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정씨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그녀를 고발할 것이고, 시율은 제 죄를 덮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면 무엇이 달라질까.
사당에 갇혀 남은 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혼수는 모두 사라질 것이고, 결국 열녀문에 새겨진 이름만 남을 터였다.
하경은 천천히 붉은 비단 앞으로 다가갔다.
시율이 소리쳤다.
“서하경! 감히 그 문에 손을 대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경은 그를 돌아보았다.
“도련님은 제가 이 문을 세워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시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경은 더 묻지 않았다.
횃불을 붉은 비단에 가져갔다.
불꽃이 옮겨붙었다.
처음에는 손바닥만 한 불길이었다. 그러나 기름을 먹은 장식 천이 타들어 가자 불길이 순식간에 위로 치솟았다.
“불이야!”
하인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시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형수님!”
그가 달려들었다.
“미쳤습니까! 저게 어떤 문인데!”
하경은 타오르는 비단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스쳤다.
“압니다.”
그녀는 시율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 이름을 새겨 놓고 제 인생을 가두려던 문이지요.”
붉은 비단이 검게 오그라들었다.
불길이 현판 아래 장식으로 번져 가자 마른 나무에서 타닥타닥 소리가 났다.
시율은 하인들에게 물을 가져오라고 고함쳤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누군가 물동이를 들고 뛰어오다가 넘어졌고, 깨진 그릇에서 쏟아진 물이 흙바닥을 적셨다.
하경은 그 혼란 속에서 뒤로 물러났다.
시율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불길을 피해 달려드는 사람들과 부딪혀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서하경!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의 열녀문을 태워!”
하경은 몸을 돌렸다.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 여자가 불을 질렀다!”
“윤씨 집안 며느리라더라!”
“열녀가 미쳤어!”
하경은 달렸다.
다친 발목이 욱신거리고 찢어진 손바닥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열녀문의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삼 년 동안 자신을 짓눌러 온 문이 불타고 있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 그 문 앞에서 죽은 남편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할 일은 없었다.
하경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장 쪽으로 달렸다.
***
시장 어귀에는 검은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지만 차체의 나뭇결과 바퀴의 쇠테만 보아도 값비싼 마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에는 체격 좋은 마부가 앉아 있었고, 마차 양옆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하경은 그 앞을 지나치려 했다.
그때 마차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서하경.”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가리개가 천천히 들렸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도겸.
백운상단의 주인.
서른넷의 나이에 전국의 상로를 움켜쥔 거상으로, 거래에서는 피붙이에게도 손해를 봐주지 않는다는 소문이 따라다니는 사내였다.
그는 검은 비단 도포를 입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흐트러짐 없는 자세, 상대의 속을 끝까지 들여다볼 듯한 눈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경은 그를 알아보았다.
친정아버지의 거래 자리에 배석했을 때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당시 도겸은 약속한 물건의 품질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십 냥이 걸린 거래를 그 자리에서 뒤엎었다.
상대가 이름난 상단의 주인이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사내가 지금 그녀 앞에 있었다.
도겸은 하경의 몰골을 살폈다.
찢어진 상복, 피가 묻은 손바닥, 신도 신지 못한 발.
그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타시오.”
하경은 마차를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 끝에서 횃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째서 여기 계십니까?”
도겸은 대답 대신 마차 문을 열었다.
“그걸 따지기에는 쫓아오는 자들이 너무 가까운 듯하군.”
하경은 한 발 물러섰다.
마차에 오르면 윤씨 집안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백도겸이 아무 대가 없이 사람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저를 데려가시면 윤씨 집안과 척을 지게 됩니다. 관아에서도 저를 찾을 겁니다.”
