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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매화야담
“오라버니, 저…… 손이 너무 아파요!”

임하연의 얼굴이 가을날 익은 감처럼 순식간에 붉어졌다.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친 손이 있어 핑계를 댈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픈 줄 알면서 굳이 나왔느냐.”

귓가에 닿은 임태겸의 목소리는 담담할 뿐, 다른 기색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임하연은 그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남자와 이토록 민망한 접촉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답답해서…… 조금 걷고 싶었어요.”

고개를 숙인 채 발가락만 잔뜩 오그렸다. 이러다 발끝으로 지하 끝까지 뚫을 판이었다.

“그럼 앉아라.”

임태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심했다. 두 손도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다만 무릎을 움켜쥔 손끝만은 무언가를 억누르듯 희게 질려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가시는 길이 아니면…… 괜찮아요. 혼자 걸어가도 돼요.”

임하연은 하필 지금 나온 것을 후회했다.

다 임태겸 때문이었다. 분명 서재에 있다더니 왜 뜬금없이 마차에 앉아 있는 건데? 사람 사이에 믿음이라는 게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나도 천화가로 가는 길이다.”

서늘하고 맑은 목소리에 임하연은 더 말을 보태지 못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그녀는 조심스레 한쪽에 앉았다. 슬쩍 임태겸의 옷자락을 보니, 조금 전 움푹 들어갔던 부분이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 괜히 감추려다 더 티를 내는 것 같기도…….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임태겸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겨우 자신을 조금 다르게 보게 만들었는데, 지금까지의 노력을 허사로 돌릴 수는 없었다.

임하연은 머릿속의 음흉한 생각을 얼른 털어 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일 보러 가세요? 아니면 벗을 만나러 가세요?”

“벗을 만나러 간다.”

대답하던 임태겸의 눈에 임하연의 목을 주렁주렁 둘러싼 조악한 진주 목걸이가 들어왔다.

그는 긴 손가락을 뻗어 목덜미를 스치듯 목걸이를 걸어 올렸다. 잠시 살펴본 뒤 미간을 좁혔다.

“이런 볼품없는 것을 왜 걸고 다니느냐. 체면이 깎이는 줄도 모르고.”

목걸이가 당겨져 목이 조이자 임하연은 어쩔 수 없이 임태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품에 넣었다가 불룩한 모양 때문에 의심을 살까 봐 죄다 목에 걸었던 것이다. 설마 그와 마주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게…… 좋은 건 이제 없어요. 제가 잘못했죠. 심청운에게 정신이 팔려서 장신구를 다 전당포에 맡겼거든요. 맹세할게요. 앞으로는 절대 안 만날 거예요. 얌전히 시집도 갈게요. 그러니까 유재휘 같은 인간한테만 보내지 말아 주세요.”

임하연은 이참에 말을 꺼냈다. 붉어진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서리와 이슬에 젖은 꽃잎처럼,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떨어질 듯했다.

임태겸은 아직 홍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잠시 살폈다.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어머니와 서월이 지나가는 말로 했을 뿐이다. 정해진 일은 없어. 얌전히 지내면서 더는 말썽 피우지 말거라.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알아서 살펴볼 테니.”

임하연의 눈이 금세 밝아졌다. 그녀는 임태겸의 팔을 끌어안고 소매에 얼굴을 비비며 기쁘게 말했다.

“오라버니는 정말 저한테 잘해 주세요.”

일부러 한껏 부드럽고 앳된 목소리를 냈다. 특히 마지막 말끝은 물결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 소리가 임태겸의 마음을 간질이며 낯선 감각을 일으켰다.

그는 팔을 빼내고 낮게 꾸짖었다.

“명문가 규수답게 처신하거라.”

임하연은 혀를 살짝 내밀었다가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임서월 모녀에 비하면 임태겸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아침에 받은 그 약만큼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오라버니…… 오늘 아침에 왕길을 시켜서 제게 약을 보내셨어요?”

“그래. 왜 그러느냐?”

임태겸이 긴 눈매를 살짝 들었다.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별건 아니에요. 그런데 약이 너무 써서요. 입안에 주사 맛만 가득하고, 전에 먹던 것과는 좀 다르더라고요.”

