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비 오는 거리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목적지인 고깃집 앞에 도착했다. 설화는 낡아빠진 우산을 접고, 눅눅해진 옷을 추슬렀다. 기름진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고기 냄새, 연기가 한꺼번에 얼굴을 덮쳤다.
사장님이 설화를 보고 눈짓으로 인사했다. 가게 안은 이미 손님들로 북적였고, 빈 테이블 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굳은 고기와 빈 소주병, 흩어진 쌈 채소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불판을 들고 움직이던 지원 언니가 설화를 보자 장난스럽게 볼을 한 번 잡아당기며 피식 웃었다.
"왔어? 오늘따라 손님 오지게 많다. 각오해."
"새삼스럽게요." "설화, 왔나? 비 한번 징그럽게 온다."주방 이모가 고무장갑 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설화는 조금 전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을 잠시라도 잊어보려고 입가를 끌어올렸다.
"네, 이모. 우산을 써도 소용없네요."
"맞다. 빨리 빠진 테이블부터 정리 해줘."검은 앞치마를 허리에 단단히 둘러매고 손님이 빠진 테이블부터 돌기 시작했다. 빈 접시와 널브러진 쌈 채소를 쟁반에 담고, 소주병 목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손안에 빈 병 세 개가 가볍게 잡혔다.
이마저도 익숙한 일이었지만, 편의점에서 받았던 그 기분 나쁜 시선이 아직 가시지 않아 몸이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취기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최 사장이 설화의 손목을 낚아채고 히죽거렸다. 근처에서 나름 큰 규모의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쁜아, 여기 물 좀 줘."
"네, 알겠습니다."설화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짓고 손목을 빼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가져다주었다. 이내 몸을 돌려 다른 테이블을 정리했다. 주방 쪽에서는 설거지 소리가 더 빨라졌고, 계속해서 손님이 밀려들었다.
좁은 테이블 사이를 설화는 곡예를 하듯 오가며 저녁 피크타임을 버텼다.
쌓여 있는 그릇을 주방으로 옮기고, 테이블에 흘린 소스를 행주로 닦았다. 홀 구석에는 설화의 손목을 낚아챘던 최 사장이 같이 온 직원들과 소곤거리며 설화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괜찮지?"
"사장님 너무 어린 거 아닌가요." "어린 게 좋은 거지."때아닌 품평회였다. 설화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단골이기도 하고, 매번 손님들을 몰고 오는 쪽이라 가게에서도 대놓고 뭐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설화는 그 시선을 못 본 척하며 마음속으로만 짧게 빌었다.
제발, 오늘은 별일 없이 끝나길…….
고깃집 안은 이미 하루 종일 구워진 고기 냄새와 기름 섞인 공기로 가득했다. 어느덧 마감 시간이 가까워오자 설화는 빠르게 남은 반찬과 그릇을 쟁반에 쓸어 담았다. 지원 언니는 정리를 마친 뒤 앞치마를 풀고 우산을 툭툭 치며 구시렁거렸다.
"매일하는 일인데 오늘따라 더 힘드네."
"비가 와서 몸이 늘어져 그럴걸요." "넌 애 늙은이 같은 소리만 한다." "들어가요. 언니."주방에서는 이모가 음식물을 모아 담고 그릇을 뒤집어 놓는 소리가 달그락거렸다. 설화는 물수건을 들고 구석구석을 닦으며 벽시계를 힐끗 바라봤다.
오후 11시.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주방 이모가 가방을 둘러메며 설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설화야, 오늘도 고생 많았다. 먼저 간다.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네, 이모도요."홀 한쪽에선 아직 자리를 비우지 못한 남자 손님 두 명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여기, 소주 한 병만 더 줘요!"
주방 불은 꺼졌고, 지원 언니도 없고, 사장님조차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런 때가 제일 난감했다. 설화는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손님. 마감 시간이 지나서 더는 주문이 어렵습니다."
"돈 내고 마시겠다는데 뭐가 이리 말이 많아."술기운이 오른 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목청을 높였다. 설화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취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것도 구실을 만들어 주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오시면 서비스 드릴게요."
"허. 서비스? 서비스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술."다른 한 명이 빈 소주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설화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지만, 남은 안주 그릇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야! 우리 아직 안 나간다고. 왜 치워?"
"이제 문 닫아야 해서요. 죄송합니다."윽박지르는 소리에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때 자리를 비웠던 사장님이 돌아와 테이블 앞에 섰다.
"손님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저희 직원도 이제 퇴근해야 해서요."
사장님의 단호한 말에 마지못해 남자들은 혀를 차고 비틀거리며 가게를 나서자, 설화는 그제야 조용히 한숨이나마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남긴 테이블을 치우고 닦았다.
