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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or: 매화야담
“무엄하다!”

이 층에서 낮고 매서운 호통이 터졌다. 순간, 백자 찻잔 뚜껑이 창밖으로 날아들더니 얼굴 긴 사내의 손목을 정확히 때렸다.

“아악! 내 손! 부러진 것 같아!”

임하연의 귀에도 희미하게 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사내는 손목을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천향루 안에서 차분한 발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문을 나선 훤칠한 남자는 임태겸이었다.

단단히 좁힌 미간에는 서릿발이 서려 있었고,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거센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얇은 입술마저 일자로 굳게 다문 얼굴은 한겨울 추위처럼 싸늘했다.

사내의 얼굴이 경련하듯 떨렸다.

“도…… 도련님. 아니, 도찰어사 대인을 뵙습니다!”

그는 아픔을 참으며 무릎을 꿇고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임아연 같은 어수룩한 여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됐다. 하지만 임태겸은 달랐다.

그는 겨우 스물 몇 살에 도찰원의 우도어사가 되어, 육부의 수장들과 나란히 구경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누구 하나 조사하기로 마음먹으면 조상 팔 대까지 낱낱이 들춰낼 사람이었다. 도성의 크고 작은 관리 가운데 뒤가 깨끗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사람들은 그를 존중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렇다고 달리 손쓸 도리도 없으니, 일찌감치 집안 자제들에게 단단히 일러 두었다. 임태겸을 보면 피해 가고, 절대로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그런 그들이 임아연을 희롱할 수 있었던 것은 임태겸이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진짜 딸까지 돌아왔으니, 가짜가 아무리 날뛰어 봐야 가짜일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임태겸이 가짜 여동생 때문에 화를 내고 있었다.

구경하던 망나니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슬그머니 사람들 틈으로 숨어들어 딴청을 피웠다. 임태겸의 눈에 띄기라도 할까 두려웠다.

임하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부가 안으로 달려가 알리는 걸 보지 못했다면 자신도 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랑이 위세를 빌리는 여우라니. 빌릴 수 있는 위세가 있는데 안 쓰는 게 더 아깝지 않은가.

“오라버니!”

임하연은 몸을 돌려 뜻밖의 구원자를 만난 듯 반갑게 불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얼굴 긴 사내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 제 옷을 다 벗기겠대요. 길 한복판에서 저를 덮치겠다고도 했어요.”

임태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안에서 서늘한 불길이 일었다. 목소리는 이를 악문 사이로 흘러나온 듯 차갑고 날카로웠다.

“유계상. 간이 단단히 부었구나.”

사내는 쉴 새 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임 대인,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 아버지라야 호부의 낭중령에 불과했다. 임태겸을 상대로 무슨 힘을 쓸 수 있겠는가.

임태겸이 냉소했다.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그 입부터 손봐 주어라.”

어디선가 호위 몇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순식간에 사내를 바닥에 눌렀다. 한 명이 신발을 벗더니 입을 향해 사정없이 후려쳤다.

사내는 입에서 피를 쏟으면서도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

얼굴이 비뚤어질 만큼 얻어맞고서야 임태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옷을 벗겨 채소 시장에 내던져라.”

찌익, 옷감이 찢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사내의 옷은 금세 너덜너덜한 천 조각이 되었다. 손을 멈춘 호위 하나가 세심하게 물었다.

“대인, 속바지도 벗깁니까?”

임하연은 얼른 고개를 숙여 임태겸의 가슴 앞에 얼굴을 숨겼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저 흉한 꼴은 보고 싶지 않은데.

임태겸이 시선을 내렸다. 옥처럼 희고 매끄러운 목덜미가 눈에 들어오자 잠깐 정신이 흐트러졌다. 이내 그가 담담히 말했다.

“그 아비가 나와 같은 조정에서 일하는 것을 보아, 가릴 것 하나는 남겨 두어라.”

사내는 겁에 질려 정말로 울기 시작했다. 여기서 알몸이 되면 무슨 낯으로 살아가겠는가. 그는 새빨간 속바지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감사합니다, 임 대인! 감사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임태겸은 그 비굴한 모습마저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데려가거라.”

호위들이 사내를 들어 올려 성큼성큼 채소 시장으로 향했다. 구경꾼들도 우르르 뒤따라가고 나니 천향루 앞이 비로소 조용해졌다.

