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2027년 1월 5일 아침, 서연은 목폴라의 깃을 끝까지 올렸다.
거울에 목덜미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화장으로 가리기에는 자리가 깊었고, 가린다고 손이 그 자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출근 가방을 메다 휴대전화가 한 번 울렸다.
『목 추워. 목도리 해.』
태주의 문자는 늘 그런 식이었다. 하고 난 일을 다시 말하지 않고, 날씨나 밥이나 길을 말했다. 서연은 답을 쓰다 지웠다. 『자국 보여요』라고 치면 그가 달려올 것 같았고, 『괜찮아요』라고 치면 거짓말 같았다.
화면을 끄자 날짜가 눈에 걸렸다. 1월 5일.
그 숫자가 겹치며, 다른 해의 같은 계절이 아닌 다른 달이 떠올랐다.
열 달 전.
2026년 3월, 언니의 장례식장.
“이모, 엄마는 밥 안 먹어?”
봄이가 국그릇 옆에 놓은 숟가락을 하나 더 집었다. 어른용이라 아이의 손바닥 밖으로 자루가 길게 나왔다.
서연은 식은 밥을 뒤적이던 손을 멈췄다. 빈소 안에서는 누군가 코를 풀었다. 주방 쪽에서는 빈 접시들이 부딪쳤다. 그 소리 사이에서 봄이는 여전히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엄마 것도 놔야지.”
아이 앞에는 맵지 않은 국을 따로 받아 놓았다. 한 숟갈도 줄지 않았다. 서연은 물컵을 아이 쪽으로 조금 밀었다.
“봄아. 엄마는 이제 밥을 못 먹어.”
“배 안 고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서연은 입 안쪽을 깨물었다. 오늘만 벌써 몇 사람이 엄마가 좋은 곳에 갔다고 했다. 멀리 갔다는 사람도, 하늘나라에 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봄이는 그때마다 천장을 봤다.
서연이 대답하기 전에 아이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아빠한테 물어볼래.”
아이의 운동화 뒤축이 접혀 있었다. 서연이 무릎을 굽히자 봄이는 익숙하게 어깨를 짚었다. 지난달 생일에 사 준 신발이었다. 언니는 한 치수만 크게 사라며 신신당부했다.
서연은 뒤축을 펴고도 잠깐 손을 떼지 못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태주는 빈소 입구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조문객의 손이 그의 팔을 두 번 두드렸다. 태주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른 사람이 들어오자 다시 숙였다. 봄이가 바짓단을 잡을 때까지 그 자세였다.
“아빠. 엄마 밥.”
태주의 시선이 아이 손에 들린 숟가락으로 내려갔다.
“봄아.”
“아빠가 불러. 엄마 안 들리나 봐.”
태주의 입술이 벌어졌다. 아이가 기다리는 동안에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이를 안으려다 말고 상복 소매를 걷었다. 손목에 마른 밥풀이 붙어 있었다. 언제 묻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서연이 손수건을 꺼내 건네자 태주는 받기만 했다.
손가락이 스쳤다. 그 짧은 접촉을 서연은 나중에야 기억했다. 그날은 그냥 천을 건넨 일이었다. 밥풀을 떼는 남자의 손등이 유난히 힘줄이 서 있었던 것만 남았다.
“제가 잠깐 데리고 있을게요. 형부는 인사 마저 하세요.”
“혼자 괜찮겠어?”
“둘인데요, 뭐.”
서연은 말하고 나서 입술을 다물었다. 평소 같으면 언니가 옆에서 그러니까 둘이 싸우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봄이가 먼저 이모가 맨날 진다고 웃었을 것이다.
오늘은 아무도 말을 받지 않았다.
복도 끝 휴게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창문 아래 난방기가 뜨끈했지만 유리 너머 나무는 아직 맨가지였다. 서연은 봄이의 겉옷 지퍼를 올려 주고 옆에 앉았다. 봄이는 숟가락을 무릎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엄마 죽었어?”
서연의 손가락이 지퍼 끝에 걸렸다.
“누가 그랬어?”
“아까 할머니가. 우리 엄마 죽었다고 울었어.”
아이는 난방기 구멍을 보며 말했다. 서연은 대기실에서 엄마를 말리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엄마는 언니의 이름을 부르다가 숨이 차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서연은 물을 가지러 뛰느라 봄이가 어디 있었는지 못 봤다.
“응.”
겨우 나온 대답이 너무 작았다. 서연은 다시 말했다.
