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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년 1월 4일, 눈 내리는 저녁.
“우리…… 보고 싶어서 만난 거지, 처제?”
두 남녀는 차 안에 있었다.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은 서연이었다. 돌려줄 물건도, 전할 부탁도 없었다. 태주는 그걸 알면서 나왔고, 지금은 보고 싶었다는 말까지 했다.
서연은 종이컵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따뜻한 라테를 샀는데 한 모금도 넘기지 못했다. 종이컵 뚜껑의 작은 구멍으로 김이 빠져나왔다. 태주의 무릎 위에도 검은 커피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형부.”
익숙한 호칭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서연은 다음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그를 그렇게 부르면 언제든 선을 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언니가 처음 소개해 준 날부터 불러 온 말이었다. 지금도 틀린 호칭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태주가 자신을 보는 눈은 달라져 있었다.
“응.”
“저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알아.”
“언니 자리를 갖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그것도 알아.”
“그런데도 형부가 보고 싶었어요.”
태주는 두 손으로 종이컵을 감쌌다.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바로 앞에 서연이 있는데도 그 손을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앞유리에 달라붙은 젖은 눈송이가 난방 열에 녹아 흘렀다. 와이퍼가 물기를 밀어낼 때마다 맞은편 카페의 불빛이 잠깐씩 또렷해졌다.
차 밖에서는 사람들이 목도리를 여미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자신이 부끄러워 서연은 시선을 내렸다.
“나도 서희를 잊은 적 없어.”
“네.”
“모든 걸 잊어야 네가 보이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컵을 감싼 서연의 손이 멈췄다.
언니를 생각하지 말자고 했다면 차에서 내렸을 것이다. 지난 일을 잊고 자기만 보라고 해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태주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언니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 채 서연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더 나쁜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서연은 대답 대신 컵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괜찮다고 해 주지 않는 사람이어서 믿었는데, 지금은 그와 함께 잘못된 곳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둘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서연이 손가락을 펴자 눌린 종이가 작게 울렸지만, 두 사람 모두 그쪽을 보지 않았다.
난방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밖에서 어깨에 붙었던 눈은 벌써 녹아 코트 천을 짙게 적셨다. 서연은 단추를 풀지 않았다. 벗어 놓으면 더 오래 머물겠다는 뜻처럼 보일까 봐서였다.
조수석 발치에는 접은 검은 우산이 놓여 있었다. 서연은 구두 끝으로 우산을 밀지 않게 발을 모았다. 몸을 조금 옮기는 것만으로도 태주가 돌아볼까 신경이 쓰였다.
그를 보고 싶다고 말해 놓고, 정작 눈을 마주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태주가 운전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연은 그가 컵을 홀더에 내려놓는 것을 봤다. 빈손이 되자 더는 쳐다볼 곳을 찾지 못했다.
“역까지 데려다줄게.”
“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됐다. 역에 내려 전철을 타고, 원룸에 돌아가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고 생각하면 됐다. 태주는 실제로 그렇게 끝낼 수 있도록 기어봉에 손을 뻗었다.
서연은 그 손이 움직이기 전에 불렀다.
“태주 씨.”
형부란 호칭 대신 이름을 불렀다.
남자의 손이 기어봉 앞에서 멈췄다. 서연은 뒤늦게 ‘형부’라고 덧붙이지 않았다. 종이컵을 쥔 채 그가 이쪽을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왜 그렇게 불렀어.”
“형부라고 부르면 자꾸 숨는 것 같아서요.”
“숨지 않으면?”
“모르겠어요.”
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덧붙였다.
“그런데 지금 가면, 또 보고 싶을 것 같아요.”
태주는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눈송이가 붙은 창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문을 열고 내리면 저 사람들 사이로 걸어갈 수 있었다. 오늘도 커피 한 잔 마신 일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서연은 손잡이를 찾지 않았다. 그의 손이 기어봉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우리…… 지금 멈출까?”
