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웅— 웅—.
휴대폰이 계속 울었다.
받아야 한다.
이 집의 주인이자, 내 연인이니까.
그런데 이 망할 손은 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받으세요. 조용히 있을 테니.”
이 무슨,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기라도 했던 강아지처럼, 손이 움직여 휴대폰을 들었다.
“어, 응. 채영 씨.”
“규현 씨, 지금 뭐하고 있어?”
“뭐하냐니ㅡ”
순간 아찔했다.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설마, 내가 모르는 숨겨진 카메라라도?’
다행히 아니었다.
“친구들이 규현 씨한테 너무 전화 안 하는 거 아니냐고 하길래.”
앞에 앉은 유진이 조용히 웃었다.
“아… 집에서 밥 먹고 있었어.”
“응? 집에 있어?”
“응.”
“왜?”
왜냐니, 내가 집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이기라도 하단 건가.
하지만 알 수 있다.
그녀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송곳처럼 날카로워지는 여자다.
즉슨, 지금 내가 집에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일 확률이 높다.
핑계를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핑계.
“피규어 제작 의뢰 들어와서 작업하느라.”
“아.”
휴대폰 너머로 짧은 납득이 돌아왔다.
서둘렀다.
“재밌게 놀고 있어? 이제 3일 남았네?”
“응, 안 그래도 발바닥이 너무 아파.”
“돌아오면 주물러줄게.”
채영과의 통화가 끝났고, 정적이 잠깐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건 유진이었다.
“왜 그렇게 당황해요? 사실을 말했으면서.”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내가 이러는 게 누구 때문인데.
아니, 솔직히. 내 앞에 앉은 이 여자 때문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 내 애매함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삼촌 말대로 작업 때문이잖아요?”
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도 -
왜 난 또 끌려가는 건지.
“…네.”
“그럼 내일부터는 작업에 집중해요.”
그리곤 유진이 잔을 내밀며 덧붙였다.
“오늘까지만 친해지고. 괜찮죠?”
“……”
당초에, 내게 선을 그을 의지가 있긴 했을까.
***
다음날.
작업실 문이 열렸다.
채영의 원피스를 입은 유진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골라준, 채영이 아끼던 원피스.
“여기면 돼요?”
“네.”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이 창가로 스며들어 유진을 비췄다.
빛은 원피스를 비추는 게 아닌, 몸이 만들어 낸 곡선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채영이 입었을 땐 우아했던 원피스였다.
그런데 같은 옷인데도 유진 몸 위에서는 전혀 다른 선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찰칵.
화면 속에 유진이 담겼다.
다시 버튼을 눌렀다.
찰칵.
조형은 모델을 꼼꼼히 살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 작업을 위한 기록. 원래는 그뿐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시선은 형태를 읽는 순서를 벗어나고 있었다.
빛이 허리선에서 잠시 머물렀고, 그림자는 골반을 따라 길게 흘러내렸다.
나는 평소라면 넘겼을 그 흐름을 끝까지 따라가고 있었다.
유진이 말했다.
“사진은 왜 찍어요?”
“컴퓨터에 옮겨놔야죠.”
“사진을 보고 만드는 거예요?”
“네, 피규어 완성까지 유진 씨가 계속 같은 자세를 유지할 수는 없으니까요.”
유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려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한 달쯤.”
사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달이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유진은 그 말을 입안에서 한 번 굴리듯 되뇌었다.
“한 달이라….”
그녀가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한 달 동안 삼촌은 사진 속의 날 구석구석 보겠네요.”
또다시 도발적인 말에 손이 잠깐 멈췄다.
“유진 씨 -”
그러자 유진이 내 말을 잘랐다.
“농담이에요. 뭘 그렇게 정색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메라를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사진보다 눈이 먼저 움직였다.
어깨.
허리.
골반.
늘 그랬듯 선을 읽었다.
조형은 그런 것을 선명하게 담아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 보는 것인지,
사람에게 끌려 보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왼쪽 어깨만 조금 뒤로 해볼래요.”
유진은 내 지시에 움직였다.
원피스 자락이 당겨지며 몸의 흐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멈췄다.
닿지 않았다.
닿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작업이다.'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건 작업이다.'
ㅡ
그렇게 몇 장 아니 몇십 장의 사진을 찍었던 때였다.
“이 정도면 될까요?”
