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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화. 그림자만 남은 방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7 18:57:02

도현의 바다 그림은 다음 날에도 완성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완성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퇴근하고 서재에 들어가 보니 스케치북은 어제 그 자리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

수평선도.

의자 두 개도.

더해진 게 없었다.

나는 문틀에 기대 물었다.

“오늘은 안 그렸어요?”

도현이 노트북에서 눈을 들었다.

“네.”

“바다 어렵죠?”

“많이.”

“그래서 포기?”

“아닙니다.”

“그럼?”

그는 화면을 닫았다.

“오늘은 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전이라면 끝내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려서라도 연필을 들었을 사람.

그런데 이제는 꽤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그림 속 두 번째 의자를 가리켰다.

“내 자리 그대로 있네.”

“어제 앉는다면서요.”

“응.”

“그럼 두십시오.”

“도현 씨는?”

“제 자리도 있습니다.”

나는 웃었다.

“그럼 둘이 앉았네.”

도현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먹읍시다.”

*

회사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게 조금 낯설었다.

새 승인 구조도 문제없이 굴러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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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02화. 먼저 건넨 쪽

    서윤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현은 이미 침실에 없었다.협탁 위에는 물컵만 놓여 있었다.그 옆.접힌 종이 한 장.서윤은 베개에 기대앉은 채 종이를 집었다.[아홉 시 회의. 먼저 나갑니다.]끝.서윤은 종이를 뒤집어봤다.아무것도 없었다.“이게 다야?”혼잣말을 하다가.괜히 웃었다.요즘 도현이 뭔가를 길게 설명하지 않는 게 익숙해졌는데.그래도.이렇게 메모 한 줄만 남기고 먼저 나간 건 오랜만이었다.서윤은 휴대폰을 들었다가.다시 내려놨다.굳이 답장할 필요는 없었다.어차피 몇 시간 뒤면 회사에서 볼 테니까.*오전 회의는 예상보다 짧게 끝났다.서윤이 회의실에서 나오자.복도 건너편에서 도현이 걸어오고 있었다.다른 이사 두 명과 함께였다.서윤은 그대로 지나가려 했다.도현도 회사에서는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한 총괄.”“의장님.”짧게.그게 전부였다.그런데.스쳐 지나가는 순간.도현의 손에 들린 파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베이지색.모서리가 조금 구겨진 얇은 파일.어젯밤 서재에 들고 들어갔던 종이와 비슷한 색이었다.서윤은 순간 뒤를 돌아봤다.도현은 이미 몇 걸음 지나간 뒤였다.그런데.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딱 한 번.고개를 돌렸다.눈이 마주쳤다.서윤은 바로 입술을 다물었다.도현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다.그대로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갔다.“진짜 신경 쓰이게 하네.”서윤이 작게 중얼거렸다.뒤에서 예린이 말했다.“뭐가.”서윤이 깜짝 놀라 돌아봤다.“언제 왔어요?”“방금.”“아무것도 아니에요.”예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 말 요즘 안 쓰기로 하지 않았어?”“누가.”“차 의장.”“그걸 왜 한예린이 알아.”“당신이 전에 말했잖아.”서윤은 잠깐 멈췄다.“내가?”“응.”“언제.”“기억 안 남.”“그럼 됐어요.”예린은 웃으며 지나갔다.*저녁.서윤이 집에 먼저 들어왔다.서재 문은 열려 있었다.그 순간.걸음이 자동으로 그쪽으로 갔다.도현은 아직 오지 않았다.책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01화. 먼저 닫힌 문

    서윤이 집에 들어왔을 때.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도현은 보이지 않았다.“도현 씨?”대답 대신.서재 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탁.문 닫히는 소리.서윤은 가방을 내려놓고 그쪽을 봤다.“뭐 해요?”이번에는 대답이 왔다.“잠깐만 기다리십시오.”“왜.”“정리할 게 있습니다.”서윤은 눈썹을 올렸다.도현이 자기 서재 문을 닫는 건 드문 일이었다.회사 통화라도 하나.그렇게 생각하고 코트를 벗었다.그런데.휴대폰은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화면도 꺼져 있었다.서윤은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일 분.이 분.결국.“진짜 뭐 해.”문이 열렸다.도현이 나왔다.손에는 종이 한 장.“뭐예요?”“아무것도 아닙니다.”“그럼 왜 문까지 닫았어.”도현은 종이를 뒤집어 들었다.“당신이 보면 안 되는 거라서.”서윤의 눈이 바로 커졌다.“내가 보면 안 되는 거?”“네.”“왜.”“아직 안 끝났습니다.”“그림?”도현이 잠깐 그녀를 봤다.“비슷합니다.”“보여줘.”“안 됩니다.”“조금만.”“안 됩니다.”너무 단호해서.서윤은 오히려 웃었다.“주인님이 숨기는 거네.”“숨기는 게 아니라.”도현은 종이를 다시 서재 안에 두고 나왔다.문을 닫았다.이번에는 잠그지는 않았다.“완성되면 보여드리겠습니다.”“언제.”“모릅니다.”“또 몰라.”“네.”서윤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그를 봤다.“나 오늘 저 문 계속 신경 쓰일 것 같은데.”“그러십시오.”“안 말려?”“제가 닫았습니다.”도현의 시선이 서재 문으로 한번 갔다가.다시 서윤에게 왔다.“궁금해하는 것도 예상했습니다.”숨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하….”도현이 바로 알아챘다.“왜.”“또 먼저 정했잖아.”“문 닫는 걸?”“응.”“그게 좋습니까.”서윤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금.”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그렇군요.”*저녁은 배달이었다.둘 다 늦게 들어온 날.도현은 식탁에 찜닭 그릇을 놓고.서윤은 밥을 덜었다.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400화. 거울 속에서 먼저 본 것