“엄마가 사고로 많이 다쳤어. 그래서 죽었어. 우리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대.”
“병원에 가면 되잖아.”
“병원에서도 못 고쳤대.”
봄이가 숟가락을 뒤집었다. 둥근 면에 천장 불빛이 작게 맺혔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그 불빛을 문질렀다.
“이모도 봤어?”
“아니. 이모는 못 봤어.”
“그런데 어떻게 알아?”
서연은 무릎 위 손을 움켜쥐었다. 멀리서 사고가 났다는 전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가득한 종이, 언니를 데려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설명. 그 사이 그녀가 실제로 한 일은 어머니를 부축하고 휴대전화를 충전한 것뿐이었다.
“아빠가 연락을 받았어. 엄마랑 같이 있던 곳에서.”
봄이가 드디어 서연을 봤다.
“이모도 울어?”
“응. 이모도 엄마 보고 싶어서.”
“울면 코 아픈데.”
아이의 인중이 벌겋게 헐어 있었다. 서연은 가방에서 새 휴지를 꺼냈다. 문지르지 않고 콧물만 살짝 눌러 닦았다. 봄이는 고개를 피하지 않았다.
“이건 부드러운 거야.”
“엄마는 물 묻혀 줘.”
“그랬구나. 이모가 조금 묻혀 올게.”
그녀가 일어서자 봄이가 치맛자락을 잡았다. 처음에는 손끝으로, 곧 천을 구겨 쥘 만큼 세게.
“가지 마.”
“저기 정수기까지만.”
“나도 갈래.”
서연은 가방을 그대로 둔 채 아이와 정수기까지 걸었다. 두 걸음 거리였다. 종이컵에 물을 받아 휴지 모서리를 적시는 동안 봄이는 서연의 치마를 놓지 않았다.
휴게실로 돌아왔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회사 사장님이었다. 화면에는 연차는 정리해 둘 테니 급하게 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문자가 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서연이 금요일에 고치기로 한 상품 페이지 사진이 작게 보였다.
뚜껑이 잘 닫힌 반찬통 여섯 개.
서연은 화면을 껐다. 봄이가 검은 휴대전화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모 집에 가?”
“오늘 밤은 여기 있을 거야.”
“나 잘 때도?”
“응. 잘 때도.”
“화장실 갈 때는 말하고 가.”
“알았어. 꼭 말할게.”
봄이는 그제야 치맛자락에서 손을 뗐다. 대신 서연의 손가락 두 개를 잡았다. 아이의 손은 더웠고 손톱 밑에는 파란 색연필 가루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 울지 말라고 건네준 색칠책을 아까까지 쥐고 있었다.
서연은 그 책을 펼쳤다. 토끼의 귀 한쪽만 파랗게 칠해져 있었다.
“엄마한테 보여 주려고 했는데.”
서연은 아이 무릎 위에 책을 펼쳐 두고 구겨진 모서리를 눌렀다. 봄이는 토끼 귀를 만지다가 숟가락을 책 위에 얹었다.
“아빠도 밥 안 먹었어.”
“아빠한테 가 볼까?”
봄이가 일어났다. 서연은 아이가 놓고 갈 뻔한 숟가락을 챙겼다. 돌아오는 복도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봄이의 얼굴을 만지려 하자 아이는 서연 뒤로 숨었다. 서연이 대신 짧게 고개를 숙였다.
태주는 빈소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손 사이에 서연이 건넨 손수건이 구겨져 있었다. 봄이가 다가가자 그는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아이 눈높이로 몸을 낮췄다.
“어디 갔다 왔어.”
“물.”
봄이가 한 손으로 아빠의 무릎을 짚었다. 다른 손은 여전히 서연의 손가락을 잡고 있었다.
태주가 아이를 안아 올리려다 말고 그녀를 봤다.
“조금만 같이 있어 줘.”
“네. 봄이가 놓을 때까지요.”
서연은 아이를 사이에 두고 그 옆에 앉았다. 챙겨 온 어른용 숟가락을 무릎 위에 놓자 봄이가 손끝으로 자루를 만졌다.
가까이 앉은 태주의 어깨가 상복 천 너머로 닿았다. 서연은 그 닿음을 피하지 못했다. 피할 자리가 없었다. 그때는 그 온기를 죄라고 이름 붙일 줄도 몰랐다.
***
봄이는 새벽에 두 번 깼다.