이제 진짜 퇴근할 시간이었다. 기름기와 연기, 남겨진 술 냄새가 뒤섞인 텅 빈 가게가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설화는 앞치마를 벗어 가게 구석에 걸어두고, 지갑을 열어보았다. 구겨진 만 원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강현이 L호텔 1층의 Noir Lounge에 들어선 것은 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은은한 황색 조명이 흐르는 바 테이블 구석에 진우가 앉아 있었다.셔츠 단추를 두어 개 푼 진우는 잔을 느리게 돌리고 있었다. 입가에는 평소처럼 느슨한 기색이 걸려 있었다.“왔어?”강현은 대답 없이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빗물이 몇 방울 튄 재킷을 가볍게 털어내는 몸짓은 흐트러짐 없이 정돈돼 있었다.“용건만.”진우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리고 와인병을 기울였다. 붉은 액체가 잔을 채우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깼다.“아까 설화 씨랑 잠깐 얘기해 봤는데.” “그래서.” “생각보다 단단하더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도 있고.”강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우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신선했어.” “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한 사람 아니야.”확실한 선긋기였다. 진우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예민하게 받을 말은 아니었는데.” “그만해.” “알았어. 일 얘기나 하자고.”강현은 시선을 노트북으로 돌렸다.“내가 넘긴 건부터.”진우는 더 묻지 않고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에는 마약 유통 경로와 해외 거점들이 복잡하게 연결돼 있었다.“네가 제보한 건 거의 세탁이 끝났어. 다음 주부터 돌리기에 들어가.” “경로.” “라오스 찍고, 중국 거쳐서 다시 국내로 들어와. 중간에 한 번 더 돌려서 흔적을 지우는 식이지.”강현은 트랙패드를 움직여 숫자와 날짜를 확인했다. 방금 전까지 날이 서 있던 눈빛은 순식간에 업무용으로 정리됐다.“입찰 전에 들어오겠네.” “그럴 가능성이 커.” “이 건은 크게 써.”진우가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짚었다. 강현은 와인잔을 매만지며 낮게 말했다.“한 번에 목을 잡아야 다시는 못 움직여.” “여전히 무섭다, 너.” “칭찬으로 들리네.”그 말에 진우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말을 고르듯 짧게 침묵했다.“근데 강현아.”진우가 천천히 물었다.“설
김 기사가 VIP 발렛 대기 구역에서 뒷좌석 문을 열었다. 설화가 올라타자 검은 세단은 L호텔을 천천히 빠져나갔다.조금 전까지 맑았던 여름 밤하늘에는 어느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창 위로 번진 불빛이 길게 흔들렸다.차 안에는 음악도 흐르지 않았다. 김 기사는 룸미러를 한 번 확인한 뒤 시선을 도로에 고정했다. 설화는 손끝으로 드레스 위의 작은 주름을 펴고 또 폈다. 조금 전 파티장에서 들었던 웃음과 낮은 속삭임이 빗소리 사이로 자꾸 되살아났다.강현은 그런 설화를 보지 않는 척했지만, 창문에 비친 시선은 몇 번이나 그녀 쪽으로 움직였다.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설화는 창밖만 보다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오늘 같은 자리에 저를 왜 데려간 거예요?”강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앞에 둔 채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은색 슈트의 옷깃은 여전히 반듯했고, 표정에도 흔들림이 없었다.설화는 입술을 한 번 눌렀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이 시킨 대로 웃고, 옆에 서 있었어요. 그런데 정유라 씨는 계속 저를 건드렸고요.”강현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어디서 굴러온 건지 모르겠다고 했어요.”설화는 끝까지 창밖을 봤다. 울음도 분노도 섞지 않으려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또렷했다.“제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빚에 일부예요?”차 안이 조용해졌다. 와이퍼가 빗물을 밀어내는 소리만 일정하게 이어졌다.강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시선은 차갑고 정확했다. 설화는 피하지 않았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지만, 턱은 들려 있었다.“그건 아니야.”짧은 대답이었다. 설화는 마른 웃음을 삼켰다.“그럼, 뭔데요?”강현은 입을 다물었다. 설명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다시 앞을 봤다. 설화는 그 침묵이 대답이라는 걸 알았다.“역시 말 안 해주시네요.”강현은 턱관절을 단단히 맞물린 채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가볍게 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그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창밖 빗줄기에 멎어 있었다.
