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은 깊은 물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듯 돌아왔다.
코끝을 스치는 옅은 소독약 냄새.
규칙적으로 허공을 가르는 산소 발생기의 백색소음.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지독한 근육통.
한채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
시야가 흐릿하게 번지다 이내 선명해졌다. 고급스러운 간접 조명이 은은하게 깔린 천장. 그저 넓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거대한 VVIP 병실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
채원은 마른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구멍이 사포로 긁어낸 것처럼 따가워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켁……!”
그 작은 소리에, 창가 쪽 소파에 앉아 있던 거대한 실루엣이 짐승처럼 기민하게 반응하며 다가왔다.
“정신이 드나.”
서늘하고도 낮게 가라앉은 저음. 서도진이었다.
채원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항상 먼지 한 톨 없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대한민국의 젊은 황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몰골을 하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고, 넥타이는 어디다 풀어 던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채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구겨진 그의 흰 와이셔츠 소매 끝에 말라붙어 있는 검붉은 핏자국이었다.
폐공장에서 그가 삼류 양아치들을 처참하게 짓밟을 때 튀었던 피.
그때의 살벌했던 기억이 플래시백처럼 뇌리를 스치자, 채원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도진은 채원의 시선이 자신의 소매에 닿은 것을 알아채고는, 말없이 소매를 둘둘 말아 걷어 올렸다.
“의사 말로는 다행히 치명상은 없다고 하더군. 무릎 관절 쪽에 타박상이 심하고, 양쪽 손목에 열상이 깊어 봉합 수술을 한 게 전부다. 과호흡과 탈수로 기절했던 거고.”
“……지금, 몇 시입니까.”
“오전 11시. 꼬박 만 하루를 죽은 듯이 자더군.”
만 하루.
채원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팔에 힘을 주는 순간, 양쪽 손목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아윽……!”
채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침대에 파묻혔다. 그녀의 양쪽 손목에는 두꺼운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케이블 타이를 억지로 끊어내느라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탓이었다.
“가만히 있어.”
도진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침대 옆의 버튼을 눌러 매트리스 상단부를 천천히 들어 올려 주었다.
“목이 마릅니다.”
채원의 갈라진 목소리에 도진은 말없이 탁자 위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그가 컵에 물을 따르자, 채원이 두 손을 뻗어 컵을 받으려 했다.
탁.
도진이 채원의 붕대 감긴 손등을 가볍게 쳐내며 컵을 뒤로 물렸다.
“뭐 하시는…….”
“그 손으로 뭘 쥐겠다는 거지. 얌전히 입이나 벌려.”
도진이 침대 가장자리에 바짝 걸터앉았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다가오자, 병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했다.
그가 물컵에 꽂힌 유리 빨대를 채원의 입술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채원은 당황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마실 수 있습니다.”
“고집부리지 마. 지금 당장 네가 할 수 있는 건 숨 쉬는 것 빼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도진의 시선은 집요하리만치 채원의 입술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강압적인 태도에 채원은 결국 체념한 듯 입을 살짝 벌려 빨대를 물었다. 차가운 물이 타들어 가던 식도를 적시자 살 것 같았다.
채원이 조심스럽게 물을 삼키는 동안, 도진은 단 한 순간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긴 속눈썹.
창백하게 질려 있다가 물기를 머금고 옅은 생기를 되찾는 붉은 입술.
그리고 가운 틈새로 보이는, 멍이 든 하얀 목덜미까지.
도진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불길이 일렁였다.
“……다 마셨습니다.”
채원이 고개를 살짝 뒤로 빼자, 도진이 컵을 내려놓았다.
채원의 입가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리려던 찰나였다. 도진이 불쑥 손을 뻗었다.
그의 크고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채원의 입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앗.”
채원이 놀라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녀의 입술에 닿은 도진의 손가락은 서늘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묘한 열기는 피부를 델 것처럼 뜨거웠다.
도진의 손가락이 물기를 닦아낸 후에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짓누르듯 머물렀다.