그때 입구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임 공자의 여동생이었구려. 어쩐지 그리 크게 화를 낸다 했소.”

임하연이 고개를 내밀었다. 문 앞에는 짙은 붉은색 비단 장포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임태겸과 비슷해 보였다. 접부채를 가볍게 흔드는 모습이 여유로웠고, 말투는 온화했다. 풍류를 아는 선비 같은 기품에 얼굴까지 잘생겼다.

역시 잘생긴 사람끼리 어울리는구나.

눈이 즐거워지자 임하연의 기분도 금세 나아졌다.

임태겸이 몸을 조금 틀어 그녀의 시선을 가렸다.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사황자 전하께 인사드려라.”

이 사람이 바로 노래 듣기를 좋아한다는 사황자 신경헌이었다.

임하연은 얼른 옛사람들의 몸짓을 흉내 내어 몸을 굽혔다.

“사황자 전하께 문안드립니다.”

신경헌이 성큼 다가오며 웃었다.

“예는 됐다. 곱고 여린 아가씨인 줄 알았더니, 제법 매서운 데가 있구나. 아까 뺨을 치는 소리가 아주 시원하던데.”

임하연은 마른기침을 했다.

“저 사람이 먼저 모욕해서요. 화를 참을 수 없어 제 몸을 지켰을 뿐입니다.”

신경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옳은 말이다. 저런 자들은 집안 어른이 벼슬한다는 것만 믿고 날마다 제멋대로 설치지. 한번쯤 단단히 혼을 내 줄 필요가 있어.”

그는 가락지를 낀 손으로 임태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임 공자도 이제 화를 푸시오. 겨우 꾀어 내 한 번 데리고 나왔는데, 또 핑계를 대고 돌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임태겸이 차분히 답했다.

“오늘은 전하께서 흡족하실 때까지 함께 듣겠습니다.”

임하연은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도성에서는 소월향의 노래와 춤이 으뜸이라고들 하던데요. 전하께서도 그분을 보러 오신 건가요?”

그 이름을 듣자 신경헌의 얼굴에 아쉬움이 어렸다.

“소 낭자는 참으로 빼어난 여인이었지. 하지만 미인은 명이 짧다더니, 지난달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 여인이 없으니 천향루도 운치가 덜해졌지.”

어?

임하연은 놀랐다.

소월향이 원래 주인보다 먼저 죽는 건 맞았다. 그래도 이렇게 빠르지는 않았다. 소설에서는 임아연이 성병에 걸린 뒤에야 죽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유재휘도 천향루에 자주 드나들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그 썩어 빠진 놈 때문에 병에 걸린 건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생각만 해도 역겨워.

“운치가 없다면 더 들을 까닭도 없겠지요. 전하께서도 일찍 돌아가 쉬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임태겸의 얼굴은 담담했다. 소월향이라는 이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신경헌 얼른 그를 붙잡았다.

“왜 이러시오. 소 낭자는 없어도 왕 낭자와 조 낭자가 있지 않소. 두 사람 다 목소리가 좋소. 모처럼 왔는데 그냥 갈 수야 없지!”

소설과 다른 일이 또 벌어졌다.

임하연은 이유 없이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더는 임태겸의 풍류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굽혀 말했다.

“오라버니는 들어가세요. 저는 먼저 돌아갈게요.”

임태겸은 서둘러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이복, 큰아가씨를 집으로 모셔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경헌이 그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청기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흘렀지만, 임태겸의 마음은 자꾸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마차 안의 임하연도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갑자기 모든 것이 맞지 않는 거지?

소월향은 죽었고, 임씨 부인은 중독되었다. 남강에 있어야 할 뱀이 도성에 나타났으며, 자신에게 온 약에는 주사가 지나치게 들어 있었다.

모든 일이 임하연이 알고 있던 내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자신에게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는 누구나 두려워지기 마련이었다. 임하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임씨 집안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그래야만 제 운명을 제 손으로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성에서 가장 번화한 천화가를 벗어났다.

그때 길가의 도박장에서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는 턱으로 마차가 떠난 쪽을 가리켰다.

“저 여자는 누구냐? 임태겸의 정인인가?”

하인이 굽실거리며 답했다.

“도련님, 잊으셨습니까? 임태겸 도련님의 여동생, 임아연 아가씨입니다.”

유재휘가 입술을 핥으며 음흉하게 웃었다.

