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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민원 내용이 뭐였는데?”
한로로가 소주잔을 입술에 가져가며 물었다.
박승철은 대답 대신 안경을 벗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청 민원실 팀장 박승철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기 직전이라는 신호였다.
“가로수.”
“가로수가 왜?” “불빛이 너무 밝대.”옆에서 맥주를 마시던 장혁도 고개를 들었다.
“가로수가 빛도 나냐?”
“가로수 옆 경관조명, 이 새끼야.” “아.”승철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 불빛 때문에 잠을 못 잔대. 담당 부서 연결해드린다니까 왜 자기가 통화해야 하냐고 나보고 해결하래.”
“푸흡!” “웃어?” “미안. 계속해봐.” “너 지금 존나 즐겁지?” “응.” “미친년.” “공무원이 시민한테 미친년이라고 해도 돼?” “퇴근했잖아.”금요일 밤 열 시.
세 사람이 모인 곳은 영업이 끝난 장혁의 타투숍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닭발, 족발, 피자가 뒤죽박죽 놓여 있었다.
대부분 로로가 주문한 음식이었다.
“야, 한로로.”
“왜?” “족발 먹고 싶다며. 피자는 왜 시켰어?” “피자도 먹고 싶으니까.”장혁이 작은 체구의 로로를 훑어봤다.
“뭘 봐.”
“신기해서.” “뭐가?” “연비 존나 안 좋은 경차 같아.” “뒤질래?”승철이 피식 웃었다.
“경차는 연비라도 좋지.”
“박승철, 너도 뒤질래?”두 남자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그랬다. 셋 중 가장 작은 건 로로였지만 서열까지 작은 적은 없었다.
장혁이 닭발 접시를 밀어줬다.
“먹어.”
“안 먹어.” “왜.” “경차라며.” “경차도 기름은 넣어야지.” “이 새끼가.”로로가 장혁의 정강이를 걷어차려던 순간이었다.
딸랑.
숍 입구의 종이 울렸다.
“오빠.”
장혁의 여자친구 장서운이었다.
“아직 있었네?”
반갑게 들어오던 서운은 장혁 옆에 앉아 있는 로로를 발견하자 표정이 굳었다.
또 시작이네.
서운은 로로를 싫어했다. 20년 된 여자 사람 친구. 전화 한 통이면 새벽에도 나오고, 장혁의 부모님과도 알고 지내며 그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여자.
여자친구 입장에서 신경 쓰이는 건 이해했다. 그래서 로로는 굳이 부딪치지 않았다.
“나 먼저 갈까?”
로로가 일어나려 하자 장혁이 말했다.
“앉아.”
서운의 얼굴이 더 굳었다.
“오빠. 나랑 얘기 좀 해.”
“여기서 해.” “둘이.”승철이 소주잔을 들었다.
“나 오늘 민원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는데.”
“닥쳐.”결국 장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유리창 너머로 두 사람이 보였다. 서운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또 결혼 얘기인가.”
승철이 중얼거리자 로로는 피자를 베어 물었다.
“쟤 진짜 결혼 안 하려나?”
“안 한다잖아.” “서운 씨는 하고 싶어 하잖아.” “둘이 알아서 하겠지.”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로로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결혼할 생각 없으면 나랑 왜 만나는데!”
이번에는 안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뭘!” “난 결혼 생각 없다고.” “그게 언제까지인데? 우리가 몇 살인데!”서운의 눈가가 붉어졌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나랑 결혼할 거야, 말 거야?”
긴 침묵.
로로의 손에 들린 피자가 멈췄다.
장혁이 입을 열었다.
“안 해.”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래?”
“어.” “그럼 헤어져.”장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승철이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
서운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알았다고?”
“네가 헤어지자며.” “장혁, 너 진짜…….”입술을 떨던 서운이 결국 돌아섰다.
“그래. 평생 혼자 잘 살아봐.”
쾅.
차 문이 닫히고 잠시 뒤 차가 사라졌다.
정적.
딸랑.
장혁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들어와 소주잔을 채웠다.
승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
“왜.” “괜찮냐?”장혁은 소주를 한 번에 털었다.
“나 방금 헤어졌다.”
로로와 승철이 동시에 그를 봤다.
“그걸 우리가 못 봤을 것 같냐?”
“아. 봤냐?” “동네 사람도 다 봤겠다, 미친놈아.”장혁은 태연하게 족발을 집었다.
“넌 슬프지도 않냐?”
