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8화. 웃음을 사지 못하는 남자
한시준은 일주일 동안 진서아를 웃길 방법을 생각했다.
정확히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회의 중에도,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준비실에서 봤던 얼굴이 떠올랐다. 눈꼬리가 완전히 휘어지고, 웃음을 참지 못해 입을 가리던 모습.
자신의 앞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농담을 준비하는 건 우스웠다.
웃긴 이야기를 찾아 외우는 건 더 우스웠다.
무엇보다 그렇게 얻은 웃음이 자신 때문인지, 외워온 문장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시준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약 시간보다 십오 분 일찍 에덴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서아가 준비실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나 VIP룸으로 향하던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복도 안쪽을 훑었다.
준비실 문은 닫혀 있었다.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준은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정각이 되자 서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선을 따라 매끄럽게 떨어지는 옷과 붉은 입술이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선명했다.
"일찍 오셨네요."
서아가 웃었다.
시준은 그 미소를 한참 바라봤다.
예쁘고, 부드럽고, 완벽했다.
그래서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요?"
서아가 물었다.
"오늘 화장 달라?"
"아니요."
"그런데 왜 쳐다봐."
"손님 얼굴 보는 것도 안 돼요?"
서아는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앉았다.
술병을 들려는 손보다 시준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병목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가져왔다.
서아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제가 따를게요."
"됐어."
시준이 직접 잔을 채웠다.
서아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오늘은 접대받기 싫으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
"정말요?"
"그래."
서아는 술병에서 손을 거두고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린 채 시준을 바라봤다.
"알겠어요."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준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이 비어도 채우지 않았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질문도 꺼내지 않았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 정확히 따르고 있었다.
오 분이 지나자 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어."
"그럼 대화해드릴까요?"
해드릴까요.
그 한마디가 거슬렸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
서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딱히 없는데요."
시준의 눈빛이 낮아졌다.
"나랑 할 말이 없어?"
"손님이 원하시는 주제를 말씀해주시면 맞춰드릴 수 있어요."
"내가 고르지 말고 네가 하라고."
"왜요?"
서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오늘은 평소랑 다르게 해보고 싶으세요?"
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아가 웃었다.
또 그 미소였다.
"이런 식으로 가만히 계시면 제가 알아서 진짜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았어요?"
시준의 손가락이 잔 표면을 눌렀다.
"틀렸어?"
"네."
대답은 단호했다.
"부사장님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도 여기는 에덴이고, 저는 일하는 중이에요."
서아는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정리했다.
"제가 알아서 하는 것도 전부 접객이에요."
시준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지난주 자신이 세운 방법은 시작부터 실패했다.
요구하지 않으면 진짜 표정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아는 요구가 없는 상황에 맞는 태도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럼 민우 앞에서는."
서아의 시선이 움직였다.
"왜 일하는 중인데 그렇게 웃었어."
"준비 중이었으니까요."
"그게 달라?"
"손님 앞은 아니었잖아요."
"여긴 나밖에 없어."
"그래도 손님이시죠."
시준의 턱이 굳었다.
어떤 말을 해도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손님.
돈을 내고 정해진 시간 동안 진서아를 만나는 남자.
"그놈이 무슨 말을 하면 웃어?"
"민우 씨요?"
서아는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몰라요."
"모른다고?"
"민우 씨가 항상 웃긴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왜 걔한테는 웃었어."
"그때 상황이 웃겼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시준은 침묵했다.
자신도 그 장면을 봤다.
특별한 말은 없었다.
잘못 얼린 케이크와 어처구니없는 변명뿐이었다.
돈도, 선물도, 능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더 불쾌했다.
서아가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저를 웃기고 싶으세요?"
"아니."
대답이 너무 빨랐다.
서아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럼 왜 계속 웃은 얘기만 해요?"
"네가 다른 얼굴을 하니까 궁금한 거야."
"그 얼굴을 부사장님한테도 보여주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시준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서아가 자신 때문에 웃는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손님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진짜 웃음 한 번으로 관계가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보고 싶었다.
자신이 아닌 남자가 너무 쉽게 얻은 것을 갖고 싶었다.