“아, 그 여자였군. 심청운은 복도 많지. 저렇게 몸매 좋은 미인이라니…… 자꾸 눈길이 가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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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30화

    임태겸은 시선을 거두고 담담히 말했다.“아니다. 네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할 줄은 몰랐구나. 글은 언제부터 배웠느냐?”임하연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사실 남몰래 배운 지 이 년쯤 됐어요. 그래도 비웃으시면 안 돼요. 책에 나온 이야기도 겨우 뜻만 짚어 가며 읽는 거지, 글자를 전부 아는 건 아니거든요.”그건 사실이었다. 한자는 획수가 많고 복잡해서, 임하연도 몇몇 글자는 앞뒤 문맥을 보고 짐작하며 읽어야 했다.“그럴 수 있지. 앞으로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붓으로 표시해 두거라. 내가 알려 주마.”말을 마친 임태겸이 다시 눈을 들었다.“그런데 아까 채의가 그러더구나. 밖에 나가 살고 싶다 했다지?”임하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채의가 괜한 소리를 한 거예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집이 이렇게 좋은데 제가 왜 나가겠어요?”임태겸은 임하연의 얼굴을 잠시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뒷짐을 진 어깨 위로 맑은 달빛이 은빛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훤칠한 몸을 감싸는 빛이 서늘하고도 고요했다.“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면 가끔 나가 바람을 쐬어도 좋다. 다만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마라. 어머니 심기를 거슬러 또 책잡힐 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몸에 밴 냉랭한 분위기와 달리, 목소리는 꽤 부드러웠다.임하연은 뜻밖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선뜻 짐작되지 않았다.“오라버니도…… 제가 이 집에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짐짓 서운한 얼굴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허튼소리.”임태겸이 못마땅한 듯 돌아서더니, 예스러운 모양의 황동 열쇠 하나를 탁자 위에 던졌다.“영안가 끝자락에 작은 집이 있다. 문 앞에 백양나무 두 그루가 있고, ‘발묵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니 쉽게 찾을 게다.”임하연은 놀라 입을 벌렸다.이건…… 집을 쓰라는 뜻인가?눈빛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밤하늘의 별보다도 반짝이는 눈이었다.임태겸은 정말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오라버니가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29화

    운방각으로 돌아오자 채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부인께서 먼저 잘해 주시는데, 아가씨는 왜 여전히 기분이 안 좋으세요?”임하연은 턱을 괸 채 대꾸했다.“이유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은 속셈부터 의심하라는 말도 못 들어 봤어?”잠시 임하연을 바라보던 채의가 뜻밖의 발견이라도 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런데 아가씨는 언제 그렇게 많이 배우셨어요? 노래도 지으시고, 어려운 말도 척척 하시잖아요. 언제 공부하신 거예요? 정말 대단하세요!”채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얼굴에는 감탄과 동경이 가득했다.임하연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대체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흘러가는 건데?“대단하면 뭐 해. 그걸로 배가 부르는 것도 아닌데.”겨우 허기만 달랜 배를 쓰다듬으며 임하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만 더 이렇게 먹었다가는 저혈당으로 쓰러질 판이었다. 옛날 규수들의 허리가 한 줌밖에 안 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죄다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 거였다.그렇다고 음식점에 가서 배불리 먹을 수도 없었다. 임아연의 악명은 도성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또 밖에서 눈에 띄게 돌아다녔다가는 여기저기서 손가락질을 받을 게 뻔했다.차라리 몰래 집 한 채를 사 두는 편이 낫겠다. 가끔 들러 제대로 된 식사도 하고, 나중에 임씨 가문을 정말 떠나게 되면 자신만의 보금자리로 삼을 수도 있으니까.“채의야, 도성에서는 집값이 비싸?”채의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자리 좋은 곳에 우리 저택만한 집을 장만하려면 팔구천 냥은 있어야 할 거예요. 그보다 더 비쌀 수도 있고요.”임하연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비싼 대저택을 살 형편은 못 됐다.“외진 곳은? 그냥 평범한 살림집 말이야.”“그런 집은 훨씬 싸지요. 조용한 곳에 있는 작은 집이라면, 따로 마당이 딸려 있어도 팔십 냥에서 백 냥 정도면 살 수 있을 거예요.”“아, 그렇구나.”현대 돈으로 어림잡으면 400만 원쯤이었다. 그 정도면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그렇게 따져 보니, 임씨 가문은 생각보다 훨씬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28화