“뭐가.” “여자친구랑 헤어졌잖아.”젓가락이 잠깐 멈췄다.
“결혼 안 한다는데 어쩌라고.”
로로가 턱을 괴었다.
“그러다 진짜 평생 혼자 산다?”
장혁이 그녀를 바라봤다.
20년.
저 얼굴을 본 시간이 벌써 그만큼이었다.
장혁이 피식 웃었다.
“뭐.”
“뭐가 뭐야.” “너도 있잖아.”로로가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왜 나와?”
“너도 결혼 안 한다며.” “그거랑 뭔 상관인데?”장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승철이 미간을 좁혔다.
“잠깐만.”
“왜.” “뭔가 불길한데.” “뭐가?” “모르겠어. 근데 저 새끼가 방금부터 널 보는 눈깔이 마음에 안 들어.” “지랄한다.”로로는 웃어넘겼다.
그날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장서운의 한마디로 끝난 장혁의 연애가, 20년 동안 한 번도 이름이 바뀐 적 없던 세 사람의 관계를 뒤흔드는 시작이 될 줄은.
그리고 장혁이 그날 로로에게 했던 말.
‘너도 있잖아.’
그 한마디가 언젠가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 돌아오게 될 줄도.
집을 구하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회사와 가깝고, 햇빛이 잘 들고, 작업할 작은 방이 있을 것.네 번째 집에서 로로는 베란다 창을 열었다.바람이 들어왔다.“여기로 할게요.”“조금 더 보셔도 되는데요.”“아뇨. 여기가 좋아요.”소파도 식탁도 누군가의 흔적도 없었다.누구와 함께 살 집도 아니었다.처음부터 끝까지—한로로 혼자 고른 집이었다.토요일 오전.“야, 미친년아. 이게 짐이 적은 거냐?”“적지.”“저건?”“술.”“장혁 불러.”로로의 손이 멈췄다.“싫어.”“왜.”“너 있잖아.”“장혁까지 부르면 사람이 둘이잖아!”“전화해봐.”“싫다고.”“걔랑 싸웠냐?”“안 싸웠어.”“근데 왜 안 불러.”“그냥.”부르면 올 테니까.예약이 있어도 끝내고 와서 짐을 들고, 탄산수까지 사다 놓을 인간.그래서 부르지 않았다.“침대 여기 맞아?”“응.”“창문 옆인데 추워.”“난 더위 많이 타.”“그건 장혁이고.”둘 다 멈췄다.
일주일이었다. 장혁을 피한 지. 정확히 말하면—도망친 지.로로는 책상에 턱을 괸 채 휴대전화를 봤다. 연락도 없는데 몇 번씩 같은 이름을 검색했다.[장혁]“미친년.” “네?” 민지가 고개를 들었다. “본인한테 욕하셨어요?” “맞아. 병신 같아서.” “또 장혁 씨요?” “꺼져.” “좋아하는 거 알았으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건데요?”로로의 손이 멈췄다.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그걸 알아버렸다. 그럼 하진은?“아무것도 안 해.” “왜요?” “걔 여자친구 있잖아. 내가 남의 연애 깨도 돼?”기태와 사귀면서 혁과 잤다. 섹스와 마음은 별개라고 떠들었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처음부터 분리된 적이 없었다.“나 이미 한 번 충분히 개같이 굴었어. 이번에는 안 그래.” “그럼 계속 피하게요? 20년 친구라면서요.” “말은 쉽지.” “쉬우니까 제가 하죠.”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었다. 스무 해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민지야. 나 오늘 칼퇴한다.” “데이트요?” “아니.” “그럼요?” “친구 보러.”퇴근 후 타투샵 앞에 섰다. 예전에는 문부터 열었다. 야, 장혁. 그거면 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혁을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었다.그때 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혁이 들어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했다.“저 새끼가 진짜.”딸랑— 문을 열자 익숙한 종소리가 났다.“앉아 있어.” “오랜만에 온 친구한테 그게 끝이냐?” “일주일 가지고?” “일주일이면 오래지.” “스무 해 봤는데?”혁은 냉장고를 가리켰다. “탄산수 있어.”자기가 마시던 탄산수가 있었다. 하나를 열었다. 예전 같았다. 그래야 했다.마지막 손님은 아홉 시 넘어 나갔다.“밥 먹었냐?” “어.” “뭐 먹었는데.” “왜.” “안 먹었네. 거짓말할 때 대답부터 짧아져.” “떡볶이나 시켜.” “김말이?” “응. 순대는 내장 많이.”혁을 보며 로로는 다시 생각했