와이퍼가 앞유리를 한 차례 쓸고 지나갔다. 낮은 물음은 그 소리가 멎은 뒤에도 귀에 남았다. 그만하겠다고 하면 그는 더 묻지 않을 사람이었다.
서연은 컵을 홀더에 내려놓았다.
“아니요.”
태주의 손이 뺨 가까이에서 멈췄다. 기다리는 손에 서연이 먼저 얼굴을 기댔다. 따뜻한 손바닥에 닿은 뒤에야, 눈앞의 사람이 정말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견디기 어려워졌다.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쳤다. 내리면 그의 손에 뺨이 더 깊이 닿았다. 서연은 어느 쪽으로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서연이 그의 손목을 감쌌다. 태주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 다시 그녀와 눈을 맞췄다. 서연은 먼저 잡고도 손가락을 펴지 않았다.
태주가 몸을 숙였다.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서연은 눈을 뜨고도 바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에게 가까이 간 것도, 멈추지 말라고 한 것도 자신이었다.
태주가 물러나려 하자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멈췄다. 서연은 자신이 붙잡았다는 걸 알고도 곧바로 놓지 못했다.
잠깐 뒤에야 손이 풀렸다. 태주의 손바닥은 아직 뺨 곁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다시 다가가지 않았다.
서연은 입을 열었다. 이름을 부르려 했는지, 아무 말이라도 해서 그를 물러나게 하려 했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형부…….”
조금 전 버리려던 호칭이 끝내 입 밖으로 나왔다.
“나도, 알아.”
그는 언니가 사랑했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끝나기 전에 서연이 다시 끌어당겼다.
두 번째 입맞춤은 짧지 않았다. 이가 가볍게 부딪쳤고, 태주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입 안에서 울렸다. 서연은 기어봉 쪽으로 빠져 나가려던 그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잡은 손은 이미 빈손이 아니었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맥박이 뛰었다.
난방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코트 깃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끝이 처음에는 망설이는 것처럼 멈췄다가, 서연이 고개를 더 들자 그대로 내려갔다. 목, 잠긴 단추의 위, 브래지어 천이 시작하는 자리.
“차 안이야.”
태주가 입술 사이에서 말했다.
“알아요.”
“누가 보면.”
“안 봐요. 아까부터 확인했어요.”
말이 부끄러워 서연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뒤로 와이퍼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남았다. 태주의 손바닥이 코트 안에서 가슴을 덮었다. 옷을 입은 채로도 유두가 손금에 걸렸다. 서연의 허리가 시트에서 살짝 떴다가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하자.”
태주가 낮게 말했다. 손은 거두지 않았다.
“형부가 시작해 놓고.”
“그래서 말하는 거야.”
서연은 대답 대신 무릎을 조금 벌렸다. 좁은 조수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태주의 시선이 내려갔다. 코트 자락 아래 어두운 스타킹과, 그 위로 올라간 치마 끝이 보였다.
그의 손바닥이 허벅지 안으로 들어왔다. 스타킹 너머로 온기가 닿자 서연은 이를 악물었다. 종이컵이 홀더 안에서 흔들렸다. 라테는 이미 식어 있었다.
손가락이 스타킹의 얇은 끝을 더듬다 가장자리를 내렸다. 살에 직접 닿는 순간 서연의 숨이 끊겼다. 태주는 그 숨을 듣고도 더 묻지 않았다. 묻기에는 이미 늦은 손이었다.
면 팬티가 한쪽으로 밀렸다. 중지가 틈을 가르고 들어갈 때 서연은 핸들 쪽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젖어 있네.”
혼잣말처럼 낮았다. 비난도 달램도 아니었다. 사실만 있었다.
“……말 안 해도 돼요.”
“내가 알아야 해.”
