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밖으로 나오자 낮의 열기는 간데없이 습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따라 유독 부치는 몸에 남은 것은 뼈마디를 파고드는 피로와 공허함뿐이었다.
조금만 더. 진짜 조금만 어떻게 버티면…….
그렇게 되뇌면서도, 정작 버티고 난 끝에 자신에게 뭐가 남아 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텅 빈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툭 꺼져 내리듯 아팠다.
가방끈이 젖은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보다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이 더 무겁고 저릿하게 가라앉았다.
어느새 멈추었던 비가 다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굵어졌다. 설화는 낡은 우산을 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걸었다. 빗속을 헤치던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결국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다리 위에 멈춰 섰다.
설화는 젖은 손으로 가방을 뒤적여 낮에 편의점에서 받았던 내용증명 서류를 꺼냈다. 지독한 채무의 굴레. 설화는 이를 악물고 종이를 갈가리 찢어 다리 아래로 던져버렸다. 조각난 하얀 종이들은 빗물에 무겁게 젖어들며 시커먼 강물 위로 휩쓸려 흔적도 없이 떠내려갔다.
"아빠 거니까, 가져가."
목구멍을 찢고 나온 나지막한 속삭임은 거센 빗소리에 묻혀 금세 흩어졌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온통 숨이 막힐 듯한 회색빛이었다. 강물도, 도로도,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자신만 남겨둔 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상 전체가 저 멀리 밀려나는 듯한 고립감 속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뺨을 적시는 것이 차가운 빗물인지, 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거긴 어때, 아빠? 그렇게 다 던지고 떠나버리니까, 속이 후련해?"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질문이 허공에 맴돌았다. 세상에 철저히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과 끝없는 불안이 칠흑 같은 밤어둠 속으로 깊게 스며들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도로변. 검은 세단 안에는 낮은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담배 연기가 천천히 빠져나가 빗물 섞인 밤공기와 엉켰다.
남자는 운전석에 앉은 채 멀리 다리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 너머로, 가로등 아래 선 여자의 모습이 희미하게 번졌다.
젖은 머리카락, 축 처진 어깨, 난간에 멈춘 발끝. 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이 느리게 손목시계로 내려갔다.
한 시간째였다. 짧게 혀를 찼다. 담배 끝에 불씨가 어둠 속에서 붉게 깜빡였다.
이 시간의 그녀라면 보통 멈추지 않았다. 피곤에 절은 몸으로도 고개를 숙인 채 걷고, 버스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걸음을 재촉하고, 누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 쪽이었다.
그런 여자가, 오늘은 저기에 서 있었다.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낮게 숨을 내뱉었다. 상중에도 울지 않던 여자였다. 검은 옷을 입고 빈소 한구석에 마른 꽃처럼 서 있던 그녀는 울지도, 매달리지도, 누군가의 손을 붙잡지도 않았다.
그 독기가 눈에 걸렸었다. 처음에는 그저 우스웠고, 다음에는 묘하게 거슬렸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비를 맞고 서 있는 꼴이라니."하."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는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창밖으로 튕기듯 버렸다. 빗물 고인 도로 위로 작은 불씨가 떨어졌다가 금세 꺼졌다.
그는 다시 다리 위를 보았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비에 젖은 어깨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왜’라는 의문이 떠오르자 기분이 불쾌해졌다. 누군가를 걱정하고 있다는 식의 감상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빚을 받아내고, 쓸모를 계산하고, 필요하면 끝까지 몰아붙이는 쪽에 가까웠다면 모를까.
그런데도 시선은 다시 다리 위의 여자를 쫓았다. 짜증인지, 경멸인지, 혹은 설명하기 싫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깊은 곳을 스쳤다.
"성가시게."