시준은 잔을 다시 들었다.
"네가 웃으면 방 분위기가 좀 나아지겠지."
서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렇게요?"
"그거 말고."
"그럼 어떤 웃음이요?"
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명하는 순간 우스워지는 건 자신이었다.
돈을 내고 여자를 부른 남자가, 돈으로 살 수 없는 웃음을 달라고 매달리는 꼴이었다.
서아는 그가 원하는 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부사장님이 원하시는 게 웃음인지 진짜인지부터 정하세요."
"둘 다."
결국 시준이 말했다.
서아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다시 접객용 미소를 지었다.
"욕심이 많으시네요."
"이제 알았어?"
"처음부터 알았죠."
서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집었다.
시준의 잔이 아니라 자신의 잔이었다.
술을 조금 따른 뒤 입술만 적셨다.
"그런데 진짜는 주문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나오는데."
"저도 모르죠."
"네 감정인데 네가 몰라?"
"제가 웃기면 웃고, 화나면 화내는 거예요."
서아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걸 미리 정해서 보여주면 진짜가 아니잖아요."
시준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가 웃기면 웃는다는 거네."
"웃기시면요."
"내가 재미없다는 뜻이야?"
서아는 잠깐 고민하는 척했다.
"아직까지는요."
시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아는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 표정까지 예상한 사람처럼 태연했다.
"화내지 마세요."
"안 냈어."
"지금 기분 나쁘시잖아요."
"내가 널 웃기려고 노력이라도 했나."
"아니라면서 왜 자꾸 확인하세요?"
서아의 말이 정확히 찔러왔다.
시준은 술을 마셨다.
평소라면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의 말이 거슬리면 입을 막거나 방에서 내보내면 됐다.
하지만 서아를 내보내면 오늘도 자신만 답을 얻지 못한 채 남는다.
"해봐."
시준이 말했다.
"뭘요?"
"네가 웃기는 이야기."
서아가 눈을 깜빡였다.
"제가 부사장님을 웃겨요?"
"네가 먼저 해."
"그러면 부사장님도 해요?"
"생각해보지."
서아는 한동안 시준을 바라봤다.
그러다 최근 대기실에서 있었던 사소한 실수를 하나 이야기했다. 신입 직원이 VIP용 얼음 대신 장식용 모형 얼음을 가져왔다는 내용이었다.
시준은 끝까지 듣고도 웃지 않았다.
"안 웃기세요?"
"전혀."
"저도 부사장님 이야기 들으면 이런 기분일 것 같네요."
서아가 말했다.
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래도 예상돼요."
"뭐가."
"웃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실 거잖아요."
서아는 술잔을 그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부사장님은 너무 티가 나요."
"내가?"
"네."
"그 말 처음 듣는데."
"다들 말 못 했겠죠."
시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서아는 그 짧은 웃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웃는 건 원하면서, 정작 자신이 웃는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예약 시간이 끝날 무렵까지 시준은 결국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말하기 전부터 서아의 반응을 계산하는 자신을 의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서아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음 방 가?"
"네."
"누군데."
서아가 가방을 들다 그를 바라봤다.
"왜요?"
"물어볼 수도 있지."
"부사장님이 모르는 분이에요."
"이름."
서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은 질문이 많으시네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시준은 뒤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손님의 이름까지 묻는 모습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잠시 뒤 재킷을 챙겨 방을 나온 그는 복도 끝에서 서아를 다시 발견했다.
그녀 앞에는 마흔이 채 되지 않아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시준처럼 날카롭거나 위압적인 인상은 아니었다. 에덴에 여러 번 온 사람처럼 직원들과도 익숙하게 인사를 나눴다.
남자가 작은 종이봉투를 서아에게 건넸다.
"목은 좀 괜찮아?"
서아가 봉투 안을 확인했다.
안에는 낱개로 포장된 목캔디가 들어 있었다.
비싸 보이지도, 특별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거 기억하셨어요?"
서아의 목소리가 조금 가벼워졌다.
"지난번에 이 맛만 먹는다며."
"그냥 지나가면서 한 말이었는데."
"네가 한 말이니까 기억했지."