병실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진의 얼굴이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 채원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의 코끝에서 풍기는 짙은 타바코 바닐라 향이 채원의 호흡을 온통 집어삼켰다. 어젯밤 주방에서 그가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을 때 났던, 바로 그 위험한 수컷의 향기였다.
심장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동정? 아니면, 소유욕?
“……선을 넘고 계십니다, 서도진 대표님.”
채원이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입술 위에 머물러 있는 그의 손가락을 피하며 차갑게 내뱉었다.
도진의 행동이 멈췄다.
그는 채원의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거두었다.
“선이라.”
도진이 침대 등받이에 팔을 기댄 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히 집 안에서 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말라고 그어둔 선이긴 하지.”
“그렇다면 지금 대표님의 행동은 명백한 계약 위반입니다. 간호라는 명목으로 이런 불필요한 스킨십을 할 이유는…….”
“네가 먼저 그 선을 짓밟고 나갔잖아.”
도진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명백한 분노가 서렸다.
“내 눈앞에서 내 물건이 처참하게 박살 날 뻔했어. 삼류 양아치 새끼들 발밑에서 구르면서, 네 몸에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길 뻔했다고. 그런데 내가 지금 계약서 쪼가리에 적힌 선 따위를 신경 쓰게 생겼나?”
“저는 대표님의 물건이 아닙니다.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죠.”
“파트너? 네가 어제 그 공장에서 혼자 뒤졌으면, 내 파트너는 사라지는 거야. 내가 너한테 투자한 가치, 내가 너를 통해 얻으려 했던 그림. 그 모든 게 한유라 같은 멍청한 년의 변수 하나에 날아갈 뻔했다는 뜻이다.”
도진이 상체를 확 숙이며 채원의 턱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난 내 통제 밖에서 내 소유물이 손상되는 걸 극도로 혐오해. 넌 내 허락 없이 다쳐선 안 돼. 그게 찰과상 하나라도 말이야.”
지독한 억지였다.
하지만 도진이 내뱉는 ‘소유물’, ‘내 것’이라는 단어들 속에는 비즈니스적인 분노를 넘어선, 훨씬 더 원초적이고 끈적한 집착이 묻어나고 있었다.
채원은 그의 강렬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오만하시군요. 제 목숨은 제 겁니다. 대표님이 화를 낼 자격은 없습니다. 어찌 됐든 전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대표님의 자본을 축내지도 않았으니까요.”
“입 다물어.”
도진이 으르렁거리듯 채원의 말을 잘랐다.
“네가 피투성이가 돼서 내 품에 안겨 있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넌 상상도 못 할 테니까.”
그의 눈동자가 고통스럽게 흔들렸다.
어제 폐공장에서 의식을 잃은 그녀를 안아 들었을 때, 도진은 태어나 처음으로 심장이 뜯겨 나가는 듯한 처절한 두려움을 맛보았다.
이 여자가 이대로 숨을 멈추면 어쩌나.
자신의 그 알량한 계산과 계약 따위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 감정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한채원이라는 늪에 완벽하게 빠져버렸다는 것을 시인하는 꼴이었지만, 도진은 더 이상 이 치명적인 텐션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채원은 도진의 그 낯선 눈빛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차갑고 완벽한 통제광 서도진. 그가 지금 자신 앞에서 묘한 빈틈을, 아니 억눌린 짐승의 민낯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채원이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물었다.
“그 쓰레기들은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경찰에 넘겼나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화제 전환이었다.
도진 역시 채원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탁자 위에 툭 던졌다.
“경찰? 내 방식이 그렇게 무르다고 생각하나.”
도진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숨만 붙여서 내 개인 사육장에 던져놨다. 손발이 멀쩡한 놈은 단 한 놈도 남겨두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평생 밥숟가락 하나 제 손으로 못 들고 짐승처럼 기어 다니게 될 테니까.”
그 살벌한 대답에도 채원의 표정은 평온했다. 오히려 옅은 안도감마저 스쳤다.
“잘하셨네요. 쓰레기들은 재활용할 가치도 없으니까요.”
채원의 냉혹한 대답에 도진이 피식 웃었다.