도겸은 서류함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장부를 찾으러 가는 사람에게는 장부를 읽을 자리가 필요하지 않겠소.”그는 종이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백운상단의 장부 열람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문서였다.하경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이걸 제게 주시는 겁니까?”“빌려주는 것이오.”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대신 조건이 있소.”하경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녀는 종이를 내려놓았다.“무슨 조건입니까?”“당신이 찾아낸 장부를 나에게도 보여 주시오.”하경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그러다 종이를 집어 들었다.“원본은 제가 보관하겠습니다.”도겸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그건 이미 약속했소.”하경은 문서를 접었다.“그렇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서하경.”하경이 고개를 들었다.“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사람이군.”그녀는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저는 재미를 드리려고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도겸은 낮게 웃었다.“알고 있소.”그의 눈빛이 깊어졌다.“그래서 더 눈을 뗄 수가 없군.”하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도겸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손에 쥔 문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그날 밤, 하경은 객실로 돌아왔다.탁자 위에는 깨끗한 옷 한 벌이 놓여 있었다.짙은 남색 저고리와 치마였다.관리인이 도겸의 지시로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하경은 옷을 내려다보았다.삼 년 동안 입었던 흰 상복과는 전혀 다른 색이었다.그녀는 손끝으로 비단을 만졌다.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친정어머니가 혼례 전날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네가 입고 싶은 색을 골라라. 네가 입을 옷이니 네 마음에 들어야지.”하경은 한동안 옷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아직 상복을 벗지 않았다.내일 아침이 되면 직접 고를 생각이었다.누군가 마련해 준 옷을 입는 것과 스스로 입을 옷을 선택하는 것은 달랐다.그녀는 옷을 가지런히 접어 두었다.그리고 등잔 아래에 앉아 오늘 확인한 문서들을 펼쳤다.가짜 손도장이 찍힌
하경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남색 비단 열두 필은 제 친정에서 가져온 혼수입니다.”상단주는 비웃었다.“윤 도련님께서는 집안 물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대금도 지급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요?”하경은 준비해 둔 종이를 펼쳤다.비단의 수량과 품질, 친정에서 가져온 날짜가 적혀 있었다.그녀는 비단 끝에 수놓인 서씨 집안의 표식까지 설명했다.상단주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그 표식은 저도 보았습니다.”하경은 그를 바라보았다.“그렇다면 제 물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겠군요.”상단주는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이미 돈을 지급했습니다. 거래를 취소하려면 그 돈부터 돌려받아야 합니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합니다. 대금을 지급했다는 영수증을 보여 주십시오.”상단주는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다.하경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거래 금액과 날짜를 확인하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영수증 아래에 찍힌 도장이 눈에 들어왔다.붉은 도장.그 안에 새겨진 이름은 윤시율이 아니었다.서하경.그녀의 이름이었다.하경은 종이를 가까이 가져갔다.도장의 모양이 이상했다.그녀가 사용하던 인장은 가장자리 한쪽이 조금 깨져 있었다. 어린 시절 떨어뜨린 뒤 수리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 도장에는 깨진 흔적이 없었다.완전한 모양이었다.누군가 그녀의 이름으로 새 인장을 만들었다.하경은 숨을 삼켰다.시댁은 그녀의 손도장만 위조한 것이 아니었다.인장까지 새로 만들어 거래에 사용하고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 도장은 제 것이 아닙니다.”상단주의 얼굴이 굳어졌다.“무슨 말씀입니까?”하경은 종이를 도겸에게 건넸다.도겸은 도장을 확인했다.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윤씨 집안이 꽤 대담한 짓을 했군.”상단주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저는 몰랐습니다! 윤 도련님께서 분명히 형수의 허락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하경은 그를 바라보았다.“그렇다면 그 말을 증언해 주십시오.”상단주는 입술을 다물었다.