아직 부족했다.
아니, 무엇을 위해 부족하다는 건가.
“조금만 더 찍을게요.”
유진은 아무 대답 없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창밖 햇살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유진이 원피스 밑단을 털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긴장이 한순간에 끊어졌다.
“네?”
“모델도 쉽진 않네요.”
그녀가 작게 웃더니 덧붙였다.
“계속 들여다봐지니까, 탐닉 당하는 기분이에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유진은 작업실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남은 건 적막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사진을 컴퓨터로 옮겼다.
모니터에 유진이 나타났다.
마우스를 움직였다.
한 장, 또 한 장, 또 한 장.
분명 작업을 위한 사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사진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사진 속 그녀에게 붙잡혀 있었다.
손이 화면 가까이 올라갔다가 멈췄다.
“미친, 진짜 미친놈이다. 이규현.”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은 유진의 사진을 확대하고 있었다.
“…….”
철컥.
작업실 문손잡이가 잡히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창을 닫았다.
사춘기 소년처럼.
웅— 웅—.휴대폰이 계속 울었다.받아야 한다.이 집의 주인이자, 내 연인이니까.그런데 이 망할 손은 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받으세요. 조용히 있을 테니.”이 무슨,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기라도 했던 강아지처럼, 손이 움직여 휴대폰을 들었다.“어, 응. 채영 씨.”“규현 씨, 지금 뭐하고 있어?”“뭐하냐니ㅡ”순간 아찔했다.괜히 주변을 둘러봤다.‘설마, 내가 모르는 숨겨진 카메라라도?’다행히 아니었다.“친구들이 규현 씨한테 너무 전화 안 하는 거 아니냐고 하길래.”앞에 앉은 유진이 조용히 웃었다.“아… 집에서 밥 먹고 있었어.”“응? 집에 있어?”“응.”“왜?”왜냐니, 내가 집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이기라도 하단 건가.하지만 알 수 있다.그녀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송곳처럼 날카로워지는 여자다.즉슨, 지금 내가 집에 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일 확률이 높다.핑계를 생각했다.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핑계.“피규어 제작 의뢰 들어와서 작업하느라.”“아.”휴대폰 너머로 짧은 납득이 돌아왔다.서둘렀다.“재밌게 놀고 있어? 이제 3일 남았네?”“응, 안 그래도 발바닥이 너무 아파.”“돌아오면 주물러줄게.”채영과의 통화가 끝났고, 정적이 잠깐 흘렀다.그 정적을 깬 건 유진이었다.“왜 그렇게 당황해요? 사실을 말했으면서.”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내가 이러는 게 누구 때문인데.아니, 솔직히. 내 앞에 앉은 이 여자 때문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 내 애매함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삼촌 말대로 작업 때문이잖아요?”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도 -왜 난 또 끌려가는 건지.“…네.”“그럼 내일부터는 작업에 집중해요.”그리곤 유진이 잔을 내밀며 덧붙였다.“오늘까지만 친해지고. 괜찮죠?”“……”당초에, 내게 선을 그을 의지가 있긴 했을까.***다음날.작업실 문이 열렸다.채영의 원피스를 입은 유진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내가 골라준, 채영이 아끼던 원피스.“여기면
도화선이었다.유진이 내뱉는 말의 의미를 모를 만큼 나는 둔하지 않았다.심장이 뛰었다.나는 소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유진 씨.”그녀가 나를 바라봤다.나는 한 번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왜 이러는지 모르겠다.왜 자꾸 선을 넘으려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적어도 하나만큼은 분명히 해야 했다.“난 채영 씨 남자친구예요.”잠깐의 정적이 흘렀다.유진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그리고 느닷없이 뻗어온 그녀의 검지가 내 입술 가까이에서 멈췄다.“그래서.”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이건 아니라고 말하려고 하는 거예요?”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분명 그 말을 하려고 했다.그런데, 왜인지 그 한마디가 막혀 버렸다.유진이 피식 웃었다.“난 그냥 친해지고 싶었던 건데.”친해지고 싶다는 사람의 거리라고 보기엔 너무 가까웠다.그녀가 덧붙였다.“웃기네요. 우리가 뭐 했어요?”그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분명 이상했다.