남자는 우산을 들고 조용히 차 문을 열자, 강한 빗방울과 함께 습한 바람이 검은 셔츠 위로 빠르게 스며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그는 비가 내리는 다리 위를 향해, 여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차 안에 남겨진 재즈만이, 닫힌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설화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봤다. 전날 백화점에서 보낸 하루와 진우와의 저녁, 그 자리에서 들었던 말이 뒤엉킨 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협탁 위를 더듬었지만, 스마트폰은 잡히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기기를 주워 화면을 열었지만, 너무도 조용했다. 부재중 전화도, 알림 숫자 하나도 없었다.왜 아무 연락이 없지.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설화는 입술을 다물었다. 단순히 빚으로 엮인 사이라면 이런 조바심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일주일째 이어지는 강현의 부재는 생각보다 선명하게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출근이나 하자.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으니까.”보름이라는 시간도 어느새 절반을 넘겼다. 설화는 몸을 일으켜 옷장을 열었다. 고깃집 냄새가 밴 오래된 티셔츠 대신 잘 다려 둔 셔츠를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입술에 옅은 색을 얹었다.거울 속 얼굴은 전보다 조금 단단해 보였다. 강현이 없는 시간 동안에도 하루는 굴러갔고, 자신은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오늘도 버티자.***W백화점 정문 앞에 도착한 설화는 차가운 가을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5층 버튼을 누른 뒤에는 습관처럼 주머니 속 스마트폰으로 손이 갔다. 화면은 여전히 어두웠다.“바보 같이.”허탈한 실소가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다. 대단한 연락이라도 기다렸던 사람처럼 구는 자신이 우스워 고개를 작게 저었다. 미련처럼 목을 조여 오는 낯선 감정을 억지로 바닥으로 욱여넣었다. 매장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설화 씨,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잘 부탁드릴게요.”의류 상자를 안고 지나가던 동료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오늘 물량 엄청나게 들어왔어요. 오픈하자마자 정신없을 것 같아요.” “옷만 갈아입고 바로 도울게요.”설화는 직원 대기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처음에는 뒤꿈치를 까지게 만들던 구두도 이제는 제법 익숙했고, 포스기 조작과 손님에 따라붙는 입담도 늘어있었다.오픈과 동시 손
팽팽하게 이어지던 하루는 오후 여섯 시가 지나서야 느슨해졌다.설화는 직원 대기실에서 땀과 먼지가 밴 유니폼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속 얼굴에는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가방에서 립밤을 꺼내 입술 위에 덧바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누군가와 저녁을 먹기 위해 퇴근 준비를 하는 일이 낯설었다. 업무도 거래도 아닌 약속이었다.매니저와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정문으로 나가자, 난간에 기대선 진우가 보였다. 설화를 발견한 그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오래 기다렸어요?” “여섯 시라더니 삼십 분은 더 지난 것 같은데요.”진우의 투정 섞인 말투에 설화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죄송해요. 마감 정리가 늦어져서요. 뭐 드실래요?” “일단 걸어요. 배고픈 사람이 메뉴 고르는 게 제일 빠르니까.”진우가 앞장섰고, 설화는 그의 옆에 맞춰 걸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하루 종일 달아올랐던 얼굴을 식혀 줬다. 백화점 안의 기계음과 안내 방송이 멀어질수록 발걸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저는 검사님처럼 지갑이 두둑하지 않아서 비싼 곳은 안 돼요.” “제가 그렇게 속물처럼 보입니까?”진우가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저도 평범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삼겹살 먹고 싶네요.”삼겹살이라는 말에 설화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 불판 앞에 서서 손님들의 고기를 뒤집고, 기름 냄새가 밴 옷으로 집에 돌아가던 날들이 떠올랐다. 진우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고도 모른 척 계속 걸었다.“근처에 아는 곳 있으세요? 저는 이 동네를 잘 몰라서요.” “자주 가는 데가 있어요. 분위기는 기대하지 말고.”백화점 뒤편 골목으로 들어서자 낡은 네온 간판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진우가 멈춘 곳은 ‘생삼겹살 전문’이라는 환한 간판이 걸린 식당 앞이었다.문을 열자 고기 굽는 냄새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설화는 잠시 입구에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냄새였지만, 오늘은 앞치마를 두르지 않아도 됐다.직원이 물병과 물수건을 내려놓으며 진우