탁자 위에는 은전이 담긴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너희는 며느리가 열녀문에 불을 지르는 것을 보았지?”하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마님, 저희는 불이 난 뒤에야 달려갔습니다.”정씨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그럼 지금부터 본 것으로 해라.”그녀는 은전 주머니를 하인들 앞으로 밀었다.“서하경이 사내와 달아나려고 열녀문에 불을 질렀다고 증언하면 된다.”하인들의 얼굴이 굳었다.“하지만 마님,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정씨가 탁자를 내리쳤다.“내 집에서 삼십 년을 먹고살았으면 누구 덕에 살아왔는지 알아야지!”하인들은 고개를 숙였다.정씨는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관아에 가서 말 한마디만 하면 된다. 며느리가 남편의 명예를 더럽히고 외간 사내와 도망쳤다고.”그녀는 은전 주머니를 다시 밀었다.“그렇게만 하면 너희 자식들까지 먹고살게 해 주마.”하인들은 끝내 주머니를 거절하지 못했다.정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그녀는 서랍에서 다른 문서를 꺼냈다.서하경이 남편의 빚을 갚지 않으려고 도망쳤다는 내용의 고발장이었다.정씨는 붓을 들어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죄인을 즉시 체포하여 윤씨 집안으로 인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그녀는 붓을 내려놓았다.“열녀문을 태우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정씨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번졌다.“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윤씨 집안 며느리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해가 저물 무렵, 북문 창고를 확인하러 갔던 사람이 돌아왔다.하경은 관리인과 함께 그를 맞았다.“남색 비단 열두 필은 아직 창고에 있습니다. 다만 내일 새벽 동문상단으로 넘기기로 했습니다.”하경은 종이를 받아 펼쳤다.매도인 윤시율.매수인 동문상단.남색 비단 열두 필.거래 금액은 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그녀는 종이를 접었다.“대금을 지급했다는 영수증도 확인했습니까?”“그것까지는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하경은 잠시 생각했다.“그렇다면 내일
“이야, 형수가 아주 좋은 곳에 들어앉았네. 형님 제사상 앞에서는 그렇게 정숙한 척하더니, 이제는 사내 집에서 밤을 보내?”하경의 얼굴이 굳어졌다.시율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어머니께서 보내셨어. 돌아와서 이것만 찍으면 열녀문 태운 일도 덮어 주신대.”하경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혼수품 일체의 처분에 동의한다는 문서였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 재산을 모두 팔겠다는 겁니까?”시율이 어깨를 으쓱했다.“형님 빚을 갚아야지. 설마 형님이 남긴 빚을 모른 척할 생각은 아니겠지?”하경은 문서를 접었다.“그 빚은 제가 진 것이 아닙니다.”시율이 코웃음을 쳤다.“형수가 돈을 빌렸든 형님이 빌렸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집안 돈인데.”“제 혼수는 집안 돈이 아닙니다.”시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는 하경에게 성큼 다가왔다.“형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형수는 열녀문을 태운 죄인이야. 어머니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당장 관아에 끌려가!”하경은 물러서지 않았다.시율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그러나 하경이 재빨리 손을 피했다.“손대지 마십시오.”시율이 비웃었다.“백 대행수 뒤에 숨으니까 이제 형수도 무서운 게 없어졌나 봐?”그가 다시 손을 뻗는 순간,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그 손을 어디에 대려는 거지?”백도겸이었다.시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도겸은 천천히 다가왔다.그의 시선이 시율의 손에 머물렀다.“어젯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시율은 황급히 손을 내렸다.“대행수님, 집안일입니다. 형수를 데리러 왔을 뿐입니다.”도겸은 하경을 바라보았다.“돌아가겠소?”하경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도겸은 시율에게 시선을 돌렸다.“들었나?”시율의 얼굴이 붉어졌다.“대행수님,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안일에 이렇게 끼어드시는 건—”도겸이 그의 말을 끊었다.“남의 집안일이라.”그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남색 비단 열두 필의 거래 내역이었다.“그럼 이것도 집안일인가?”시율