그런데 더 이상한 건 그녀보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나였다.유진이 내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잊었어요?”“......?”“피규어 제작 구도 잡힐 때까진 나가지 말라고 해놓고. 삼.촌.이.”순간 기억이 스쳤다.'완성'이 아니라 '구도’그 정도라면 정말 내가 했을 법했다.유진이 조용히 물었다.“왜요. 지금이라도 나갈까요?”그래요. 그 한마디면 끝이었는데도 다른 대답이 튀어나왔다.“…아뇨.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유진이 아주 작게 웃었다.“그럼 된 거네요.”난 도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걸까.왜, 이 여자에게 이렇게까지.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느닷없었다.“삼촌, 손 좀 보여줄래요.”“손은 왜ㅡ”유진은 거침없이 내 손을 잡고는 뒤집었다.조금 부끄럽기까지 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작품이라도 감상하듯 손을 바라봤다.“…왜요?”내 질문에 유진이 아주 작게 웃었다.“이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지.”그녀의 시선은 여
거북해야 마땅한데, 두려워야 마땅한데 심장은 오히려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이성과 경고등이 머릿속을 시끄럽게 두드렸지만, 나는 피하지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피할 마음 따위는 없었던 걸지도.끈적한 기분이었다.심장까지 그 감각에 잠긴 것 같았다.나도 모르게 비닐봉지를 더 꽉 쥐었고 비닐봉지 안에서 소주병들이 소리를 냈다.신호가 바뀌고 걸었다.유진이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붙었다.서로의 팔이 스칠 듯 가까워졌다.“이렇게 있어야 자연스러워 보여요.”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유진이 나를 이끄는 곳은 여전히 채영의 아파트였지만, 나는 이미 그녀에게 끌려가고 있었다.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경비 아저씨가 인사를 건넸다.“어? 사모님 오늘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시네요?”당황스러웠다.평소라면 채영의 남자친구로서 당당하게 고개를 숙였겠지만, 지금 내 곁에는 채영의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조카가 내 팔에 붙어 있었다.“아, 그게ㅡ”그때였다.유진이 경비 아저씨에게 말했다.“네, 오늘은 좀 다르게 꾸몄거든요.”경비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 번 더 쳐다봤다.난 애써 시선을 피했는데,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날 이끌었다.ㅡ“하하! 경비 아저씨 얼굴 봤어요?!”그럼 봤지, 뭐지 하는 표정.우리는 서둘러 엘리베이터 탑승했다.“진짜 재밌다. 히히.”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채영의 원피스를 입은 유진이 웃고 있었다.그 옆에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가 서 있었다.“이모가 여기 있으면 아마 기절할 거야.”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는 채영의 집으로 들어갔다.***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정적을 가르며 묵직하게 울렸다.뒤이은 잠금장치 소리는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격리하는 기분이었다.집 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채영이 고심해서 고른 디퓨저의 향기.각도까지 맞춰 정리된 신발장.먼지 하나 허락하지 않는 타일 바닥.이 집의 모든 구석구석은 채영이 구축해 놓은 완벽한 질서의 산물이었다.하지만 그 질서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는 전혀 질서정연하지
공기가 다르다.나는 괜히 셔츠 깃을 만지며 헛기침했다.앞서 걷는 유진의 뒷모습을 보았다.“…하필 그 원피스를.”익숙한 옷이다. 내가 직접 골라준, 채영이 아끼던 원피스.ㅡ같은 옷을 계속 입을 순 없잖아요? 이모 없을 때 빌려 입어야죠.마흔의 채영이 입었을 때는 성숙하고 우아했던 그 옷은 지금은 전혀 다른 형태를 뿜어내고 있었다.굳이 관리하지 않아도 팽팽하게 차오른 젊음이 원피스 자락 밖으로도 선명했다.시선이 멈췄다. 아니, 떼어낼 수가 없었다.잘록한 허리를 타고 완만한 곡선을 지나, 길게 뻗은 다리까지.“왜요?”유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뭐가요?”“계속 보잖아요. 이모가 입었을 때랑 달라서 그래요?”뜨끔했다.서둘러 시선을 옮기며 대꾸했다.“안 봤는데요.”“거짓말.”유진이 짧게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길가에는 벚꽃이 막 터지기 시작하고 있었다.다 피지도, 그렇다고 안 핀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그게 꼭 지금 우리 사이의 거리 같았다.“저 사진 찍어주세요. 여기서.”유진이 자신