W백화점 5층 직원 대기실.유니폼 상의의 마지막 단추를 채운 설화는 거울 속 자신과 잠시 눈을 맞췄다. 면접을 통과하고 출근한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어색한 유니폼은 아직 몸에 겉돌았고, 구두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꿈치를 파고들었다. 그래도 매장 입구에서 숨부터 고르는 일은 줄었다.“유설화 씨, 오늘은 이쪽 매장 서브로 붙어요. 점심은 한 시부터고, 중간 대기는 없습니다.”한아름 의류 상자를 끌어안고 움직이던 선배가 일정표를 내밀었다.“네, 알겠습니다.”설화는 짧게 대답하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오늘 하루만 버티자. 속으로 한 번 되뇌고 매장 문을 열었다.후끈한 열기와 소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른 시간부터 계산대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아이를 달래는 손님과 옷을 들고 매장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끼리 동선을 뒤엉켰다.“직원분, 이거 다른 색상 있어요?” “이건 교환은 가능한 거죠?” “얼마나 기다려야 해요?”질문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설화는 입가에 미소를 걸고 차례로 응대했지만, 몇 번이나 창고와 매장을 오가는 사이 발등은 벌겋게 부어올랐다. 포스기 옆에는 정리하지 못한 영수증이 쌓였고, 한 손님이 물러나기도 전에 다음 손님이 옷을 내밀었다.설화는 바코드 스캐너를 다시 쥐었다. 숨이 가빠질 때마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생각할 틈이 없는 건 오히려 나았다. 강현의 연락도, 보름 뒤의 일도 떠올릴 시간이 없었다.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설화는 매장 밖 벤치에 몸을 기대듯 앉았다. 구두를 살짝 벗어 보니 뒤꿈치가 붉게 짓물러 있었다. 손끝으로 상처 주변을 눌러 보던 설화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아, 진짜….”스마트폰을 켜자, 달력 위로 보름의 절반이 지나 있었다. 강현이 허락한 시간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지만, 그동안 그의 연락은 한 번도 없었다. 보름을 달라고 한 건 자신이었으니 그가 찾지 않는 동안은 홀가분해야 했다. 그런데 퇴근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알림창을 확인하는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뜨지 않은 화면을
저녁 일곱 시, 검은 세단이 한정식집 담초 앞에 멈췄다.“도착했습니다, 대표님.”김 기사의 목소리에 강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차창 밖으로 가지런히 손질된 정원과 묵직한 기와지붕이 보였다. 은밀한 회합 장소로 자주 찾는 곳이었지만, 담초의 고요한 분위기는 올 때마다 사람을 긴장시켰다.강현은 재킷 단추를 잠그고 차에서 내렸다. 한복을 갖춰 입은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가장 안쪽 별채로 들어서자, 박 회장이 상석에 먼저 앉아 있었다.“회장님.”박 회장은 손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직원이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미닫이문을 닫고 나갔다.“청일제지 건은 들었네.” “벌써 들으셨습니까.” “이 바닥에서 숨길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숨소리 하나에도 값이 붙는데.”박 회장은 찻잔을 들어 향을 맡은 뒤 강현을 바라봤다. 속을 가늠하기 힘든 노련한 눈빛이었다.“청일제지를 넘겨받을 곳은 우리 계열사겠지?” “한성화학입니다. 지분 구조가 비슷해서 겉으로는 무리 없이 넘어갈 겁니다.” “말처럼만 되면 좋겠군.”박 회장의 시선이 찻잔 너머로 강현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슈트의 소매부터 넥타이 매듭까지 흐트러진 곳 하나 없었고, 대답에도 망설임이 없었다.“정치권에서 냄새를 맡으면 거래는 끝이야. 청일제지 하나 정리하자고 우리까지 끌려 들어갈 순 없어.” “그럴 일 없습니다.” “확실해?” “네. 필요한 책임은 외부 법인에서 끝나게 해 뒀습니다.”수백억 원 규모의 회사는 이름만 남긴 채 사라질 예정이었다. 강현은 숫자와 지분율, 문제가 생겼을 때 잘라 낼 선까지 이미 계산해 둔 상태였다.박 회장이 그제야 마음에 드는 듯 짧게 웃었다.“좋아. 자네 실력은 알고 있으니까.”그는 빈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대신 공식적으로 우린 이 일과 무관해. 자네도, 나도.” “알겠습니다.”원하는 답을 들은 박 회장은 식사도 하지 않은 채 별채를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졌다.강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거
다음 날 아침 일찍, 설화는 강현에게 받은 서류 봉투를 품에 안고 집을 나섰다. 지정된 주소에 물건을 두고 오는 것뿐인 익숙한 일이었지만, 전달하고 돌아서는 순간 손끝이 떨림은 항상 있었다.대신 너도 하나는 내놔야겠지.전날 라운지에서 들었던 강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는 보름을 허락했지만, 그 시간조차 필요하면 언제든 거둬 갈 수 있다고 못 박았다. 거래라고 부르면 간단했지만, 설화는 자신이 조금씩 그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두려웠다.그래도 이번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남의 지시가 아니라 제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며칠. 그 정도의 평범함은 가져도 된다고 생각했다.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버스를 타지 않고 오래 걸었다. 봉투를 내려놓은 순간부터 제시간이 시작됐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누구의 연락도 기다리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길가 카페 앞에 멈춰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약국에서 값싼 비타민 한 통을 사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하지만 가방 안의 회색 카드가 걸을 때마다 옆구리에 닿았다. 