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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

作者: 유리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2 14:45:47

새벽 3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JS 타워 펜트하우스.

게스트룸의 두꺼운 암막 커튼 밖으로는 여전히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을 채우는 것은 오직 태블릿 PC 화면을 두드리는 건조하고도 빠른 마찰음뿐이었다.

탁, 탁, 타닥. 탁.

한채원은 젖은 몸을 씻어내고 펜트하우스 전담 메이드가 내어준 넉넉한 사이즈의 남성용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메이드가 구급상자를 가져와 피투성이가 된 맨발을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었지만, 그녀는 상처를 내려다볼 여유조차 없었다.

'시간이 없어.'

도진이 준 시간은 아침 7시까지. 단 4시간.

그 안에 자신이 왜 JS그룹 후계자의 완벽한 아내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한성그룹을 어떻게 뒤흔들어 서도진의 적들에게 타격을 줄 것인지 완벽한 기획안을 짜내야 했다.

화면을 노려보는 채원의 눈동자에 시퍼런 핏발이 섰다.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석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성그룹의 숨겨진 지분 구조, 계모 배정아가 관리하는 페이퍼 컴퍼니의 자금 흐름, 그리고 JS그룹 내에서 서도진의 사촌들이 벌이고 있는 권력 암투까지.

지난 수년간 전략기획실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머릿속에 구겨 넣었던 정보들이, 지금 이 순간 생존을 위한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화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배정아, 네가 날 쫓아내며 완벽하게 이겼다고 생각했겠지.”

채원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서늘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넌 가장 큰 실수를 한 거야. 내 머릿속에 있는 폭탄을 제거하지 않고 날 밖으로 내던졌으니까.”

화면 위로 복잡한 마인드맵과 자금 추적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피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배신감과 증오, 그리고 억울함이 지독한 아드레날린이 되어 온몸을 태우고 있었다.

반드시 살아남아, 그들을 찢어발길 것이다.

같은 시각. 펜트하우스 반대편에 위치한 서도진의 개인 서재.

최고급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은 도진은, 한 손에 크리스탈 글라스를 든 채 김 비서가 건넨 태블릿 화면을 무심하게 넘기고 있었다.

글라스 안의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고요한 서재를 울렸다.

“보고해.”

도진의 짧은 지시에, 김 비서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반듯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한성그룹 전략기획실 한채원 본부장. 아니, 자정부로 전 본부장입니다. 조금 전 한성그룹 사내 게시판과 언론사에 보도자료가 뿌려졌습니다. 혐의는 500억 원대 회사 자금 횡령 및 배임입니다.”

“소문이 아니라 진짜였군. 배정아의 작품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김 비서가 리모컨을 조작하자, 서재 벽면의 대형 스크린에 몇 장의 사진과 문서가 떠올랐다.

“오늘 밤, 한성그룹 본가에서 한채원 씨가 쫓겨나기 직전… 그녀의 약혼자였던 강민호와 이복동생 한유라가 불륜 관계였다는 정황이 확인되었습니다.”

도진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위로 치솟았다.

“약혼자와 이복동생의 불륜이라.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군. 횡령 건은?”

“완벽하게 조작된 덫입니다. 한채원 씨가 유럽 출장을 간 사이, 강민호가 그녀의 개인 보안 토큰을 배정아 측에 넘긴 것으로 파악됩니다. 횡령 자금이 흘러 들어간 페이퍼 컴퍼니의 실소유주는 배정아의 친동생입니다.”

도진은 글라스를 입가로 가져가며 스크린 속 채원의 이력서를 응시했다.

한성그룹 회장의 혼외자.

10살 때 본가로 들어와 온갖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자람.

그러나 악착같이 공부해 수석으로 입사, 지난 5년간 한성그룹의 핵심 사업들을 모조리 흑자로 전환시키며 주가를 300% 이상 끌어올린 장본인.

“능력 하나는 괴물 같군요.”

김 비서가 혀를 내두르며 덧붙였다.

“배정아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이번 유럽 지사 건까지 성공시키면 회장님이 그녀를 정식 후계자로 지목할 확률이 높았으니까요. 그래서 아예 뿌리까지 뽑아버리려고 작정한 듯합니다.”