혹시.정말 혹시—한로로가 자신 때문에 저러는 거라면.장혁은 한참 휴대폰을 내려다봤다.그러다 피식 웃었다.“……지랄.”말도 안 됐다.한로로였다.자기가 소개팅을 나간다고 했을 때 옷까지 골라주던 여자.하진과 손을 잡았다고 하자 잘했다고 했고.정식으로 만나게 됐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신나게 축하했다.한기태와 데이트가 있다고 자신과의 약속을 취소하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여자.그런 한로로가—이제 와서 자신을 좋아한다고?장혁은 고개를 저었다.“미쳤네, 진짜.”잠깐이라도 기대한 자신이 병신이었다.로로는 그냥 변한 게 싫은 거다.이십 년 동안 자기 필요할 때마다 있던 놈이 갑자기 다른 여자 때문에 안 움직이니까.그게 낯선 거겠지.그 이상일 리 없었다.장혁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오빠.”하진의 목소리에 장혁이 고개를 들었다.“응?”“또 딴생각.”“아.”하진이 웃었다.“오늘 세 번째예요.”둘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하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친구분?”장혁의 손이 멈췄다.하진은 금방 알아차리고 웃었다.“맞네.”“……티나?”“조금?”“미안.”“미안할 건 아닌데.”하진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로로 씨 맞죠?”장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남자친구랑 헤어졌대.”“아…….”하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많이 힘들겠네요.”그 말뿐이었다.왜 헤어졌냐고 묻지도 않았다.자기와 있을 때 다른 여자를 생각하냐고 화내지도 않았다.오히려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장혁이 눈을 들었다.“어딜.”“로로 씨한테.”“…….”“오래된 친구라면서요.”장혁은 헛웃음을 흘렸다.“오지 말래.”“싸웠어요?”“그런 것 같기도 하고.”“왜 싸웠는데요?”장혁이 대답하지 못했다.왜 싸웠지.생각해보면 시작은 로로였다.왜 변했냐고 했다.연락하면 안 된다고 하고.불러도 안 나오고.자기와의 관계도 끝냈다고.그러다—하진을 만나면서 자기와도 자자고
[버려.]메시지를 보낸 뒤.장혁에게서는 답이 없었다.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로로는 그날 밤 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병신.”답하지 말라고 밀어낸 건 자신이었다.그러면서 답장이 없다고 서운해하는 것도 자신이었다.결국 휴대폰을 침대 반대편으로 던졌다.며칠 동안 로로는 호텔에서 출퇴근했다.회사에서는 기태와 필요한 말만 했다.“2팀 수정안 전달드렸습니다.”“확인하겠습니다.”그뿐이었다.기태도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오히려 그래서 더 숨이 막혔다.민지가 눈치를 보며 커피를 내려놓았다.“팀장님.”“응.”“집은 알아보고 계세요?”“응. 주말에 몇 군데 보려고.”“혼자 가세요?”“그럼 누구랑 가.”민지가 입을 다물었다.예전 같으면 당연히 기태였을 것이다.아니면—로로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얼굴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장혁.“씨발.”“네?”“아무것도 아니야.”이제 생각하는 것조차 습관이었다.점심시간.휴대폰이 연달아 울렸다.한동안 조용했던 단체방이었다.[박승철][야][니들 언제까지 분위기 이럴 건데]로로의 손이 멈췄다.현재 방에는 셋뿐이었다.박승철.장혁.한로로.기태가 빠졌을 뿐인데—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이십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박승철][기태랑 헤어진 건 헤어진 거고][우리 셋까지 이럴 필요는 없잖아]잠시 뒤 장혁이 답했다.[냅둬.][박승철][뭘 냅둬 새끼야][니도 요즘 존나 이상해]로로는 화면을 바라봤다.우리 셋.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익숙한 말이었다.어디를 가도 셋.술을 먹어도 셋.여행을 가도 셋.누가 연애를 해도 결국 돌아오면 셋이었다.그런데 이제—그럴 수 있을까.[박승철][이번 주 토요일 가게로 와][술이나 먹자][장혁][난 하진이랑 약속 있음.]로로의 손가락이 굳었다.아무 잘못 없는 말이었다.당연한 말.장혁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으니까.그런데도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박승철][