서아가 웃었다.
크게 터지는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준이 방 안에서 봤던 미소와는 달랐다.
눈빛이 먼저 느슨해지고, 그 뒤에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누가 요구해서 만들어낸 얼굴이 아니었다.
남자는 서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지도, 가까이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복도 끝의 방으로 사라졌다.
시준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자신은 서아의 웃음을 얻으려고 이유를 물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계산했고, 그녀가 웃는지 얼굴만 살폈다.
저 남자는 작은 목캔디 하나를 건넸다.
진서아가 지나가듯 말했던 취향을 기억하면서.
가격의 차이는 비교할 가치도 없었다.
그런데 서아가 조금 전 보여준 얼굴은 시준이 아직 한 번도 얻지 못한 것이었다.
실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부사장님, 차량 준비해드릴까요?"
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서아가 들어간 방문에 머물러 있었다.
"방금 저 남자."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누구야?"
# 특별외전 - 우리가 사는 방식## 진서아 시점결혼했다고 해서 라운지의 규칙이 바뀌지는 않았다.한시준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런데 결혼 후 첫 금요일, 그는 예약도 없이 라운지 문을 열고 들어왔다.나는 바 안쪽에서 그를 바라봤다."오늘 예약 없는데요."시준이 멈췄다."남편도 예약해야 해?""손님으로 올 거면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라운지에는 이미 손님이 몇 명 있었다.그중에는 강도현도 있었다.시준은 도현과 바 위에 놓인 디저트 상자를 번갈아 봤다.결혼 전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조합이었다."그럼 손님 아니면.""뭐로 왔는데요?"시준은 잠시 생각했다."너 보러.""그건 영업 끝나고요."직원 한 명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시준은 불쾌한 얼굴로 바 끝자리에 앉았다."그럼 예약할게.""오늘은 자리가 없어요.""여기 비어 있잖아.""그 자리는 예약석이에요.""누가.""곧 오세요."시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예약자를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남자라면 취소시키고 싶을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끝나면 연락해.""가려고요?""네 규칙이라며."화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표정만으로도 라운지 온도가 내려갈 정도였다.그래도 나가야 할 때 나갔다.나는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으세요?""뭐가?""부사장님 화난 것 같은데.""맞아.""그런데 그냥 보내요?"나는 새 잔을 꺼냈다."화난 건 본인이 해결해야지."그날 마감을 마치고 나가자 시준은 건너편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정확히 네 시간 동안.차에 타자마자 그가 물었다."예약자 누구였어.""여자 손님이요."굳어 있던 얼굴이 아주 조금 풀렸다."그걸 먼저 말했어야지.""왜요?""괜히 기다렸잖아.""여자면 괜찮고 남자면 안 괜찮아요?"시준은 안전벨트를 매주는 척 내 쪽으로 몸을 기울
#특별외전 - 한시준 시점(2)## 네가 내게 걸어오던 날결혼식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많이 내리지는 않았다.문제는 비가 내린다는 사실 자체였다.나는 한 시간 단위로 기상 자료를 확인했다.오후에는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가능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실내로 옮길까요?"행사 담당자가 물었다.정원과 연결된 실내 공간은 이미 준비돼 있었다.하객을 전부 수용할 수 있도록 테이블 배치도 바꿀 수 있었다.결정만 하면 됐다.나는 정원 끝의 작은 단상을 바라봤다.서아가 그곳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고 말했다.그래서 이 장소를 골랐다.정확히는 서아가 골랐고, 내가 동의했다."기다려."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서아에게 전화하면 드레스와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비 이야기부터 꺼낼 것이다.그녀가 직접 결정하게 해야 했다.그 사실은 알았지만 기다리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오전 열한 시가 넘어 서아에게 메시지가 왔다.[비 오는 것도 괜찮아요.]나는 화면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밖 봤어?"[봤어요.]"정원 바닥 젖어."[의자만 닦으면 되죠.]"드레스도 젖을 수 있어."[그럼 조금 젖죠.]"감기 걸리면."[한시준 씨.]서아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저 결혼하러 가는 거지 야외 촬영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원래대로 해요.]"비 계속 오면."[우산 쓰고요.]역시 진서아였다.나는 담당자에게 정원 예식을 그대로 진행하라고 말했다.대신 통로 위에 투명 천막을 설치하고, 하객 자리에 우산과 담요를 추가했다.서아가 부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선택을 바꾸는 일은 아니었다.비를 멈출 수는 없어도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준비할 수는 있었다.하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강재혁은 나를 보자마자 웃었다."긴장하셨습니까?""아니.""넥타이가 비뚤어졌습니다."손을 올려 확인하자 멀쩡했다.재혁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농담입니다.""오늘 끝나고 보자.""결혼