한 번은 물을 달라고 했고, 한 번은 아무 말 없이 서연의 귀를 만졌다. 휴게실에 편 이불 가장자리에서 서연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 손이 떨어진 뒤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침에는 머리끈이 없었다. 가방을 세 번 뒤졌는데 검은 고무줄 하나만 나왔다. 봄이는 서연의 손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아파.”
“살살 묶을게.”
“엄마가 쓰는 거 아니야.”
서연은 빗 대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골랐다. 목덜미 쪽에 땀이 말라 붙어 있었다. 빗어 내릴 때마다 봄이의 어깨가 움찔해서, 결국 물수건으로 눌러 정리하고 묶지 않았다.
빈소로 나오자 엄마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박정숙은 딸의 얼굴을 보더니 제 무릎에서 카디건을 들어 건넸다.
“너 추운 데서 잤지.”
“안 추웠어. 봄이가 뜨거워서.”
“밥은?”
“같이 먹자.”
엄마는 카디건을 다시 접었다. 모서리가 맞지 않아 펴고, 또 접었다. 서연은 그 옆에 앉아 카디건 한쪽 끝을 잡아 주었다. 엄마 손가락에 밴드가 붙어 있었다. 언니 사고 소식을 듣고 급하게 짐을 싸다가 손톱이 꺾였다고 했다.
태주가 다가와 정숙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머니. 이제 준비해야 한대요.”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주의 구두 끝만 내려다보았다.
서연은 그 옆모습을 봤다. 허리를 숙인 목덜미가 짧게 드러났다. 나중에, 훨씬 나중에 그 자리에 입을 맞추게 될 줄은 그날의 서연은 몰랐다.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뒤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서연은 봄이의 손을 아버지에게 맡겼다. 엄마를 부축하려고 빈손이 필요했다. 닫힌 관 앞에서 정숙의 무릎이 꺾였다.
“얼굴도 못 보고 보내는 게 어디 있어.”
서연은 엄마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었다. 어제도, 그제도 들은 말이었다. 멀리서 온 관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가족이 언니라고 믿고 받아 든 것은 관과 전달받은 서류, 그 위에 놓인 언니의 사진이었다.
“엄마, 나 좀 봐. 여기 앉아.”
“내가 뭘 봐. 우리 딸을 봐야지.”
***
열 달이 지난 새벽, 서연은 원룸 책상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커튼은 치지 않았다. 바깥 가로등 불빛이 방 안을 반만 밝혔다. 태주는 이미 들어와 있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소리를 듣고도 서연은 목폴라를 내리지 않았다.
“목 보여.”
태주가 먼저 말했다.
“출근해야 해요.”
“그래서 지금 보자는 거야.”
서연이 깃을 내리자 그의 시선이 자국에 멈췄다. 손가락이 그 위를 스쳤다. 어제 저녁의 입술이 남긴 자리였다. 태주가 무릎을 꺾었다. 서연은 그의 어깨를 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 손은 밀지 못하고 귀 뒤로 갔다.
책상 모서리가 허벅지 뒤에 배었다. 태주가 레깅스 허리를 내렸다. 서연은 소리가 샐까 봐 자기 입을 막았다. 막은 손 사이로 숨이 새었다.
그의 혀가 먼저 닿았다. 차가운 코끝이 안쪽에 스쳤고, 곧 입술이 열렸다. 서연의 무릎이 그의 귀를 조였다. 태주는 그 조임을 풀라고 하지 않았다.
“형부—— 지금.”
“지금은 이 말 하지 마.”
말은 그렇게 하고 혀는 멈추지 않았다. 깊게 들어와 위쪽을 끌어올리자 서연의 허리가 책상에서 떴다. 펜꽂이가 쓰러졌다. 태주가 한 손으로 펜을 집다 말고 다시 허리를 붙잡았다.
절정이 가까워지자 서연은 그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밀쳐야 하는 손이 잡아당기는 손이 됐다. 안에서 오르자 다리가 떨렸다. 태주는 그 떨림이 끝날 때까지 입을 떼지 않았다.
서연이 숨을 고르고 나서야 그가 일어났다. 입가에 묻은 것을 손등으로 닦지 않고 서연의 허벅지 바깥쪽으로 문질렀다. 지우는 손길이 아니었다. 남겨 두는 손길이었다.
서연은 내려간 목폴라 깃을 다시 올렸다. 올려도 속은 아직 열려 있었다.
“그때 빈소에서 형부가 안 운 이유를, 지금은 알 것 같아요.”
태주의 눈이 멈췄다.
“무슨 소리야.”