강현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표시처럼 느껴졌다.땀에 젖은 채 여기저기 불려 다니던 여름은 어느새 끝나가고 있었다. 버티는 동안 계절 하나가 통째로 넘어간 셈이었다.며칠 뒤, W백화점 여성의류관 단기 아르바이트 면접일이 됐다. 설화는 새로 산 흰 블라우스와 검은 슬랙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단정했고, 적어도 강현의 옆에 세워진 사람이 아니라 유설화로 보이고 싶었다.머리를 묶은 뒤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여름의 열기는 한풀 꺾여 있었고, 지하철역을 나서자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백화점으로 향하던 설화의 걸음이 버스정류장 옆 신문 가판대 앞에서 멈췄다.『미래인재, 추석맞이 장학금 수여식』굵은 제목 아래 한복 차림의 인사들 사이로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날이 선 턱선과 단정하게 넘긴 머리. 이름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서
진우는 두 손을 가볍게 들어 항복의 제스처를 보인 뒤,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야, 서운하네. 안 그래도 갈 참이었어.”그는 라운지를 떠나기 전 설화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나중에 밥 사기로 한 약속, 잊지 말아요.”그 순간 강현의 시선이 곧바로 설화에게 꽂혔다. 설화는 뺨을 스치는 따가운 눈기를 느끼면서도, 대답 대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라 부를 만한 대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의 눈치를 보며 그 알량한 호의마저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진우가 라운지를 빠져나간 뒤에도 강현은 한동안 출입구 쪽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입술 사이로 짧은 마찰음이 새어 나왔다.“쯧.”별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소리였지만, 가라앉은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설화가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자, 강현은 맞은편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으며 재킷 단추를 하나 풀었다.“낮에 꽤 귀엽게 굴던데.” “……무슨 말씀이세요?” “기왕 긁을 거면 좀 더 세게 긁지 그랬어.”강현은 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말투가 오히려 사람의 속을 긁어놓기 충분했다.“제가 왜 그랬는지, 알고 계셨어요?”강현은 잔을 내려놓으며 테이블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내 신경 좀 건드려 보고 싶었던 거 아냐? 그 정도는 훤히 보였어.”설화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애써 흔들어 놓으려던 시도가 그에게는 투정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비참하고도 얄미웠다.“그래서요. 짜증은 나셨어요?”강현은 잠시 말없이 설화를 내려다보았다. 표정은 무심한 듯 서늘했지만, 그녀의 흔들림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은 집요했다.“전혀.”짧고 건조한 대답 뒤로 옅은 웃음이 스쳤다.“다음 알림이 언제 오나 기다리긴 했지. 마지막이 구천 원짜리 노트라서 좀 웃기긴 했고.”설화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나름대로 던진 반항이 저 오만한 남자에게는 귀여운 장난쯤으로 소비되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긁었다.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뭐가 이렇게 불편한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여자 하나가 방 안에 잠들어 있을 뿐인데, 그런데도 손끝에 닿았던 설화의 부드러운 살결과 입술의 촉감이 기어이 잔상처럼 달라붙었다.아주 오래전 닫아 둔 문 안쪽에서, 누군가 조용히 손잡이를 건드리는 것처럼.비가 내렸다. 회색 하늘 아래, 굵은 빗방울이 낡은 식당 문을 쉼 없이 때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그 작은 식당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열 평 남짓한 식당은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년이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엄
설화가 차가운 기운을 느꼈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더 둥글게 웅크렸다. 강현의 커다란 재킷 아래로 가냘픈 어깨가 파묻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강현은 그 위태로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강제로 시선을 뚝 끊어냈다. 그런데도 의지는 배신하듯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확인하듯, 아니면 상황을 부정하려는 사람처럼.……이건 아니야.그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눈물처럼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닿는 순간마다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고, 단단히 손끝에 들어가 있던 통제력은 허무하
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 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