#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2)## 내가 고른 결혼식결혼식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다만 한시준과 결혼한다는 이유로 내 결혼식까지 한율그룹 행사가 되는 건 싫었다.그 생각이 더 확실해진 건 한율 비서실에서 보내온 첫 번째 결혼식 기획서를 본 뒤였다.서울 시내 특급호텔 그랜드볼룸.하객 예상 인원 천이백 명.정재계 주요 인사와 계열사 대표, 해외 협력사 관계자까지 포함된 명단.결혼식이라기보다 한율그룹 후계자의 공식 발표회에 가까웠다.나는 기획서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뒤 시준을 바라봤다."이거 봤어요?"시준은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업무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뭘."나는 두꺼운 기획서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표지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한율그룹 한시준 부사장 결혼식 진행안.신부 이름은 작은 글씨로 그 아래에 붙어 있었다.진서아."제 이름이 부제예요?"시준이 문서를 펼쳐보더니 표정이 굳었다."누가 보냈어.""비서실이요."그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집었다.나는 그의 손을 눌렀다."또 전화부터 하지 말고요.""이건 내가 지시한 게 아니야.""알아요."시준이 원했다면 신부 이름조차 없는 결혼식 기획서가 왔을지도 모른다.그래도 그는 적어도 내게 묻기 전에는 장소조차 정하지 않았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시준이 물었다.나는 기획서를 다시 넘겨봤다."여기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건 하나 있어요.""뭔데.""음식."시준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것만?""네."나는 기획서를 덮었다."결혼식은 작게 하고 싶어요."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얼마나 작게.""제가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만 부를 수 있을 정도로요.""그럼 한율 쪽은.""시준 씨가 정말 부르고 싶은 사람만요."시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한율 후계자의 결혼식은 개인 행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회사와 집안, 언론과 투자자까지 모두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내가 그 현실을
#특별외전 - 한시준시점 (1) ## 처음으로 갖지 않기로 한 사람결혼한 뒤에도 진서아는 내 것이 아니었다.법적으로는 배우자였고, 같은 주소에 살았으며, 서류 위에는 내 이름 옆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하지만 그것이 서아를 소유할 권리는 아니었다.그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망쳤다.에덴에서 진서아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정확히는 가지고 싶었다.긴 검은 머리와 붉은 입술,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모으는 태도.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그런 여자는 익숙했다.원하는 것을 물어보고,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면 됐다.그런데 진서아는 달랐다.완벽하게 웃으면서도 나를 보지 않았다.내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알았지만, 그 안에 자신은 없었다.세 번의 미소가 전부 같다고 말했을 때 그녀의 눈빛이 처음으로 조금 변했다.그 짧은 흔들림이 마음에 들었다.그래서 손목을 잡았다.그녀가 나를 의식하게 만들고 싶었다."밀어내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아니에요."서아가 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기분이 나빴다.내 손을 거절한 여자는 있었지만, 내가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듯 말한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날부터 나는 진서아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단순한 승부라고 생각했다.다른 손님에게 보이는 얼굴과 내 앞에서 보이는 얼굴을 다르게 만들면 내가 이기는 것이었다.비싼 귀걸이를 보냈다.당연히 하고 올 거라고 생각했다.서아는 돌려보냈다.대신 값도 알 수 없는 검은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내가 선택한 것을 거절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을 보여주는 여자.불쾌한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일부러 늦게 도착한 날에도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나를 위해 시간을 비워두는 대신 다른 손님을 받았다.다음부터는 늦지 말라고 했다.그 말을 듣고도 다시 예약했다.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지고 있었다.그녀가 정한 시간에 맞춰