한 마디가 들어간 뒤에 두 마디가 겹쳤다. 좁은 각도여서 깊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도 서연의 허벅지가 떨렸다. 창문에 김이 서렸다. 맞은편 카페의 불빛이 흐릿해졌다 선명해졌다.
태주가 손을 빼고 벨트 버클을 풀었다. 금속 소리가 차 안에서 유난히 컸다. 서연은 그 소리를 지우려고 다시 그의 입을 막았다. 키스는 서툴렀다. 이가 또 부딪쳤다.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짧지 않았다. 서연이 엉덩이를 들고 건너가려다 콘솔박스에 무릎을 부딪쳤다. 태주가 시트를 뒤로 밀었다. 공간이 조금 늘었을 뿐이었다.
서연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코트는 그대로였다. 벗으면 밖에서 더 잘 보일 것 같아서였다. 속옷만 옆으로 밀어 둔 채 그의 것을 손으로 찾았다. 손안에 들어온 무게가 생각보다 뜨거웠다. 귀두가 이미 젖은 입구에 닿았다.
밀어 넣는 각도가 맞지 않았다. 조금만 들어가고 미끄러졌다. 서연이 허리를 숙여 다시 맞추자 태주의 숨이 목에서 깨졌다.
“아프면 그만해.”
“안 아파요.”
반쯤 들어갔을 때 서연의 입에서 소리가 새나갔다. 그녀는 그 소리를 삼키려다 호칭을 삼키지 못했다.
“형부——.”
태주의 손이 허리에서 멈췄다. 들어간 것도 멈춘 채로 한 번 뛰었다. 서연은 그 정지가 자기 탓인 줄 알고 더 내려앉으려 했다. 태주가 허리를 붙잡았다.
“그 말로 하면 내가 빠져.”
“그럼 뭐라고 해요.”
“지금은…… 이름.”
“태주 씨.”
그제야 그가 허리를 올렸다. 그러나 시트 각도가 받쳐 주지 못했다.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서연의 무릎이 핸들에 닿았다. 경적이 울릴 뻔한 자리에 손이 먼저 갔다. 태주가 핸들을 제압했다. 두 사람은 잠깐 숨을 고르며 서로를 봤다.
차 안에서는 안 됐다.
태주가 이마를 서연의 이마에 붙였다.
“뒤로 가자.”
“네.”
서연이 조수석으로 내려설 때 다리 사이로 액이 흘렀다. 스타킹 안쪽에 온기가 번졌다. 그녀는 그 감각을 모른 척하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잠깐 들어왔다가 문이 닫히며 끊겼다.
뒷좌석은 더 어두웠다. 태주가 지갑을 꺼냈다. 콘돔을 집어 든 손가락에, 지금은 끼지 않은 결혼반지의 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서연은 그 자리를 보지 않으려다 결국 봤다. 포장지를 찢는 소리가 와이퍼 소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태주가 씌우는 동안 서연은 스타킹을 한쪽만 내렸다. 둘 다 벗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고, 전부 벗으면 돌아갈 곳이 없어질 것 같아서였다.
그가 서연의 무릎 사이로 들어왔다. 한 번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서연이 각도를 바꾸자 허벅지 안쪽이 그의 허리에 밀착됐다. 채워지는 감각이 깊어지자 서연은 눈을 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얼굴은 언니가 사랑했던 그 얼굴이었다. 숨소리도 그 목소리였다. 서연은 그 사실을 아는 채로 다리를 더 열었다.
“봐.”
태주가 말했다.
“보고 있어요.”
“눈 감으면 내가 누군지 모를까 봐.”
잔인한 말이었다. 서연은 그 말을 고치라 하지 않았다.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차체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창 너머로 사람이 지나갔다.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여전히 없었다. 그 사실이 안심이 되면서 더 더러워졌다.
태주의 손이 코트 안에서 유두를 문질렀다. 아래에서는 깊어졌다. 서연이 신음을 삼키려 그의 손등을 물었다. 이 자국이 남을 힘까지는 주지 못했다.
