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마지션은 아쳐와의 숨 막히도록 격정적인 관계를 마친 뒤, 어지러워진 옷매무새를 수줍게 가다듬으며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방금 전까지 몸을 탐하며 짙은 열기를 피워 올렸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무심하고 단정한 태도였다.비록 저주 탓에 어지간히도 몸이 낫지 않고 그 고귀하던 외모마저 빛을 잃어 안타까움을 자아냈지만, 더럽고 흉터진 피부 아래 흐르는 마력만큼은 기적처럼 밀도 높게 채워져 있었다.지금 마지션의 가슴속은 아쳐를 향한 미움으로 가득했다. 자신을 이용해 교묘히 저주를 퍼뜨리고 무고한 이들에게 상처를 남긴 채 지니만 집착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그와 가진 잠자리에서 느낀 극도의 쾌락은 부정할 수가 없어 스스로가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몸이란 참으로 정직한 법입니다, 교수님. 자······ 이제 우리를 위협하는 그자를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지 의논해 볼까요?”참으로 나쁜 남자지만, 마지션은 그의 서늘한 음성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일단, 그자에게서는 진동할 만큼 짙은 진흙 냄새가 풍겼습니다. 결계를 비틀고 들어올 만큼 대단한 마법사임은 분명해 보였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오라버니의 피부에 남아 있던 특유의 솔잎 향이 함께 느껴져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그자가 또다시 나타난다면 어찌할 생각입니까?”마지션은 당연히 그자를 추적해 봉인하고, 오라버니를 어떻게 해한 것인지 그 끔찍한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자신의 실력은 그 괴물 같은 자에 비하면
첫 번째 주인이 대체 얼마나 지독한 놈이었기에 이토록 상처를 입은 걸까.하긴, 이리도 곱고 어여쁜 생명체니 나쁜 마음을 품은 사내라면 흉한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일이었다.그런 그녀가 제 눈앞에 나타나 이렇게 인연이 닿다니. 아무래도 자신과 이 엘프는 보통 인연이 아닌 게 분명했다.현생에 그 어떤 기대도 품지 않던 스틸이었지만, 주춤거리며 기죽어 있는 그녀를 보니 타인에게 정체를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린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눈치채게 되었다.“너, 사람들 앞에서는 차라리 그냥 인간인 척해야 하는 거 맞지?”“……응. 마탑에 끌려가면…… 내 마력을 강제로 뽑아갈 거야. 첫 번째 주인님처럼……. 끔찍한 실험만 당할 것 같아서 그건 정말 싫어…….”그녀의 미려하고 맑은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스틸의 팔을 잡은 작은 손에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과거에 지독하게 아픈 기억이 있는 게 분명했다. 비록 램프에서 나온 요정이라 해도 인간처럼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고, 감정도 풍부하며 물리적으로 실체가 존재하는 생명체였다.스틸에게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득도 없어 보였지만, 문득 호기심이 생겨 목에 걸린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아라비안나이트라는 이야기 들어봤어? 거기 나오는 램프의 요정은 덩치 큰 파란색 남자에, 거처하는 램프도 이 펜던트보다 훨씬 크던데.”“램프의 형태는 제각각이야. 요정들도 외형이나 성향이 전부 다르고.”소원을 들어주고 주인을 온전히 따르는 이런 강력한 존재가 내 편이라면.어쩌면 이번 생의 가장 강력한 치트키는 이 엘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틸의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고동쳤다.“너, 이름은…… 지니라고 하자.”그 순간 엘프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름을 지어준 게 그렇게나 놀랄 일이었을까.이게 그리 깜짝 놀랄 일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이번 생에는 자신도 아쳐에게 깔끔하게 복수를 완성하여 원한을 풀고, 제 곁에 선 이 불쌍하고 어여쁜 엘프도 구원해 주겠노라고 스틸은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이름
