우리 엄마한테 지금 데리러 오라고 하면 안 돼요?” “오늘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을 엄마가 꼭 혼내 주게요!”“맞아요, 맞아요! 누가 우리를 괴롭힌 걸 알면, 엄마가 반드시 호되게 혼을 내줄 거예요.”두 아이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한 마디씩 하는데, 호흡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예민주는 표정이 붉어졌다는 것도, 심지어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이 두 녀석의 말을 들으니, 송성연이 이 두 녀석을 아주 진지하게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