설화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유라는 그 침묵을 어떻게든 잡아내려는 듯 거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립스틱 끝으로 입술 라인을 다시 정리한 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냥 봐도 티 나거든.”설화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손등에는 얼마 전 고깃집 불판에 스치듯 데인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밝은 조명이 그 작은 상처까지 또렷하게 드러냈지만, 유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겉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야. 네가 아무리 꾸며도, 숨길 수 없는 건 있거든.”설화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소리가 끊기자, 파우더룸 안이 더 조용해졌다. 그녀는 핸드타월로 손을 천천히 닦고는 거울 너머의 유라를 똑바로 봤다.“저한테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유라의 입가가 아주 조금 틀어졌다. 설화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아니면 불편하셨나요? 제가 당신 자리라도 뺏은 것처럼 보여서.”유라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설화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한 걸음 더 다가왔다.“강현 오빠 옆에 서 있는 게 네 자리라고 생각했어?”설화는 드레스 자락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목까지 차오르는 수치심을 삼키는 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그건 대표님이 정하신 일이에요.”유라가 립스틱 표면을 거칠게 손톱으로 긁었다.“그래? 여기서 제일 안 어울리는 사람이 누군지, 너만 모르는 것 같네.”그녀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향수 냄새가 짙게 번졌다.“사람들이 다 봐.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유라는 말을 부드럽게 흘렸지만, 그 안에 박힌 조롱은 더 날카로웠다.“그러니까 괜히 애쓰지 마. 오래 못 버틸 테니까.”그 말에 설화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세면대 아래로 숨긴 손은 떨렸지만, 목소리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불만 있으시면 대표님한테 직접 하세요.”설화는 젖은 타월을 휴지통에 내려놓았다.“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유라의 얼굴이 굳었다. 몇 초 뒤,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설
연회장 입구 쪽의 공기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일정한 보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의 대화가 한 박자씩 늦어졌고, 샴페인 잔을 들던 손들이 조용히 멈췄다.설화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은빛 머리를 정갈하게 넘긴 남자가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삼청동의 그 넓은 저택에서 마주쳤던 남자, 이재영이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틈이 없는 눈빛으로 강현과 설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설화는 그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숨이 얕아졌다. 삼청동 저택의 조용한 거실, 난잎을 닦던 손, 자신을 보며 “눈이 닮았다”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한 번에 떠올랐다. 그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재영의 시선은 여전히 사람을 홀로 남겨 두는 방식으로 차가웠다.강현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설화보다 반걸음 앞에 선 자세가 자연스럽게 시야를 가렸다. 노골적으로 막아서는 동작은 아니었지만, 이재영이 설화에게 곧장 다가올 틈은 사라졌다.“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설화는 드레스 자락을 가만히 쥐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검은 실크가 그 흔들림을 대신 드러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세 사람에게 모였다.강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은색 슈트의 옷깃도, 반듯한 넥타이 매듭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만 그의 손이 설화의 손등을 짧게 눌렀다. 괜찮다는 뜻인지, 움직이지 말라는 뜻인지 알 수 없는 압력이었다.“드디어 오셨네요. 이재영 의원.”곁에 서 있던 진우가 낮게 말을 꺼냈다. ‘의원’이라는 호칭이 주변의 정적 위로 무겁게 떨어졌다.이재영은 진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설화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눈빛에는 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내가 자네에게 선택하게 될 거라고 말했지.” "……."설화는 반사적으로 강현의 팔을 잡았다. 차가워진 손가락이 단단한 소매 위로 감겼다. 강현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 설화의 손등 위를 짧게 한 번 스쳤다. 버티라는 뜻인지, 움직이지 말라는 뜻인지 알 수 없는 짧은 접촉이었다.이재영의 시선이
설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유라는 샴페인 잔을 가볍게 기울이며 설화의 꼿꼿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태도를 흥미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이름도 얼굴도 너무 낯설어서요. 보통 이 바닥은 한 다리만 건너도 다 아는 사이인데, 어느 쪽 분인지 감이 안 오네요.”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말끝에는 노골적인 무례가 배어 있었다. 설화는 잔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했다.“그런 배경은 없습니다.” “아.”유라의 짧은 탄성에는 확인과 무시가 함께 담겨 있었다. 그녀는 샴페인 잔을 매만지며 한 걸음 다가왔다. 진한 향수 냄새가 설화의 숨결을 스쳤다.“그럼, 미래드림 쪽 사람?” “필요한 일을 돕고 있습니다.” “필요한 일?”유라는 설화의 대답이 우습다는 듯 천천히 되뇌었다. 시선은 노골적으로 아래로 흘렀다. 목덜미의 푸른빛 목걸이에서 시작해 드레스의 허리선을 지나, 긴장한 얼굴까지 느릿하게 올라왔다.“강현 오빠는 곁에 둘 사람 고르는 기준이 꽤 까다로운 줄 알았는데.”주변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가까운 테이블에 서 있던 사람들까지 대화에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슬쩍 눈길을 흘렸다. 