    운방각으로 돌아온 임하연은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아이들에게는 이미 유재휘의 생김새와 특징까지 알려 두었다. 이제 유재휘와 심청운이 서로 물고 뜯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설령 유재휘가 돈을 받아 오지 못하더라도, 심청운은 날마다 자신을 깎아내리는 노래를 듣고 견디지 못할 게 분명했다.어느 쪽이든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없었다.임하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햇볕을 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옛날의 생활은 참 단순하면서도 심심했다.방으로 들어가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임하연은 채의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앞채로 향했다.오솔길을 막 벗어나는데, 이복이 의원 한 명을 안내해 정청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임하연은 일부러 발소리를 죽이고 문가에 몸을 숨겼다. 안에서는 의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부인께서는 마음의 근심 때문에 몸이 상하신 겁니다. 크게 염려하실 일은 아니니, 마음을 편히 가지시면 머지않아 회복하실 것입니다.”임씨 부인은 임태겸을 가볍게 나무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태겸이가 영 마음을 놓지 못해서 말이지.”의원이 웃으며 거들었다.“임 대인께서 효성이 지극하셔서 그렇지요. 어머님께서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급하실 수밖에요. 이런 효자를 두셨으니 부인께서는 참으로 복이 많으십니다.”칭찬에 임씨 부인의 눈가에 잡힌 웃음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그녀는 임태겸을 곁눈질하며 슬쩍 말을 돌렸다.“그렇지요. 아들은 효성이 지극하고, 딸도 어미 마음을 살뜰히 헤아려 준답니다. 이제 떡두꺼비 같은 손자만 하나 있으면 되겠어요.”의원은 약상자를 챙기며 아첨을 이어 갔다.“소인이 도성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임 대인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큰일을 맡으신 데다 재주도 출중하시고, 용모 또한 훤칠하시니, 어느 집 규수가 국공부로 시집오든 조상님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지요.”임씨 부인은 그런 말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더욱 흡족해진 그녀는 곁의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27화

    그 시각, 심청운은 근처 찻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 몇이 깡충깡충 뛰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에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저 아이들, 심 공자라고 부르는 것 같지 않느냐?”하인이 귀를 기울이더니 목을 움츠렸다.“도련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만…… 썩 좋은 말은 아닌 듯합니다.”바로 옆에서 밀떡을 파는 장사꾼이 쉴 새 없이 손님을 부르는 통에, 심청운에게는 노랫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한 명 데려와서 물어보거라.”하인은 곧장 아이들을 뒤쫓아가 사탕 하나로 한 아이를 달랜 뒤, 심청운 앞으로 데려왔다.“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었니? 나한테도 들려주겠느냐?”심청운이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눈앞의 사내가 노래 속 심 공자인 줄 모르는 아이는 임하연에게 배운 노랫말을 그대로 읊었다.심청운은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유지했다.“얘야, 그 노래는 누가 가르쳐 주었니?”“유씨 성을 가진 공자님이요.”아이는 대답을 마치자 다시 깡충깡충 뛰어갔다.심청운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누구야. 청운 도련님 아니신가? 한참 찾아다녔잖아.”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한 심청운의 속이 불편해졌다.“유재휘?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백성들은 두 사람을 똑같이 망나니라 불렀지만, 실상은 꽤 달랐다.심청운은 풍류를 즐기고 돈을 물 쓰듯 쓰기는 해도, 양갓집 여인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 도성에 온 뒤 몇 년 동안 그와 가까이 지낸 여인은 임아연뿐이었다.반면 유재휘는 악명이 자자했다. 상인들을 괴롭히고 시장을 제멋대로 휘어잡는 데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납치하는 등 못 하는 악행이 없었다. 뒤를 따르는 몇몇 앞잡이를 제외하면, 누구나 그를 보는 즉시 멀찍이 피했다.유재휘는 능글맞게 웃으며 심청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임씨 가문의 큰소저 대신 볼일 좀 보러 왔지. 그동안 그 소저 돈을 꽤 많이 썼다며?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으면 돈이라도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뒤따라온 하인들도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26화