#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1)##내가 그 남자를 선택하기까지결혼한 뒤에도 한시준은 가끔 나를 손님처럼 기다렸다.정확히 말하면, 내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렸다."안 들어오고 뭐 해요?"늦은 밤 라운지 문을 열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계단 끝에 서 있었다.영업은 이미 끝난 시간이었다.직원들도 모두 퇴근했고, 골목에는 겨울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네가 마감 중이었잖아.""열쇠 있잖아요.""라운지 열쇠는 없어.""집 열쇠 말고요."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손님으로 오지 않는 날에는 내가 먼저 부르기 전까지 계단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내 남편이 된 뒤에도 그랬다.처음 만난 날의 한시준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에덴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았다.비싼 정장과 손목시계 때문만은 아니었다.남자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시선이었다.무엇을 보고 있는지보다,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했다.한시준은 사람을 선택하는 눈으로 봤다.마음에 들면 가지고, 싫증 나면 놓아버리는 사람.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가능성은 생각해본 적 없는 남자.그런 남자들은 오히려 다루기 쉬웠다.원하는 말을 해주고, 정해진 순간에 웃어주고,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을 주면 됐다.그날도 평소와 똑같이 웃었다.그런데 그가 말했다.세 번 다 똑같은 미소라고.처음에는 조금 놀랐다.그런 걸 알아보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그렇다고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내 손목을 잡고도 놓으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놓지 않을 것처럼 굴었으니까."밀어내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아니에요."나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그 순간 시준의 눈빛이 달라졌다.기분이 상한 남자의 얼굴이었다.그런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대신 나를 더 오래 봤다.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그가 나를 손님에게 웃어주는 여자가 아니라, 자신을 거절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비싼 귀걸이를 돌려보낸 건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었다.정말
#외전 5화. 매일 다시 선택할 사람진서아가 한시준의 집에서 지낸 지 여섯 달이 지났다.처음에는 일주일씩 연장하던 동거였다.두 번째 일주일이 끝났을 때는 서아가 먼저 기간을 말하지 않았고, 시준도 묻지 않았다.계절이 바뀌는 동안 드레스룸의 절반은 자연스럽게 서아의 옷으로 채워졌다. 화장대 위에는 립스틱과 향수가 늘어났고, 냉장고에는 시준이 먹지 않던 과일과 탄산수가 들어왔다.침실 구석의 수면등도 여전히 켜져 있었다.이제 시준은 불빛이 없으면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같이 산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시준은 서아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시간을 확인했고, 서아는 그런 시준에게 라운지 영업시간표를 냉장고에 붙여놓으라고 했다.서아는 사용한 컵을 아무 곳에나 두었고, 시준은 발견하는 즉시 정해진 위치로 옮겼다.한 번은 서아가 일부러 컵을 거실과 침실, 드레스룸에 하나씩 놓아두기도 했다.시준은 말없이 전부 치운 뒤 다음 날 같은 자리에 새 컵을 가져다 놓았다."뭐 하는 거예요?""네가 필요해서 둔 줄 알았어.""제가 어지럽힌 거예요.""알아.""그런데 왜 다시 놔요?""내가 치우는지 시험한 거잖아."시준은 서아보다 먼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여전히 자주 부딪혔다.하지만 이제는 한쪽이 사라지는 것으로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고,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했다.문을 닫더라도 잠그지는 않았다.그 정도면 두 사람에게는 충분히 평온한 연애였다.서아가 시준의 변화를 눈치챈 것은 목요일 아침이었다.시준은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자꾸 서아의 왼손을 바라봤다.처음 한두 번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식탁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차에 타기 직전에도 시선이 같은 곳에 머물렀다.서아가 결국 손을 들어 보였다."왜 자꾸 봐요?"시준이 시선을 피했다."안 봤어.""세어봤는데 일곱 번 봤어요.""그걸 왜 세.""이상하니까요."서아는 그의 앞에 왼손을 내밀었다."뭐 묻었어요?""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