“울면 그 자리에서 무너질 것 같아서 안 운 거죠. 지금 내 앞에서 무릎 꿇는 것도, 그때랑 비슷한 일이에요.”
태주는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서연의 무릎을 한 번 쓸고 일어서며 말했다.
“울지 않은 게 잘한 일은 아니야.”
“알아요. 그래서 더 나쁜 거죠.”
서연은 레깅스를 끌어올렸다. 책상 위에 넘어진 펜을 세웠다. 펜촉에 묻은 잉크가 손가락에 번졌다.
창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2027년의 아침이었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아직 2026년 3월의 관 앞이었다. 열리지 않은 뚜껑, 그 위의 사진, 그리고 울지 않던 형부의 옆모습.
화요일 4시, 서연은 유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습관처럼 정류장 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방향을 바꿨다. 명자가 5시에 봄이를 데리러 가겠다는 문자는 3분 전에 왔다. 서연은 그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서연은 문자에 짧게 답했다.어머니, 감사합니다. 저녁 드시고 천천히 계세요.명자는 밥은 해 놓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자신이 없어도 저 집의 저녁이 굴러간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뒤따라와서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서운함의 밑바닥이 무엇인지, 정류장을 지나며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원룸까지는 회사에서 버스로 18분이었다. 며칠 비운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티가 났다. 현관에 신문 두 장이 끼어 있었고, 싱크대 배수구는 바싹 말라 있었다.서연은 창문부터 열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우편물을 날짜순으로 나눴다. 관리비 고지서, 카드 명세서, 광고 전단. 언니가 준 반찬통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토요일에 가져간 작은 통만큼 빈 네모가 생겨 있었다.냉장고에는 달걀 두 개와 물, 오래된 고추장뿐이었다. 배달 음식을 시킬까 하다가 동네 분식집으로 걸어갔다. 원룸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대학 친구이자 회사 동료인 조민아에게 전화가 왔다.“너 오늘 어디야?”“내 집.”“내 집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요즘은 형부네 있는다며.”“화요일은 여기 오기로 했어.”서연은 떡볶이 봉투를 한 손으로 바꿔 들었다. 민아는 지금 근처라며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서연은 방 안의 빨래 더미를 떠올렸지만 오라고 했다.20분 뒤 민아는 편의점 캔맥주 대신 탄산수 두 병을 들고 왔다. 서연이 술을 마시고 다시 아이 있는 집에 갈까 봐 골랐다는 말에, 서연은 괜히 웃었다.두 사람은 낮은 상 앞에 앉아 떡볶이와 김밥을 나눠 먹었다. 5시가 지나자 봄이가 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는 사진이 왔다. 민아는 장례식장에서 서연의 부모 곁을 지키다 먼저 돌아갔다. 그 뒤로는 길게 통화하지 못했다.“한 달만 있는 거 맞아?”“4월 14일까지.
월요일 오후 3시 52분, 고객문의 창에 빨간 표시가 떴다.선물로 보낸 반찬통 세트에 작은 뚜껑이 하나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안에 다시 보내야 내일 출고가 가능했다.서연은 창고 재고를 확인하고 송장을 만들었다. 시계가 3시 57분을 가리켰다. 미경이 외투를 입는 서연 옆으로 왔다.“답변은 내가 보낼게. 파일만 열어 둬.”“송장까지 만들었어요. 주소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알았어. 뛰지 말고 가.”서연은 컴퓨터를 끄지 못한 채 가방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주에게 버스가 늦으면 5분쯤 늦을 수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바로 왔다. 선생님께 연락하겠다고 했다.문자를 넣고 화면을 내리는데, 지난주 작은방의 요 주름이 손가락에 남는 것 같았다. 뛰지 말라는 말은 아이 앞에서 나온 잔소리였는데, 지금은 자기 심장에도 해당됐다.버스는 다행히 제시간에 왔다. 유치원 문 앞에 도착하니 4시 56분이었다. 겨우 4분 남았는데 심장은 늦은 사람처럼 뛰었다.봄이는 외투 지퍼를 올리지 않은 채 나왔다. 선생님은 아침에 태주가 산책 동의서를 잘 전달했다고 말했다. 서연은 가방 안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이모 뛰었어?”봄이가 서연의 붉어진 얼굴을 봤다.“조금 빨리 걸었어.”“아빠가 뛰지 말라고 했는데.”“그러게. 이모도 혼나야겠네.”봄이는 지퍼를 올려 달라며 턱을 들었다. 서연은 숨을 고르면서 끝까지 채웠다. 아이의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다른 숨과 겹치지 않게, 그녀는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집에 돌아온 뒤 미경에게 전화가 왔다. 출고는 마쳤으니 내일부터는 3시 30분에 새 문의를 넘기라고 했다. 대신 사진이 필요한 오전 업무는 서연이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죄송해요.”“미안해할 거면 인수인계 꼼꼼히 해. 둘 다 뛰다 쓰러지면 그땐 진짜 곤란하니까.”서연은 메모장에 3시 30분을 크게 적었다.봄이는 거실 바닥에 산책 준비물을 펼쳤다. 노란 물병, 작은 손수건, 운동화. 수요일에 가져갈 것인데 이틀 전부터