“이건 지나친 처사입니다! 백운상단이 아무리 큰 곳이라 해도 남의 장부를 함부로 뒤질 권리는 없소!”하경이 문을 열었다.회색 도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도겸 앞에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두꺼운 장부 세 권이 쌓여 있었다.도겸은 하경을 보자 빈자리를 가리켰다.“앉으시오.”중년 사내가 그녀를 훑어보았다.“이 여자가 서하경이오?”도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말을 가려 하시오.”사내는 입을 다물었다.하경은 자리에 앉아 장부를 펼쳤다.백은 삼백 냥.이자 이백팔십 냥.총 오백팔십 냥.그 아래에는 윤시헌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하경은 날짜를 확인했다.차용증에는 초사흘.장부에는 초나흘.돈을 빌린 날짜와 실제 지급한 날짜가 달랐다.“이자가 초사흘부터 계산되었군요.”중년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문제요?”“돈은 초나흘에 지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자는 하루 전부터 받으셨군요.”사내의 얼굴이 굳어졌다.하경은 다음 장을 넘겼다.“그리고 삼백 냥을 지급했다는 영수증이 없습니다.”“있소!”사내가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다.그는 탁자 위에 종이를 내던졌다.하경은 종이를 펼쳤다.대금 지급 영수증.수령인 윤시헌.금액 삼백 냥.그 아래에는 담보물로 남색 비단 열두 필이 적혀 있었다.하경의 손이 멈췄다.최 객주가 어젯밤 알려 준 바로 그 물건이었다.“이 비단을 직접 확인하셨습니까?”사내가 헛기침했다.“윤 나리께서 부인의 혼수라고 하셨소.”“물건을 보셨느냐고 여쭈었습니다.”“윤씨 집안의 명성을 믿고 거래한 것이오.”하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렇다면 제 물건을 담보로 잡으면서 저에게는 한마디도 묻지 않으셨군요.”사내는 얼굴을 붉혔다.“부부 사이의 재산이니 남편이 처리할 수도 있지!”하경은 영수증을 내려놓았다.“돈을 받은 사람은 윤시헌입니다. 그런데 채무자는 서하경으로 적으셨습니다. 제 동의도 없고, 제가 직접 돈을 받은 기록도 없습니다.”사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도겸이 장부를 집어 들었다.“박 서기.
도겸은 차용증을 가리켰다.“내일 아침까지 원장과 영수증을 가져오시오. 돈을 받은 사람의 이름도 확인하겠소.”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남의 대부방 장부를 들여다보겠다는 것이오?”도겸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불편한가?”사내의 얼굴이 굳었다.백도겸은 한번 의심한 거래를 끝까지 파헤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가 장부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허위 거래와 빼돌린 돈은 오래 숨길 수 없었다.사내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를 갈았다.“내일 다시 오겠소.”“오시오. 그때는 사람을 끌고 갈 생각 말고 장부부터 가져오시오.”사내들이 말을 타고 사라졌다.하경은 그들이 떠난 길을 바라보았다.손에는 여전히 차용증이 들려 있었다.도겸은 그녀의 붉게 부어오른 손목을 보았다.“많이 다쳤소?”하경은 소매를 내려 상처를 가렸다.“괜찮습니다.”도겸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더 묻지 않았다.대신 마차 문을 열었다.“타시오. 오늘 밤은 여기서 끝내야겠군.”하경은 차용증을 품에 넣었다.죽은 남편이 남긴 것은 추억만이 아니었다.그녀의 이름으로 된 빚이었다.***백운상단의 별채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높은 담장 안쪽에는 창고와 사랑채가 나란히 들어서 있었다. 밤늦은 시각인데도 일꾼들이 비단 꾸러미를 나르고 있었고, 서기들은 등불 아래에서 수량을 확인하고 있었다.하경은 창고 앞에 쌓인 비단을 바라보았다.물건마다 표찰이 붙어 있었다.수량과 가격, 보관 장소가 적힌 표찰이었다.친정아버지가 거래하던 방식과 같았다.하경은 문득 울컥했다.친정에서는 그녀가 숫자를 잘 읽는다고 칭찬했다. 아버지는 거래처에서 보내온 장부를 맡겼고, 어머니는 혼수품을 고를 때도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그러나 윤씨 집안에 시집간 뒤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여자가 돈을 밝히면 천박하다고 했다.장부를 보겠다고 하면 시댁을 의심하는 불효한 며느리가 되었다.그렇게 삼 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재산은 하나둘 사라졌다.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