큰 키에 흐트러짐 없는 체구, 활력이 넘치는 젊은 20대 후반의 겉모습을 한 마르바스를 마주하자 자드키엘은 저도 모르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그의 미형 얼굴 뒤에 감춰진 마력은 10년 전보다 얼마나 더 지독하고 강해졌을까.제논 폐하가 마르바스만큼은 가문의 가주이자 최고의 마탑주로서 제 오른팔이라 존중하며 막강한 권력을 내어준 이유를 자드키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도른 제국 전체를 뒤흔드는 그의 오만한 영향력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얼마만큼의 정보를 모았습니까?”8월의 한여름이었지만, 그가 닿은 공간에는 서늘하고 자극적인 냉기가 자드키엘의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일단······ 스틸 대공이 8월 15일에 제국의 귀족들을 전부 가르나르로 초청했습니다.”그녀는 가쁘게 심호흡을 했다. 겹겹이 둘러쳐진 결계 안이었지만, 누군가 제 목덜미를 노려보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마르바스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그건 이미 온 제국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상단 발족과 함께 길드 설립을 알리는 화려한 공개 행사를 연다는 것 말입니다.”“······참고로 아쳐 황태자가 비약적으로 마력을 키워가고 있습니다.”“······그건 제법 흥미롭군요. 내가 모르는 마법사가 이 제국에 존재하다니.”자드키엘은 온몸의 살가죽이 따끔거릴 정도로 생소하고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지독한 정신 지배라도 걸려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더 위험한 기운이었다. 대단한 아우라를 풍겨 대는 마
지니는 스틸의 짙어진 눈빛과 그 속에 감도는 진득한 분위기에 숨을 들이켜며, 그가 무엇을 전하려는지 기대와 호기심이 얽힌 눈으로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뜨거운 달콤함이 남은 숨결이 어지럽게 섞이는 짧은 찰나.스틸은 지니의 보드라운 손을 가져와 그 안에 가만히 무언가를 쥐여 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아직도 서툴지만, 너를 두고 더 이상 가만히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말이지.”“주인님······.”그는 지니의 입술 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짙은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말을 덧붙였다.“복수도 해야 하고, 대공으로서 헤쳐 나갈 길도 아득히 멀어. 하지만 네가 내 곁에서 사라졌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너 없는 내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똑똑히 깨달았어.”자신이 일궈낸 아름다운 가르나르의 영지도 소중했다. 그러나 그 어떤 찬란한 풍경보다도 스틸의 시선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오직 제 품 안의 지니였다.앞으로 나아갈 길이 비록 피로 물든 험난한 가시밭길이라 해도, 이 여자만큼은 영원히 내 품에서 웃게 만들고 싶었다.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툰 스틸은 고개를 숙여 지니에게 우선 입부터 맞추었다.진득하게 이어진 입맞춤의 여운이 가라앉기도 전에, 스틸은 지니의 손바닥을 부드럽게 지그시 누르며 자신의 가장 깊은 속내를 내보였다.“지니, 네가 살던 세상에 이런 보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있던 곳에서는 이게 그 어떤 마정석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 네게 주
제논은 스스로를 돌이켜보아도 정말 꼴사납고 어이없다고 생각했다.황족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부끄러움을 느껴서는 안 되는 법이건만, 빛의 요정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에 차오르는 것은 제 손으로 버려놓고 이제 와 다시 얽매이려는 한심하고 질척이는 아욕뿐이었다.버려버린 엘프 따위, 아무런 능력이 없더라도 다시 손에 쥐고 탐하는 것이 제 욕심이었고, 이제는 그 빛의 요정을 곁에 둔 스틸이라는 남자에게로 온 관심이 옮겨가고 있었다.그 남자는 도대체 어떤 대단한 천운을 타고났기에, 빛의 요정을 낚아채 간 것일까.제논의 눈앞으로 투명한 상태창이 자욱하게 떠올랐다. 테라스를 시꺼멓게 채우는 검은 연기 속에서, 요술 램프의 팔찌가 마치 해탈한 현자처럼 묵묵히 답을 일러주고 있었다. *************************★스틸 반 가드 캔도르는 차원을 넘나든 초월자임.* 기타 능력 : 580,000 * 4개월 전이 당시 레벨 5 / 현재 레벨 : 88★ 빛의 요정(Ljósálfr)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짐. ★ 물, 바람, 흙, 불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됨. ★ 봉인, 마법 탐지, 연금술, 순간이동, 인벤토리 보유, 치유, 정화, 소환, 건축, 결계, 투명화, 흑마법이 사용자. ★ 플로럴스피릿 (Floralspirit), 다른 이형의 존재에게 가호를 받게 됨. ★ 남은 수명이 45년임.************************* 제논은 시야에 허공처럼 떠오른 그 경이로운 수치들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깊은 숨을 집어삼켰다.스틸이 보통이 아닐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독보적인 능력을 품고 있어 결코 간과할 수가 없었다.“기타 능력치에······ 플로럴스피릿과 이름 모를 이형의 존재가 수호해 준다고?”