일요일에는 이불을 빨기로 했다.서연이 작은방 요의 커버를 벗기자 봄이가 베갯잇을 들고 따라왔다. 자기 것도 같이 빨겠다는 말에 태주가 세탁기 앞에서 색을 나눴다. 요 커버를 뒤집는 동안 서연은 수요일 밤의 주름이 남아 있는지 봤다. 세탁망 안으로 밀어 넣자 그 주름은 보이지 않았다.“이건 흰 것끼리. 분홍 이불은 다음.”“왜 같이 안 해?”“분홍 물 들면 이모 베개도 분홍색 돼.”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건 예쁠 것 같다고 했다. 서연은 웃으며 자기 베갯잇을 흰 빨래 더미에 넣었다.욕실 아래칸에서 개인 세제를 꺼내려는데 언니가 쓰던 섬유유연제 병이 흔들렸다. 뚜껑 둘레에 말라붙은 파란 액체가 보였다. 서연은 자기 병만 빼고 위칸 문을 닫았다.태주는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 건조대를 닦았다. 서연이 창틀 먼지를 훑는 동안 봄이는 노란 집게를 전부 자기 바구니로 가져갔다.“오늘부터 이건 내 거.”태주가 순순히 남은 집게를 챙겼다. 서연은 그 모습에 웃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창틀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나눈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처제라는 두 글자와, 끝나지 못한 오 분.첫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실 서랍도 정리했다. 비어 있는 색연필 통, 다 쓴 건전지, 유효기간이 지난 쿠폰이 나왔다. 태주는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직접 확인했다. 서연은 물건을 들 때마다 물었다.“이 영수증은요?”“버려도 돼.”“이 충전선은?”“가족 태블릿 거야. 남겨 줘.”소파 아래에서 태블릿을 찾아 충전기에 꽂았다. 화면 한쪽이 금이 가 있었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봄이는 비밀번호를 안다며 숫자를 눌렀다. 자기 생일 네 자리였다.“내가 춤추는 거 볼래?”태주가 먼지 묻은 손을 바지에 닦았다.“빨래 널고 보자.”“지금 조금만.”아이는 동영상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는 작년 겨울 날짜가 적혀 있었다. 분홍 양말을 신고 거실에서 빙글도는 봄이가 썸네일에 보였다.서연은 서랍 속 건전지를 한 봉지에 모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화면 속 봄
토요일 아침, 냉장고의 주말 칸은 비어 있었다.태주는 주간표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연은 식빵 봉지를 닫으며 물었다.“오늘 장은 누가 봐요?”“내가 봐야지.”“봄이는요?”“같이 가거나 엄마한테 잠깐 부탁하고.”소파에서 그림을 그리던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나 이모랑 갈래.”태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먼저 제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원룸에 가서 우편물을 챙기고 세탁물을 가져오려 했다.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다.“형부는 집에 있을 거예요?”“오전에 회사 서류만 좀 볼게. 오후엔 봄이랑 있을 거고.”“그럼 제가 장 봐 올게요. 원룸도 들러야 해서.”태주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목록을 보냈다. 쌀, 우유, 달걀, 봄이가 먹는 김, 두부. 서연은 자기 샴푸와 세제를 따로 적었다.“장 본 건 봄이 봉투 돈으로 쓰면 돼.”“공동으로 먹는 것만요.”“알았어.”그가 고집하지 않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태주는 봄이에게 마트에서는 이모 손을 놓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보다 카트를 잡겠다고 했다.원룸에 들르자 봄이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서연은 보일러를 잠깐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고지서를 책상 위에 놓고, 세탁 바구니에서 필요한 옷만 골랐다. 봄이는 창가에 서서 아래 골목을 봤다. 그 사이 서연은 욕실 선반만 확인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는 어제 밤을 다른 방에 두기로 했다.싱크대에는 언니가 준 반찬통이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봄이가 노란 뚜껑을 알아봤다.“우리 집 거.”“이모 주라고 엄마가 가져온 거야.”“그럼 이제 이모 거야?”서연은 통을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내려놓았다.“응. 이모가 쓰는 거지.”봄이는 뚜껑을 하나씩 맞춰 보고는 가장 작은 통을 골랐다. 마트에서 딸기를 사 담아 가자고 했다. 서연은 씻은 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주말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봄이는 약속대로 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과자 진열대 앞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서연은 과자 하나를 고르게 하고 목