    “제가 여자를 납치하는 도적도 아니고, 흉악한 강도도 아닌데 무슨 나쁜 짓을 하겠어요? 어머니 마차가 돌아오는 걸 봤단 말이에요.”임하연은 응석 부리듯 가볍게 콧소리를 내고는 치맛자락을 들어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허둥지둥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임태겸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이제는 제 말을 들을 줄도 알고, 성격도 한결 밝아졌다. 좋은 변화였다.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임씨 부인의 마차가 대문 앞에 도착했다. 임태겸은 얼른 다가가 어머니가 내리는 것을 부축했다.“오늘은 햇볕이 좋아 나들이하기에 알맞겠습니다. 몸은 좀 나아지셨습니까?”임씨 부인이 기분 좋은 얼굴로 답했다.“절의 종소리를 듣고 은은한 단향을 맡으니, 마음이 한결 고요해지더구나.”“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예부의 방 대인께 들으니, 얼마 전 도성에 온 이 의원이라는 분의 의술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오늘 신시에 어머니를 진찰하러 오도록 청해 두었습니다.”임서월의 안색이 미세하게 변했다. 슬쩍 임태겸을 살피는 눈에 의문이 스쳤다.갑자기 왜 의원을 바꾸는 거지?반면 임씨 부인은 아들의 정성에 흐뭇해졌다. 임태겸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날마다 공무로 바쁠 텐데, 어미 몸까지 신경 쓰느라 애쓰지 말거라. 앞으로 이런 일은 서월이에게 맡기면 된다.”임태겸이 담담히 웃었다.“서월이는 아직 도성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처녀가 밖에 나가 알아보기 어려운 일도 있고요.”임씨 부인은 사뿐히 다가오는 임서월을 바라보았다. 눈길에는 숨길 수 없는 편애가 묻어 있었다.“여자는 혼인 전까지 집 안에서 얌전히 지내는 게지. 온종일 밖으로 쏘다니면 그게 무슨 꼴이겠니.”당연히 임하연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다행히 오늘 유씨 노부인을 만났으니, 임씨 가문의 뜻도 곧 유 승상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임태겸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어렸다.“한 가지 모습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실 수는 없습니다. 아연이도 이제는 달라지고 있으니, 어머니께서도 선입견을 거두어 주십

  •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25화

    “아가씨, 정말 대단하세요! 말 몇 마디로 유 공자를 속이시고, 심청운에게 돈까지 받아 오게 하셨잖아요. 이거야말로 일석이꿩 아닌가요?”조금 전 유재휘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갈 기세였다. 채의는 몇 번이나 식은땀이 날 만큼 겁에 질려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위기를 넘긴 데다 뜻밖의 소득까지 생겼으니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임하연은 채의처럼 낙관할 수 없었다. 유재휘는 몹시 집요한 인간이었다. 한번 눈독을 들인 여인은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으니, 오늘은 둘러댔다 해도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서둘러 돈을 모으고, 미리 살길을 마련해야 했다.유 승상은 세 황제를 섬긴 원로로, 지금도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임씨 가문의 양녀일 뿐이었다. 정말로 가문의 이익이 걸린다면, 임태겸도 집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릴 터였다.“이 멍청아, 그럴 땐 일석이조라고 하는 거야. 일단 전장부터 가자.”은표를 잔돈으로 바꾼 임하연은 채의에게 다시 일렀다.“채의야, 사탕을 몇 봉지 사 와. 아까 그 아이들도 데려오고.”채의는 무슨 생각이신지 알 수 없었지만,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잠시 뒤, 옆 골목에 아이들 열댓 명이 모였다. 임하연은 사탕을 나누어 주며 웃었다.“누나가 노래 하나 가르쳐 줄게. 이걸 부르고 다니면 사탕도 주고, 동전도 줄 거야.”아이들이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빨리 가르쳐 주세요! 저희 부를래요!”임하연은 몸을 낮추고 아이들 곁에서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두 번 들려주었다.“다 외웠어?”“네!”“좋아. 한 사람씩 사탕 한 봉지에 동전 두 닢이야. 사흘 뒤에 누나가 거리로 나와 볼 테니까, 잘 부르고 다니면 그때도 사탕이랑 동전을 줄게.”한창 먹을 것에 마음이 끌릴 대여섯 살 아이들이었다. 사탕만 받아도 기쁜데 동전까지 생겼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아이들은 제 몫을 챙기자마자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작은 등 뒤로 노랫소리가 따라붙었다.“후작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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