독한 여자. 일반적인 여자였다면 사람을 불능으로 만들었다는 말에 겁을 먹거나 질렸을 텐데, 이 여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유라가 사주했다는 건 확인했습니다.”
채원이 붕대 감긴 손을 꾹 쥐며 눈을 번뜩였다.
“통화 녹음본은 확보하셨습니까?”
“당연하지.”
도진이 탁자 위의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곧이어 병실 안에 한유라의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 찍은 영상 넘겨받는 대로 약속한 잔금 1억 꽂아줄 테니까, 확실하게 짓밟아. 알았어?! ]
녹음이 끝나자 채원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옥불 같은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멍청한 년. 제 발로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었군.”
“이 파일로 당장 경찰에 살인 교사로 쳐넣어 줄까.”
도진의 물음에 채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고작 이딴 걸로 감옥에 보내는 건 너무 편한 결말입니다. 한유라와 배정아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한성그룹의 권력과 돈, 그리고 그들이 쌓아 올린 가짜 명예를 만천하에 발가벗긴 다음에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시켜야죠.”
채원이 도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 퇴원하면, 내일 당장 한성 본사로 출근할 겁니다.”
“이 몸 상태로 출근을 하겠다고? 미쳤나.”
“제 몸은 제가 압니다. 손목에 붕대 좀 감은 것뿐이에요. 휠체어를 타서라도 갈 겁니다.”
채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지금쯤 한유라와 배정아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미쳐 날뛰고 있을 겁니다. 양아치들과는 연락이 두절됐을 테니까요. 그들이 두려움에 떨며 헛발질을 하기 시작할 때, 제가 멀쩡히 살아서, 그것도 서도진 대표의 비호를 받으며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채원의 눈빛에 차가운 계산이 돌기 시작했다.
“공포. 완벽한 공포를 심어줄 겁니다. 쥐새끼들은 코너에 몰려야 스스로 살을 파먹는 법이니까요.”
그녀의 독기 어린 눈빛을 보며, 도진은 가슴 한구석에서 기묘한 카타르시스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 있으려 하지 않고, 상처 입은 짐승이 이빨을 드러내듯 전장으로 기어나가려는 저 오만한 여자.
도진은 참지 못하고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채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웃기시죠?”
“아니. 내가 파트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붕대가 감긴 채원의 손목을 피해서, 그녀의 손등을 자신의 큰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쥐었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내일부터 한성그룹 전략기획실로 복귀시켜 주지. 필요한 권력, 자금, 인맥. 전부 내 이름으로 끌어다 써.”
도진의 시선이 채원의 눈동자에 깊숙이 박혔다.
“대신.”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
“두 번 다시 내 시야 밖에서 다치는 건 용납하지 않아. 또다시 이런 꼴로 내 앞에 나타나면, 그때는 널 한성그룹에 돌려보내는 게 아니라 이 병실에 영원히 묶어둘 테니까. 명심해.”
서도진의 방식대로 전하는, 지독하게 비뚤어지고 과격한 진심이었다.
채원은 자신의 손등을 감싸고 있는 그의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묘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얽혀 들었다.
계약이라는 명목 아래 그어져 있던 얇은 선이, 이미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한남동 한성그룹 본가.
“씨발!! 왜 전화를 안 받아!!”
쨍그랑-!
유라의 방에서 최고급 크리스탈 화병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는 이미 그녀가 집어 던진 향수병, 화장품, 액자들이 널브러져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한유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 안을 미친 듯이 서성거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의 액정은 수십 통의 발신 기록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제저녁에 끝냈어야 할 일이야! 왜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거냐고, 이 병신 같은 새끼들!!”
불안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분명 어제 오후, 칼자국 일당에게 한채원을 납치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시한 대로 한채원의 옷을 벗기고 처참하게 짓밟은 영상을 보내오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자정이 넘고, 아침이 밝고, 낮이 될 때까지 놈들과의 연락은 완벽하게 끊어져 버렸다.
돈만 받고 튄 걸까? 아니면, 일이 틀어진 걸까?
끼익-
그때, 유라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배정아가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엄마! 어떻게 됐어? 사람 풀어서 알아봤어? 그 새끼들 어딨대?!”