도진은 스크린 속, 당당하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과거의 한채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몇 시간 전, 빗속에서 처참하게 젖어 있던, 그러나 절대 굴복하지 않던 그 독기 어린 눈동자가 겹쳐 보였다.

‘유능한 놈은 뒤통수를 맞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믿었던 가족과 사랑했던 연인이 완벽하게 합심하여 등 뒤에서 칼을 꽂은 것이다.

도진은 픽,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멍청한 것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것도 모자라, 그 거위를 내 발밑에 던져줬군.”

“대표님, 설마 아까 그 여자가 한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김 비서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현재 정계 거물인 박 의원 측에서도 대표님과의 혼담을 적극적으로 추진 중입니다. 굳이 횡령범 낙인이 찍힌, 그것도 몰락한 집안의 혼외자를 들이실 이유가 없습니다. 사촌분들에게 공격당할 빌미만 제공하는 꼴입니다.”

도진은 잔에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뜨겁게 내려갔다.

“박 의원의 딸? 그 멍청하고 온실 속 화초 같은 여자가 내 옆에서 사촌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나? 오히려 내 등에 칼을 꽂지 않으면 다행이지.”

도진의 눈빛이 포식자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건 ‘말 잘 듣는 인형’이 아니야. 나와 함께 진흙탕을 구르며 JS그룹을 장악할 수 있는 ‘미친 사냥개’지. 게다가 한채원 정도의 머리와 독기라면, 내 사촌들의 목줄을 물어뜯기엔 아주 제격일 것 같은데.”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잃을 게 없는 상태입니다. 통제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잃을 게 없는 인간이 가장 통제하기 쉬운 법이야. 내가 그녀의 유일한 구명줄이 되어주면 되니까.”

도진은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머릿속으로 이미 거대한 체스판이 그려지고 있었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내민 손.

한채원은 분명 무슨 짓을 해서든 그 손을 꽉 잡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짖고, 물어뜯겠지.

“기대되는군. 과연 7시까지 어떤 답안지를 들고 올지.”

도진의 입가에 짙은 흥미가 번졌다.

오랜만에 심장이 기분 좋게 뛰고 있었다.

아침 7시 정각.

샤워를 마치고 완벽하게 떨어지는 네이비 슈트를 차려입은 도진이 다이닝룸으로 걸어 나왔다.

넓은 대리석 테이블 끝에는 한채원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았고, 메이드가 빌려준 옷은 그녀의 체구에 비해 커서 위태로워 보였다.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핏기가 전혀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도진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허리는 꼿꼿하게 펴졌고 눈빛은 레이저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일찍 나왔군.”

도진이 커피잔을 집어 들며 여유롭게 맞은편에 앉았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건 제 방식이 아니라서요.”

채원은 망설임 없이 테이블 위로 태블릿을 밀어 보냈다.

“확인하시죠. 서 대표님이 요구하신 제 가치의 증명입니다.”

도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태블릿 화면을 내리며 천천히 기획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도진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미세하게 깊어졌다.

‘……이건.’

완벽했다.

아니, 완벽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소름 돋는 통찰력이었다.

“JS그룹 2대 주주인 서태진 전무. 대표님의 사촌 형이죠.”

채원이 건조한 목소리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서 전무는 겉으로는 대표님께 복종하는 척하지만, 뒤로는 JS 화학의 지분을 은밀히 매집하고 있습니다. 그 자금줄의 출처가 어딘지 아십니까?”

“어디지?”

“한성건설입니다.”

도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도진의 정보망으로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고급 정보였다.

“한성건설이 진행 중인 신도시 개발 하청 비리에 서 전무가 연루되어 있습니다. 제가 한성 전략기획실에 있으면서 그 더러운 자금 세탁 경로를 전부 추적해 두었죠.”

채원은 붕대가 감긴 발을 꼬며 당당하게 도진을 응시했다.

“저를 대표님의 아내로 맞이하십시오. 그럼 저는 내일 당장 그 자금 세탁 증거를 언론에 터뜨릴 겁니다. 서태진 전무의 손발을 자르고, 그가 가진 지분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호오.”