설화는 어느새 사방이 막힌 듯 숨이 답답해졌다.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덧붙이든 결국 스스로 변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침묵하는 설화를 보며 유라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이런 자리는 처음이죠?” “…….” “너무 티가 나요.”유라의 시선이 설화의 손으로 내려갔다.“샴페인 잔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잖아요.”설화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다봤다. 유리잔의 기둥을 부러뜨릴 듯 움켜쥔 손이 보였다. 수치심이 발밑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유라는 우아하게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나긋하게 말했다.“긴장 풀어요. 옷도 목걸이도 다 오빠가 골라준 것 같은데.”유라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구석에서 조용히 샴페인이나 마시다 가요. 괜히 튀지 말고.”그 순간 등 뒤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정유라.”유라의 어깨
차가운 정적 속에서 차량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창밖으로 이어지던 서울의 야경이 높은 석조 벽 뒤로 사라졌다. 검은 세단은 H호텔 메인 로비를 지나 VIP 전용 진입로 앞에 멈췄다. 인이어를 낀 직원들이 차를 확인하자마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기사가 문을 열기 직전, 설화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강현이 잡고 있던 손바닥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을 의식할수록 가슴 안쪽은 오히려 서늘해졌다.설화는 마른침을 삼키고 옆을 바라봤다. 은색 슈트를 입은 강현은 넥타이 매듭부터 소매 끝까지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차창에 비친 옆얼굴에도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제가 해야 하는 역할이 뭐죠?”문이 열리기 직전 던진 질문에 강현은 즉각 답하지 않았다. 그의 무감한 시선이 설화가 입은 검은 실크 드레스의 매끄러운 선을 따라 내려갔다 머물렀다.“내 옆에 있으면 돼.”가라앉은 목소리였다.“웃으라면 웃고, 묻지 않은 말은 하지 말고.”김 기사가 문을 열자, 강현은 먼저 내린 뒤 설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손을 얹자, 그는 짧게 잡아끌어 세웠다. 이어 깊게 파인 드레스 등선 위로 닿는 손길의 감촉에 설화는 순간 걸음을 멈칫했다.“불편하면 지금 말해.”강현의 서늘한 시선이 잠시 설화의 얼굴에 머물렀다.“빚이라고 생각해."빚. 그 한마디에 설화의 입가가 굳었다. 낮 동안 아스팔트 위를 누비며 배달 앱을 켜고 버텨내던 현실의 무게가 화려한 호텔 입구까지 따라온 기분이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르고, 거울 앞에서 연습했던 미소를 입가에 얹었다.VIP 통로는 낮은 조명 아래 길게 이어졌다. 두 사람 뒤로 수행 직원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설화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또각또각 두드렸다. 강현은 한 번도 보폭을 늦추지 않았다. 설화는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따라붙었다.통로 끝의 문이 열리자 밝은 빛과 잔잔한 클래식, 그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높은 천장 아래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밖으로 나오자 낮의 열기는 간데없이 습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따라 유독 부치는 몸에 남은 것은 뼈마디를 파고드는 피로와 공허함뿐이었다.조금만 더. 진짜 조금만 어떻게 버티면…….그렇게 되뇌면서도, 정작 버티고 난 끝에 자신에게 뭐가 남아 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텅 빈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툭 꺼져 내리듯 아팠다.가방끈이 젖은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보다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이 더 무겁고 저릿하게 가라앉았다.어느새 멈추었던 비가 다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 정중한 척했지만, 그 안에 숨기지 못한 냉랭함이 섞여 있었다. 설화는 허리를 들고 돌아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서류가방을 든 남자가 슈트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딱 봐도 용건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얼굴이었다."네, 맞는데요.“남자는 설화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안 볼을 혀로 밀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가방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설화 앞으로 내밀었다."내용증명입니다. 확인해 보시죠.“흰 종이 위에는 채무자 유설화라는 이름이 박혔고, 그 아래로 선명하게 찍힌 주식회사
경기도 외곽에 자리한 사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빈소 안에는 향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문객보다 빈 곳이 더 많았다. 한때는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나던 사람들조차 아무도 없었다. 이름도 낯선 몇 명만이 어색한 얼굴로 다녀갔다. 설화는 영정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생전에 집 안에서 쉽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화한 미소가 이상하게 낯설어서, 설화는 헛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거면서. 이렇게 다 놓고 갈 거면서. 그동안 엄마와 나를 왜
일상적인 며칠이 지나갔다. 여름 햇살의 열기는 여전했고, 매미 소리도 여전히 귀가 따가울 만큼 울어댔다. 골목을 채운 낡은 빌라들, 담벼락 위로 엉켜 늘어진 전선, 쓰레기봉투 옆을 지나쳐가는 고양이까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다른 건 하나뿐이었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고, 낯선 사람들이 집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압수수색영장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낮고 딱딱한 목소리가 좁은 현관을 파고들었다. 설화는 처음에는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압수수색. 영장. 협조. 뉴스에서나 들었을 법한 단어들이,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