절정은 예쁘게 오지 않았다. 서연의 안이 먼저 조여 들었고, 태주가 그 조임을 느끼고 허리를 멈췄다가 더 밀어 넣었다. 서연은 뒷좌석 천장 손잡이를 잡았다. 잡고도 이름이 나오지 않아 다시 그 단어를 삼켰다.
형부.
입 안에서만 불렸다.
태주가 조금 뒤에 따라왔다. 숨이 목에서 갈라질 때 그는 서연의 이름을 불렀다. 언니의 동생으로 부르던 그 이름이 아니었다. 그냥 서연이었다.
둘은 바로 떨어지지 못했다. 빠져나온 뒤에도 이마가 맞닿아 있었다. 콘돔의 끝이 무거웠다. 태주가 매듭을 지어 휴지에 감쌌다. 휴지는 원래 커피를 받치려 컵홀더에 넣어 둔 것이었다.
서연은 속옷을 바로잡다 포기하고 코트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스타킹은 한쪽으로 처진 채였다. 다시 조수석으로 넘어가 앉자 식은 라테가 그대로 있었다. 뚜껑 구멍으로는 더 이상 김이 오르지 않았다.
태주가 벨트를 채우고 운전석에 앉았다. 앞머리를 쓸어 넘긴 손이 잠깐 떨렸다.
“역까지 데려다줄게.”
같은 말이었다. 하기 전의 그 말과 같은 문장이었다.
서연은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가면, 또 보고 싶을 것 같아요.”
이미 하고 난 다음에도 그 말이 나왔다. 태주가 핸들을 쥔 채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집에 가서 씻어.”
“형부 손은요.”
“나는 나중에.”
서연은 그의 손등을 봤다. 이빨 자국은 흐렸다. 반지 자국은 선명했다.
차가 출발하지 않은 채로 한참이 지났다. 눈이 앞유리를 다시 덮었다. 와이퍼가 한 번 더 지나갔다.
***
원룸 불을 켠 것은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서연은 코트를 벗지 않은 채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고 허벅지 안쪽을 봤다. 희미한 붉은 자국이 손가락 두 개 너비로 남아 있었다. 문지르자 더 선명해졌다.
거울 속 목덜미에도 입술 자리가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목폴라를 입어야 했다.
휴대전화가 싱크대 위에서 울렸다.
『도착했어?』
서연은 젖은 손으로 화면만 보다가 내려놓았다. 답을 치면 오늘이 일정이 되고, 치지 않으면 사고처럼 남을 것 같았다.
물을 끄고 나서야 짧게 보냈다.
『도착했어요.』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오는 동안 서연은 자국 위에 수건을 올려 두었다. 덮는다고 지워지지 않는 자리였다.
창밖으로 눈이 아직 내리고 있었다.
그날은 2027년 1월 4일이었다.