유라가 다급하게 달려가 배정아의 팔을 붙잡았다.
짝-!!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유라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배정아의 풀스윙 싸대기였다.
“아악! 엄마! 왜 때려!!”
유라가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배정아의 얼굴은 분노를 넘어선 극심한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유라의 어깨를 틀어쥐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이 미친 기집애야! 네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줄 알아?!”
“무, 무슨 짓이라니! 한채원 그 년이 먼저 내 약혼식을 망쳤잖아! 그래서 내가 사람 좀 써서 손봐준 게 뭐 어때서!”
“그년 뒷배가 누군지도 모르고 건드렸어?! 그년이 어제 누구랑 같이 있었는지 아냐고!!”
배정아의 비명 섞인 호통에 유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뒷배? 스폰서 말하는 거야? 그깟 졸부 새끼 돈 좀 뜯어낸 거 가지고…….”
“서도진이야!!”
배정아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토해냈다.
“대한민국 재계 1위, JS그룹의 젊은 황제 서도진! 한채원이 그 서도진의 약혼녀로 JS그룹 본가에 인사를 갔었다고, 이 멍청한 년아!!”
“……뭐?”
순간, 유라의 귓가에서 삐- 하는 이명이 울렸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서, 서도진? JS그룹? 엄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거짓말이지? 한채원 그 거렁뱅이 년이 어떻게 그런 거물이랑 엮여! 말도 안 돼!!”
“말이 안 돼? 내가 지금 지어내는 소리 같아?!”
배정아가 핏발 선 눈으로 유라를 쏘아보았다.
“어젯밤, 마포구 합정동 폐공장에 JS그룹 사설 경호팀 수십 명이 들이닥쳤어. 네가 고용한 그 쓰레기 양아치 세 놈? 서도진이 직접 차를 몰고 쳐들어가서 그놈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놨단다! 지금 그놈들은 경찰서가 아니라 행방불명 상태야. 쥐도 새도 모르게 서도진 손에 죽어 나갔다고!”
“아…… 아아…….”
유라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JS그룹. 한성그룹 따위는 하룻밤 만에 공중분해 시킬 수 있는 거대한 포식자. 그곳의 수장 서도진이 직접 움직였다고? 한채원을 구하기 위해서?
“그, 그럼 한채원은? 한채원 그 년은 살았어?”
“멀쩡히 살아서 서도진의 VIP 병동에서 보호받고 있대! 너 이 기집애, 네가 그 양아치들이랑 통화한 내역이라도 남아있으면 우린 끝이야! 서도진이 널 가만둘 것 같아?! 그 또라이 새끼가 우리 한성그룹을 통째로 씹어먹으려 들 거라고!!”
배정아는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빼앗은 한성그룹이, 멍청한 딸년의 섣부른 짓거리 하나 때문에 대한민국의 가장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게 생겼다.
유라는 초점 잃은 눈으로 바닥의 유리 파편들을 내려다보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공포가 목구멍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채원은 모든 것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비참한 패배자였다. 자신이 언제든 발로 밟아 터뜨릴 수 있는 벌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판이 뒤집혔다.
한채원은 자신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절대적인 권력자의 비호를 받는 여왕이 되어 있었다.
“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년이 어떻게…….”
유라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내가, 내가 어떻게 뺏은 건데…… 내가 어떻게 무너뜨린 년인데!! 서도진이 왜 그딴 쓰레기 같은 년을 감싸안아! 왜!!”
유라는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피눈물 같은 억울함과, 곧 자신에게 닥쳐올 처절한 응징에 대한 극도의 공포가 뒤섞여 흘러내렸다.
자신이 파놓은 지옥불 구덩이에, 스스로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쥐새끼의 비참한 말로였다.
“이제 끝났어…… 우린 다 죽은 목숨이야…….”
배정아의 절망적인 중얼거림이 유라의 귓가를 맴돌았다.
폭풍전야.
한성그룹을 집어삼킬 거대한 해일이, 저 멀리서 시퍼런 이빨을 드러내며 몰려오고 있었다. 한채원과 서도진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자비 없는 괴물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