기억나지 않느냐니, 무슨 소리지.유진은 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피식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요, 기억 안 나면 어쩔 수 없죠. 억지로 떠올리진 마세요. 무서운 기억일 수도 있으니까.”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뒤돌았다.어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ㅡ“앉으세요.”유진이 차려준 해장국 앞에 앉았을 때, 혼란을 깬 건 내 휴대폰 진동이었다.채영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과 함께 허둥지둥 휴대폰을 들었다.“어, 응.”“잘 잤어? 나 지금 친구들이랑 온천 왔어. 여기 너무 좋다. 조만간 같이 오자.”“으응.”“당신 목소리가 이상한데?”눈앞에 앉은 유진은 조용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그 시선에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했다.“아냐, 좀 피곤해서 더 잘게. 재밌게 놀고 이따 전화해요.”통화를 마치자, 유진이 숟가락을 들었다.식탁 위로는 수저 소리만 계속됐다.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었다.난 간신히 입을 열었다.“그, 어제 우리 너무 취했나 봐요.”나는 비겁한 질문을 했다.결론에 가린 질문을.“같은 침대에서 자고…. 정말 미안해요. 내가 다른 방에서 잤어야 했는데, 필름이 끊겨서.”유진의 손이 멈췄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맑다 못해 시린 눈동자로 날 보던 그녀는 비웃듯 입을 열었다.“필름이 끊기면, 사람이 바뀌나 봐요.”유진이 낮게 다시 읊조렸다.“어제 삼촌은, 지금처럼 그렇게 죄지은 표정 아니었는데.”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상체를 내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거리가 가까워지자, 향기가 훅 끼쳤다.이 집 어디에도 없어야 할 향기가.“이모는 삼촌이 착해서 좋대요. 잘생기고,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고.”유진이 손을 대리석 식탁 위에 올리며 덧붙였다.“근데 어제 삼촌은 전혀 안 착했어. 내 얼굴을 조각하듯이 훑으면서, 이건 이모한테는 없는 선이라고….”기억나지 않는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뜨거웠다.유진은 내 표정을 감상하듯 조용히 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내 안색을
왜 밥을 먹자고 했지.김치통만 건네주고 보내도 됐는데.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어제오늘 김치 때문에 고생하셨고, 제가 채영 씨 대신 밥 한 끼 정도는 살 수 있잖아요. 하하.”유진이 멋쩍은 내 웃음을 지켜보던 그때, 초인종이 또다시 울렸다.인터폰 화면엔 헬멧을 쓴 배달 기사가 서 있었다.‘아차, 배달.’유진이 말했다.“배달시키신 거 아녜요?”“아! 그러긴 했는데! 마침 오셨으니까!”“배달 음식은 어쩌려고요?”“이따 저녁에 먹으면 되죠!”그래, 그저 정상적인 호의일 수 있었다.하지만 비정상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아 아찔했다.유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현관으로 향하며 말했다.“배달은 제가 받을게요. 준비하세요.”***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황급히 씻었다.거울 속의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상기되어 있었다.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장을 뒤졌다.채영의 취향이 가득한 옷들 사이에서 가장 무난한 옷을 꺼내 입었다.거울 앞에 서자 헛웃음이 나왔다.흰 티셔츠에 청바지라니.ㅡ집을 나서자, 완연한 봄기운이 끼쳐왔다.길가에는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졌고,벚나무 가지 끝에는 당장이라도 터질 듯 꽃봉오리들이 맺혀 있었다.나란히 걷는 우리 사이에 1미터 남짓한 거리가 있었지만,그 공간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거 같았다.계속되는 정적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았다.그래서 어렵게 말했다.“곧 벚꽃이 피겠네요. 저 봉우리들이 다 터져서 울창해지면… 생각만 해도 좀 설레지 않아요?”유진은 대답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내 발소리와 그녀의 발소리가 불규칙하게 섞이는 정적 속에서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몇 초의 정적 끝에 유진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설레서 좋으시겠어요. 그 꽃, 이모랑 보러 가실 테니.”“그건… 뭐, 그렇겠죠.”“예쁘긴 하겠네요. 분홍 꽃잎 아래서 두 분이 웃고 있으면.”유진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봄볕을 받은 그녀의 눈동자가 빛났다.시골에서 보았던 그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