금요일 오후, 봄이의 담임은 작은 봉투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다음 주 수요일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요. 동의서와 전에 쓰시던 비상 연락 카드를 넣었어요. 바뀐 연락처 확인해서 월요일까지 보내 주세요.”서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멈췄다.“제가 이모라서요. 아빠에게 그대로 전할게요.”“네. 보호자분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이모도 보호자야.”봄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 카드에 이모 번호도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아빠가 확인해서 보내 달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보호자가 뭐야?”“봄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챙겨 주는 어른.”“그럼 이모도 보호자네?”서연은 걸음을 늦췄다. 아이 손이 장갑 안에서 꼼지락거렸다.“그럼.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추운데 혼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아빠는?”“아빠는 봄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챙겨 주잖아.”“엄마는?”찬 바람이 모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봄이의 귀를 덮어 주었다.“엄마도 그랬지.”봄이는 잠시 바닥의 보도블록만 밟아 걸었다. 검은 칸은 건너뛰고 회색 칸에만 발을 놓았다. 서연도 아이 속도에 맞췄다. 보호자라는 말이 수요일 밤의 문 닫힌 작은방과 겹쳐, 그녀는 장갑 안에서 아이 손을 더 정확히 쥐었다. 정확히 쥘수록 밤에 한 일이 보호와 멀어졌다.집에 돌아오자 봄이는 물병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서연은 동의서 봉투를 냉장고 위에 두었다. 자기 이름은 직접 쓰겠다며 연필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연습할 종이를 내줬다.아이가 강봄을 세 번 쓰는 동안 서연은 사과를 깎았다.태주는 오늘은 7시 10분쯤 들어오겠다고 미리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주간표의 저녁 칸에 그 시간을 적었다. 8시부터 할 일은 예정대로 할 수 있겠다는 걸 확인하고 봄이와 먼저 밥을 먹었다.7시가 조금 넘어 현관문이 열렸다. 태주는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친 채였다. 봄이가 봉투를 들고 달려가자 그는 신발도 벗기
서연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천장이 낯설었다. 얇은 요 아래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고, 닫힌 문 너머에서 수도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작은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이 요 위에서 그를 받아들인 밤이 떠올랐다.시계는 6시 12분이었다.허벅지 안쪽이 딴딴했다. 요 옆 작은 휴지통에 티슈가 구겨져 있었다. 태주가 새벽에 몰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티슈를 더 깊이 눌러 넣었다.복도에서 먼저 소리가 나는지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물 한 컵을 마시러 나갔다가 옷차림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의 감각까지 아침의 일이 되어 있었다.서연은 셔츠를 챙겨 욕실로 갔다.문 앞의 작은 발 받침을 비켜 디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잠을 설친 티가 났다. 태주와 마주치기 전에 씻으려고 일찍 나온 것이 더 민망했다. 손목 안쪽에 얕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가 붙잡았던 자리인지, 스스로 이를 악물다 남은 자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 불이 켜졌다. 태주가 밥솥을 열어 보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벌써부터 늦으면 사장님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려요.”“밥은 해 놨어. 국은 어제 거 데우면 되고.”태주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그녀를 다시 봤다.“거기.”“뭐 묻었어요?”“옷깃. 안으로 접혔어.”그는 자기 목 옆을 가리켰다. 서연은 반대편 깃을 만졌다가 손을 바꿨다. 태주가 한 번 더 자기 옷깃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가 다가올 것처럼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다가온 손끝이 깃을 펴다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두의 윤곽이 잠깐 섰다. 형광등이 그 자리를 그대로 비췄다. 태주의 시선이 그 점을 스치고 냉장고로 도망갔다. 서연도 본 척하지 않았다. 못 본 척하는 공기가 어제 밤보다 더 짙었다.“됐어.”태주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멀쩡해진 옷깃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린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