임하연은 의술을 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원래 주인은 글자도 몇 개 읽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주사를 많이 먹으면 중독될 수도 있다고 들어서 걱정됐어요. 의원이 양을 잘못 맞춘 건 아닐까요?”

“주사가 더 많이 들어간 게 확실하냐?”

임태겸이 생각에 잠긴 채 물었다.

왕길이 약을 달인 하인에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임아연이 헛간에 갇혔을 때 한기를 풀어주는 약을 버린 것은 임서월이 맞았다.

임아연이 너무 심하게 소란을 피우니 이번에는 정신을 좀 차리게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임태겸도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임아연은 어려서부터 지붕과 나무를 타고 오르던 아이였다. 약 한 번 거른다고 탈이 날 만큼 허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사의 양이 지나쳤다면…….

임하연은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요. 심청운을 좋아한 뒤로는 밤낮으로 그 사람 생각만 하느라 잠을 못 잤거든요. 그래서 안신약도 많이 먹었어요.”

임태겸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느냐.”

임하연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응석을 부렸다.

“이제는 잘못한 거 안다니까요.”

그때 마차가 멈췄다. 밖에서 마부가 소리쳤다.

“도련님, 천향루에 도착했습니다.”

천향루?

기루잖아?

임하연의 눈빛에 묘한 기색이 스쳤다.

평소에는 차갑고 고귀해서 범접도 못 할 사람처럼 굴더니. 속은 똑같네. 머릿속에는 남녀 간의 그 일밖에 없는 거지?

“허튼 생각 하지 말거라. 사황자 전하를 모시고 곡을 들으러 온 것이다.”

임태겸은 ‘곡을 들으러’라는 말을 유난히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긴 다리를 뻗어 발을 내딛더니, 발을 걷고 마차에서 내렸다.

임하연은 눈을 굴렸다.

기루에 노래만 들으러 왔다고? 그걸 누가 믿어.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얼른 발을 걷어 올려 밖을 보았다. 금빛으로 새긴 세 글자는 분명 천향루였다.

소설 속 천향루에는 노래와 춤 모두 뛰어나다는 명기 소월향이 있었다. 그녀는 줄곧 임태겸을 탐내, 그를 차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원래 주인과 견줄 만했다.

하지만 아무리 매달려 봐야 남는 것은 없었다. 달처럼 차갑고 고결한 국공가의 공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소월향은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죽은 것도 임아연보다 빨랐다.

그래도 지금은 살아 있을 터였다.

임하연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토록 아름답다고 소문난 명기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임태겸은 이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임하연도 곧장 마차에서 내렸다. 막 천향루 입구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임씨 집안 큰아가씨 아니야? 오늘은 도박장 대신 기루를 찾으셨네?”

다른 사내가 히죽거리며 거들었다.

“뭘 물어? 우리 청운 도련님께서 안에 계신 게 뻔하지.”

“어쩐지 요 며칠 청운 도련님이 안 보이더라니, 천향루 여자한테 빠져 있었구먼. 임 아가씨도 저 여자들처럼 얇은 비단 치마나 입어 보지 그래? 그럼 청운 도련님 마음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심청운이 어울리는 자들은 하나같이 질 나쁜 무리였다. 원래 주인도 그들과 가까워지려고 평소 이런 음담패설을 주고받곤 했다.

하지만 임하연은 임아연이 아니었다.

저 꼴 같지도 않은 것들이 무슨 권리로 자신을 희롱한단 말인가. 말뿐이라 해도 참아 줄 생각은 없었다.

임하연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구둣주걱처럼 얼굴이 긴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다치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뺨을 후려쳤다.

짝!

“상스러운 놈. 어디 한마디만 더 해 봐.”

정통으로 맞은 사내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곁의 벗들이 이미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체면을 구긴 사내가 얼굴을 붉히며 욕을 퍼부었다.

“임아연, 이 천한 년이 감히 나를 때려? 여기서 옷을 다 벗겨 버리고 덮쳐 줄까?”

임하연은 턱을 치켜들고 냉소했다.

“개도 거들떠보지 않을 놈이 어디서 입을 놀려? 할 수 있으면 해 봐. 어디 한번 덤벼 보라고.”

조금도 겁먹지 않은 채 도도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사내의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손을 뻗어 임하연의 옷을 잡아 찢으려 했다.

“그래, 내 허리 힘이 심청운보다 못한지 직접 보여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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