스틸 역시 지니와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레벨의 변화가 비로소 궁금했다.비록 몸은 멀어져 있었을지라도 마음만큼은 더욱 굳건하게 밀착되었던 시간들이었다.그 혹독한 시련을 거치며 서로의 존재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달았던 두 사람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의 애틋함은 이전과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게다가 던전까지 완전히 폐쇄한 데다 축복받은 가르나르 땅에 오래 머물렀으니, 스틸의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으리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간절한 바람을 품은 채, 스틸은 허공에 장엄하게 떠오른 마법 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이내 드러난 결과는, 실로 충격적인 전율 그 자체였다.******************************- 기타 능력 : 580,000- 현재 레벨 : 88(S급 마력소유자, 소드 마스터)★ 물, 바람, 흙, 불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됨.★ 봉인의 능력이 발현됨.★ 플로럴스피릿 (Floralspirit)의 가호를 받게 됨.★ 추가 수명 45년을 획득하였음.★ 마법 탐지, 연금술, 순간이동, 인벤토리 보유, 치유, 정화, 소환, 건축, 결계, 투명화, 흑마법, 이 증폭됨.******************************“주인님! 수명이, 수명이 정말 폭발적으로 늘어났어!”지니는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스테이터스 화면을 가리켰다. 이미 수명이 꽤 늘어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무시무시한 수치로 폭증했을 줄은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스틸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뜬눈으로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45년이라니······.
30대 중반의 노련한 호위 기사단장, 세도르는 한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를 거칠게 휘감은 채 말을 달리던 중이었다. 묵직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은발의 젊은 부하 기사가 다급하게 다가와 앞을 가로막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고삐를 홱 잡아챘다. “세도르 단장님! 방금 이스트 마구간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이런 황당할 데가. 세도르는 황망함에 굵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황실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아카데미 안에서 화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이버 경, 지금 뭐라고 했나?” “진화는 방금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인명 피
자신이 알고 있는 ‘소원을 말해 봐!’라고 하는 램프의 요정이 그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어서 빨리 이 소녀를 전문가에게 보여줘야 하는데.“어이, 내가 나이가 많아 보이니 말은 좀 편히 할게. 엘프야, 일단 내가 눈 떠보니 다른 세상에 소환되어 환생한 것 같아서 얼른 적응해야 하거든? 그러니 그쪽도 정신 차려.”넋두리하듯 그리 스틸이 말을 내뱉고 몸을 돌리라 하자, 엘프는 제 두 어깨를 꼭 부여잡더니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어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 초월자인가? 나 횡재했잖아? 초월자를 주인님으로 맞이하다니!”
주인님은 무슨. 불이 난 연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스틸은 우선 잠시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3초 잠깐 고민한 그였다. 누가 봤나? 참 CCTV는 없는 세상이지? 하지만 목숨까지 내던지며 대한민국 영공을 지키던 천하의 파일럿 강철신이 이런 목걸이 하나의 움찔하다니.게다가 망한 영지기는 해도 고위 귀족 대공 인생에 뭘 주워서 넙죽- 꿀꺽할 수 없는 법.일단 이 화재부터 진압하고 주인이나 찾아줘야겠다 싶어 주변을 훑었다.강철신은 일단 구유통이 아닌 우물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불길에 쫓겨 물을 찾던 그의 눈에 목걸이가 들어
한 달 전, 20XX년 4월 1일 오전. 인생 2번째라 공군 소령 강철신은 오늘이 당연히 올 줄 알았다. 그리고 당연히 적국기 등장으로 출격 명령을 받았다. 전생의 기억이 혈관 속을 맴돌았다. 오늘, 그는 죽을 각오로 전투기에 올라가야 하는 날이다. 분명 적국의 전투기에는 망할 아쳐가 타고 있을 터.정밀유도폭탄(SDB)까지 무장하고 스텔스 전투기로 출격 30분 만에, 지금 그는 사선을 넘나들게 되었다. 여전히 그는 대한민국 영공을 휘저어 놓았고, 심지어 서울 한복판에 미사일을 터트릴 요량으로 북방 한계선을 넘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