열 달 전만 해도, 이 사람은 언니의 남편이었고, 서연은 그 사실을 호칭으로만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봄이는 횡단보도를 건넌 뒤 이모에게 메시지를 보내고서야 다시 걸었다.태주는 아이의 화면 대신 안경점 봉투를 보고 있었다. 손잡이를 너무 오래 쥐어 손가락 마디가 붉어졌다.“내일 이모 집에 가도 돼?”“엄마한테 먼저 말해. 몇 시인데?”“두 시. 내가 지하철 탈 거야.”“역 바꿔 타는 데 알고?”“작년에도 갔잖아.”맞는 말이었다. 태주는 새 안경 때문에 어지럽지는 않은지만 물었다. 봄이는 괜찮다며 안경다리를 귀 뒤로 밀었다.“아빠는 이모 보면 아직 슬퍼?”태주가 걸음을 늦췄다. 봄이는 못 들은 척해 줄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가끔은.”“이모도 그럴까?”“그건 아빠가 대신 말할 수 없지.”“물어봐?”“아니. 아빠 대신 물을 필요 없어.”봄이는 잠깐 입술을 내밀었다. 질문하면 안 된다는 뜻으로 들렸을까 봐 태주가 말을 보탰다.“네가 궁금한 건 물어도 돼. 그런데 아빠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주거나, 이모 대답을 아빠한테 가져오려고 하지는 마.”&ld
서연은 아파트 입구를 지나쳐 한 동을 더 걸었다.현관 번호를 누르려다 문 옆에 붙은 이름을 보고서야 잘못 왔다는 걸 알았다. 같은 모양의 출입문이었다. 장바구니를 고쳐 들고 돌아오는 동안 커피가 손등으로 조금 흘렀다.뜨겁지는 않았다. 뚜껑을 너무 세게 눌러 한쪽이 들려 있었다.자기 집에 들어와 고기부터 냉장고에 넣었다. 무와 대파는 식탁에 두고, 세제는 욕실로 가져갔다. 거울에 제 얼굴이 비쳤다. 조금 전 태주가 본 얼굴도 이랬을까.서연은 세제 봉지를 거꾸로 들었다가 바로 세웠다. 아직 뜯지도 않은 봉지였다.휴대전화가 울렸다.『이모, 아까 마트 앞에 있었지?』봄이였다. 뒤이어 새 안경을 쓴 사진이 왔다. 갈색 테가 아이 얼굴에 잘 어울렸다. 사진 뒤쪽에 아빠의 어깨가 걸려 있었지만 서연은 확대하지 않았다.『응. 봤어. 안경 예쁘다. 네가 골랐어?』『아빠는 잘 보이면 된대. 그게 대답이냐고.』서연은 웃음을 흘렸다.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아빠가 잘 모르는 거지. 다음엔 네가 비교해서 보여 줘.』『했어. 그래도 몰라. 근데 왜 안 불렀어?』입력창에 손가락이 멈췄다.사람이 많았다고 하면 됐다. 신호가 바뀌었고, 장바구니가 무거웠고, 이제 서로 가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고. 그중 마지막 이유만은 봄이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너도 아빠랑 있었잖아.』
서연이 그 집을 떠난 지 5년이 지났다.남색 가방의 손잡이는 그사이 두 번 더 꿰맸다. 이번에 단 실은 원래 것보다 조금 밝았다. 현관에서 실밥을 발견한 서연은 손톱으로 잡아당기지 않고 가위를 가져와 짧게 잘랐다.물건을 챙겨 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토요일이었다.마트 정육 코너 앞에는 점심을 먹고 나온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서연은 국거리 한 팩을 고르고 고기에 적힌 날짜를 확인했다. 작은 무와 대파도 담았다. 세제는 늘 쓰던 것이 할인 중이었다.계산을 마치고 봉투에 물건을 넣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민아가 다음 주 금요일에 밥을 먹자고 했다. 이번에는 회사 사람들과도, 가족들과도 상관없는 약속이었다.‘좋아. 내가 식당 찾을게.’‘지난번처럼 줄 서는 데 말고. 배고프면 나 성질나.’‘원래 나잖아.’곧 욕 한 글자가 답으로 왔다. 서연은 계산대 옆으로 비켜서 소리 내 웃었다. 뒷사람이 지나가자 가방을 다시 어깨에 올렸다.일은 바빴고 가끔 지겨웠다. 수진과 의견이 달라 회의가 길어지는 날도 있었고, 어머니 전화를 일부러 저녁까지 미루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을 보내고도 주말이 오면 누군가와 밥을 약속할 수 있었다.태주에게 걸지 않은 전화만으로 5년을 세지는 않았다.마트 옆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샀다. 사장에게 뚜껑을 한 번 더 눌러 달라고 부탁하고, 장바구니에서 삐져나온 대파를 안쪽으로 밀었다. 집에 도착하면 고기부터 냉장고에 넣을 생각이었다.&nbs