    도현이 서재 문을 열어둔 채 안에서 뭔가를 옮기고 있었다.서윤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소리를 들었다.“뭐 해요?”대답이 없었다.대신.드르륵.무거운 게 바닥 위를 움직이는 소리.서윤은 가방을 소파 위에 올리고 서재로 갔다.문 앞에서 바로 멈췄다.“이게 뭐야.”도현이 세워놓은 건.사람 키보다 조금 큰 전신거울이었다.테두리가 거의 없는.단순한 거울.원래 침실 옷장 안쪽에 작은 거울은 있었지만.이 정도로 큰 건 처음이었다.“거울.”“그건 알아.”“그럼 왜 묻습니까.”“갑자기 왜 샀냐고.”도현이 거울 각도를 조금 조정했다.“그림 볼 때 쓰려고.”“그림을 왜 거울로 봐.”“좌우 뒤집어서 보면 이상한 부분이 잘 보입니다.”서윤은 잠깐 거울을 봤다.자기 모습.그 옆에 서 있는 도현.둘 다 그대로 비쳤다.“오.”“왜.”“생각보다 크네.”도현은 거울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이 정도는 돼야 전신이 보입니다.”서윤은 거울 앞으로 갔다.코트도 아직 벗지 않은 상태.회사에서 돌아온 그대로.“여기 세워둘 거예요?”“아마.”“내가 옷 볼 때도 써도 되지?”“거울인데 왜 허락을 받습니까.”“주인님 거니까.”도현의 시선이 거울 속 서윤에게 갔다.“집에 있는 건 같이 쓰는 겁니다.”서윤이 웃었다.“그 말 좋네.”“요즘 당신은 뭘 말해도 좋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다 좋은 건 아니거든.”“예를 들어.”“지금처럼 분석하는 거.”도현이 아주 조금 웃었다.“알겠습니다.”서윤은 코트를 벗었다.의자 등받이에 걸어놓고.다시 거울을 봤다.도현은 바로 뒤쪽에 서 있었다.눈이 마주친 건.직접이 아니라.거울 안에서였다.몇 초.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윤이 먼저 물었다.“왜 봐요.”“당신도 봅니다.”“나는 거울 보는 거고.”“거울 속 저를.”들켰다.서윤은 웃었다.“조금.”“왜.”“그냥.”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서윤이 바로 정정했다.“뒤에 서 있으니까.”“그게 이유입니까.”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99화. 먼저 골라놓은 자리

    도현이 맞잡은 손에 힘을 준 건 잠깐이었다.서윤은 그대로 한 걸음 가까워졌다.“왜.”“무엇이.”“또 당겼잖아.”“당기고 싶어서.”서윤이 웃었다.요즘은 정말.이런 대답이 빨랐다.이유를 돌려 말하지도 않고.자기가 하고 싶어서.자기가 골라서.그게 전부였다.“주인님.”“네.”“오늘은 여기까지?”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서윤의 손을 놓았다.“일어나십시오.”“갑자기?”“네.”“왜.”도현은 이미 소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보여드릴 게 있습니다.”서윤도 따라 일어났다.“새 도구?”“아니.”“그럼 뭐.”도현은 침실도.서재도 아닌.복도 끝 작은 방으로 향했다.원래는 거의 쓰지 않던 방이었다.큰 창 하나.낮은 수납장.벽에는 아무것도 없었고.한쪽에 작은 러그만 깔려 있었다.서윤이 문 앞에서 멈췄다.“여기?”“네.”“왜 갑자기.”도현이 불을 켰다.방 중앙에는.낮은 등받이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평범한 목재 의자.새것이었다.서윤은 그걸 보다가.도현을 봤다.“이거 언제 샀어요?”“오늘 왔습니다.”“뭐 하려고.”“앉으려고.”“누가.”“당신.”서윤의 눈썹이 올라갔다.“나?”“네.”“왜.”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대신.의자 위치를 아주 조금 돌렸다.창을 정면으로 보지 않고.대각선.방 안쪽도.창밖도 같이 보이는 각도.“이 자리.”“응.”“제가 골랐습니다.”서윤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나한테 안 물어보고?”“네.”“왜.”“물어보고 싶지 않았습니다.”몇 초.서윤은 그냥 그를 봤다.“주인님.”“네.”“그 말 좋다.”“무엇이.”“물어보고 싶지 않았다는 거.”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싫다고 할 수도 있었는데.”“그러면 바꾸면 되잖아.”“맞습니다.”“근데 일단 주인님이 정한 거잖아.”도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서윤은 의자를 다시 봤다.“앉아봐?”“아직.”멈췄다.도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제가 말하면.”서윤의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98화. 묻지 않고 골라준 것