도진이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기획안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대표님이 저를 아내로 선택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채원의 눈동자에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현재 여론은 500억 횡령범 한채원에게 쏠려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JS그룹의 대표가 쫓겨난 몰락한 집안의 여자를 거두어 결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기의 로맨티스트 소리를 듣겠지.”

“맞습니다. 서 회장님은 기업의 ‘이미지’를 병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횡령 누명을 썼다는 증거를 대표님이 밝혀주시고, 절 극적으로 구출해 내는 서사를 만든다면? 회장님은 대표님을 그저 차가운 사업가가 아닌, 대중을 품을 줄 아는 완벽한 후계자로 인정하실 겁니다.”

정확했다.

도진의 치명적인 약점은 대중 친화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항상 도진의 피도 눈물도 없는 경영 방식을 경계했다.

하지만 한채원을 구원하는 서사가 더해진다면, 그 약점은 완벽하게 지워진다.

“내가 네 누명을 벗겨주면, 넌 내 사촌들을 무너뜨릴 칼이 되어주고, 내 후계 구도를 완벽하게 만들어주겠다. 이거군.”

도진은 태블릿을 덮고 채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획안은 훌륭해. 아니, 기대 이상이야.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

“말씀하시죠.”

“너는 이 거대한 판에서 무엇을 얻지? 고작 횡령 누명을 벗는 거? 그걸로는 네 성에 차지 않을 텐데.”

도진의 예리한 질문에 채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당연히 누명을 벗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한성그룹을 집어삼킬 겁니다.”

“뭐?”

“저를 짓밟고 제 자리를 뺏어간 한유라, 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배정아, 그리고 저를 배신한 강민호까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뺏고, 가장 비참한 바닥으로 끌어내릴 겁니다. JS그룹이라는 당신의 거대한 배경이 제 복수의 무대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적나라한 살기였다.

보통의 남자라면 그 지독한 독기에 질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도진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그 맹렬한 분노가 마음에 들었다. 어설픈 감정이나 위선보다, 철저한 이익과 복수심으로 뭉친 관계가 훨씬 더 견고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도진의 입술 사이로 낮고 매력적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 하하하.”

처음 들어보는 도진의 웃음소리에 채원은 흠칫 놀라 어깨를 굳혔다.

웃음을 거둔 도진은 뒤에 서 있던 김 비서에게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탁.

김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고급스러운 가죽 폴더 하나를 꺼내 대리석 테이블 위로 미끄러지듯 밀어 보냈다.

스으윽-.

채원의 바로 앞까지 멈춰 선 폴더.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도진을 쳐다보았다.

“열어봐.”

채원은 떨리는 손으로 가죽 폴더를 열었다.

안에는 최고급 특수 용지로 인쇄된 세 장짜리 서류가 들어 있었다. 맨 위 상단에 적힌 굵고 선명한 텍스트가 채원의 눈에 박혔다.

[ 혼 인 계 약 서 ]

“……이게 뭡니까?”

채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네가 증명한 가치에 대한 내 대답.”

도진은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그의 차가운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채원의 눈을 깊게 파고들었다.

“네 제안, 받아들이지. 아니, 오히려 내가 더 적극적으로 사고 싶어졌어. 네 그 미친듯한 독기와 복수심이 내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지 아주 흥미로워졌거든.”

도진은 턱을 치켜들며 오만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기한은 딱 1년. 그 1년 동안 우리는 완벽하게 대중과 회장님을 속일 거야.”

“1년…….”

“그래. 1년 동안의 완벽한 쇼윈도 부부. 그게 내가 내미는 조건이다.”

도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이닝룸 안에는 숨 막힐 듯한 팽팽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비가 그치고, 먹구름을 뚫고 나온 눈부신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이 마주 앉은 대리석 테이블 위를 비추고 있었다.

한채원은 자신의 앞에 놓인 계약서와, 자신을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 서도진을 번갈아 보았다.

지옥 같았던 어젯밤.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하게 쫓겨났던 그녀에게, 지금 악마가 구원의 밧줄을 내밀고 있었다.

절대 놓칠 수 없는, 아니, 무조건 잡아야만 하는 가장 달콤하고도 위험한 동앗줄을.

채원의 마르고 창백했던 입술 위로, 비로소 아주 짙고 매혹적인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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