2034년 10월의 금요일 밤, 서연에게 봄이의 메시지가 왔다.‘이모, 엄마랑 싸웠어.’서연은 씻어 둔 물컵을 건조대에 엎다가 휴대전화를 들었다.‘왜?’‘말하기 싫어.’예전 같으면 무슨 일이냐고 거듭 물었을 것이다.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은 말을 받아 줄 사람으로 불린 것 같았다.‘그럼 말하고 싶을 때 해.’그 뒤로 한동안 답이 없었다. 서연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내일은 남은 국거리를 더 사야 했다. 세제도 바닥나고 있었다.밤 10시가 가까워져서야 봄이가 다시 보냈다.‘엄마가 내 사진 맘대로 할머니한테 보냈어. 나 눈 감고 나왔는데.’서연은 휴대전화를 보며 웃었다. 웃는 얼굴을 보내지는 않았다. 아이에게는 웃을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엄마한테 지워 달라고 했어?’‘그게 뭐 어떠냐고 해서 싸웠어.’서연은 답을 쓰려다가 멈췄다. 언니가 무슨 마음으로 사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모르는 동안 커 버린 딸이 아니라, 오늘 자기가 찍은 딸의 얼굴을 부모에게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봄이가 싫다는 말을 없앨 수는 없었다.‘이모가 엄마한테 대신 말할까?’‘아니. 그냥 말한 거야.
2033년 봄, 중학교에 들어간 봄이는 처음으로 이모와의 약속을 취소했다.아프거나 학원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토요일에 같이 나가자고 했고, 봄이는 그쪽이 더 가고 싶었다.약속을 취소해도 되는지 엄마에게 먼저 물었다가 혼났다.“먼저 잡은 약속이 있잖아.”“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잖아.”“이모는 토요일을 너한테 비워 뒀을 텐데.”“엄마가 이모도 아니면서 왜 먼저 안 된대.”서희는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딸의 말투는 얄미웠지만 틀린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그럼 네가 직접 설명해. 엄마가 다른 핑계 대 주지는 않을 거야.”봄이는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서연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한참 걸렸다. 나중에 아프다고 하면 쉬울 것 같았지만 그러면 이모가 뭘 먹었는지, 병원은 갔는지 물을 것이었다.“이모, 토요일 있잖아.”서연은 사무실 밖으로 나왔는지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응. 뭐 준비할 거 있어?”“나 친구들이랑 놀고 싶은데.”말을 꺼내 놓고 봄이는 이불 무늬만 봤다.“그래서 우리 약속을 바꾸고 싶어?”“응.”
2032년 가을, 수진이 교육실 문을 닫고 들어왔다.“팀장님, 내일 매장 사람 한 명이 못 나온대요.”서연은 새 진열 안내서에서 눈을 들었다.“언제 연락 왔어요?”“방금. 아이가 열이 난다고요.”“당장 빠지는 시간부터 확인해요. 내일 나올 수 있는 사람도 같이.”수진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대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손님 앞에서 반품 기준을 잘못 말할까 봐 긴장하던 직원이었다. 지금은 수도권 매장의 교육을 함께 맡고 있었다.“제가 하루 종일 서면 되긴 해요.”“내일 수진 씨 다른 일정은요.”“오후에 교육 하나요.”“그럼 두 사람 일을 다 하는 거잖아요.”서연은 비어 있는 시간만 표에 표시했다. 오전 물류 작업은 본사에서 한 사람을 보낼 수 있었고, 저녁 마감은 점장이 시간을 바꾸기로 했다. 수진은 그 사이 세 시간만 지원하고 교육에 들어가기로 했다.결정한 내용을 아픈 아이를 돌보는 직원에게 보낸 뒤에도 서연은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붙이지 않았다. 오늘 그 직원이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아이의 상태였다.미경이 문 앞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옛날 같으면 네가 가겠다고 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