    서윤은 책장 앞에 쪼그려 앉아 책등을 하나씩 읽고 있었다.도현이 새로 산 건축 책과.예전에 읽던 경영서.스케치 참고 자료.그 사이에 이상하게 얇은 요리책 한 권이 끼어 있었다.서윤이 바로 꺼냈다.“이건 뭐예요?”도현이 소파에서 고개를 들었다.“무엇이.”서윤이 표지를 들어 보였다.《둘이 먹는 늦은 저녁》“주인님이 산 거?”“네.”“언제.”“지난주.”“왜 말 안 했어.”“책 하나 사는 것도 보고해야 합니까.”“아니.”서윤은 페이지를 넘겼다.복잡한 요리는 거의 없었다.냄비 하나.프라이팬 하나.이십 분 안에 만들 수 있는 음식들.“이거 완전 우리 집용이네.”“그래서 샀습니다.”“오늘 해볼까?”도현이 시계를 봤다.아홉 시 십 분.“배고픕니까.”“조금.”“그럼.”자리에서 일어났다.“하나 고르십시오.”서윤은 목차를 훑었다.“크림파스타.”“늦은 시간에?”“그럼 토마토.”“그건 괜찮겠군요.”“주인님은?”“저도.”서윤이 책을 들고 주방으로 따라갔다.*냉장고를 열어보니 재료는 거의 다 있었다.방울토마토.마늘.베이컨.파스타 면.서윤이 냄비를 꺼내려 하자.도현이 먼저 말했다.“오늘은 제가 합니다.”“또?”“왜.”“저번에도 칼국수 주인님이 했잖아.”“그럼 오늘은 당신이 하고 싶습니까.”서윤은 잠깐 생각했다.“아니.”“그럼.”도현이 냄비를 꺼냈다.“앉아 있으십시오.”서윤이 바로 웃었다.“이거 명령?”도현이 손을 멈췄다.“원합니까.”“응.”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그럼 저쪽에 앉아 있으십시오.”주방 아일랜드 앞 높은 의자.서윤이 올라가 앉았다.“손은?”“편하게.”“뭐 하면 안 돼?”“오늘은 그런 것 없습니다.”“그럼 구경만?”“네.”도현이 물을 올렸다.서윤은 턱을 괴고 그를 봤다.소매를 걷고.마늘을 썰고.토마토를 반으로 자르고.팬에 올리브오일을 두르는 손.몇 분 지나지도 않아.도현이 말했다.“또 팔 봅니까.”“아니.”“거짓말.”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397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저녁

    서윤은 메일 제목을 두 번 읽었다.[유럽 차세대 운영 책임자 멘토링 요청]보낸 사람은 인사팀이었다.대상자는 세 명.프라하 한 명.파리 한 명.뮌헨 한 명.그리고 멘토 후보 첫 번째 칸에.한서윤.“이걸 왜 내가.”옆자리에서 자료를 정리하던 예린이 고개를 들었다.“뭐가.”서윤이 화면을 돌려 보여줬다.예린은 읽자마자 웃었다.“딱인데?”“뭐가 딱이에요.”“다섯 도시 굴려본 사람이 누군데.”“굴린 게 아니라 살아남은 거죠.”“그게 그거야.”서윤은 메일을 다시 봤다.멘토링 방식은 월 1회.일대일 면담.단.실무 판단에 직접 개입하지 말 것.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예린이 바로 알아챘다.“그 문장 때문에 싫지.”“아니.”“표정은 맞는데.”“멘토링인데 답을 주면 안 된대.”“원래 그렇지.”“물어보면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방향은.”예린이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답은 본인이 찾아야지.”서윤은 한동안 화면을 봤다.“카렐이 추천했나.”“그럴 수도.”“물어볼까.”“왜.”“진짜 카렐이면 한마디 하려고.”“무슨 말.”서윤이 입술을 눌렀다.“모르겠어.”예린이 웃었다.“벌써부터 멘토 자질 없는데.”“한예린.”“왜.”“나 안 할 수도 있어요.”“그러든가.”예린은 정말 관심 없는 듯 자기 노트북을 열었다.그게 오히려 이상했다.“안 말려요?”“왜 말려.”“나한테 잘 맞는다며.”“잘 맞는 거랑 해야 하는 건 다르지.”서윤은 다시 메일을 읽었다.잠깐.그리고.답장 버튼을 눌렀다.[한 달 시험 운영 후 지속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전송.예린이 화면을 힐끗 봤다.“했네.”“한 달만.”“응.”“대신 진짜 답 안 알려줄 거야.”“그 말부터 못 믿겠는데.”서윤이 그녀를 노려봤다.예린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첫날 후기 꼭 알려줘.”“안 알려줄 거예요.”“그럼 더 궁금하지.”*집에 들어오자.거실 바닥이 난장판이었다.판자.나사.조립 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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