아침 일곱 시.로로는 호텔 침대에서 눈을 떴다.잠든 건지 기절한 건지 알 수 없었다.눈은 퉁퉁 부었고 머리는 무거웠다.제일 먼저 손을 뻗은 건 휴대폰이었다.메시지 두 개.[민지][팀장님 오늘 오전 회의 10시로 바뀌었어요!]그리고.[장혁][출근은 할 거냐.]새벽 한 시 십칠 분.로로는 한참 그 문장을 바라봤다.답장은 하지 않았다.대신 휴대폰을 뒤집었다.“……하지 마.”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도 몰랐다.연락하지 말라는 건지.기대하지 말라는 건지.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후회했다.기태가 있었다.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같은 회사.같은 층.디자인 1팀과 2팀.헤어졌다고 출근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그런데 이상했다.어제까지만 해도 저 사람과 같은 집에서 출근했다.오늘은 호텔에서 혼자 나왔다.“팀장님.”민지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괜찮으세요?”“응.”“눈이…….”“울었어.”민지가 입을 다물었다.로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노트북을 켰다.잠시 후 회의가 시작됐다.“2팀부터 진행 상황 공유하겠습니다.”기태의 목소리가 들렸다.로로는 화면만 봤다.평소와 똑같았다.차분했고.일 얘기만 했다.“1팀 의견은 어떻습니까?”결국 시선이 마주쳤다.딱 한 번.“현재 안으로 진행해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알겠습니다.”그게 끝이었다.한로로 팀장.한기태 팀장.삼 년을 사랑한 흔적은 회사 어디에도 없었다.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로로도 자료를 챙겨 일어났다.“로로야.”걸음이 멈췄다.회의실에는 둘뿐이었다.기태는 로로를 보지 않았다.“오늘 짐 가지러 올 거야?”“……응.”“몇 시.”“퇴근하고.”“알았어.”로로가 문으로 향했다.“나 그 시간에 나가 있을게.”손잡이를 잡은 손이 멈췄다.“그럴 필요 없어.”“내가 있어도 괜찮겠어?”대답하지 못했다.기태가 씁쓸하게 웃었다.“봐. 안 괜찮잖아.”“……미안해.”“그 말도 이제 그만해.”로로는 결국 문을 열었다.
[한기태님이 나갔습니다.]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한 줄.가장 먼저 반응한 건 승철이었다.[?][뭐야][둘이 또 싸움?]로로는 화면만 바라봤다.헤어졌어.고작 네 글자면 설명되는 일이었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잠시 후 개인 메시지가 왔다.[장혁][너 기태랑 뭔 일 있어?]심장이 먼저 반응했다.한참 망설이다 답했다.[헤어졌어.]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받지 않았다.다시.또다시.세 번째가 울릴 때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왜.”-어디야.평소와 똑같은 목소리.그것만으로 울컥했다.“밖.”-밖 어디.“그냥 밖.”-한로로. 어디냐고.예전 같았으면 말했다.데리러 와.혁이네 갈게.술 사놔.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됐어. 혼자 있을 거야.”-왜 헤어졌어. 결혼 때문에?“아니.”-그럼?대답할 수 없었다.너 때문에.내가 널 사랑하는 걸 알아버려서.장혁에게는 하진이 있었다.“내 문제야. 캐묻지 마.”잠깐 침묵이 흘렀다.-가게로 와.가슴이 철렁했다.너무 익숙한 말이라서.가고 싶었다.기태와 헤어진 게 아팠고.미안했고.무서웠다.무엇보다 장혁이 보고 싶었다.하지만.“싫어.”-뭐?“안 갈래.”-왜.'하진 씨 있잖아.”-지금 없어.“그런 뜻 아니야.”로로는 눈을 감았다.-“너 여자친구 있잖아.”장혁이 조용해졌다.“나 이제 거기 예전처럼 못 가.”-왜 갑자기 그래.“갑자기가 아니라.”로로가 씁쓸하게 웃었다.“이제야 정신 차린 거지.”먼저 전화를 끊었다.좋아하는 줄 몰랐을 때는 마음대로 찾아갔다.술을 마셨고.같은 침대에서 잤고.심지어 하진을 만나면서 자신과도 자자고 했다.그런데 사랑한다는 걸 알아버린 순간—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장혁은 종료된 통화 화면을 내려다봤다.한기태와 헤어졌다.그 말을 들은 순간 아주 잠깐—기뻤다.“……미친 새끼.”기뻐하면 안 됐다.로로는 삼 년을 만난 남자와 헤어졌다.자신에게는 하진이 있었다.그런데도 가장 먼저 떠오른